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99 105. 대국의 길 =========================================================================
세자가 주도하는 왕도 건설 사업이 착착 진행되는 중이었다. 현대의 텍사스 휴스턴인 새순천과 현대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인 새목포 중에서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새목포를 새로운 수도로 결정했다. 고산국이 유럽 지향적인 대서양 국가가 아닌, 인구와 부가 훨씬 많은 태평양 국가로 남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다경제를 운영할 예정이므로 국가의 성격을 규정짓는 데 수도 하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도가 여럿이라도 국왕과 관료들이 조금만 더 부지런을 떨고 주, 군, 현으로 이어지는 지방행정 체계가 완비된다면 원나라나 명나라처럼 국가의 통일성을 유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건 왕궁이 아니라 누가 봐도 황궁이네. 왕도가 완공된다면 북경이나 이스탄불, 프라하가 시골마을로 보이겠어.”
“예, 아바마마. 워낙 멀어서 명나라에서 시비를 걸지 않을 테니 예산 한도 내에서 넉넉하게 만들어봤습니다. 언덕을 중심으로 주요 건물들이 입체적으로 배치돼서 더 커 보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민호가 미니어처와 조감도를 살피며 감탄했다. 새목포 남쪽 분지 중앙 언덕에 거대한 왕궁이 신축 중이고 사방으로 뻗친 대로와 지하철, 관공서, 상업지구와 주거지역 건물들이 차근차근 건설됐다. 철도와 도로를 주변 도시들과 연결하는 작업도 계속됐다. 새목포 군항 외에 민간 항만과 배후 농장, 주거지 역할을 할 위성도시들도 동시에 속속 건설되고 있었다.
현대 샌디에이고와 티후아나를 중심으로 남북 40km 축과 그 주변이 새로운 수도의 권역으로 확정됐다. 그리고 북쪽 100km에 위치한 새인천과 동쪽 100km 메히칼리가 수도권에 속하는 대규모 메트로폴리스로 기획됐다. 물론 현재 인구가 적으므로 당장 일일 생활권이 되는 것은 아니고 몇 세대를 거쳐 꾸준히 건설해야 진정한 메트로폴리스가 형성될 것이다.
“수도에 인구가 집중되는 것은 어느 나라나 자연스런 현상이긴 한데, 새원산이나 새강릉 같은 지방도시를 활성화시키면 사람들이 굳이 수도로 몰려들 필요가 없을 거다.”
“예, 아바마마. 하오나 인구가 20억을 넘으면 수도에 1억쯤 거주한다고 봐야 합니다. 몇백 년 후의 미래를 대비해 그렇게 공간 설계를 하고 있습니다.”
“세자는 참 길게 보는구나. 좋다. 아주 좋아.”
세자의 시공간적 스케일에 이민호는 몹시 흐뭇했다. 이때 명목상 해중국 여왕이기도 한 총리 혜영이 세자에게 물었다.
“세자! 해중국이 이전할 공간도 마련됐나요?”
“물론입니다, 어마마마. 새 수도 서쪽 해안과 남쪽 산맥, 동쪽 사막으로 연결될 산악 지역까지 해중국 영역으로 지정했습니다. 세자빈이 이주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주거지는 고산국 왕도와 조금 겹치게 하세요, 세자빈.”
“그렇게 하고 있어요. 어마마마. 좋은 계획이 더 있으면 알려주세요.”
차기 국왕인 세자가 새 수도 건설을 총지휘하고, 차기 해중국 여왕이 될 세자빈이 해중국이 이전할 지역의 건설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민호가 유민들을 데리고 최초로 상륙한 곳이 현재의 해중국 영역이지만 국초부터 고산국과 해중국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해중국은 고산국 왕실의 직영지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고산국 중요 기술자들이 거주하는 고급 주택지역과 조선소, 수산연구소 등이 해중국 땅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해중국을 고산국 왕도 북쪽에 위치한 작은 행정구역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세자빈이 군인 출신이라 해중국에 관련된 이야기가 잘 통하겠어요. 그런데 세자는 요즘 왕도 분위기를 알지요?”
