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14 105. 대국의 길 =========================================================================
5월 말까지 새 수도 티완이 말끔히 정비됐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 10분의 1도 채 이주하지 않아 텅 빈 유령도시를 방불케 했다. 병원과 관공서는 이미 문을 열었고 교직원과 학생 가족들은 6월 중순부터 시작될 여름방학 때 집중적으로 이주할 예정이었다.
새 왕도 티완은 도시로서 자급자족할 모든 기반 시설을 갖췄다. 항구와 상업 지구는 외항 역할을 할 새목포에 맡기고 티완 외곽 소도시 몇 곳에는 공단도 설립했다. 사람들을 도시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역시나 충분한 일자리와 문화생활이 관건이었다.
동쪽 콜로라도 강의 지류에는 새 왕도와 거리가 가까운 순서대로 화훼, 채소, 과수, 곡물 등을 생산하는 농장이 이미 자리 잡았다. 널찍널찍한 대학교와 연구단지도 사람들이 왕도에서 문화생활을 즐기는데 어렵지 않을 만한 적당한 거리에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새인천에 살다가 이주하겠다는 희망자도 많아 왕도에 인구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코요테도 설치류를 사냥해 잡아먹지만 쥐를 잡는 데는 역시 고양이가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코요테는 개체수도 많고 서식지도 넓기 때문에 새 왕도를 비롯한 도시 주변에서 코요테를 몰아내더라도 생태학적으로 큰 변동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천도를 앞두고 고북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새 수도 티완 주변에 서식하는 코요테를 몰살시키자고 대신들이 주장했다. 가급적 생태환경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며 잡는 어업보다 키우는 어업을 중시하는 고산국에서 이는 매우 특이한 사례였다. 대신들은 이 결정을 북미의 다른 도시에도 적용시키자고 이민호에게 청했다.
현대 미국의 대도시마다 몇 천 마리 단위의 코요테가 사람들 눈에 거의 띄지 않은 채로 함께 살고 있었다. 코요테를 도시에서 완전히 박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천도를 앞두고 코요테가 아이와 고양이를 공격한다는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됐다. 국가의 미래인 아이들을 지키고 흑사병 전염체인 쥐를 박멸하기 위해서라도 아이와 고양이의 적인 코요테를 쫓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코요테와 고양이가 잘 어울려 지내는 것을 본 것 같은데 말이오.”
“코요테는 아주 약삭빠른 동물입니다. 필요할 때는 오소리와 함께 사냥을 하고 고양이들과 놀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주민들에게 문의한 결과 그들이 키우는 고양이들의 사망 원인 중 첫 번째가 코요테에게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흰머리수리나 매, 올빼미 같은 맹금류입니다.”
“왕도를 비롯한 도시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겠소. 또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쥐가 옮길 가능성이 높은 흑사병을 막는 일인데, 아직 백신이 없으니 괭이 손이라도 빌려야겠소.”
고산국에는 어딜 가나 동네마다 고양이 급식소가 설치돼 있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사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예산으로 흑사병 방지를 위해 사료를 공급했다. 사람들을 따라 고양이들도 난데없이 새 왕도로 이주하게 생겼다.
“전하! 북미주 북동부에 삵만 한 크기의 고양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체구가 커서 코요테가 쉽게 공격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본토 고양이보다는 북미에 이미 살고 있는 고양이를 새 왕도로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새 왕도는 따뜻하고 선선한 해양성 기후에 속해 있소. 사진을 보니 이 고양이들은 체구가 지나치게 크고 털이 너무 길어서 안 되겠소. 새 왕도에서 계속 번식하고 건물 틈새나 도랑 속에서 사냥하기에는 작고 털이 짧은 조선 고양이가 더 유리할 것 같소.”
대신이 제시한 사진에는 이민호가 현대에서 봤던 메인쿤 비슷한 커다란 고양이들이 찍혀 있었다. 동물복지를 논하지 않더라도 새 왕도에서는 털이 짧은 고양이가 생존에 유리할 것이 명백했다.
“그럼 새 왕도에는 본토에 흔한 조선 고양이를 이주시키겠습니다. 코요테는 상금을 걸어 원주민들에게 구제를 맡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진행하시오.”
웬만하면 동물의 생태에 간섭하지 않고 싶었지만 코요테는 현대 미국에서도 골치 아픈 동물이었다. 영리하고 약삭빠르며 특히 인간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마치 현대 한국의 도시에 출몰하는 멧돼지 같아서 인명피해가 나기 전에 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도 준비로 다들 바쁜 왕도 고북의 궁전에 유럽 여러 나라의 손님들이 한꺼번에 방문했다. 독일 내전을 끝내기 위한 평화협상에 참가했던 각국 대표들이었다. 프라하 조약이 체결된 다음 중재인 자격인 이민호에게 최종적으로 서명을 받기 위해서였다.
