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15 105. 대국의 길 =========================================================================
명나라 관군에게 계속 밀리던 농민반란군 13가(家)의 지도자들이 하남성에 모여 ‘형양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틈왕 고영상의 부장인 이자성이 13가 연합을 제의하고 반란군 지도자들이 고영상을 대표로 추대했다.
연합군이 구성되고부터 농민반란군이 관군을 상대로 한동안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농민반란군 전체가 고영상 개인의 군대로 점차 성격이 변하자 반란군 지도자 장헌충 등이 반발해, 모처럼 힘을 모았던 농민반란군이 다시 분열되고 말았다. 농민반란군 조직들이 관군에게 각개격파의 제물이 되어 하나씩 항복하거나 진압됐다.
반란군이 산산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고영상과 이자성은 토지 분배와 세금 면제, 즉 균전면부(均田免赋)를 구호로 내걸었다. 몇 년째 거듭된 흉년과 과도한 세금으로 고통을 받던 농민들이 큰 지지를 보냈지만, 대세를 점한 관군에게 계속 형편없이 밀렸다.
“토지 분배와 세금 면제라. 반란이 성공한다면 농민들이 세금을 내지 않으니 고산국 농민보다 두 배는 잘 살겠군. 농지 소유권을 넘겨준다면 여차 하면 팔 수도 있어서 농민에게 더욱 이익이겠지.”
그래서 본토와 북미에서 3년 이상 건설노무자로 일한 다음 고산국 국적을 얻었던 명나라 사람들이 지금은 대거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자금과 무기를 들고 반란군에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 북미에 풀린 민수용 단발총을 이들로부터 수거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명나라로 떠나는 배마다 모든 짐을 샅샅이 수색해 총기류를 압수했다.
명나라 출신 상인과 요식업 종사자들도 공짜 농지라는 말에 솔깃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기에 대부분이 고산국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최근 몇 년 새 백만, 성인 남자만 최소 30만 명이 명나라로 되돌아갔다. 결국 3퍼센트 정도를 유지했던 명나라 출신자들의 인구 비중이 2퍼센트 이하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명나라 조정의 압력으로 인해 그나마 명나라 출신자들의 이민을 적게 받았었는데, 앞으로 더욱 줄어들게 생겼다.
아무리 중국인들이 군인이 되는 것을 싫어한다 해도, 이들 중 일부는 명나라 농민반란군에 합세할 것이 분명했다. 가끔 혼란에 빠진 명나라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워보겠다는 야망을 품고 떠나는 자들이 문제였으나, 고산국에서 그런 자들을 붙잡을 이유도, 권리도 없었다.
“아바마마. 소자의 소견으로는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봅니다.”
“물론 농지 면적이나 종자, 비료, 기계 영농을 따라올 수가 없겠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동원된 관군이 100만을 넘고 농민군은 30만도 채 안 됩니다. 후금이 사라졌으니 반란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명나라 조정에서도 농민반란군을 상대로 승리를 확신했는지 고산국에게 병참 지원이나 파병을 요청하지 않았다. 가끔 명나라에서 날아오는 정세보고서를 읽어보면 농민반란군이 승리할 가망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명말 농민반란군 지도자 장헌충 같으면 사천지방에 나라를 세우고 비록 단 기간에 망했지만 70만 대군을 유지했다. 이자성도 패잔병 10여 명에서 시작해 단숨에 50만으로 규모를 불리기도 했다.
역대 중국에서는 농민들에게서 민심만 얻으면 병사나 군량 등 자원을 아주 쉽게 대규모로 모을 수 있었다. 바로 그런 특성이 앞으로 명나라에서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다.
“글쎄.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우린 이사나 하자.”
“예! 아바마마.”
이민호와 세자가 왕실의 소유물이 담긴 두꺼운 종이상자를 손수레에 가득 실어 대형 화물차로 옮겼다. 후궁이나 왕자, 공주들도 가구를 제외한 책과 옷 등 개인 소지품을 직접 날랐다.
군부대나 관청은 시간을 두고 차츰차츰 인원과 장비를 옮기는 것이 가능하나 일반 가정집은 한꺼번에 세간과 식구들이 동시에 이사해야 했다. 왕실은 고산국에서 가장 큰 가정집이라, 여객선 외에 수송선이 두 척이나 이사에 동원됐다. 아무리 다경제를 유지한다 해도 첫 번째 수도가 생활의 기반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세간을 옮겼다.
“전하! 고향을 버렸던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고향을 등지게 하시렵니까?”
“한 번 버린 고향, 두 번이 어려우랴? 궁둥이 붙이고 정들면 고향이지. 아니, 정 붙이고 살면 고향이라던가?”
계획을 세워서 이사를 하더라도 온갖 문제가 생겼다. 바빠 죽겠는데 항구까지 나와서 발목을 잡는 이들이 많아 이민호가 짜증을 냈다.
