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17 105. 대국의 길 =========================================================================
선단이 북태평양 항로에서 살짝 벗어나 알류산 열도 가까이 접근했다. 몇몇 섬에서 운영되는 전파중계소와 등대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여름인데도 바다에는 유빙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빙산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빙산이 한두 개가 아님을 확인한 호위전단장이 남쪽으로 선단의 항로를 크게 꺾도록 지시했다. 그 사이에도 호위전단 순양함들이 전파탐지기와 음파탐지기를 최대한 가동하며 빙산의 흐름을 추적해 미연에 위험을 회피했다.
배마다 견시가 두 배로 투입돼 차가운 바람을 견디며 쌍안경으로 사방을 훑었다. 호위항모 갑판이 얼어붙는 바람에 초계기 이륙을 금지하고 직승기만 띄워 주변 해역을 감시했다.
“앞으로 점점 대권항로를 이용하기 어려워지겠어.”
“해수면이 내려가서 연안어업에도 문제가 많아요. 북극과 남극을 중심으로 빙하가 확장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북빙양이 남쪽으로 확장하면서 이익을 보는 집단은 알류산열도를 통과할 필요가 없게 된 고래들뿐이었다. 고래 떼는 매년 베링해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새끼 고래의 절반을 범고래 무리에게 잃는다. 그러나 베링해, 이 시대 이름 민호해가 얼음으로 뒤덮이는 바람에 알류산열도 남쪽에 어장이 형성돼 고래들이 적은 피해로 새끼를 키울 수 있게 됐다.
“응. 열대 지방 높은 산에도 눈이 쌓이고 빙하가 불어나고 있어. 다들 기후 변화에 잘 적응해야 할 텐데, 걱정이야.”
“과거 기준에 얽매인 자들은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 거여요.”
“그게 문제야.”
이민호가 머지않아 소빙기가 올 것으로 확신한 것은 옛 기억이 아니라 실측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영토 곳곳에 기상관측소를 설치해두고 오랜 시간 기상변화를 추적하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가끔 예년보다 따뜻한 해가 오더라도 평균 기온의 추세선은 분명 우하향하고 있었다. 몇 년에 한 번꼴로 치명적으로 추운 해가 찾아올 때마다 북반구에 파란을 일으켰고, 수십 만 명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다. 그때마다 임신과 출산이 뚝 떨어진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날씨야 매년 바뀔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해 보이는 날씨 변화 따위에 시간과 인원, 자본을 대거 투입하는 일은 국내에서도 반발이 심했었다. 특히 혹한이 몇 달씩 계속되는 기상관측소와 등대에 투입되는 인원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관리들이 군사교육과 생존훈련을 받는 이유가 있었군요. 관상대 관리들이 군인만큼, 어쩌면 군인들 이상으로 고생하고 있어요. 고산국 백성들이 과학문명의 혜택을 듬뿍 받으면서도 여전히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 중 하나예요.”
“그들 덕택에 공무원이 나태하고 나약하다는 소리는 안 듣게 됐어. 어때? 이제 관상대 예산을 깎을 마음이 덜 들겠지?”
“나라 살림을 하다 보면 눈물을 머금고 예산을 깎아야 할 때가 있어요. 그러니 주인님이 더 벌어오세요.”
“끙! 석유 수출 가격을 올리면 유럽에서 얼어 죽는 사람이 많이 생길 거야.”
“그건 안 돼요. 지금도 석유와 석탄 값이 비싸다고 추운 겨울에도 모피 옷만으로 견디는 사람들이 태반이에요. 예산을 확보할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흔히 명장과 졸장, 구체적으로 이순신과 원균의 결정적인 차이로 정보활동의 유무를 든다. 즉 정찰과 척후활동을 통해서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여부가 승패의 관건이 된다.
이순신은 적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해 선제 대응에 나서서 승리했고 원균은 적의 기습에 무너졌다는 사실은 현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러나 왜군 함대가 오는 길목에 매복 함대를 교대로 파견하고, 높은 산에 척후들을 보낸 이후 연락선을 계속 유지하고, 밤에 잠자는 파수꾼을 적발해 곤장을 쳐야 정찰, 초계선이 유지된다. 지휘관으로서 매우 피곤한 일이며 부하들의 불만도 많아지고 비용도 꾸준히 들어간다.
정보의 중요성을 쉽게 말하는 이들이 과연 정보 획득 활동에 드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 인적 자원 투입을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지는 의문이다. 엄청난 방위예산이 투입되는 현대 한국군만 봐도 정보 자산에 대한 투자는 미군에 의존한다는 핑계로 최소화하고 있다.
정보 자산이나 정보 획득을 위한 시스템에 대한 투자는 잔존자산으로 평가할 실체로 남기기 어렵기 때문에 투자를 꺼리는 경향이 생긴다. 결국 정보의 중요성을 누구나 말로만 떠들면서도 정작 비용을 들여야 할 때는 주저하게 된다는 뜻이다.