“물론입니다, 어마마마. 일반 백성 집이라 해도 이사 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까지 더하니 왕도 주민들은 천도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자가 한 말처럼 현 왕도 고북 주민들 사이에서 천도에 대해 말이 많았다. 새 왕도로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키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어도 천도를 하게 되면 관청에서 근무하는 이들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영향을 받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 살기를 바라는 왕도 백성들이 더 많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래를 생각하자면 수도를 인구가 많은 북미 대륙으로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수도가 국토 중에서 한 곳으로 치우친 지금 상태가 지속된다면 왕실에서 국가 전체를 다스리기 버거워진다. 끝내는 왕도가 왕따 당하고 말거라는 위기의식을 이민호와 왕실 식구들이 가지고 있었다. 만약 몇몇 주가 경제적 손실이나 전쟁을 감수하고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면 고산국의 전체적 역량이 낮아지거나, 국가가 아예 해체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천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그래서 세자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있지?”
“예, 아바마마. 지구의나 세계 지도를 들이밀면 아무 말도 못합니다. 설혹 새목포가 아닌 다른 곳을 새 왕도로 정하자고 주장할지언정 현재 왕도 고북 시가 수도로서 좋은 위치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현재 고북에서 잘 지내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새 왕도로 옮기지 않고 계속 고북에 남을 사람들이 특히 천도에 불만이 많았다. 어느 시대든 수도에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실 대단한 특권이었으므로, 당연히 반발할 것으로 왕실에서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긴 하지. 설득도 좋고 유인도 좋지만, 남든 떠나든 상관없이 불안해하는 백성들을 다독이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천도를 앞두고 신기하게도 상인들보다 오히려 법조인들의 불만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그 인간들은 무시해. 부당한 특권을 지키려는 이익집단일 뿐이야.”
얼마 전에 왕도에서 근무하는 판사와 검사, 변호사, 경찰로 이뤄진 법조 집단에 숙정의 칼날을 들이댔었다. 자기들 딴에는 지배집단에 속한다고 착각하고 초법적인 특권을 누리려 한 모양인데, 공무원이란 그저 거대 조직인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소모되는 일개 부속품일 뿐이었다.
고산국에서 국왕 한 사람을 제외하고 후궁이나 왕자, 공주들도 누리지 못하는 초법적 특권을 법조인 집단이 갖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특권적 양반 계급이 없는 고산국에서 특권 계급을 창출하려던 국가 반역자들일 뿐이었다. 공무원들이 주어진 임무만 충실히 하면 좋겠지만 사람이란 외부 견제를 뿌리칠 수만 있다면 법과 상식을 넘어선 자신들만의 이득과 특권을 추구하려 한다.
“무시할 수 없게 됐어요, 주인님. 요즘 그 집단 내에서 활발히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으니까요.”
“미카! 저번에도 법조 집단이 심상찮다는 보고를 받긴 했는데, 설마 사법 반란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야.”
“주인님과 총리님, 세자 저하가 아니라 자기들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라 위험해요. 조선의 양반 문벌들이 하는 생각과 비슷하니까 주인님이 아닌 세자 저하를 목표로 할지도 몰라요.”
비변사에 한 번 넘어간 군권을 그 똑똑하다는 정조도 끝내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정조가 기껏 만들어놓은 장용영은 정조 사후 해체됐다. 국왕이 무관 인사를 장악해 왕권을 강화하려 시도할 때마다 신하들과 양반들이 난리를 쳤다.
조선에서 왕과 신하, 양반들 사이에 치열한 논리가 전개되더라도 결국 승자는 항상 군권을 쥐고 있는 관료들이었다. 누구 말처럼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법칙에 예외는 없었다.
국왕이 사색당파를 조율해 한 당파를 몰락시킬 수는 있어도 관료집단 전체를 제압하기에는 힘이 달렸다. 그 와중에 힘없이 양쪽 눈치를 살펴야 하는 조선의 세자는 양반들에게 아주 만만한 희생양이었다.
