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10 105. 대국의 길 =========================================================================
마치 곰 같은 체구에 범 같은 강한 기도를 뿜어내는 자들이 당당히 걸어 대전에 들어섰다. 장군들과 호위들이 그들을 무섭게 노려보고 나서야 대전에 흐르는 공기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옥좌에 앉은 이민호는 모른 척하고 그저 흐뭇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이민호는 군주가 신하를 시험하듯이 신하들도 새로운 군주를 시험할 자격이 있다고 봤다. 세자에 대한 시험이 좋게 끝나서 다행이었다.
“백산 3부의 족장들이 국왕전하와 세자저하의 명을 받들어 알현하옵니다.”
“백두산과 우랄산맥에서 항상 수고가 많다. 혹시 걱정거리가 있느냐?”
건주여진이 팽창하던 시기에 백산 3부는 압록강부와 주셔리부, 너연부로 구성돼 있었다. 이 부족들은 건주여진에 의해 멸망할 위기에 처하면서 고산국에 투속했다가 지금은 유라시아 대륙의 산악지대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백두산과 우랄산맥을 지키는 백산 3부처럼 레인저 임무에 충실한 자들도 드물었다.
영국에서 레인저(ranger)는 축구클럽 QPR처럼 왕실 소유림의 감시원을 뜻한다. 오페라 <마탄의 사수>에서 영주가 뽑은 숲지기와 미국 국유림의 순찰대원들이 맡은 일과 같았다. 숲을 지키는 일과 사냥에 능숙하고 일정 지역에 한정해 치안을 유지하는 자들이 바로 레인저였다. 반면 텍사스 레인저는 원래 인종차별적 민병대로서 자발적으로 국경감시임무를 맡았다가 현대 들어서 텍사스 주 경찰에 편입됐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인구가 대폭 느는 데 비해 사냥 지역, 아니 순찰 지역은 그대로입니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맹수는 잡지 못하게 법이 되어 있어서 사냥감이 부족하옵니다.”
“봉록을 받으니 사냥을 하지 않더라도 수입이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물론 국왕전하의 은혜로 풍족하게 지내고 있습니다만, 사냥을 꾸준히 해야 사냥기술이 녹슬지 않습니다. 그리고 커나가는 아이들에게 사냥을 잘 가르쳐야 저희 후손들도 제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왕도가 북미로 이전한다는데 혹시 저희들이 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인구가 늘어나면서 더 많은 일을 달라고 요구하는 백성을 싫어할 군주는 없었다. 이민호가 흐뭇하게 웃으면서 세자에게 준비된 발언을 하도록 지시했다.
“백산 3부 족장들은 들어라! 국왕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세자가 대신 전하겠다. 북미 서부에 바위 산맥이라고 있다. 우랄산맥보다 조금 더 길고, 조금 더 높다.”
“오오!”
우랄산맥은 2,300km, 로키산맥은 5,000km 길이다. 표고는 천 미터와 2천 미터로 대략 두 배 차이였다. 우랄산맥은 루스 차르국과의 국경이고 로키산맥은 국내 영토 내부에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으나 고산국에 완전히 복속하지 않은 북미 원주민 부족들이 산기슭에 거주하고 있어서 로키산맥 쪽이 좀 더 위험했다.
“백산 3부의 사냥꾼들에게 물어서 희망자에 한해 가족 혹은 마을 단위로 바위 산맥으로 옮기도록 해라. 너희들이 산맥 지형을 살펴본 다음 교통이 편리한 지역 몇 곳을 고르면 작은 도시들을 지어줄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 산맥 남쪽 끝에 새 왕도가 있느니라. 유사시 왕도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긴다.”
“오! 부족의 영광이옵니다, 전하!”
군주가 세자, 혹은 섭정 역할을 맡은 대신과 같은 자리에 있을 경우, 세자나 대신이 신하에게 말을 하더라도 신하들은 오로지 군주에게 대답해야 한다. 실록을 보면 이런 예법이 확실히 지켜졌다. 백산 3부 여진족들도 고산국의 백성이 된 지 오래라 궁중 예법에도 익숙해졌다.
“북미에서는 일반 백성들도 화승총이 아닌 단발총을 갖고 있으니 너희들은 연발 사냥총을 휴대해야 할 것이다. 되도록 원주민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말고 잘 돌보도록 해라. 그리고 곰과 대형 고양이과 동물, 회색늑대가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굳이 잡지 말도록 해라.”
