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04 105. 대국의 길 =========================================================================
국가를 표방한 온갖 곳에서 사절단을 보내 반란 진압 성공을 축하했다. 축하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 할 일임에도 다른 나라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산국 같은 신흥 강대국과 우호를 다질 좋은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약소국들에게 고산국이 좋은 점은 그 강한 힘을 갖고도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교역을 추구한다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지역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약소국을 적당히 보호해준다는 점도 다른 강대국에서 보기 어려웠다. 현대에서는 상식이겠지만 지금은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시대였다. 사실 현대에도 강한 국가가 특권을 누리며 더 많이 갖는다.
거대한 기둥들이 쭉 늘어선 대전에서 이민호와 혜영, 그리고 세자 부부가 여러 나라 사절단들을 차례로 접견했다.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이어 이번에는 무굴제국과 남인도 여러 나라, 그리고 실론 섬의 왕국들에서 보낸 사절단들이 입장했다.
“인도에 나라가 참으로 많구나.”
“인도 역사를 공부하다가 포기했습니다. 나라의 흥망성쇠와 국경선이 참으로 변화무쌍한 곳입니다.”
무굴제국이 아직 인도 아대륙 남단까지 정복하지 못하고 데칸 고원을 야금야금 집어먹던 시기였다. 사실 무굴제국이 1857년 영국에게 멸망할 때까지 인도 남단과 실론을 끝내 정복하지 못한다. 현재 인도 남쪽에는 나야크 왕국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토후국들이 있었다.
큰 나라인 나야크 왕국은 단독으로, 작은 토후국들은 포르투갈의 도움을 받아 고산국에 사절을 보냈다. 실론 섬 한 곳에서만도 다섯 나라가 사절단을 보냈는데 일부는 독립국이었고, 자프나 왕국 같으면 1619년 포르투갈에게 멸망해 현재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다.
“변변찮은 일이었는데 걱정해주시고 이렇게 방문까지 해주셔서 고맙소이다. 사절단 여러분과 군주께 드릴 선물을 마련해놓았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소. 그리고 예조에서 무역협상을 준비하고 있으니 찬찬히 협의를 하시기 바라오.”
알현에 참가한 사절단들에게서 이민호와 세자가 인사만 받고 실무 협의는 예조에 떠넘겼다. 수마트라와 자바 섬의 도시국가들을 합치니 현대 유엔 가입국보다 수가 많은 것 같았다.
사절단의 인사를 받는 일만으로도 점점 지쳐 가는데 눈에 익은 복식을 한 자들이 나타났다. 사절단 대표의 얼굴을 확인한 이민호가 깜짝 놀랐다.
“오리 대감께서 오셨군요. 연세가 계신데 어떻게......”
“어이쿠! 용상에 앉아 계십시오, 전하. 먼저 절을 올리겠습니다.”
영의정을 수십 년째 역임했던 이원익이 조선 사절단의 대표로 왕궁을 방문했다. 올해 나이가 86세인 이원익을 고산국에 사절단으로 보낸 것은 거의 노인 학대 수준이었다.
이민호가 아무리 뻔뻔하다 해도 30살이나 연장자이며 한때 이민호의 상관이었던 이원익에게 절을 받을 배짱은 없었다. 게다가 대전에는 해군 상원수 이순신이 고개를 돌리고 연신 헛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실제 역사와 같이 이순신의 서녀와 이원익의 외서손이 결혼해 두 사람은 어찌 됐든 사돈간이었다. 이민호는 이순신을 몇 년 더 현직에 앉혀놔도 될 것 같아 기뻤고, 그래서 이순신이 헛기침을 해댄 것이었다.
“오리 대감! 제가 앉아서 절을 받기 민망합니다. 간단히 서로 읍을 하시지요.”
“하오나 전하! 저는 축하 사절단의 일원으로 왔습니다. 제 임무를 수행하도록 윤허해주십시오.”
옥좌에 앉아 있기가 매우 불편했지만 결국 이원익의 절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조선에서 온 사절들은 고산국을 낮춰 봐서 조금 뻣뻣한 감이 있었는데 이원익은 현실 감각이 매우 뛰어난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이용해 국익을 챙길 수완도 있는 사람이었다.
“조선에서 현재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온지요, 전하?”
