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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003화 (952/1,000)

01003  105. 대국의 길  =========================================================================

항만시설이 완공된 상하이 내항에 순양함이 도착했다. 상가와 창고를 비롯한 나머지 공사는 개항 후에도 계속 진행할 예정이었다. 시가지도 거의 텅 비었으니 현대는 물론 19세기 상하이와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민호가 세자와 함께 깔끔하게 정돈된 부두에 내렸다. 순양함에서 호위 장갑차까지 붉은 융단이 쫙 깔려 있었다.

이민호가 기분을 내는 동안 순양함은 좁은 주차장에서 앞뒤로 번갈아 움직여 방향을 바꾸는 자동차처럼 움직여야 했다. 순양함 같은 배가 황포강에 들어오기에는 너무 컸지만 국왕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는 꼰대 마인드로 무리를 좀 했다.

“고산국 국왕전하와 세자저하의 상하이 방문을 저희 행정청 관인들은 열과 성을 다해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고맙네. 청장도 차에 타게.”

“황공하옵니다, 전하.”

상하이 행정청장으로 임명된 명나라 관료가 고산국 말로 환영 인사를 올렸다. 관료와 병사들이 도열해 고개를 들지 않는 모습이 마치 무협지에서 마교 교주를 영접하는 교인들을 방불케 했다. 인사는 매우 정중했지만 업무 능력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홍콩에서 뼈저리게 느낀 바 있었다.

“묻고 싶은 게 많은 것 같군. 말하라. 설명해주겠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소신은 작은 보루를 부둣가 세 곳에 거리를 두고 지은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대포가 전쟁에 활용된 다음부터는 기반이 튼튼한 건조물만 살아남지 않습니까? 보루를 높게 지은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대포로 쏴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속속 한양에 접근하는 동안 조선 조정에서는 한성의 성벽 길이와 여기에 배치해야 할 최소한의 병력을 계산한 다음 깔끔하게 포기했다. 반면에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강항은 작은 일본식 보루를 정상적인 전투로는 도저히 점령할 수 없다며 극찬했다.

백성들을 지킬 계획이 없다면 방어진지는 작을수록 방어에 유리했다. 상하이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킬 생각이 없었으므로 오직 부두만 방어범위에 넣은 작은 보루들만 건설했다. 그러나 서로 사각을 없애는 위치에 보루 세 개를 건설해 방어 효율을 높였다.

“대명의 영토에 비록 맹방이라 하나 외국인 고산국이 군사시설을 지은 것을 두고 말이 많았습니다.”

“어허! 유럽 해적이나 농민반란군이 대규모로 쳐들어올 것에 대비한 것일세. 상하이는 앞으로 강남의 돈이 모일 곳이야. 여기서 나오는 이익 절반은 황상폐하의 내탕금일세. 당연히 지킬 준비가 돼야 하지 않겠나?”

“그, 그렇습니다, 전하!”

황제 소리가 나오자마자 행정청장이 찍소리도 못했다. 명나라에서 황제 이름을 팔아 안 되는 게 없었다.

행정청은 중국식으로 사방을 두른 높은 담과 3층짜리 본전 건물과 기타 부속 건물들로 구성됐다. 이민호는 개항 준비에 바쁜 관료들에게 일을 시키고 3층에 올라 시가지를 감상했다.

“아바마마. 홍콩과 상하이에 단순한 일감만 맡긴다지만 장기적으로 기술이 유출될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백성들에게 계속 단순한 일을 시킬 수는 없지 않느냐? 섬유산업이나 제화, 식품산업 중에서도 부가가치가 낮은 단순 공정은 이곳에 맡겨라. 이런 단순작업 말고도 우리 백성들이 할 일이 많다.”

21세기에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고 중국산 짝퉁이 범람한 사실을 다 알고도 이민호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고산국의 고급 노동력을 부가가치가 낮은 산업에 묶어두기에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홍콩과 상하이를 저임금이 장점인 21세기 개성공단으로 만들기로 했다.

“홍콩만으로 충분했는데 상하이까지 굳이 개발할 필요가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세계 시장은 앞으로도 계속 커질 것이다. 나중에 세자가 인구와 시장 크기를 감안해 적당한 부분을 홍콩과 상하이에 넘겨주도록 해라. 유럽에도 에이레나 포르투갈에 이곳과 비슷한 일을 맡겨야 할 것이다. 다만 국내 산업이 공동화되지 않도록 세심히 조절하도록 해라.”

