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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005화 (954/1,000)

01005  105. 대국의 길  =========================================================================

“처음 뵙겠습니다, 국왕전하.”

“오! 이렇게 젊으면서도 수염을 멋지게 기른 분이라면 돈 페르난도가 틀림없겠지요?”

“하하!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20대 초반의 추기경 왕자이며 톨레도 대주교인 에스파냐의 돈 페르난도는 사촌 페르디난트 헝가리 국왕과 같은 이름이었다. 돈 페르난도는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여동생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 펠리페는 나중에 펠리페 4세가 되고, 누나 안네는 현재 프랑스 왕비였다.

앞으로 더 많은 작위를 가지게 될지 모를 젊은 왕자가 이민호에게 친한 척 말을 걸었다. 그는 에스파냐 사절단 대표로 고산국을 방문했다.

“고산국이 왕도를 조만간 북미 서해안으로 옮긴다고 들었습니다. 이왕이면 유럽에 가까운 대서양 연안으로 옮기시면 더 좋을 걸 그랬습니다.”

“유럽 군주들이 불편해하실 것 같아서 말이오. 그리고 고산국 영토는 태평양을 중심으로 퍼져 있기 때문이오.”

대답을 마친 이민호가 씩 웃었다. 동맹인 덴마크라면 몰라도 다른 나라들은, 심지어 고산국에서 후원해주고 있는 스웨덴마저도 고산국 왕도가 북미 동해안으로 옮기기를 바라지 않았다. 수도의 위치로 대충이나마 국가의 장기 전략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만약 고산국이 새원산이나 새강릉으로 수도를 이전한다면 유럽 군주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잘 것이다.

현대 미국이 태평양 국가의 일원이라고 선언한 것은 동맹국들에 대한 립 서비스에 불과했다. 러시아가 태평양 국가라고 자칭한 것은 우호가 아니라 협박이 목적이었다. 태평양 연안 지역의 경제규모가 커진 21세기에도 미국과 러시아는 여전히 유럽 가까운 곳에 수도를 두는 것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이익이었다.

“내가 여러분을 한 자리에 부른 이유가 있소. 불편하더라도 참으시길 바라오.”

“험! 험!”

“자! 자리를 옮깁시다.”

대전과 연결된 접견실에 원탁이 준비돼 있었다. 그러나 평등하라고 일부러 원탁에 앉혔던 일명 원탁의 기사들 사이에서도 위아래가 있었듯이 이민호와 가까운 자리가 더 상석이었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는 프랑스 수석국무대신 리슐리외 추기경을 왼쪽에, 커다란 턱을 수염으로 적당히 가린 헝가리 국왕 페르디난트를 오른쪽에 앉혔다. 자리를 두고 잠시 팽팽하게 신경전이 벌어졌으나 이민호가 입을 열자 순간 침묵이 찾아들었다.

“추기경 예하. 프랑스에서 군을 일으킨다고 들었소.”

“예, 국왕전하. 하이브론 동맹의 일원으로서 프랑스가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입니다.”

스웨덴이 주도하던 독일 내 신교도 제후 동맹인 하이브론에 프랑스가 가담했다. 프랑스는 외국이고 가톨릭 국가였음에도 신교도 제후들이 열렬히 환영했다. 이제 독일 내전에서 종교는 상관이 없었다.

“프랑스가 움직이면 에스파냐에서 참전할지도 모르오.”

“이미 각오한 일입니다, 전하.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이 프랑스를 세 방향에서 포위하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습니다. 독일에서 전쟁이 마무리되면 조만간 합스부르크 가문이 프랑스의 목줄을 죄어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계신 에스파냐의 추기경 왕자님이 지휘하는 2만에 가까운 대군이 이미 브뤼셀에 주둔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군 공격의 예봉이 남 네덜란드가 아닌 독일로 향한다고 선언했다. 스웨덴은 영토 확장이라는 목적이었지만 프랑스는 국가 생존을 위해 이미 국제전으로 비화한 독일 내전에 개입할 태세였다.

남쪽 에스파냐와 동쪽 신성로마제국 중 하나가 무너지지 않을 경우 프랑스는 계속해서 선제적 방어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리슐리외 추기경이 주장했다. 물론 프랑스는 에스파냐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네덜란드를 지원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솔직히 말씀해주셔서 고맙소. 그럼 현재 독일의 상태를 봅시다. 세자가 보고해라.”