6월 중순부터 수도를 북미 서부 티완으로 옮기는 천도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반대파가 언론을 동원하고 대규모 집회를 열어 조선 출신이 다수인 백성들의 감성을 한껏 자극했으나 마침내 이성이 승리하고 말았다. 떠나든 머물든 다들 계산을 마쳤기에 한 번 결정된 이상 천도는 급물살을 탔다.
“천도하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데도 이토록 반발이 심할 줄 몰랐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재위 중이 아닐 때라면 천도하기가 어려웠겠습니다.”
사실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재위 말년에 천도를 서두른 감이 있었다. 조선이 개경에서 한양으로, 명나라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것은 개국 초라서 가능했다. 오래 된 나라라면 기존 수도에 자리 잡은 기득권자들의 반발을 억누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봐라, 세자야. 왕도가 영토 한쪽 구석에 있다고 그토록 악을 쓰고 지랄하던 인간들이 정작 천도한다니까 온갖 이유로 반대한다.”
“천도 반대파들이 예전에 했던 발언을 내세워 그들의 현재 주장을 일축할 수 있습니다. 이사 때문에 바쁘더라도 한 번 창피를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세자는 참 좋은 사람이구나. 저들에게 상식이 통할 줄 아느냐? 세자 말대로 하더라도 저치들은 부끄럼을 전혀 모른다.”
처음부터 이성적 판단이나 이익에 따라 천도파와 반대파로 나뉜 것이 아니라, 예전 천도파가 지금은 반대파로 변신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웠다. 이유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국왕을 비난하며 떠들어대는 일에 맛 들린 자들이었다.
그래서 천도에 대한 의견이 정반대로 바뀐 신문사 몇 개를 골라서 그 신문사가 몇 년 전에 천도설을 주장했던 사설을 신문 하단에 정부광고로 싣도록 강제하는 일을 준비해놓았다. 어차피 천도하는 기간이라서 조만간 정기구독자가 뚝뚝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런 표리부동한 자들이 여론을 좌지우지할까 걱정입니다.”
“그런 놈들이 언론만 장악하면 다행이게? 추밀원과 지방의회에도 그런 자들이 수두룩하다. 아국에 더 이상 외부의 적이 없으니 세자는 앞으로 내부의 적에게 더욱 신경 쓰도록 해라.”
“예, 아바마마. 제발 정상적인 사람들이 기자나 의원을 하면 좋겠습니다. 비열한 자들이 자그마한 권력이라도 차지하려고 거짓말을 하며 발버둥치는 것 같습니다.”
정상적이며 평범한 백성들이 의원 후보로 출마하면 좋겠는데, 왕정제 국가에서 의원들의 권한에 한계가 명백하다는 게 문제였다. 추밀원이나 지방의회나 의원이 명예직에 불과해 적극적으로 의원이 되려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의원이 되기 위해 적극적인 자들은 인성이 의심스러웠다.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죄로 비열한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벌을 받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민호는 그 이상을 의심했다.
“원래는 정상인이었는데 권력의 맛을 알고 나서 변했는지도 모르지.”
“공무원들 일부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봉사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누리려고 해서 큰일입니다.”
원래 천도 계획은 세자가 새 수도로 가서 북미와 남미를 다스리고, 이민호는 고북 시에 남기로 했었다. 그러다가 이민호가 새 수도로 가고, 세자는 고북에 남아 분조를 다스리기로 변경됐다. 그러나 고북에 누가 남더라도 할 일이 별로 없고, 권력이란 집중될수록 강해지고, 또한 조만간 양위를 해야 하기에 함께 새 수도로 가기로 최종 결정했다.
그렇다고 해도 왕과 세자가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현대 미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처럼 유사시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자를 먼저 비행기에 태워 새 수도에 보내고 이민호는 후궁들과 왕자, 공주들이 탄 여객선에 탑승했다.
“설마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실종되는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겠지.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세자야.”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세자가 사고를 당하면 주인님이 앞으로 10년쯤 더 일하시면 돼요.”
“그건 안 돼!”
괜히 걱정하는 이민호를 혜영이 놀렸다. 선단이 태평양을 횡단하는 동안 이민호는 끝까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세자가 이미 새 왕도 티완에 무사히 도착해서 국왕 대리로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늙으면 걱정만 느나 봐.”
“주인님은 아직 늙지 않았어요. 예전에 조선에서 본 환갑노인들은 수염이 허옇게 새고 피부가 자글자글했는데 주인님 피부는 아직 탱탱하세요. 고산국에 사는 다른 노인들도 마찬가지로 정정해요.”
그러나 이민호가 거울을 보면 예전과 달리 늙어 보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후궁들이 염색을 하라고 권해도 나이가 권위인 시대라서 일부러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더니, 지금은 흰머리가 검은머리보다 더 많았다.