“기술 발전의 과실을 다른 나라 백성들에게도 적당히 나눠주라는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국가에서 꾸준히 기술개발을 계속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겠습니다. 다른 나라에 뒤처지면 안 되니까요.”

민간 기업에 모든 것을 맡기면 저임금과 환경규제가 적은 곳으로 공장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산국은 국가와 국영기업이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산업 공동화의 폐해가 적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물론 세자가 한 말처럼 극히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조선에서 활동하는 해동상단도 네가 이어받아야 할 국영 사업체다. 어떠냐? 대단하지?”

“아바마마께서는 조선도 손 안에 놓고 주무르셨군요. 너무 많은 일을 하시는 것 같아 아바마마의 건강이 걱정입니다.”

“해동상단을 관리하는 데 들이는 시간은 일 년에 여섯 시간도 안 된다. 그래서 초기에 사업체가 알아서 잘 굴러가도록 완벽하게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네가 이어받은 다음에는 관리하는 데 들이는 시간을 더욱 줄이도록 해라.”

어느덧 3세대에 해당하는 해동상단의 대방이 상하이 행정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대방은 최대한 정중하게 주인과 차기 주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해동상단 대방이 고산국 국왕전하와 세자저하를 알현합니다.”

“어서 오게. 상단은 잘 운영되고 있는가?”

“예, 전하. 어명에 따라 내수와 무역을 반반 비중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해동상단을 통해 조선에서 이익을 볼 생각은 없었지만 조선 정계와 관계에 들이는 여러 가지 비용을 제하고도 흑자가 매년 3할씩 불어나고 있었다. 고산국이 조선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상단이 대신 추진해서 이민호 입장에서는 매우 편했다.

“상단에서 조운을 점차 넘겨받더니 드디어 올 초에 삼남의 조졸이 모두 해체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그리 많지 않은 비용을 들여 수만 명의 민생을 살렸네. 아주 좋은 일을 했어.”

“황공하옵니다, 전하.”

조선에는 정식 주식회사 제도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자본 투자에 대한 이익을 배분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리고 국가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민호의 재산인 상단 자체를 삼키는 경우도 예상할 수 있었으나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상단 내부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고산국의 그늘 아래에서 얻는 이익을 계산하면 계속 고산국 왕실을 주인으로 섬기는 편이 상단 관계자들에게도 훨씬 이익이었다.

“비록 떨어져 있지만 저희들의 일편단심을 믿어주시옵소서. 이것은 공주마마가 맡기신 서신이옵니다.”

“어디 보세.”

호위의 검색을 거친 다음 지은 공주가 보낸 편지를 읽었다. 종이에서 기역 니은 디귿이 정신없이 굴러다녔으나 이것들은 우물 정(井) 자를 해체한 모음이고 45도짜리 꺽쇠는 열 십(十) 자를 두 개 겹친 도형을 분해한 자음이었다.

이민호가 어린 왕자와 공주들에게 장난삼아 가르쳐준 암호문이었다. 그러나 한글 점자처럼 아주 쉽게 해독이 가능해서 군사용 암호문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역시나 편지를 빼앗길 것에 대비해 내용은 단순한 문안편지였다. 이민호는 딸 지은 공주가 보낸 편지 내용에서 행간을 읽어 잘 지내고 있다는 뜻을 확인했다. 만약 지은 공주에게 정말 필요한 일이 생기면 다른 루트를 통해 의사를 전달할 것이다.

“조선 사정은 어떤가?”

“북경과의 사행길이 차단된 것을 위기로 느낀 듯합니다. 사실 지금도 육로 통행에 제한이 전혀 없고 배로 다닐 수도 있지만 말이 그렇다는 이야깁니다.”

후금을 몰아내고 명나라와 합의해 요동 절반을 고산국이 차지하면서 조선 조야에 큰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호전적인 후금이나 여진족보다는 영토 야욕이 없어 보이는 고산국과 국경을 맞댄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고산국은 영토 대신 사람에 관심이 많아 여전히 조심스럽긴 했으나 후금은 사람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집단이었으니 고산국이 훨씬 나았다.

요동 지역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비쩍 마른 식인호와 승냥이 떼가 돌아다니던 무인지경 황야에 신작로가 깔리고 커다란 승합차가 마을마다 돌아다녔다. 겨우 몇 년 사이에 조선의 사행 행렬은 촌사람들 취급을 받게 됐다. 선양에 당도한 사행 행렬은 숙소로 배정된 여각의 화려함에 놀랐다.

“사행에 관련된 이권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그것을 포기할 인간들도 아니지. 그래. 지은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일에 반발이 심한가?”