“예, 아바마마.”

원탁에 앉은 자들의 칭호가 다들 어마어마하게 길었기 때문에 세자가 잠시 목례만 한 다음 발표를 시작했다. 즉위를 겨우 몇 년 앞둔 고산국 세자에게 예법을 논할 만큼 간 큰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독일은 오랜 전쟁으로 인해 몹시 피폐해졌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과 현재를 비교하면 인구가 최소 3할이나 줄었습니다. 나머지도 간신히 생존할 뿐,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활동은 마비 단계를 넘어 거의 붕괴됐습니다.”

“으음!”

“고산국에서 활용하는 경제력 지수라는 게 있는데, 현재 독일은 전쟁 전에 비해 자그마치 4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대로 전쟁이 지속된다면 독일 땅은 조만간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헝가리 국왕 페르디난트가 물었다.

“전하. 어디까지나 독일 내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국외자인 고산국에서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연유를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만약 고산국이 독일 땅에 군사력을 투입해 전쟁을 그치게 할 경우, 독일 내에서 내 인기가 매우 높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오. 이 기회에 황제 선거에 나서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페르디난트 국왕 생각은 어떻소? 반대파 선제후들을 제거해 내 지지자로 교체시키면 가능할 것도 같단 말이오.”

“안 됩니다, 전하!”

뜻밖에 고함을 지른 자는 페르디난트가 아니라 리슐리외 추기경이었다. 이 시기에는 프랑스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 폴란드 국왕 선거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들어서 아실 것이오.”

“휴우~ 알겠습니다. 국왕전하의 뜻이 그렇다면 프랑스는 포기하겠습니다. 고산국 국왕전하는 돈의 힘 말고도 막강한 군사력을 쥐고 계십니다. 우리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다른 가문으로 바뀌기만 한다면 무조건 좋습니다.”

“저희 스웨덴도 북부 영토만 보장해준다면 찬성입니다.”

“험! 험! 그럼 본격적으로 선제후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여볼까요?”

합스부르크 가문은 결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포기할 리가 없었다. 바로 눈앞에 헝가리 국왕 페르디난트도 황제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온 사람이었다.

“전하! 도대체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평화요. 독일인들의 생명이오.”

이해하지 못하는 페르디난트의 시선을 외면하고 세자를 불렀다.

“여러분들이 독일의 현재 상황에 동의하는 것 같으니 세자는 앞으로의 전망을 알려드리도록 해라.”

“예, 아바마마.”

세자가 독일 내전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한 보고서를 참석자들에게 나눠줬다.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 이제는 신교도 연맹이 아닌 반 합스부르크 진영에서 스웨덴과 프랑스, 네덜란드, 기타 독일의 제후국이 참전한 전쟁의 시뮬레이션이었다.

전선이 전 유럽으로 확대되면서 15년이 넘는 장기전의 결과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파멸이었다. 참석자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제국 황실에서 제대로 세금을 걷지 못한 기간이 이미 10년이 넘었소. 황실에 자금이 바닥났으니 현지 보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럼 용병 부대를 소집할 때마다 진격로 인근의 마을들이 모조리 초토화될 것이오.”

“인정합니다, 전하. 그래서 에스파냐에서 보낼 원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에스파냐 역시 자금 사정이 안 좋습니다.”

이민호가 페르디난트를 압박하자 순순히 인정했다. 에스파냐의 자금 사정은 필리핀과 시칠리아를 판매하고 싶다는 의사를 고산국 왕실에 전해온 것으로 이미 알아봤다. 그러나 독일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토 매매 협상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보고서가 참으로 현실적입니다. 특히 에스파냐군이 남프랑스를 침공하다가 열악한 보급 사정으로 인해 자체 붕괴되는 장면이 몹시 인상적입니다. 에스파냐군의 보급에 정치권과 상인이 결탁한 부패 문제가 개입되니까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합니다. 무척 현실적인 예측입니다.”

프랑스 국왕의 직위인 프랑스군 총사령관의 대리이며 군사 전문가이기도 한 리슐리외 추기경이 실실 웃었다. 실제로 30년 전쟁 기간 막바지에 벌어진 일이었다.