간단히 요약해 평균적인 인간은 결코 원균을 넘을 수 없다. 그런데 전쟁에 필요한 사람은 이순신 같은 지휘관이다. 나라를 지키는 일을 생각할 때는 그런 고민을 해야 한다.
“군사력이나 상품경쟁력 등에서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해. 하지만 지금은 무역수지와 경상수지를 억지로 균형에 맞춰두고 있어. 북반구 온대지방에서 더 이상의 자산을 흡수했다간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 거야.”
“유럽을 정복할 호기로군요. 유럽 각국에 지운 부채를 일거에 회수하면 군주와 영주들이 죄다 망하지 않나요?”
그러나 군주와 영주들만 망하면 상관없는데 사회 체계가 무너진다면 이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독일 내전 중에 군주와 영주들이 멀쩡히 권력을 잡고 있는데도 생산 체계가 무너지면서 독일 사람들이 어떤 비극을 겪게 됐는지 잘 지켜봤었다.
“다 굶어죽게 만들고 나서 천년만년 욕을 먹거나, 유럽 인구 1억 명을 생으로 먹여 살릴 자신이 있다면 그렇게 해. 겨우 2천만에 불과한 독일인들을 구호하는데도 엄청난 자본이 들었어.”
“소빙기가 지나기 전까지는 외국과의 무역이 국가재정에 보탬이 되지 않겠군요. 농업생산력이 매년 떨어지는 와중에 국내 경제 성장분만으로 국가를 유지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어요. 건국 초가 차라리 편했어요.”
소빙기가 온다고 지금은 확신을 갖고 대응하고 있었지만 마냥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오대호 인근 농민들 절반을 남쪽으로 이주시키면서 든 비용과 그 과정에서 땅을 잃은 농민들의 반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주라는 게 결코 가볍게 볼 게 아니었다. 농민은 새로운 농지와 작물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게 됐고, 부인들은 서로 돕고 살던 공동체에서 쫓겨났으며, 학생들은 친구를 잃었다. 새로 정착한 곳에 적응할 때까지는 모든 것이 스트레스의 연속인 환경에서 살아야 했다.
“주인님과 비교돼서 개똥이는 성군 대접을 받기 어렵겠죠?”
“하기 나름이지. 하지만 앞으로 계속 날씨가 추워지고 작황이 나빠지면 나보다 좋은 왕이란 소리는 듣기 힘들 거야.”
“대를 이을수록 더 나빠질 거여요. 유럽에서도 가난한 자들이 더 이상 못 버텨 혁명이 일어날 테죠.”
“고산국 영역은 그나마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 기준으로는 과도할 정도로 넓은 농지를 활용하느라 잉여식량이 남아돌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인구가 늘고 매년 갈수록 작황이 나빠지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이민호가 재위 중에 판로를 신경 쓰지 않고 국고에 부담이 가더라도 미친 듯이 농지를 늘린 이유였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준비를 했기에 후대에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소빙기에 외국의 인구가 감소하는 반면 고산국 인구가 꾸준히 늘어난다면 지구 인구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혜진이는 어디 있어? 요즘 통 안 보이던데.”
“저기 탄약 보급선에 세자빈과 함께 있어요. 세자빈이 화학 전공자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이민호의 후궁이 150명 정도인데 반해 세자의 후궁은 호위들까지 다 합해서 30여 명에 불과했다. 하나하나 뛰어난 재원들이긴 해도 세자가 즉위한 순간부터 이들이 과로에 시달릴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예상이었다.
그래서 이민호가 재위 기간을 더 늘리거나, 세자가 더 많은 후궁을 들여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물론 왕실의 일 일부를 정부에 이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실행하기 어려웠다. 왕정국가에서 왕실의 일과 인원을 줄인다는 것은 권력을 포기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안정되기 위해해서는 먼저 왕실이 안정돼야 한다는 것이 이 시대 모든 식자들의 공통된 신념이었다.
“아! 새 왕도에서 세자가 후궁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겠군.”
“어머! 참. 그렇게 연결되는 건가요?”
말이 탄약 보급선이지 사실은 무연화약과 뇌관, 포탄 신관 제조 시설을 옮기는 중이었다. 탄약선이 만에 하나 잘못된다면 새로 시설을 갖출 때까지 고산국 전체가 꽤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호위전대 하나가 통째로 탄약선 한 척의 호위를 전담했다.
며칠 후 선단은 새남포에 입항했다. 호위전단장이 유빙 때문에 위험하다고 권고해 알래스카 쪽은 접근하지도 못했다. 지구가 차가워진 동안에는 새 영토의 개척이 계속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시애틀인 새남포는 아시아와 북미대륙을 잇는 무역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배에서 내려 부두에 마중 나온 관료들, 그리고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수십 개 부족의 원주민 추장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눴다.
부족을 이끄는 추장 외에도 각종 집회를 이끄는 다양한 추장들을 만났다. 임진왜란 때 어느 절을 약탈하러 산을 올라오는 왜군 다섯 명 중에 투구를 쓴 세 명이 왜장으로 분류됐듯이, 수족의 태양 춤 집회 참가 인원 다섯 명 중에 세 명이 추장이라는 칭호를 달고 다녔다. 그러나 북미 원주민들의 추장은 존경을 받는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 지도자들과 달랐고, 그래서 훨씬 책임감이 넘쳤다.