“예상한 것처럼 적자가 아니고 왕비마마가 아직 젊으시므로 어느 정도 반발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이상으로 고산국을 상국으로 모셔야 한다는 여론도 강해지고 있습니다. 나라를 합치자는 이야기도 간혹 도는 모양입니다만, 대역죄가 되기에 숨어서 돌고 있습니다.”

“걸림돌은 명나라겠지.”

“예, 전하. 그래서 고산국이 어서 제국을 선포해서 조선이 우선 고산국과 대명에 이중 신속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모양입니다.”

“고산국을 격이 떨어지는 무관, 빈민, 천민들의 나라로 여겼던 주제에 지금은 많이 달라진 모양이군.”

“양반들이 답답하긴 해도 현실적인 국력의 차이를 부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조선 양반들에게 상국이라는 존재가 없으면 불안해지는 걸까 고민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상국과 황제 자체가 조선국왕의 권위를 깎으므로 명분을 떠나 상국을 모시면서 양반층이 얻는 정치적 이득은 분명히 있었다.

“지은의 핏줄이 그런 주장을 해서는 안 돼. 양반 관료들이 주도하는 식으로 밀어주게.”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그런데 조선도 요즘에는 충분히 잘 살지 않는가? 굳이 상국을 모시거나 나라를 합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빈민과 빈농, 천민 위주로 고산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조선에는 농지가 남아돌았다. 그리고 고산국에서 행하는 신농법과 신품종이 조선의 농지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었다. 도로가 닦이고 해운도 이전 시대보다 발달해 최소한 식량이 부족해 자연재해가 닥치더라도 백성들이 굶주릴 일은 없었다.

“제가 상인이라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반발하는 세력도 분명 있습니다만, 점차 약화되는 것 같습니다.”

“오호! 답이 되었도다.”

이민호가 고개를 돌렸다. 세자가 입을 벌린 채 놀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자는 할 말이 있느냐?”

“아바마마! 조선은 그대로 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조선에서 뭘 하느냐? 그대로 두었지 않느냐? 조선 사람들이 알아서 뭔가를 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해동상단을 통해 고위 관료나 이름이 높은 학자들에게 약간의 기름칠을 하고 있었다.

“조선을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이 큽니다. 양반 특권층이 이번 반란처럼 꾸준히 왕권에 도전할 우려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조선이 고산국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나도 바로 네가 말한 이유로 조선이 고산국에 합류하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힘을 쓰는 것은 나쁜 짓이 아니다.”

지은이 생산한 세자가 국왕으로 등극한다면 조선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조선 왕실의 외척이 되는 고산국 입장에서는 조선 왕실이 계속 유지되는 편이 바람직했다.

양반 관료들이 기득권을 지키려 한다면 나라를 합치는 것보다는 종주국과 속국이 적당한 관계였다. 고산국이 제국을 선포하고, 반대로 명나라가 농민반란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고산국과 조선의 관계 설정에도 큰 변화가 생길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혹시 루스 차르국도 조선과 같습니까?”

“아니. 거긴 속국으로 유지되는 편이 좋다. 보기와 달리 고산국 군주는 세계를 지배하는 자리다. 내정을 총리에게 맡길 수밖에 없단다.”

“딱 보기에도 아바마마는 지금도 세계를 지배하고 계십니다.”

“네가 이어받을 자리다. 어떠냐? 무게감이 느껴지느냐?”

대륙 몇 개와 속국들,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계산하면 이미 전 세계 영토의 3분의 2, 전 인류의 절반 가까이를 지배하고 있었다. 두 세계의 인구 증가 속도가 크게 달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고산국에 속하는 인구가 더 많아질 것이다.

“세자 자리도 이미 버겁습니다. 아바마마께서 10년만 더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되도 않을 소리는 하지도 마라. 나는 퇴임 후에도 과학 연구로 바쁠 것이다. 네가 젊었을 때 유능한 후궁들을 구하라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부터 일일이 가르쳐야 하는 이민호와 달리 세자의 후궁들은 이미 충분히 교육을 받은 재원들이었다. 그러나 이민호 때처럼 마구 늘릴 수도 없는 것이 현재 세자의 후궁들이었다. 고산국은 의회에 실권이 없고 정상적인 관료제를 유지하기도 어려워 아직까지는 내정을 후궁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상하이에 와서 세자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나 20대 초반 때처럼 세자 자리를 집어던지고 도망칠 놈은 절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이런 관계에서는 조선 정치에서 변동이 심할 겁니다.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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