“예, 전하. 생태계가 유지되도록 잘 보호하고 원주민들을 선도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백산 3부 족장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웃더니 얼른 절을 했다. 로키산맥 주변에 아직 고산국의 통치권에 들어오지 않은 호전적인 원주민 부족들이 몇 남아있고, 이들을 제압하라는 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순수한 전투 병력이 아니며 소수 단위로 움직이는 북미 탐사전단에게 강력한 지원군이 생긴 셈이었다.
백산 3부 족장들이 거대한 호랑이 가죽 몇 장과 웅담, 녹용, 산삼을 바쳤다. 그리고 신품 6연발 사냥총을 하사품으로 받아들고 희희낙락하며 돌아갔다.
“맹수 사냥꾼들에게 새로운 군주로 인정받은 기분이 어떠하냐?”
“아바마마! 저들을 히말라야산맥에 데리고 가서 등반 훈련 좀 시켜도 되겠습니까?”
“아서라. 저들도 세자가 온실 속에서 자란 줄로 착각했다가 이번에 많이 놀랐을 것이다.”
히말라야 11봉을 등정한 세자보다 강인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산악지대 감시원으로서 백산 3부 사냥꾼만한 자들도 드물었다. 단 세 명이서 창으로 호랑이를 찔러 잡는 사냥꾼들은 전 세계적으로 봐도 결코 흔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조선 강원도의 기마사냥꾼들이 아직은 더 우수했고 언제든 정예 군인으로 전용 가능하다는 높은 평가를 조선 조정으로부터 받았다. 함경도 사냥꾼들은 임진왜란 이후 활 대신 조총을 쏘는 포수로 전환 중인데, 바로 이들이 실제 역사에서 러시아 코사크들을 전멸시킨 나선정벌의 주력이었다.
2차 나선정벌을 이끈 신흠 장군의 <북정일기>에 청군 소속 영고탑 포수들 100여 명이 시범 사격을 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과녁을 맞힌 자가 약간 있었다.’고 평가했다. 반면에 조선 포수들에게 조총 시범 사격을 해달라고 요청한 청나라 장수들마다 그 날 저녁에 소를 잡아 포수들을 대접했다.
그러나 백산 3부 사냥꾼들이 수적으로 압도했고 사냥범위가 훨씬 더 넓으므로 조만간 실력으로도 조선 사냥꾼들보다 우위에 설 것으로 기대했다. 백성들이 특기를 잘 살릴 수 있도록 재배치를 하는 이민호와 세자의 기분도 몹시 좋았다.
“아바마마. 백산 3부가 아무리 뛰어난 사냥꾼들이더라도 북미 탐사전단에서 최소 몇 달은 훈련을 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서라. 탐사전단을 훈련시킨 자들이다. 바위 산맥과 원주민 정보만 제공해주면 충분하다.”
고산국 영토 내에는 세계 최고라고 할 만한 민족 집단들이 꽤 흔했다. 조선 출신은 활과 총을 잘 쏘고 여진과 몽골은 말을 잘 탔다. 남태평양 섬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거대한 체격과 힘으로 유명했다. 과학기술은 이민호를 비롯한 왕실이 세계 최고였다.
얼마 전 왕도에 들렀다가 파푸아 섬에 간 마오리족 전사들이 원주민 마을마다 돌아다녔다. 그리고 아직도 식인 습성을 버리지 못한 자들을 백이면 백 다 색출하고 있다고 한다.
특전여단 장교들이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면 마오리족 전사들이 척 보면 안다고 해서 배우길 포기했다. 마나가 어쩌고 붉은 눈이 어쩌고 설명하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뿐이었다. 마나에 민감한, 즉 사람들 사이의 권력관계를 잘 파악하는 마오리족 전사들답게 식인행위를 하고도 마을 주민들로부터 비호를 받는 자를 쉽게 파악한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조선에서 온돌이 크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 중 고산국식 온수 온돌이 절반이며, 덕택에 이층과 삼층 건물이 예전보다 흔해졌습니다. 한성에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건물들도 몇 채 들어섰습니다.”
“오호! 좋은 일이야.”
온돌은 고구려 벽화에도 나오고 발해 유적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달리 스팀 난방처럼 벽에 붙어 열기가 방의 일부만 통과하도록 돌과 진흙으로 쌓은 반 온돌이었다.
조선에서 임진왜란 시기만 해도 구들장이 이어진 온돌 시설이 갖춰진 방이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겨울이 길어지고 추워지면서 중부와 남부 지방에도 온돌 시설이 급증했다.
“온수 온돌이 더 따뜻하고 안전하긴 한데 장작이나 나무를 때는 방식이라 열효율이 좋지 못합니다.”