보급 문제로 부대 전체가 자체 붕괴하는 일은 역사상 흔히 벌어졌다. 제1차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에서 요하로 진격한 수나라 육군 30만 대군이 장마를 만나는 바람에 보급이 마비돼 전투 하나 없이 붕괴된 일이 있었다.

“덴마크나 다른 곳에서 고산국 군대가 어떻게 전투를 진행했는지 보내주신 영화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고산국이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왕전하께서는 어째서 독일의 내정에 간섭하려 하십니까?”

1634년의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제국군과 에스파냐군이 스웨덴과 신교도군을 상대로 승리한 다음에는 페르디난트가 독일 신교도 제후들을 상대로 고압적인 자세를 갖춘다. 그러나 지금은 제국군이 한참 불리한데다가 프랑스가 참전을 선언하자 페르디난트는 몹시 위축돼 있었다.

“제국이 독일과 주변 지역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오.”

“전쟁과 내전이란 항상 벌어질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그런 일로 고산국이 외국에 개입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참! 에이레를 예외로 둬야겠군요.”

이민호가 페르디난트에게 말 한 번 잘했다는 식으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지금까지 고산국에서 독일 내륙지방에 식량 보급을 추진했지만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독일인들 절반이 굶어죽고 병들어 죽기 전에 고산국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소. 전쟁이니 내전이니 하는 것은 당신들 왕이나 귀족들이 알아서 할 일이오. 그러나 양쪽 진영의 용병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약탈하고, 농사를 못 짓게 해서 굶겨 죽이고, 급기야 사람이 사람을 먹는 현재 독일 상황은 지옥이나 다름없단 말이오. 신이 독일인들을 다 죽이라 명했소? 아니면 예수님이 이런 상황을 기뻐하겠소!”

“끄응!”

“내겐 종교적 의무가 없소. 하지만 인간으로서 양심을 가진 나는 독일 땅을 지옥에서 건져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됐소. 이는 에이레를 기근과 학살에서 건져낸 것과 전혀 다를 게 없소. 독립전쟁인 에이레와 달리 이번에는 고산국이 직접 군대를 파견해서 독일의 상황을 바로잡을 것이오. 상대가 신교도든 구교도든 구별하지 않겠소.”

“진심이시군요. 실로 두렵습니다.”

헝가리 왕 페르디난트가 간신히 대꾸했고, 프랑스의 리슐리외와 스웨덴의 옥센셰르나는 거의 숨을 멈췄다. 덴마크 크리스티안 왕자와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왕자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눈만 껌뻑거렸다.

“그러니까 고산국의 개입 명분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죽어가는 독일인들을 살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요. 고산국을 침공한 적국을 물리치는 만큼 중요한 이유요.”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현대 민주주의 기본 이념이 신분제가 고착된 이 시대에 통할 리가 만무했다. 왕과 귀족들은 영지민과 농노를 재산으로 여기면서, 이번 전쟁으로 인해 농노들이 죽거나 도주하면 똑같은 재산상의 손해로 분류하고 있었다.

“그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개입하는 거군요.”

“페르난도 왕자! 나는 독일에서 이번 일로 어떤 이익도 취하지 않겠소. 독일에서 전쟁이 그쳐서 매년 백만 원씩 들어가던 난민구호비를 줄이게 된다면 분명 이득이긴 하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이왕 빼든 칼, 독일 외에 나머지 나라들에게도 경고했다.

“프랑스와 스웨덴은 병력을 동원하지 말고 잠시 기다려주시오.”

“독일 땅에 프랑스 병력을 투입하면 바로 전멸시키겠다는 뜻이군요. 국왕전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눈치 빠른 리슐리외 추기경이 먼저 무력 개입 포기를 선언했다. 스웨덴은 당장 병력이 없이 독일 북부 해안지방만 지키고 있으므로 당연히 찬성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는 나에게 대답을 해야 할 것이오. 독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신성로마제국이므로 먼저 그 책임을 물어야겠소.”

“제국 황실이 그 책임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쟁을 멈추려 해도 신교도 제후들이나 다른 나라에서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 동안에 제국 황실을 고산국에서 지켜주겠소. 대신 제국 황실에서 신구를 가리지 않은 독일 제후들, 그리고 스웨덴과 프랑스 대표를 협상 탁자에 불러들이시오.”