“내용을 다 읽어봤소. 각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어려웠을 텐데 적당한 합의점을 찾은 것 같소.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그 동안 다들 애 쓰셨소.”
“감사합니다, 국왕전하.”
여러 나라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민호가 조약문 여러 장에 차례로 서명했다. 이민호가 서명할 자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로 위였다. 평화조약 중재인이라는 핑계로, 그리고 황제가 조약의 일방 당사자라는 이유로 이민호에게 첫 번째 자리를 양보했다.
이민호를 마지막으로 모든 참가국들의 군주가 직접, 혹은 대리인이 조약문에 서명을 마쳤다. 조약 당사국들이 서명을 마친 시점에 휴전하기로 약속했으므로 이로써 독일 내전은 공식적으로 완전히 종료됐다. 실제로 독일 내부에서는 이미 교전행위를 그치고 전후 복구사업이 한창이었다.
“황제폐하께서 뜻밖에 많은 양보를 해주셨소. 특별히 감사하다는 인사 말씀을 전해주시기 바라오.”
“국왕전하의 어지를 확실히 전해드리겠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독일 영주들이 예상보다 많은 양보를 해서 협상 타결이 가능했다. 협상 기간이 길어질수록 독일 전체가 점점 고산국화되는 과정을 뻔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각국 대표단이 협상을 질질 끌며 화려한 연회와 뇌물을 즐기는 기간을 고산국에서도 철저히 이용했다.
고산국은 난민 구호를 명분으로 독일 내륙에 도로와 철도를 사방으로 깔아놓았다. 병원은 제국 수도 프라하를 비롯한 모든 주요 영지에, 학교는 영주들이 원하는 영지마다 건립됐다. 몇몇 고산국 출신을 제외하곤 의료진과 교사들 대부분이 고산국에서 배우거나 현지에서 재교육을 받은 독일인들이었다. 환자든 학생이든, 병원 의사든 학교 선생이든 가난한 독일 실정에 맞춰 적게 내고 적게 받았다.
협상 기간 중에 황제는 눈을 뻔히 뜬 채 주권을 강탈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로와 철도를 경비한다는 명목으로 주둔한 고산국 해병대가 독일 내전에 참가할까봐 두려워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대표단에게 조속한 협상타결을 종용하는 것뿐이었다.
“조약문 부칙에서 조약 내용의 이행 여부에 대한 판단과 강제를 고산국 군주에게 맡긴다는 조문에 모든 참가국들이 찬동했소. 그러므로 이행 감시와 강제 문제는 고산국에서 확실히 보장해주겠다고 이 자리에서 약속하겠소.”
“공명정대한 고산국 국왕전하께 책임을 떠맡겨 송구스럽습니다.”
“평화를 위해서요. 그리고 개인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이 조약은 인류의 역사 발전에 큰 기여를 할 것이오. 물론 지금은 생존권에 가깝지만 말이오.”
여러 나라가 평화협정을 체결할 때 중재국에 영토 할양 등 적당한 이권을 넘기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민호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또한 스웨덴 영토로 넘어간 독일 북부 포메라니아 공작령 절반에 대한 영주 손실금을 고산국에서 지불했기에 빠른 협상 타결이 가능했다.
그러나 고산국 병력이 독일의 주요 거점을 이미 장악하고 있기에 아주 적은 군비를 들여 독일 전체를 정복한 셈이 됐다. 독일 영토 전 지역이 안정될 3년 이내에 철군한다고 약속했지만 그 때는 이미 독일 영토와 독일인들에게 영향력을 깊이 끼친 다음일 것이다. 지금도 독일 농민들은 세금만 빼앗아가고 용병들에게 무자비한 약탈을 허용한 황제와 영주들보다 고산국을 더 믿고 따랐다.
“도로에 철도에 병원에 학교까지! 프랑스에도 독일처럼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전하?”
“추기경! 무역과 구호사업을 위한 기반을 구축한 것뿐이오. 프랑스에서 공식 요청할 경우 도로와 철도 건설을 도와줄 용의가 있소.”
“그 약속 잊지 말아주십시오, 전하. 다만 저는 신성로마제국 황실에게 큰 힘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제국 황실에서도 이용할 생각을 했으니 독일 영토에 도로와 철도 건설을 용인한 것 아니겠소?”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독일에서 큰 인명피해가 났지만 고산국이 개입한 덕택에 사회간접자본이 짧은 기간에 깔리게 됐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중앙집권 제도를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리슐리외 추기경이 철도와 도로의 의미를 가장 먼저 파악했다.
“일단 국가재정의 규모가 커지고, 이어서 전쟁 규모가 커지겠습니다. 앞으로는 왕의 군대가 아니라 국가의 군대가 전쟁에 나설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예상하고 계시겠지만요.”