“그래도 어쩌겠니? 석유나 석탄을 연료로 쓰기에는 조선에 유통망이 갖춰지지 않았는데.”
아이슬란드는 넘쳐나는 지열과 온수, 전기를 사용하므로 이미 지상낙원으로 변모한 지 오래였다. 루스 차르국과 토르구트는 석유난로를, 스웨덴과 덴마크는 석탄난로를 난방에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전과 탄광이 소비지와 가까이 있어야 난방 연료로써 활용이 가능했다. 조선에서는 석유가 나지 않고 탄광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워 난로 대신 온돌과 화로를 쓰고 있었다.
“조선 왕궁에서 석유를 난방연료로 쓰고 있으니 석유 공급을 확대하면 최소한 한성의 수요 정도는 감당이 가능합니다.”
“조선에 뭐 하나 보급하려면 양반들이 워낙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말이야. 우리가 석유와 난방장치를 못 팔아서 안달하는 것처럼 비쳐질 필요가 없다.”
건국 초부터 조선 양반들이 고산국을 무시한 탓에 이민호도 조선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고산국 백성들에게도 조선은 현대 한국이 가난한 사고뭉치로 여기는 북한보다야 이미지가 나쁘지 않더라도 딱히 좋지도 않았다. 제사나 명절에 조선을 방문하는 외에는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재 조선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평온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전쟁도 없고 가난도 없고, 심지어 천민 노비들도 거의 사라졌다. 주로 빈민과 천민들 위주로 고산국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조선 내 노비 가격이 급등했다. 또한 자작농이 생산성이 높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굳이 노비를 부릴 필요가 없게 됐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조선도 요즘 추워져서 지은이가 추위에 고생하는 백성들을 몹시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끙!”
세자가 딸 바보인 이민호를 적절하게 공략해 석유는 아니고 결국 연탄과 이를 이용한 각종 난방장치를 조선에 공급하기로 했다. 명나라와 필리핀에서 생산한 무연탄을 상하이에 보내 연탄을 제조하고 이를 북경과 황하 이북 지역에 공급하고 있었다. 세자가 주도해 한성과 그 이북 추운 지방에 연탄을 공급하는 일을 조선 조정과 협의하기로 했다.
국제 석탄 시세가 워낙 낮아서 조선인들을 고용해 직접 석탄을 캐는 것은 채산성이 맞지 않았다. 고산국처럼 기계를 동원하거나 노천광산이 개발되지 않는 이상 적정한 석탄 값을 책정하기 곤란했다. 예전에 고을 수령들이 부역을 동원해 철광석을 싸게 공급해준 사례가 있었지만 이것은 권력형 비리나 다름없어서 예외로 두었다. 그래서 연탄은 조선에서 무조건 수입하도록 했다.
몽골에는 연탄을, 시베리아 여러 소도시에는 난방용 석유를 공급했다. 몽골에는 노천탄광이 많아 연료 수급이 쉬운 편이었다. 시베리아 원주민 마을에는 기차를 통해 석유를 싸게 공급하려 했으나, 집 근처에서 나무를 베어 때는 편이 훨씬 싸고 효율적이었다.
“뭐, 이 정도면 어디서건 얼어 죽지는 않겠지. 난 할 일을 다 했다.”
“아바마마. 조선에서는 아국을 따뜻한 남쪽 나라라고 부릅니다.”
“제비가 중국 강남이 아니라 이곳과 필리핀 등에서 겨울을 난다는 사실이 조선에도 알려졌으니까.”
“유럽에서는 아국을 따뜻한 동쪽 나라라고 합니다. 날씨가 따뜻한 게 아니라 난방용 석유와 방한모피, 식량을 싸게 팔아주는 좋은 나라라서 그렇게 부릅니다.”
“무역일 뿐이다.”
이민호는 세자의 칭찬에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무척 기뻤다. 한국 스포츠 스타가 잘할 때마다 외국 웹 번역 사이트로 달려가던 이민호였다. 백성들은 물론 외국인들이 내리는 평가에도 관심이 많았다.
“생각해보니 대한제국처럼 굳이 한자로 국명을 지을 이유가 없습니다. 외국의 평가를 존중해 따뜻한 제국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정확히는 따뜻하게 해주는 제국입니다.”
“요즘 한창 외국에 난방기구와 연료를 팔고 있어서 난방제국이라고 오인될까 무섭다.”
이름 짓는 일에 유독 약한 이민호와 세자의 고민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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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항상 고민입니다만, 제목은 그런 뜻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