“조선에 고향을 둔 이들이 많아 조선 소식은 꾸준히 듣고 있습니다.”
“조선국이 국초부터 명나라를 대국으로 모신 것은 군사력 차이도 있지만 무엇보다 문화적 역량을 배우고 따르고자 함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산국이 비록 유교에서 벗어났다 하나 조선과 같은 뿌리를 가진 나라입니다.”
“고산국은 조선에서 나와서 건국한 나라이지요.”
“연원이 그렇다 하나 지금은 고산국이 조선보다 훨씬 큰 나라이며 배울 점도 많은 나라입니다. 예전부터 양반들이 애써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전하께서 지금까지 음양으로 조선을 도와주신 은혜는 실로 백골난망이옵니다.”
일반적인 조선 양반들과 달리 매우 현실적인 이원익의 언사에 오히려 이민호가 당황할 지경이었다. 이원익이 고산국에서 뭔가 얻으려 한다는 의도를 파악했음에도 이 정도면 거절하기 쉽지 않게 됐다. 예의를 숭상한다고 표방하는 조선 조정에서 굳이 이원익을 사절단 대표로 발탁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조선에서 우역(牛疫)이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단 몇 달 만에 전국적으로 소가 멸종할 지경에 처했습니다. 기계로 땅을 일구는 고산국과 달리 조선에서는 소로 쟁기질을 하는데 내년 봄에 어떻게 농사를 지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합니다.”
“소 돌림병이란 말이지요? 혹시 돼지나 염소 같은 발굽을 두 개 가진 다른 동물들 사이에서도 돌림병이 돕니까?”
조선에서 구제역은 원래 역사에서는 1636년, 병자호란 넉 달 전에 크게 창궐해서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혔다. 고산국이 등장하면서 정치, 경제적 변화가 심해 3년 일찍 구제역이 퍼진 셈이 됐다.
“그건 아닙니다. 유독 소만 병에 걸려 픽픽 쓰러져 죽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길도 멀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아 내년 농사는 아예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안 되지요. 세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양위할 때가 다가오고 있으므로 이민호가 세자에게 판단을 맡기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러나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그것도 외국 사절들 앞에서 세자에게 의견을 구한다는 것은, 이미 고산국 정부 차원에서 대책이 마련됐다는 뜻이었다.
“우역은 소끼리 전염되는 병이지만 사람이나 다른 동물을 경위해 퍼지기도 합니다. 원임 정승께서 조선에서 소가 멸종 단계라고 하셨으니 백신을 접종하는 것은 이미 늦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럼 소를 새로 구해야겠는데 어디에 있는 소가 조선 농경에 가장 적합하겠느냐?”
“북미와 호주에서는 주로 육우와 젖소를 사육하고 있습니다. 역우로 사용할 소라면 몽골에서 방목하여 키우는 소가 가장 낫겠다 싶습니다. 몽골 소는 추위에도 강한 편이라 조선의 기후에도 잘 어울립니다.”
몽골 소가 조선에 도입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조선에서 소가 씨가 마르고, 관원이 몽골에 파견돼 소를 사려 했으나 가격이 맞지 않아 불발이 될 뻔했다. 그 관원이 답답해서 담배를 피웠는데, 몽골인들이 신기하게 여기자 담배의 효능을 과장해서 비싸게 팔고 그 값으로 조선에 소를 들여왔다고 한다. 고산국에서 오래 전부터 몽골에 담배와 차를 대량 수출했으므로 이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실록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우역에서 살아남은 소를 각 도에 분배하고 10년 넘게 도살 금지령을 내려 꾸준히 소를 증식시킨다는 내용이다. 소를 도살해 이익을 얻는 자들이 인평대군과 능원대군의 집에 투속해서 처벌을 피하려 했으나, 형조판서 민성휘가 이들을 전가 사변시켜 소 도살을 막는다.
“그렇구나. 그런데 몽골은 바다에서 멀다. 조선으로 어떻게 수송해야 하겠느냐?”
“몽골 소를 바이칼 호수 쪽으로 옮겨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곰나루에서 하역한 다음 배를 동원해 팔도로 분산시키는 방법이 제일 낫겠습니다. 객차를 줄이고 화물차를 최대한 동원한다면 한 달에 10만 마리 정도를 수송 가능하니 내년 파종기에 늦지 않게 50만 마리를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황공하오이다, 세자저하!”