“쳇! 시간이 좀 걸린다 뿐이지 언제든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데 말이야. 사법부가 일어나봤자 기껏 경찰 병력이나 동원할 수 있을 텐데, 그놈들이 움직이기 전에 확 쓸어버릴까?”
“법조인들과 혈연으로 연결된 본토의 군 지휘관부터 손을 대야 할 거여요.”
“뭐? 또 반란이야? 건국 초라고 야망이 있는 자들이 꾸준히 도전하는구나.”
이민호가 살짝 놀랐고, 전과 달리 미카의 조언을 조금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법조 집단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미카가 지휘하는 정보국에서 공무원 집단 내부를 감시했지만 법조인 집단이라는 전문적 직업군에서 활동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첩자를 판검사로 만들기는 어려운 법이다.
반대로 판검사에게 승진을 미끼로 첩자 활동을 해달라고 요구하기에는 국왕 이민호에게 부담이 컸다. 관료 집단 중에서 특히 법조계에서 왕권에 도전하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주인님! 고북 경찰청 수사 1과장 외 경찰 4인이 법조계의 반란 문제를 고변하기 위해 알현을 청했습니다. 경찰의 무장을 해제했습니다.”
“이 자식들! 직접 어전에 들이치려 하는구나.”
“호위들 비상 대기 중이에요.”
민영이 들어와 살짝 보고하고 나갔다. 이민호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왔다고 판단했다. 이민호가 눈짓을 하자 총리 혜영과 세자빈이 별실로 빠져 나갔다.
“경찰은 들라 하라.”
경찰 다섯 명이 알현실에 들어선 다음 잔뜩 주눅이 들었는지 잠시 우물쭈물했다. 그러나 과장이란 인간이 간신히 용기를 내어 종이를 꺼내 외쳤다. 역시나 반란을 고변하겠다는 알현 이유는 거짓말이었다.
“피의자 고석현 씨를 국가반역죄 혐의로 구속영장을 집행하겠습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의 발언과 문서 기록이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신은 변호사를 고용해 조력을 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권리가 있음을 인지했습니까? 그럼 순순히 수갑을 받으십시오.”
“풋! 세자는 어떻게 할래?”
옥좌에 느긋하게 앉은 이민호가 묻자 세자도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다만 세자의 여자 호위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무력 충돌이 바람직하지 않기에 제가 경찰에 체포돼서 조사받는 것을 상정할 수도 있습니다만.”
“안 돼요! 저들이 세자 저하를 어찌 다룰지 예상이 가요.”
“세자 호위의 말이 맞다.”
비무장으로 알현실에 쳐들어온 경찰들은 몹시 상기돼 있었다. 국왕과 세자가 앉아 있었고, 호위들이 비록 여자라지만 전투력은 특수부대 직업군인들과 비교할 정도로 높았다. 이민호의 말 한 마디면 이들 경찰 다섯 명에 대한 즉결 총살도 가능했다.
그러나 경찰과 관료들이 아는 고산국 국왕은 항상 법치주의를 강조했기에 이들이 믿는 구석이 있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법과 체계를 악용하고, 악한 자들은 법과 예의를 지키려는 사람을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묻겠다. 천도 문제 때문에 왕도 경찰들이 반발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국왕전하. 세자는 국왕전하를 속여 천도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야만인들이 사는 오지로 왕도를 옮겼다간 결국 나라를 망치고 말 겁니다.”
“내가 세자에게 천도 문제를 맡겼는데?”
이민호는 나라를 세워 선정을 베푼 것으로 이미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세자는 부왕에 가려 백성들로부터 아직 그렇다 할 평가를 못 받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경찰은 국왕에 대한 반란이 아니라 세자에 대한 반정이라고 명분을 세우고 싶어 했다.
“세자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국왕전하께서 착각하고 계신 겁니다. 특히 왕도의 자부심 높은 경찰인 저희들을 감히 시골 경찰로 만들려고 한 것은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나? 새 왕도로 전출 신청은 하기 싫었던 모양이군.”
