01021 105. 대국의 길 =========================================================================
고산국에서 통신과 음성방송을 처음 시작했을 때 전파중계는 긴 줄로 지상에 고정시킨 열기구에 의존했었다. 지금은 성층권에서 떠다니는 무인 비행선과, 제트 기류를 타고 지구를 도는 무인 항공기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비행선들끼리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고정적인 위치를 지켰고, 무인 항공기는 경도 15도마다 한 대씩 떠서 전파 중계 임무를 수행했다.
헬륨 추출이 가능한 북미 유전이 이럴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북미 대륙을 매입하지 못했더라면 20세기 초반 독일처럼 구하기 쉬운 수소를 썼을 테고, 하늘에서 거대한 불꽃놀이를 보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기온과 압력이 급변하는 성층권에서도 기능을 발휘하도록 기계장치를 개량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비행선은 기본적으로 무인 조종이 원칙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빛을 받아 기낭이 부풀어 오르면 비행선이 끝없이 상승해서 조종사들이 산소 결핍과 기압 강하를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상 관제소에서 무선 조종을 해서 자세 제어와 방향 전환, 고도 조정 등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력이 부족해 한 달에 한 번은 지상에서 연료를 보급 받아야 했다. 가끔은 통제가 끊겨 비행선이 지상으로 추락하기도 했다. 기낭에서 헬륨이 꾸준히 새기 때문에 이를 보충하는 문제도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사실 이민호가 살았던 21세기 전반에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었지만, 완벽을 기하지만 않는다면 상업적 이용이 가능한 정도만큼은 운용할 수 있었다.
“와! 멋지다!”
비행선이 이착륙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항에 몰려들어 구경했다. 성능이 훨씬 뛰어난 전투기와 수송기, 여객기들이 있었지만 길이가 200미터나 되는 압도적 크기의 비행선이 인기가 훨씬 더 높았다.
20세기 초반 유럽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비행선이 일반 사람들과 정치인, 고위 군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항공역학과 기관 작동 원리를 설명해야 하는 항공기보다는, 단순하고 거대한 비행선이 이해하기 훨씬 쉽기 때문이었다.
“어때? 이제 항공대 조직만으로는 벅차지?”
“예, 전하. 관할 공역이 넓어지고 임무가 끝도 없이 늘어나서 더 이상 못 견디겠습니다. 기존 항공대를 공군으로 개편해주실 것을 전하께 상주 드립니다.”
항공대장 이면이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전투기와 폭격기, 정찰기와 수송기 외에 방송 중계용 기구와 비행선, 무인 항공기에 로켓 발사까지 죄다 항공대 관할이었다.
드넓은 영토 각지에 비행단을 두느라 인원도 많아져 지금 조직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현재 항공대의 직제는 준장 30명 위에 소장이 항공대장 달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대서양과 태평양 초계임무와 외국 원정 작전을 염두에 둔다면 해군항공대가 따로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 항공대를 공군으로 승격하고 해군항공대를 따로 분리하는 계획을 기존 항공대 중심으로 작성해보게.”
20세기 중단 강대국들에서는 육군항공대 규모가 커지면서 공군으로 독립하고, 해군항공대는 해군에 계속 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산국처럼 항공대로 출발해서 공군과 해군항공대로 분화하는 것도 사실은 그리 특이할 것도 없었다.
항공대장 이면 소장을 일주일 만에 중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한 달 후에 항공대 개편계획안이 정부에 제출된 날을 기준으로 대장으로 승진시켰다. 덕택에 이면이 육군과 해군 임관 동기들의 계급을 겨우 따라잡을 수 있게 됐다. 항공대에서 가장 큰 문제였던 인사 적체도 조금은 풀렸다.
현재 육군 원수가 네 명, 해군 원수가 두 명이지만 상원수 등 원수 계급은 개국공신들의 명예 칭호에 가까웠다. 기준 계급은 참모본부장, 육군 총사령관, 해군 총함장 등을 가리지 않고 모두 대장이었다.
고산국 총병력이 예비군과 민병대 빼고 40만 남짓하므로 계급 인플레이션이 과도한 셈이었다. 물론 이 시대에 40만 단위의 상비군을 두는 것은 일반적인 국가의 재정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국가 혹은 국민의 군대가 아닌 부유한 고산국 왕실의 군대이기에 유지가 가능했다.
“예, 전하. 그리고 전하께서 퇴위하시면 저도 퇴직을 신청할까 합니다. 아버지 총함장님이나 계복 대원수님 같은 분들도 퇴직하실 생각이시더군요. 지난 40여 년 동안 누적된 인사적체가 너무 심해서 젊은 장교들이 불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 자넨 아직 젊잖아? 현직에 있으면서 세자를 보살펴주게.”
