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19 105. 대국의 길 =========================================================================
다음 날 새목포에 도착했다. 선단과 호위전단이 차례로 사주 끝을 지나 만 안으로 들어갔다.
만 양쪽 항만에 정박해 있는 전함과 순양함, 호위항모 등 군함들 갑판에 흰 제복과 근무복을 입은 해군 장병들이 도열해 있다가 거수경례를 했다. 이민호가 탄 국왕 좌승함 승조원들도 갑판에 도열해서 답례했다.
“주인님. 아무리 국왕의 행차라 해도 승조원들이 갑판에 나와서 대함 경례를 하는 건 허례허식 같아요. 물론 아주 멋지긴 하지만요. 그리고 만약 바다에서 군함들끼리 스쳐 지나갈 때 대함 경례를 한다면 위험할 것 같아요.”
“대함 경례는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라 군함끼리 마주치면 반드시 하게 돼 있어.”
저쪽 세상에서 들었던 아주 옛날 유머가 떠올랐다. 영국 여왕이 수녀원을 방문하면서, 수녀들에게 평상시대로 행동할 것을 주문했다. 그런데 여왕을 만나는 수녀들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여왕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여왕이 질책하자 여왕을 수행한 수녀원장이 당당히 대꾸했다. 여왕이 명한 대로 평상시처럼 수녀들이 수녀원장인 자신에게 이렇게 절을 한다는 것이다.
대함 경례는 외국 군함끼리도 하고 상선이 군함에게도 한다. 현재 유럽 해군 함선들이 실행하고 있고, 특히 고산국은 여러 속국들과 동맹국을 거느린 입장이라서 대함경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사고라도 날까 걱정되니까요.”
“함장! 악천후 시에도 대함 경례를 하나?”
군대를 잘 모르는 혜영이 계속 걱정하자 이민호가 좌승함 함장에게 물었다. 그리고 태풍이 부는 바다에서 군함 두 척이 마주치면서 대함경례를 하다가 사고가 나는 장면을 상상했다. 순양함이 거대한 파도를 넘는 순간 차렷 자세로 서 있던 승조원들이 바다에 우르르 빠지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현대 한국 해군도 파도가 심하면 승조원들이 왼손으로 현측 난간을 잡고 경례하는 융통성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이민호는 고산국 함선들이 크니까 파고가 5미터 이상일 때 대함경례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함장 입에서 나온 대답은 이민호의 예상과 달랐다.
“아닙니다, 전하! 파고 1.6미터에서 2미터 사이인 황천 7급부터 대함 경례를 하지 않고 발광신호나 기류신호로 대신합니다. 안전에 관련된 규정은 항상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뭐, 그렇다는군. 바깥 바다에서는 사실상 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이제 안심이 돼?”
“네!”
혜영이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식 왕비도 아니면서 백성들에게 혜영 총리가 자애로운 국모라 칭송받는 이유였다.
국가의 미래를 제시하고 국민들을 이끌어가야 하는 정치가로서 혜영의 자질이 어떨지 알 수 없었다. 항상 국가적으로 중요한 순간에는 혜영이 이민호에게 결정을 맡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혜영은 꼼꼼하고 부지런하며 만백성을 사랑하기에 이민호가 보기에 행정가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다.
“혹시 내가 이 배에 탄 것을 다른 배의 수병들이 어떻게 아는지 궁금해?”
“네. 미리 통보했나요?”
“그럴 필요 없어. 깃대에 국왕 깃발을 게양했거든. 전단장이나 전대장이 탈 때도 그에 해당하는 깃발을 올려.”
현대 해군에서 마스트는 돛대가 아니다. 레이더를 비롯한 온갖 탐지 및 통신 장비가 달려있는 곳이다. 그리고 조선 판옥선에서는 돛대 두 개 외에 따로 두꺼운 깃대를 세워 깃발을 달았다.
“만약 함장님 두 분의 계급이 같으면요?”
“함장들이 같은 계급이라도 임관 날짜를 따져서, 그것도 같으면 심지어 군번을 따져서 경례를 주고받는다더군.”
군인이나 관료가 같은 계급 혹은 직급이면서도 직책상 상하관계에 놓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같은 계급에 동급의 직책이더라도 선후 관계를 따지는 것은 세계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계급 사회의 원칙이 민간 사회에 무차별로 적용됐을 때가 문제지 군인과 관료들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정상이었다.