“국왕전하! 이제 곧 세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늙었으면 훌륭한 인물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이만 물러나셔야 했습니다. 걸주 같은 폭군을 내모는 과정에서 죽더라도 저희들은 자랑스러운 이름 한 줄을 역사에 남기고 죽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
“오호! 반란에 가담한 군 병력이 있다는 뜻이군.”
“국왕전하께서 법치주의 원칙을 강조하다 보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 법 집행을 방해하려고요? 해보십시오. 그 동안 애써 쌓았던 국왕전하의 정의로운 거짓 모습만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것입니다.”
선영이 권총을 내밀었으나 이민호가 일단 말렸다. 이민호는 경찰의 영장 집행이 단순한 시간 끌기라고 판단했다.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실 병력이 지금도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됐고, 장난은 이제 그만하지. 너희 경찰들은 법을 어겼다. 왕실 가족에게 체포영장을 집행하려면 먼저 국왕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영장을 집행하는 경찰이나, 영장을 신청하고 발부한 검사와 판사가 그런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래서 현행범으로 너희들을 체포하겠다.”
“역시 국왕전하의 배포는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군요. 의거에 나선 군대는 세계 정복과 유럽인 이민자 추방, 그리고 종교 단일화를 위해 거병했음을 알립니다.”
“그런 주장에 동조한다면 별로 좋은 백성은 아닐 것이다.”
이때 참모본부에서 긴급 전화가 왔다. 전차와 장갑차가 왕도 외곽에 진입했으며, 무선방송국 두 곳이 이미 점령돼 혁명평의회 선언문을 읽고 있다는 소식도 동시에 전해졌다.
“그래. 기병사단 1여단과 2여단이 주둔지를 이탈했다고? 당장 군 비상사태 선포해.”
이 시대에 얼토당토않게 강력한 기갑부대가 제1 기병사단이었다. 그 중에서도 본토에 주둔한 1여단과 2여단이 반란에 가담했다. 반란 진압을 위한 출동이라고 속을 자는 없었기에 명백히 반란 의도에 찬동하고 나선 자들이었다. 자고로 출세 지향주의자들은 반란에 적극 참가하거나 반란 현장을 기웃거리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내부에서 반발이 워낙 심해서 2개 여단 중에서 겨우 1개 대대 병력만 실제 반란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래도 전차와 장갑차 합해서 1개 대대라면 40대가 넘는 강력한 제대였다.
보병부대나 기껏 상륙장갑차를 보유한 해병대로는 기갑부대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전차와 장갑차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대전차무기는 극소수만 보유하게 했기 때문이다.
“일단 저것들 지하 감옥에 쳐 넣어.”
체포 영장을 집행하러 왔다는 경찰들이 고개를 들고, 혹은 푹 숙인 채 끌려갔다. 이민호가 참모본부와 통하는 수화기를 잡았다.
“국왕이다. 이 시간부로 주둔지를 이탈하는 부대는 반역자로 간주한다.”
- 전하! 그럴 경우 반란 진압에 나설 실 병력이 없게 됩니다.
“없어도 된다. 참모본부장은 모든 부대에 내 명령을 전하라.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주둔지 이탈을 금한다.”
- 항공대에서 반란 진압을 위한 이륙 허가를 신청했습니다.
“기병사단 항공여단이 반란에 참가하지 않았으니 출격할 필요가 없다고 전하라. 왕도 상공을 당분간 비행 금지 구역으로 선포하겠다.”
그리고 이때 잠시 별실로 들어갔던 혜영과 세자빈이 원수와 대장 군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이민호가 감탄하는 사이 혜영이 옆자리에 앉았다.
“여왕폐하 납시오오~”
이민호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내시 흉내를 냈다. 해중국은 명나라 황제에게 책봉을 받는 명목상의 제후국이 아니므로 호칭은 폐하가 맞았다.
============================ 작품 후기 ============================
해중국을 흡수하지 않은 이유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