이민호보다 나이가 많은 총리 혜영도 그 사이 많이 늙었다. 염색을 자주 하는지 흰머리는 눈에 띄지 않았으나 과로가 습관이 될 정도로 일을 많이 해서 이민호가 자주 미안해했다.
“난 아직 노인이 아니야. 환갑도 안 지났어.”
“흥! 주인님은 아직 젊으시군요.”
“미안. 대머리 되기 싫으니까 검은머리는 제발 뽑지 마.”
같이 늙다 보니 어느새 이런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다음 날 낮에 류큐국의 옛 수도이며 아직도 명목상의 왕도인 나하에 도착했다. 류큐는 북미 서해안의 기름진 중앙평원 절반을 받았고 그곳에 새나하를 건설했으나 원래 본거지이며 고산국 왕도에 가까운 나하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고산국이 천도를 한 다음에야 류큐왕국도 정식으로 북미로 천도할 예정이었다.
“나하가 그 사이 엄청나게 발전했군. 와! 5층짜리 건물이 열 채가 넘겠어.”
“우리나라의 지방 중소도시 수준인데요?”
“험! 험!”
“옛날 나하 사진을 봤는데 정말 상전벽해 수준이긴 해요.”
“그렇지?”
혜영이 적당히 이민호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그 사이 이민호는 감회에 젖어 있었다. 옛날 나하의 시장에서 일본 사무라이들과 칼싸움을 벌였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전하! 제 고향 나하예요!”
때마침 아라공주가 선실에서 나오더니 이민호의 품에 파고들었다. 아라공주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사람인 혜영이 바로 옆에 서 있었으나, 아라공주는 고향을 앞두고 잠시 주위를 살필 경황이 없었다. 30여 년 전에 그랬듯이 이민호가 아라공주를 품안에 두고 꼭 안아주었다.
“헤헤! 옛날로 다시 돌아가면 좋겠어요.”
“저기 부두에 국왕 일행이 우릴 영접하러 나와있소.”
“아! 정말요. 상풍 오라버니!”
류큐국왕 상풍은 이민호와 아라공주 사이에서 낳은 고산국 왕자를 육촌 간인 류큐국 공주와 결혼시켜 류큐국의 후계자로 삼길 원했다. 그게 아니라면 고산국 공주들 중의 하나가 상풍 국왕의 장남에게 시집가서 고산국의 분가로서 왕위를 계속 잇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약소국의 비애 같아서 이민호가 단박에 거절했다. 그리고 류큐국의 왕위 계승 문제는 류큐 왕실에서 알아서 하도록 법을 세웠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신뢰를 쌓아왔지만 류큐국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국왕전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반갑소. 정말 오랜만이오.”
상풍 국왕을 비롯한 대소신료들과 온 나라 백성들이 항구에 나와서 이민호와 고산국 왕실 식구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리고 예쁘장한 소녀들이 이민호와 왕자들에게 화환을 걸어주었다.
“국왕의 손녀들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제 딸들은 비록 실패했지만 제 손녀들은 언젠가 성공하고야 말 겁니다. 고산국 왕자님들 중 한 분을 반드시 낚을 겁니다.”
“하하! 건투를 빌겠소.”
이민호는 류큐왕국과의 관계에서는 아라공주를 취한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아라공주가 상풍 국왕과 친남매가 아니라는 점에서 상풍 국왕은 여전히 불안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이민호는 일부러 아라공주의 소생들이 류큐왕국을 방문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한 때는 류큐 사람들을 아예 만나지 못하게 했었다.
“왕자들은 들어라.”
“예, 아바마마.”
나하 항구에 내린 미혼 왕자들은 20명 가량이었다. 왕자들은 키가 작고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류큐왕국 공주들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류큐 공주들이 가진 매력을 외모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류큐 왕실의 공주들은 어려서부터 대단한 상인들로 키워졌다. 여기 계신 너희 작은어머니는 내가 처음 봤을 때 시장에서 과일 행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해운과 상업을 장악했지.”
“오오! 저희도 들었습니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류큐국 공주와 결혼하면 후손들은 물론 당대부터 아주 부유하게 살 것 같은데,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류큐왕국은 부계로 왕위가 이어지니까 괜히 남의 나라 왕권에 욕심을 내지는 말도록 해라.”
왕자와 공주들이 단체로 선을 보는 사이 뱃전에 남아있는 고산국 공주들이 항구에 서 있는 류큐국 왕자들을 바라봤다. 혼기가 꽉 차고도 넘은 공주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지켜보자 왕자들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사실은 전혀 아닌데, 공주들 키가 너무 커서 키 작은 남자를 싫어할 거라는 왕자들의 자격지심이 공주들의 혼삿길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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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