이면의 입술이 움찔거리는 게 이민호와 동갑이라는 소리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관직에 든 시기는 이민호가 최소 10년은 빨랐으니 이면도 그 기간만큼 현직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전하! 저희 집안은 현재 3대가 국가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오! 이제 보니 그렇군. 정려(旌閭)라도 세워줘야겠어.”
조선에서는 충신, 효자, 열녀를 기려 정문(旌門)을 지어줘 표창했다. 가문의 경사겠지만 고산국에서 가문은 중요치 않고 효자와 열녀가 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게 아니고, 아버지에 이어 제가 빠져도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요즘 기준으로는 저도 이제 옛날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 동안 해군 총함장과 항공대장을 한 집안에서 차지한 것 때문에 말이 많았습니다.”
“수십 년 동안 나라를 지킨 가문을 존경해야지 반대로 시기하던가?”
“그건 아닙니다만, 수연이가 아체 술탄국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해군에 복귀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하필 제 아들이 공주님과 사귀고 있어서 제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부담스럽습니다.”
“나도 다 아는 이야기고, 전혀 문제가 아니라네. 신립 장군도 선종 대왕과 사돈이었지만 현직을 지키지 않았나?”
퇴위 후 군 조직에 대한 이민호의 계획은 육군을 감동이나 감불이 맡고, 공군을 이면이 맡는 것이었다. 세자의 옥좌가 안정될 5년이나 10년 후에 개국공신들이 퇴직한다면 이민호 입장에서 든든할 것 같았다.
그런데 왕실과 이순신의 가문이 혈연으로, 그것도 이중으로 엮이는 바람에 약간 문제가 생겼다. 먼저 이민호의 후궁인 브루나이 공주의 아들이 아체 술탄국 여술탄과 결혼해 술탄의 지위를 계승했다. 여술탄이 왕자에게 집요하게 편지를 보내더니 어렵게 아체 궁궐로 초청했고, 결국 낚아챈 것이다.
고산국과 아체 술탄의 국혼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지방 호족들의 발호로 인해 궁지에 몰려있던 술탄 가문이 구원줄을 얻은 셈이었다. 술탄의 호위대로 고산국에서 특전대 1개 소대와 고속정 1개 편대를 보낸 것만으로 아체 술탄국은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기간에 외할머니인 여제독 말라하야티의 후계자로 갔던 이면의 딸, 진급해서 해군 소령 이수연이 말라리아에 감염돼 고산국 군병원에 입원했다. 여기서 이민호의 아들인 군의관과 정분이 나더니 조만간 결혼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또한 이면의 조선 출신 아내의 아들은 대학원 박사 과정이었는데 대학원에서 만난 공주와 곧 결혼하게 됐다.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제가 자식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 잘난 아들딸을 두어서 좋겠네. 내 아들딸은 못났지?”
“그건 절대 아닙니다만, 왕자님과 공주님의 나이가 살짝 많아서 말입니다.”
이면의 딸 이수연은 32세, 군의관인 왕자는 35세였다. 대학원 박사과정 아들은 28세, 전임강사인 공주는 30세였다. 국가와 왕실을 위해 대를 이어 평생 충성을 바쳤는데 아들딸이 왕실의 노총각, 노처녀와 결혼하게 됐으니 불만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알다시피 나는 자식들의 결혼에 개입하지 않았네. 왕실 식구들이 공부 욕심이 많아 늦게 결혼하는 것뿐일세. 평생 결혼을 안 하겠다면 할 수 없고. 그건 자식들의 선택이니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물론 왕자님과 공주님의 인격은 훌륭하십니다. 결혼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만 평범한 결혼이 아니라는 사실에 아쉬울 뿐입니다.”
“그건 아버지가 되면 누구나 느끼는 거라네. 나하고 입장을 바꿔보게.”
이민호 입장에서 아들은 잘 나가는 감염내과 전문의에 딸은 젊은 나이에 대학의 교수진이 됐다. 이에 비해 며느리는 32세 노처녀 여군이었고 사위는 그 나이에 박사과정이라 딸을 평생 먹여 살릴 수 있을지 걱정됐다.
“험! 험! 결혼은 당사자들에게 맡기는 게 낫겠습니다.”
“새로 즉위하면 몹시 외롭고 불안하다네. 세자를 좀 지켜주게. 부탁일세.”
“알겠습니다. 사실 퇴직하고 나면 할 일도 없습니다. 이 나이에 히말라야에 다시 도전하겠습니까?”
“자네라면 어쩐지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만.”
