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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013화 (962/1,000)

01013  105. 대국의 길  =========================================================================

멕시코를 비롯한 중미 지역을 매입한 이래 처음으로 이민호가 멕시코 시를 순시했다. 멕시코 시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협곡 지형이라 대기 순환에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텍스코코 호수에서 생긴 물안개와 집집마다 취사를 하면서 뿜어낸 연기가 합쳐져 산업시대도 아닌데 시내 전체에 짙은 스모그가 깔려 있었다. 멕시코 시의 무거운 아침을 본 이민호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런 곳에서 살다간 누구나 수명을 단축시킬 것이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어명을 받들어 멕시코 시를 대신할 다른 도시를 세울 지역을 찾아 헤맸으나 교통편이나 농업 기반, 식수 공급원과 평지 면적 등을 고려할 때 이곳보다 나은 곳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농포 선생 잘못은 아니오. 다만 이곳이 멕시코 지역의 경제 중심지가 되면서 꾸준히 유입될 인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할 것 같아 우려된다오.”

북미 몇몇 도시를 건설하고 운영하면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정문부를 멕시코 시에 파견했다. 그러나 정문부도 이 시대 사람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기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웠다.

만약 멕시코 시를 이대로 두고 텍스코코 호수의 물을 뺀다면 현대 들어서 도심과 근교 지역을 합해 인구 2천만의 괴물 도시로 성장한다. 이민호는 바로 그것이 두려웠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인구 50만 정도까지는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충분히 수용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것만으로도 멕시코 시는 세계적인 대도시 반열에 들게 될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도시 지역은 천만, 근교까지 2천만을 생각하고 있소.”

“헉!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 좁은 지역에 어찌 조선 인구보다 많은 인구를 수용하겠습니까?”

“인간의 수명이 짧아 농포 선생과 내기를 하지 못해서 안타깝소.”

아스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었으며 호반 도시인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미래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현대의 정보를 갖고 있었기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래를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출퇴근 시간마다 차량으로 미어터지고 매연에 시달려 평균 수명을 깎아먹고 빈민가마다 범죄가 창궐하게 된다.

“저는 미래를 대비해 여유 있게 넓은 도로를 닦았다고 착각했는데 전하께서 보시기에는 골목길 수준이겠습니다.”

“중앙대로는 12차선으로 충분히 넓소. 그러나 주요 도로 하나에만 교통량이 몰린다면 얼마 안 가 시내 전체가 자동차와 마차로 미어터질 것이오. 항상 교통량 분산을 염두에 두고 도시계획을 추진해야 하오. 그리고 근교 도시 지역을 잘 활용해 인구를 분산하는 일에 집중하시오.”

“어명을 받드옵니다, 전하. 하온데 당장 처리해야 할 시급한 문제가 있습니다. 군사 지휘권이 없는 시장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라 황공하옵게도 전하께 아뢰옵니다.”

정문부가 보고한 일은 이민호나 총리부에서도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바로 백인과 원주민들 사이의 해묵은 갈등 문제였다. 이것 때문에 새로운 정복자로 멕시코에 들어온 고산국 관료들이 인종 갈등 문제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혼혈이 아닌 같은 백인인데도 식민지에서 태어난 자들을 멸시하는 에스파냐 본국의 풍토 때문에 에스파냐 정복자의 후손들은 영토 매입 이후에도 대부분 멕시코에 남았다. 행정과 군사력을 중앙에서 파견된 고산국 관리와 군인들이 장악했으나, 문제는 정복자 후손들과 멕시코 원주민들 사이에 고착된 인종차별 관습이었다.

“그 문제로 농포 선생이 마음고생을 하셨겠소. 마침 아침부터 알현 신청이 잔뜩 들어와 있소.”

“예, 전하. 옛 본국인 에스파냐에서 인정한 하급 귀족도 아닌 주제에 기세가 아주 등등합니다. 대지주와 신부들이 기득권을 결코 놓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아주 혼쭐을 내주겠소.”

멕시코 시를 방문한 국왕에게 알현을 신청한 자들은 무수히 많았는데 대부분 환영 인사가 표면적인 목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왕에게 선물을 바치는 대신 특권을 부여받는 에스파냐의 관행에 익숙해진 백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그래서 대지주 다섯 명, 상인 세 명, 신부 네 명의 알현 신청을 받아들였다. 알현실에 입장한 신부들이 정문부 시장을 잠시 노려보더니 이민호에게 고했다.