“고민을 해보겠습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페르디난트를 이민호가 쏘아봤다.

“지금 고민을 할 때요? 지금 이 순간에도 독일인들이 죽어가고 있소. 나는 지난 15년 동안 참아왔으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소.”

“제국 황실에도 좋은 기회이니 고산국 국왕전하의 뜻을 받들어 협상을 진행하겠습니다.”

종교적으로 고지식하면서도 독일에서 전쟁을 종식시킬 평화 협상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페르디난트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단계에서 평화 협상을 진행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앞으로도 계속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럴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의 포위망에서 벗어나겠다는 프랑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지 않습니까?”

“평화 협상을 통해서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소. 그건 프랑스에서 찾아야 할 것이오.”

“독일 서부의 제후들 몇을 설득해야겠군요. 프랑스 영토가 아니면서도 프랑스를 위해 싸우게 만들어야겠습니다. 아! 네덜란드도 있군요.”

이민호가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평화협상의 밑그림은 이미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약 내용이 이민호 입을 통해 선언됐다.

“개인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하시오. 이 조건만 수락된다면 고산국은 평화 협상에 개입하지 않겠소.”

지금까지는 군주나 영주의 종교를 그 신민들이 따라야 하는 것이 법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군주들도 뼈저리게 깨우치고 있었다. 반란이 일어나면 그 지역에서 수입을 얻을 수 없고, 오히려 반란 진압에 드는 전비가 그 영지의 몇 년치 수입을 초과하므로 심각하게 고려해 볼 만한 사항이었다.

“내년 1월 1일부터 슈테틴에서 프라하까지 도로를 건설하고, 프라하 황궁을 고산국이 보호하겠소. 여러분이 어디서건 모여서 평화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시오.”

고산국이 적극 개입해, 사실상 군사력으로 위협해 관계국들에게 평화 협상을 강권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15년 앞당겨질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으로 전쟁에 지친 군주들, 그리고 영주들에게 이는 좋은 기회였다. 속마음이 어떻든 일단은 평화 협상을 진행하겠다고 이민호에게 약속했다.

이민호는 신성로마제국보다는 프랑스가 더 걱정됐다. 그래서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따로 물었다.

“독일과 에스파냐가 어려우니 앞으로 유럽에서 프랑스가 주도권을 쥘 것이오. 이번 평화협상에 너무 불만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오.”

“오해하신 모양인데 프랑스는 야만적인 침략 국가가 아닙니다. 전쟁은 최후의 선택이었고 사실 아직 준비도 되지 않습니다. 전쟁 없이 해결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지루하게 이어질 평화 협상에서 앞으로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고산국이 군사력을 투입한 이상, 어떻게든 합의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협상 결과가 적당하다면 협상 참가자들에게 준수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현대 유엔과 같은 고산국의 역할이었다.

“참! 전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악당이 아닙니다.”

“아, 하하하! 물론이오. 소설은 가상의 이야기일 뿐이오. 그리고 <삼총사>라는 소설에 추기경의 실명이 등장하지는 않았잖소?”

“아르망 장 뒤 플레시가 아니라 클레시라고 했지만 누가 봐도 저를 본 딴 인물입니다. 의도적인지 몰라도 책에 플레시라고 된 오타가 몇 군데 있더군요.”

“소설이니 잊어버리시오. 그 소설을 쓴 소설가에게 꿀밤 한 대를 때려주겠소.”

“국왕전하를 믿겠습니다.”

허허 웃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등을 두들겨서 보냈다. 그리고 이민호가 주먹을 쥐어 자기 머리를 콩 때렸다. 약속은 지켜졌다.

평화 협상을 주선하면서 얻어먹을 것도 없는데 오히려 꿀밤 한 대만 손해 봤다. 교전 당사국 사이에서 평화 교섭을 주선해 영토 일부를 할양 받는 것은 근대에 흔한 일이었으나 이민호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

현대 강대국들이 표면적으로 아무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교전 당사자들을 강요해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것이 강대국의 국익에 합치하기 때문이다. 이미 강대국으로 성장한 고산국 입장에서는 다른 지역의 현상 유지가 최선의 이익이었다.

============================ 작품 후기 ============================

30년 전쟁을 반토막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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