너무도 고마워서 이원익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공돈 같은 기본 소득을 받으려 해도 먼저 고산국 국적이 있어야 한다.
“소 값은 팔도 항구로의 운송비까지 포함해 기존 조선 소 가격의 1.3배가 어떻겠습니까? 항구에 도착할 때마다 금과 은으로 즉시 지불하겠습니다. 이 정도 조건이면 어떨는지요?”
“흠! 흠! 운송비가 제법 많이 들겠으나 몽골에서 소 가격이 낮아서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세자는 급히 몽골에서 소를 매입해 조선 팔도로 옮기는 일을 지휘하도록 해라.”
“예, 아바마마.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거래가 될 것 같습니다.”
조선에서 소가 농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소고기도 많이 먹었으므로 소 가격이 다른 나라보다 높게, 보통 성인 남성 노비 두 명 가격으로 형성돼 있었다. 그런데 다른 상품과 교환하지 않고 금과 은만으로 대금을 지급할 정도면 조선의 경제력이 의외로 탄탄하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이것은 실제 역사보다 임진왜란에서 입은 피해가 적고, 이괄의 난이나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아예 없었기에 가능했다. 일종의 국방 무임승차였고 모두가 이민호가 개입한 덕택이었다. 이원익도 그런 사실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고산국 건국 이래 지금까지 조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고산국 백성 절반 이상이 조선 출신이고, 지금도 명절 때마다 교류가 활발하지 않습니까? 괜히 조선을 치다가 수하들에게 미움 받거나 뒤통수에 총을 맞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드립니다.”
빈 땅도 많고 할 일도 많은 이민호 입장에서 굳이 조선을 칠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다. 내버려뒀더니 그렇게 고지식하던 조선 양반들도 점점 변화하고 있었다. 현재 조선국 세자가 등극하면 더 강하게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다.
“고산국의 공주마마를 조선에 시집보내주신 국왕전하의 은혜에 이제야 감사 인사를 올리게 되어 황공하옵니다. 숙빈마마께옵서 세자마마를 비롯해 2남 2녀를 생산하시고 이번에 또 회임하시는 경사를 보셨습니다. 숙빈마마가 아니었으면 자칫 직계 왕통이 끊길 뻔했습니다.”
“남편에게 사랑을 받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오.”
이민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으나 친정아버지답게 속으로는 무척 기뻤다. 왕비나 다른 후궁들이 왕자를 생산하지 못했으므로 지은 공주가 더욱 대견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국왕의 부실한 씨를 받아 숙빈의 건강한 밭에서 잘 길렀으므로 숙빈의 공이 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국왕전하께서는 혹시 아십니까? 조선에서 손이 귀한 집안에서 고산국 며느리나 데릴사위가 인기가 높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론 건강한 고산국 청년, 처녀들이 가난한 조선에 잘 오지 않으려 해서 문젭니다만.”
“그야 어릴 적부터 잘 먹이고 운동도 열심히 시키니 건강할 수밖에요. 고산국 처녀들이 같은 핏줄인 조선 처녀들보다 키도 크고 유방도 크고, 험! 험! 방금 한 말은 잊어버리세요.”
이원익을 만나고부터 이민호가 유독 헛기침을 자주 내뱉었다. 오랜만에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 즐거워서 말실수가 잦은 탓이었다. 역시 똑똑한 사람이 아부도 잘해서, 이민호는 뿌듯한 마음이었다.
“유럽에서 의외로 거물들이 오셨군. 반갑소.”
“하하! 고산국 국왕전하에 비하면 저는 자그마한 피라미일 뿐입니다. 반란 진압을 축하드립니다, 전하.”
“고맙소, 페르디난트 국왕.”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아들이며 현재 헝가리의 왕, 보헤미아 왕인 페르디난트 3세가 세 나라의 합동 축하 사절단 대표로 이민호에게 인사를 올렸다. 선거 구도로 보아 조만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인물이었다.
페르디난트 3세의 정치적 라이벌들도 한꺼번에 대전에 등장했다. 스웨덴의 옥센셰르나 재상과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의 후계자인 왕세자 크리스티안이 차례로 대전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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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들이 독일이 아니라 고산국 왕궁에 모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