개국공신들이 퇴임 후 제2의 인생을 설계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들어 새로운 도전을 하기 벅찰 때였다. 젊은이들만 미래를 고민하지 않았고, 늙어서는 더 암담했다. 물론 젊은이나 늙은이나 죄다 가난한 노예로 내모는 현대 한국보다야 고산국이 훨씬 나았다.
“국왕전하! 천도 성공을 축하드리옵니다.”
“에스파냐 대사도 이주하느라 수고했소.”
고북에서 활동하던 외국 외교사절들도 대부분 티완으로 이전했다. 새 왕도가 유럽과 가까워지면서 전통적인 우방인 에스파냐에서 특히 천도를 반겼다.
“국왕전하께 은혜를 입어 상선 한 척을 대절할 수 있었습니다. 대사관 공관 외에 외교관 사택 단지에도 직원들이 무사히 입주를 마쳤습니다. 사택이 넓고 편해서 아주 좋습니다. 하온데 대사 사택 지하실의 용도가 무엇인지 여쭐 수 있겠습니까?”
“그야 당장 쓰지 않을 물건이나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물건을 보관하고, 에스파냐 국적의 불법 체류자나 간첩을 숨기고, 고산국에 넘기지 않을 에스파냐 국적의 범죄자를 자체 처벌하는 공간이 아니겠소?”
왕토사상에도 불구하고 대사관 공관은 국제법상 외국 영토이므로 매매계약을 체결해서 아예 팔아버렸다. 외교관들도 계약기간이 끝날 때마다 매번 이사를 다니느니 매입하는 편을 선호했다.
“그런 공간이 필요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에이! 선수끼리 그러지 맙시다. 외교관들이 없는 솜씨로 지하실을 파다가 흙더미에 깔리거나 지하수가 쏟아질 바에는 차라리 미리 만들어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 말이오.”
“흠! 흠! 세심하십니다, 전하.”
이때 정보국장 미카가 전보용지를 내밀었다. 외교사절의 방문을 받는 중에 드문 일이라 이민호가 내용을 살폈다.
“오호! 포르투갈이 독립을 선언했군요. 인도 무역도시의 포르투갈 귀족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니, 대단하오.”
포르투갈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독일 내전을 끝낸 프라하 조약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기에 지금도 네덜란드와 에스파냐가 전쟁을 지속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네덜란드가 독립 승인을 받아 전쟁을 끝내기 전에 독립을 시도하려고 노력해왔다.
그 동안 준비과정이 길었던 것은 인도 남서 해안과 남동 해안에 산재한 무역도시를 차지한 포르투갈 귀족들이 독립에 대한 열의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 세계 식민지를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나눠 갖고 있었는데, 굳이 독립을 해서 식민지를 두고 에스파냐와 다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장 본국에 보고해야겠습니다. 물론 본국에서도 통보를 받았겠지만 말입니다. 죄송하오나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대사! 잠시만 기다리시오.”
“알고 있습니다, 전하. 포르투갈에서 먼저 접근했지만 고산국은 포르투갈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도움을 주더라도 약간의 금전적인 도움에 그쳤을 것으로 믿습니다.”
“다 알고 있구려. 하긴 국제정세나 외교 구도가 그렇게 돼 있으니까 말이오.”
“그리고 아무리 동맹국이라도 국익을 위해 쉽게 배반하기도 하는 법입니다. 에스파냐와 고산국은 우방국이라 하지만 동맹조약을 체결한 적이 없으니 국왕전하를 원망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이번 일에서 중립을 지켜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고산국 입장에서 포르투갈이 독립해야 해군 기지 사용권을 얻을 수 있고, 대서양 전체를 안전한 내해로 만들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우방 에스파냐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었다.
그런 상황을 에스파냐 대사가 이해해줬다. 물론 본국에서 다른 훈령을 받고 나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대사가 본심 그대로 발언하고 있었다.
“고맙소. 대신 마카오의 포르투갈 사람들이 마닐라를 공격하지 않도록 해주겠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본국에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에스파냐 대사가 급히 대사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민호가 동남아시아에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지 못하도록 개입한 이상, 마닐라에서도 마카오를 공격할 수 없게 됐다. 어차피 유럽인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손님에 불과했고, 이 지역의 패자는 고산국이었으니 이민호가 원하는 대로 돌아갈 것이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라는, 예전의 동군연합 사이의 전쟁은 국경선을 접한 이웃나라끼리의 전쟁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대륙에 식민지를 두고 있는 두 나라의 특성 때문에 자칫하면 세계 전역에서 전쟁이 일어나게 생겼다.
============================ 작품 후기 ============================
포르투갈 독립전쟁에는 별로 개입할 의사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