“대규모 전쟁을 피하기 위해 현재 단계에 머무르는 것은 인류에게 손해 아니겠소? 프랑스처럼 왕권이 강화되면 실보다 득이 많을 것이오.”
“물론입니다, 전하.”
그러나 영토 내 전반적인 경제력이 올라가고 국가재정과 전쟁 규모가 커진다는 바로 그 이유로 언젠가 왕권은 몰락하게 된다.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 강화로 인한 변화가 현재 프랑스에서는 비슷해 보여도 의미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굳이 둘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 잉글랜드에서 전국적인 우편제도가 이번 여름부터 실시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현재는 왕권 강화를 빙자해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것이 서유럽 국가들의 추세였다.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점차 강화되면서 조만간 유럽 각국에 왕의 나라가 아닌 국민의 국가, 유럽 학자들이 정의하는 이른바 민족국가가 성립될 것이다.
“국왕전하께서 스웨덴에 베푼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옥센셰르나 재상. 고산국이 베푼 은혜를 잊지 마시오. 내 후손들이 혹시나 실수하더라도 한 번쯤은 용서하고 도와주기 바라오.”
“전하의 영명한 후손들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쨌든 국왕전하의 뜻을 저희들의 후대에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그마한 국익이라도 챙기려고 서로 악다구니 쓰며 싸우는 국제사회에서 미리 은혜를 베풀어놓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큰 나라가 먼저 베풀어야 작은 나라들이 믿고 따르며, 더 큰 이익을 바치게 돼 있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원하는 올바른 제국의 전형이었고, 고대부터 현대까지 제국이라 불리는 나라가 국익을 증진하는 방법이었다.
기원전부터 시작되고 주변 지역으로 퍼진 중앙아시아 초원의 의형제 전통도 마찬가지였다. 큰 형님이 아우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것은 물론 아우의 헤진 신발을 고쳐주고 검에 묻은 핏자국까지 노예들을 시켜 다 닦아줘야 제대로 된 형님의 의무를 수행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야 아우들이 전쟁에서 큰 형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며, 큰 형님이 죽었을 때는 자연스럽게 순장 대열에 합류한다. <삼국지> 도원결의 장면에서 한 날 한 시에 죽는다는 맹세는 그래서 중앙아시아 초원의 순장 제도를 떠올리게 한다. 주군이 죽은 다음 은퇴해 주변 사람들의 경멸에도 대응하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지내는 게르만족 기사들도 비슷하다.
“국왕전하! 세자저하께서 영명하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째서 다른 나라와 국혼을 맺지 않으셨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야 결혼은 당사자끼리 합의가 돼야 하기 때문이오. 우리 세자가 어때 보이오?”
에스파냐는 고산국 건국 초기부터 우방이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철저한 족내혼을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고산국 왕실에서는 주걱턱 유전자의 유입이 걱정돼 국혼은 물론 다른 왕자나 공주와의 혼인도 추진하지 않았다. 맹방인 덴마크는 왕위 승계와 관련 없는 공주들과 고산국 왕자들이 결혼했다.
유럽에서 국혼, 즉 최소한 한 쪽이 왕위 승계자인 결혼은 두 나라의 동맹을 위해 흔히 맺어졌다. 그러나 프랑스와 에스파냐처럼 국혼을 하더라도 언제든 전쟁이 벌어질 수 있었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굳이 혼인을 통해 다른 나라에 영향력을 끼치려고 시도할 필요가 없을 뿐이었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졌으니 괜히 국혼으로 인해 사돈 국가에게 끌려 다닐 이유가 없었다.
“세자저하께서는 부왕을 닮아 앞으로 성군이 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히말라야 산맥의 10여 개 준봉을 정복하셨다고 들어서 조금 걱정됩니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의 준봉 11좌를 이미 정복했으니 굳이 다른 나라를 정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느냐, 세자?”
“그렇습니다, 아바마마. 고산국은 이미 세계 최강대국입니다. 아바마마의 후계자들은 더 이상 정복자라는 위명을 얻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전쟁을 통해 얻을 이익도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협상대표단은 세자의 발언으로 인해 큰 감동을 안고 돌아갔다. 적당히 앞선다면 다른 나라들과 연합해 어찌어찌 경쟁을 해보겠지만 고산국은 이미 한참을 앞서나갔다. 이럴 때는 경쟁보다는 차라리 친하게 지내는 편이 낫다는 것이 각국 대표단의 판단이었다.
============================ 작품 후기 ============================
30년 전쟁은 완전히 끝났습니다. 독일에 병력을 주둔시킨 것은 평화유지군 개념이지 정복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천도, 제국 선포, 명나라가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