“국왕전하! 이것은 문화 파괴 행위입니다. 전하께서 그토록 증오하시는 종교 탄압 행위이기도 합니다! 오래된 성당을 무너뜨리고 야만인 이교도의, 흠흠! 실례했습니다. 무의미한 옛 건축물을 다시 세우는 것은 재정의 낭비이며 문명세계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단순한 문화 복원 행위요. 몇몇 성당을 해체하는 대신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더 크고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있지 않소?”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더 쉽게 지배하기 위해 멕시코의 과거 유산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멕시코 시에 산재한 대형 건물과 종교 시설들은 대체로 아스텍이나 그 이전 시대의 건축물을 무너뜨린 다음 그 토대 위에 지었다. 여기에 로마가톨릭 쪽에서 적극 가담했다.

“자그마치 백년이나 된 아름다운 성당들이 해체되어 주변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문명국인 고산국이 멕시코를 인수하면서 이곳이 하느님의 나라와 더 가까워질 줄 알았는데 전혀 오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실망했소? 원주민들이 세운 몇몇 건축물은 천년이 넘었소.”

“도무지 전하와 말이 통하지 않는군요.”

“신부! 나는 가톨릭을 탄압하는 게 아니오.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식민 지배를 자행한 에스파냐의 국가적 범죄에 가담했던 가톨릭의 흔적을 지워주고 있는 거요.”

“으윽!”

고산국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모든 종교를 존중하는 나라이므로 여기서 이교도 야만인 소리가 나오면 신부의 일방적인 패배였다. 멕시코를 매입하면서 원주민들과 소수의 흑인 노예 후손들을 고산국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는 포고령을 내린 이후 신부들은 모든 인종을  동등하게 대해야 했다.

“몇몇 신부들은 중남미 원주민들과 흑인에게 인간의 영혼이 없기 때문에 노예로 부려도 된다고 했지요? 역대 교황 성하들도 노예매매 문제를 두고 오락가락했었지요.”

“오해입니다, 전하! 그건 옛날에 원주민들을 강제 노동에 종사시키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노예 매매를 통해 이득을 올리기 위해서이기도 했었소.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면서도 노예들이 혹사당하는 현실을 묵인하는 신부들의 행태가 놀라울 뿐이오.”

재미있는 것은 에스파냐가 남미 포토시 은광을 개발하고 멕시코에서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할 때는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흑인 노예가 매매될 때에는 흑인에게 영혼이 없다고 종교계 일부에서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황인종은 여기서 쏙 빠졌는데 이유는 명나라와 청나라 등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과학기술과 산업혁명에 바탕을 둔 군사력이 강해지자 상황이 돌변한다. 황인종도 노예는 아니지만 점차 정복당하면서, 백인에 의해 인종 차별과 재산 및 노동력 수탈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근세 아일랜드인과 핀란드인을 황인종으로 분류했으니 약한 민족은 언제든 차별과 수탈, 그리고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그대들은 무엇을 청원하러 왔소?”

“어? 전하. 그게, 그러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희들은 그저 국왕전하를 환영하러 온 것뿐입니다. 저희들의 충성심을 믿어주시옵소서.”

신부들이 호되게 당하는 장면을 지켜본 상인과 지주들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상인과 지주들의 알현 목적은 뻔했다.

“너희들이 감히 내 백성을 노예로 부리고 싶으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전하!”

“아직도 몇몇 농장이나 저택에 원주민과 흑인 노예들을 숨기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너희들이 국법에 의해 죽고 싶으냐?”

“하느님께 맹세코 그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 전하!”

“너도 신께 맹세하거라. 손을 뒤로 돌려 손가락 구부리지 말고.”

“하느님께 매, 맹세합니다!”

농장주가 본업인 대지주들의 맹세가 끝나자 이민호가 턱을 치켜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호위들에 이끌려 알현실에 허름한 옷을 입은 원주민들과 흑인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들의 정체를 확인한 대지주들의 얼굴이 노랗게 변하는 기적을 볼 수 있었다. 알현을 신청했던 멕시코의 모든 지주들이 노예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알현실에 입장한 지주들은 모두 노예를 숨겨놓고 있었다. 농장에 노예를 숨겨둔 사실이 확인된 자들만 알현실에 입장시켰기 때문이다.

“유예 기간을 충분히 줬는데 아직도 농장에 가두고 노예로 부리고 있었구나. 볼 것 없이 이 자들을 참형에 처한다.”

“으악! 억울합니다, 전하!”

병사들에게 끌려가면서 얼굴이 벌겋게 닳아 오른 농장주 하나가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래서 스스로를 변명할 기회를 줬다.

“뭐가 억울한데?”

“농장주인 제 입장에서 노동자를 고용하나 노예를 부리나 비슷한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렇지.”

바로 그것이 19세기 이후 점차 노예제가 사라진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리고 휴머니즘보다 자본주의적 이익이 역사를 진보시킨 사례 중 하나였다.