한미연합사 소속 동일한 계급의 미군과 한국군 장성이 만날 때도 장군 진급을 늦게 한 쪽에서 먼저 경례를 한다. 임진왜란 용인전투 전에 삼도 감사들이 연합군을 형성했을 때, 겨우 100여 명을 동원한 경상도군이 전라도군에 비해 숙영지 선택과 보급 등에서 우선권을 누렸다. 경상감사 김수가 정2품 하계 자헌대부에 오른 날짜가 호남 감사 이광보다 며칠 빨랐기 때문이다.
이때 충청감사 윤선각은 감사의 기준 품계인 종2품 하계 가선대부였다. 물론 경상 감사가 예우만 높게 받았지 작전기간 동안 삼도 감사들은 각자 동등한 권한을 행사했다.
만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자 민간인 항만들이 나왔다. 거대한 상선과 유조선이 정박한 부두들을 지나자 다양한 크기의 어선들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작은 요트들이 빼곡하게 부두를 메웠다.
“정식 천도하기 전인데도 요트가 많네.”
“인공 섬을 만들어 정박할 면적을 늘려야겠어요.”
대부분 부동산이 국왕 소유인 고산국에서 백성들이 남는 자본을 투자할 데라곤 주식과 기명 채권, 별장과 요트뿐이었다. 천도가 본격화되면서 별장 투기는 망했고 요트는 분해해서 태평양 반대쪽으로 옮기느라 비용이 많이 들었다. 주식은 높은 수익률을 올리거나 반대로 휴지조각으로 변했고, 채권은 비교적 안전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요트 소유자들 중에 태평양을 직접 건너는 사람들도 있다며?”
“작은 요트는 아니고 큰 요트들만, 그것도 선단을 구성해서 해안경비대 함선과 함께 이동하고 있어요. 아직 사고가 났다는 소식은 없지만 태풍이라도 만날까봐 불안해요.”
“시간이 꽤 걸릴 텐데 고생이 많겠네. 설마 가족들을 태운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에요. 대부분 남자들만 탔어요.”
현대에도 돛만으로 태평양을 횡단하려면 4개월은 걸린다. 요트 면허를 발급받은 자들이 이 기회에 목숨을 걸고 도전하고 있었다.
선단은 만 남쪽 끝에 가까운 선착장에 계류했다. 현대 샌디에이고 임페리얼 비치(Imperial Beach)의 바로 동쪽인데 이민호가 그런 이름까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선단에서 내린 왕실 가족들은 원주민들과 미리 이주한 새 왕도의 백성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민호가 손을 흔들 때마다 함성이 쏟아졌다. 표정들을 살펴보니 새 왕도가 백성들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었다.
환영식 도중에 거대한 기중기가 이삿짐이 실린 철재 상자들을 배에서 대형 화물차로 옮겼다. 왕실 식구들이 워낙 많다 보니 가구를 빼고도 이삿짐이 대형 컨테이너로 수십 개나 됐다.
이민호와 혜영은 장갑차에, 나머지 왕실 가족들은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 몇 대에 나눠 올라탔다. 20세 이상이며 왕궁에 거주하는 왕자들과 공주들은 이삿짐이 실린 대형 화물차의 운전대를 잡았다. 성인이 돼서도 시집장가 못 가면 괄시를 받고 무보수 사역에 동원되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왕실 가족들이 탄 차량 행렬이 티완 강 제방 너머 길을 달렸다. 평소에는 강폭이 50미터밖에 안 되지만 상류인 산간에서 폭우가 쏟아지면 유량이 몇 배나 불어나는 강이었다.
거대한 한강을 끼고 있으며, 발전 가능성도 높은 한양을 떠올리자 이민호는 몹시 배가 아팠다. 그러나 고산국의 현재 영토 분포와 기후로 보아 티완이 수도로 훨씬 적합했다. 조선 사람들은 그들대로 잘 지내고 있으므로 욕심낼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새 왕도를 깔끔하게 잘 만들었어요.”
“그렇지? 역시 건축과 토목 분야에서는 세자를 따라올 사람이 드물어. 기능성을 중시한 설계를 하면서도 미적 감각이 뛰어나단 말이야.”
이민호와 혜영이 새 왕도에 늘어선 건물들을 보며 감탄했다. 관청 거리와 상업지역 건물은 물론 공동주택들도 같은 모양은 단 하나도 없이 뭔가 독특한 점이 있었다.
물론 세자 혼자서 설계한 것은 절대 아니었고 심지어 세자는 건축이나 토목 전공도 아니었다. 수많은 건축가들이 몇 년 동안 고생해서 만든 작품을 세자가 선택하거나 설계 수정을 지시한 것뿐이었다.