“국왕전하! 저는 두워미시 족의 추장 시아흘입니다.”
추장들 중에 특이한 이름을 들었다. 두워미시 족 어머니와 수쿼미시 족장 사이에서 태어난 시애틀 추장과 같은 이름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19세기 후반 시애틀 추장 이름을 따서 바로 이 도시의 이름을 짓겠지만 이 추장은 그저 동명이인일 뿐이었다.
“혹시 누군가 땅을 학대해서 걱정된다면 언제든 시청에 문제를 제기하시오. 대지에 부담을 주지 않을 새로운 방법을 찾으리다.”
“전혀 아닙니다, 전하. 생활하수는 물론 배설물까지 정화조를 통해 깨끗이 거르는 고산국 사람들을 감히 비난할 자들은 없습니다.”
“나무를 너무 많이 베어 숲을 파괴한다든지 강에서 연어를 너무 많이 잡는다든지 하는 불만은 없소?”
새 왕도 전체를 브루나이에서 난 비싼 티크목만으로 건설할 수 없어 이 지방에서 대량으로 목재를 구해 반출했다. 이민호는 그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생길 거라고 예상했는데 전혀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고산국 새남포 시청과 체결된 협정에 따라 벌목과 연어잡이는 원주민들만의 특권으로 지정됐습니다. 덕택에 예전에 모피와 가죽을 교역할 때보다 훨씬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벌목한 면적의 몇 배를 숲으로 조성하기에 숲이 사라질 걱정도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오.”
그러나 새남포에서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산국 본토 출신들과 생활수준이 비교되자 원주민들은 그 원인을 찾아 해소하고 싶어 했다.
또한 이 지역 기후가 계속 추워지면서 사냥과 비중이 얼마 안 되는 농업에도 문제가 생겼다. 추장들이 시아흘과 이민호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국왕전하! 저희들도 고산국의 백성들입니다. 이주해온 백인들처럼 농사와 목축을 하고 싶은데 시청에서 반대하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은 스스로를 홍인, 고산국 본토인들은 피부색을 불문하고 백인으로 불렀다. 조선 출신자들의 피부가 황인종들 중에서도 유독 하얀 탓이었다.
“요즘 날씨가 추워지면서 이 지역의 생산성이 낮아지고 있다오, 그래서 새남포 시장은 물론 북미 주지사도 농경지 확대에 반대하는 입장이라오.”
“저희들이 시청에서 내준 따뜻한 집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겨울에는 일이 없어서 젊은이들이 술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시장에게 물어보니 새남포 시청의 하급 공무원 자리와 부두에서 일하는 항만노동자, 건설노동자는 원주민들로 이미 다 채웠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 공부를 마친 원주민 청년들이 우선적으로 일자리를 차지하기에, 외곽에서 사냥 등 전통적인 방법으로 사는 원주민들에게 일자리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겼다. 이곳은 지역 면적에 비해 원주민 인구가 많고, 또한 기후 변화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는 지역이었다.
“평생 벌목과 연어잡이만 할 수는 없을 것이오. 한 곳에 정착해서 꾸준히 일할 직업이 필요하다면 시청과 협의해서 마련해보겠소.”
현대 시애틀처럼 항공기와 소프트웨어, 컴퓨터를 만드는 공장을 지어서 유휴 노동력을 흡수할 수는 없었다. 이 시대에 문제 해결은 땅에서, 혹은 바다에서 해야 했다.
“주변 토양과 기후가 고산국 농민 입장에서는 생산력이 낮겠지만 원주민 입장에서는 기존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습니다.”
“지역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생산력이 낮은 농지를 개발하는 것은 마땅치 않소. 그러니 굳이 지금 원주민들을 위해 농장을 만들어줄 이유는 없소.”
“감사합니다, 전하. 현재 새남포에서 제재소와 대규모 제지공장을 건설 중입니다. 사할린의 제지공장이 혹독한 추위로 가동 중단 위기에 처하면서 이곳이 대체지로 선정됐습니다. 원주민들을 교육시켜 배치한다면 5천여 명까지 고용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미 해결돼 있었군요. 시장이 직접 원주민들을 설득해 교육에 들어가시오.”
바다에서 일자리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연어는 이미 고산국에서 공급 과잉이었다. 그리고 고산국 어느 민족이든 낯선 어종인 연어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
결국 새남포 주변 원주민들의 과잉 노동력을 제지공장을 통해 해소하게 됐다. 숲의 사냥꾼들이 공장의 비숙련노동자로 전환된 셈이나, 기후변화에 의해 생존의 위협에 몰리던 원주민들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게 됐다. 아주 가끔 일어나는 산업재해도 곰을 사냥할 때에 비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지역 곰과 늑대의 수를 조절하기 위해 유능한 사냥꾼들을 따로 숲지기로 뽑아 활동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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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할 일도 많은데 그냥 날아갈 걸 그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