남북전쟁 이전에 미국 북부의 자본가들은 흑인 노예를 사서 일을 시키는 것보다 북유럽이나 동유럽에서 온 후발 이민자들을 비숙련 노동자로 고용하는 게 훨씬 이익이었다. 면화를 따서 유럽에 팔던 남부 농장주들도 노예나 고용된 노동자나 들어가는 비용은 비슷했다.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패한 이후 농장주들은 주로 멕시코에서 계절노동자를 고용해 면화농업을 이어갔다.

“저는 저 노예들, 아니 원주민들이 오갈 곳이 없는 빈민이라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계속 거둬준 것뿐입니다. 저도 국법에 따라 노예들을 내쳤었는데 저들이 불쌍하게 울부짖어 차마 내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호위! 저 아이의 등을 보여라.”

열 살쯤 된 헐벗은 아이는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 메스티소였다. 그러나 농장주나 그에게 고용된 백인의 자식임이 틀림없는데도 등짝에는 깊은 채찍 자국이 수십 개나 남아있었다.

이런 혼혈아들이 나중에 성년이 되면 노예에서 벗어나 백인 농장주의 고용인으로서 마름 역할을 하게 된다.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또 다른 지배층이 되는 셈이었다.

노예를 부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극형에 처할 중죄인데 미성년자를 노예로 부렸으니 농장주가 빠져나갈 일은 없었다. 그러나 농장주는 사형을 당하지 않을 유일한 탈출로를 발견했다.

“저 아이는 제 아들입니다! 훈육은 아버지의 고유한 권리입니다.”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제대로 먹이지도 않으면서 일만 시킨 주제에 친권을 논해? 데려가라!”

농장주들이 울부짖으며 알현실에서 끌려 나갔다. 상인들과 신부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민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신부님들은 멕시코 농장주들 사이에 만연한 범죄행위를 알고도 범죄자들을 전혀 교화하지 않았소. 이번 일을 교황청에 보고해서 교체를 요청하겠소.”

“국왕전하!”

농장주들과 결탁한 신부들을 알현실에서 내쫓았다. 알현실에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상인 세 명만 남았다.

“나는 차별도, 특권도 용납하지 않는다. 상공인들은 다른 자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범죄는 용서하지 않겠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상인들은 괜히 선물만 바치고 청원은 아예 하지도 못하고 돌아갔다. 상인들이 바라는 특권이란 개별 기업의 세금 인하, 국영기업의 하청 독점, 국가 기술의 특허 같은 부당한 것들뿐이었다. 상인 단체의 청원이 아닌 개인 단위의 청원은 들어줄 이유가 아예 없었다.

“농포 선생! 멕시코 시에서 아카풀코와 베라크루스로 연결된 도로를 아주 잘 닦았소. 횡단 철도뿐만 아니라 대륙 종단 철도가 곧 완공될 것이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거리가 200~300km나 되지만 이 시대에도 아카풀코는 태평양, 베라크루스는 대서양의 멕시코 만에 연한 멕시코 시의 외항이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연결점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멕시코 시가 한때 고산국의 새 왕도로 심각하게 고려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원주민 인구가 멕시코 시에 집중될 경우 고산국 전체가 멕시코 연방으로 변질될 걱정을 해야 했다. 국가가 충분히 안정된 다음이라면 걱정이 없겠지만 아직은 국초에 정한 인종간 인구 비율을 수도에서 먼저 지키는 게 나았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멕시코 고원지대의 인구가 늘어나면 텍사스나 다른 북미 방향으로 유출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큰 문제는 아니오. 그보다 멕시코 지역의 생산성을 높여 타 지역으로 이주할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게 우선이오.”

이민호는 현대 미국 국경에 설치된 전기 울타리를 넘다가 감전되고 리오그란데 강에서 빠져 죽는 멕시코인들을 떠올렸다. 미국인들은 주지사에게 통제받지 않는 사설 민병대를 조직해 국경을 넘는 멕시코인들을 사살하기도 했다.

<돈데 보이>라는 노래를 들으면 멕시코인이 아닌데도 눈물이 나왔다. 이민호는 백성들을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멕시코 고원은 풍요로우면서도 선선한 땅입니다. 저는 다른 지역보다 이곳이 특히 마음에 듭니다. 만약 멕시코 백성들이 부유해지지 않는다면 오로지 관료들의 무능력 때문일 것입니다.”

“맞소. 농포 선생의 가족 전체가 이주했던데, 아주 잘 생각하셨소.”

고산국 관료들이 거의 종신제로 일하기는 하나 이는 노동력 착취에 불과하고 세습은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정문부는 그 사실을 알고도 이주했기에 큰 상관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관심이 적었던 멕시코도 한 번 등장시켰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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