이민호가 말로만 듣던 현대와 전통이 어우러진 도시가 이곳에 실존했다.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 기와집 지붕과 고딕 양식의 교회가 섞여 있었으나 정원수와 가로수를 통해, 그리고 먼 산을 배경으로 조화가 잘 이루어졌다.
“아직 국초이긴 해도 국가발전을 지나치게 토목에 의존하는 것 같아 걱정이에요. 왕도 하나만으로 몇 년치 국가예산을 잡아먹었어요.”
“뭐, 국초니까.”
“아직 인구도 적은데 지하철이 몇 개나 있어요. 백성들의 편의를 위해서라지만 과잉 투자 아닌가요?”
“고북 시에서 많이 겪었잖아? 인구가 늘어난 다음에 추가 건설할 때 비용이 더 많이 드니까 미리 만들어놓지 뭐.”
새 수도와 연결되는 모든 철도를 전철화시켰다. 당연히 도시 지하에서 달리는 열차는 물론 새인천과 연결된 열차도 상대적으로 소음이 적은 전철이었다. 도시의 외관과 기능을 고북과 비교하면 몇 세대나 차이가 났지만, 이민호 외에는 알아봐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바마마! 원로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고생했다. 새 왕도로서 아주 좋구나.”
마중 나온 세자에게 이민호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왕궁을 비워놓을 수 없어서 세자는 왕궁 정문에서 이민호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사이 혜영과 왕실 식구들이 왕궁의 거대함에 압도돼 탄성을 내질렀다. 혜영의 반응이 가장 극적이었다.
“이건 왕궁이 아니라 황궁이에요! 사진으로만 봤을 때는 이렇게 클 줄 몰랐어요.”
“세자가 왕이 될 일은 결코 없을 거야. 즉위한 순간부터 황제일 테니까.”
혜영이 깜짝 놀랐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얼굴 표정에 걱정이 가득했다. 사실 쉽게 할 농담이 아니었다.
“유럽과 아프리카는 상관없는데 명나라와 조선이 문제겠어요.”
“두 나라와는 관계 설정을 새로 해야겠지. 서로 이익일 테니 기존의 우호관계를 해치지는 않을 거야.”
실제 역사에서 청나라와 교역을 했던 유럽 국가들은 제국이든 왕국이든 모조리 조공국, 제후국, 봉신국 취급을 받았다. 중원을 차지한 국가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고, 중화사상은 무한한 권력을 쥔 황제마저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이었다. 그래서 청나라가 국경선 획정을 위해 제정러시아와 체결한 네르친스크 조약이 평등조약이라는 이유로 국내에는 비밀에 붙였다.
“명나라 황실이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질지도 몰라요. 협상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황실의 권위가 흔들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질 테니까요.”
“요즘 다시 반란이 격화돼서 그럴 경황이 별로 없을 거야.”
왕가윤은 이미 4년 전에 전사했고 지금은 고영상이 농민반란군을 이끌고 있었다. 이자성도 형양대회 이후 꾸준히 전공을 세워 인지도를 높여나갔다.
그런데 요즘 갑자기 농민반란군의 군세가 급속히 확장되고 있었다. 고산국에 이민 갔다가 토지를 무상 분배한다는 공약을 믿고 귀국한 자들이 반란군에 대거 합류했기 때문이다.
단발총 등 신식 무기는 많지 않지만 막대한 자금과 인원, 새로운 전술을 수혈한 농민반란군이 관군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고산국에서 귀국한 자들이 더 많이 반란에 가담할 경우 명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게 됐다.
“그래도요.”
“외교 문제는 천천히 풀고 일단 들어가시지요, 황후마마.”
“농담 마세요! 전에 약속을 했었잖아요.”
“왕비를 안 하겠다고 했지 황후를 안 하겠다는 약속은 안 했잖아? 그래서 해중국 여왕도 겸임했었지.”
혜영이 뒤를 돌아보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헤드비히 공주와 북미 여대공 비올레타, 주상아 공주 등이 혜영에게 어서 이민호와 함께 정문을 통과하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국왕전하 입궐이시오!”
이민호와 혜영이 대문을 넘어 궁궐 안쪽에 첫 발을 디디는 순간 궁내부 장관이 소리 높여 외쳤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백성들이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물론 아직은 제국을 선포할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때가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 이민호에게 확 다가왔다. 이민호는 이 문제를 재위 중에 반드시 해결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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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끝~ 명나라 문제와 제국 선포, 양위가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