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96화 (945/1,000)

00996    104. 제국의 길  =========================================================================

이민호와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헤트만 3명과 마그나트라 불리는 고위 귀족들이 준비된 사열대에 올랐다. 국왕 선거가 열렸던 볼라 마을의 널찍한 평원에는 여러 기병 집단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 중에서 은빛으로 번쩍이는 갑옷과 투구를 입고 하얀 날개를 등에 달고 장창에 삼각 깃발을 단 후사르들이 가장 정예처럼 보였다. 그러나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뿐,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우중충한 위장색이 칠해진 흉갑만 입은 고산국 기병연대에 꽂혀 있었다.

“기병집단끼리 서로 눈치를 살피며 으르렁대는 게 마치 오늘 처음 만난 개들 같군.”

“아직 저들의 서열이 명확히 매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하. 평원에서는 모름지기 힘으로 서열을 정하는 법입니다.”

“그래. 여러 가지 잡다한 세력들을 다독여 힘을 모아야 하는 폴란드 국왕과 헤트만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어.”

등록 코사크와 후사르들은 같은 폴란드 소속이지만 서로 싸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같은 코사크나 후사르들이라 해서 항상 같은 편이 아니라서 동료 집단이라 말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추격할 때는 코사크, 돌격할 때는 후사르들이 확실한 강점을 갖고 있었다.

“저야 이제부터 재상과 헤트만들에게 다 떠넘길 테니 한숨 놓을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편히 쉬게나.”

이민호는 브와디스와프 4세가 친정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하느니 차라리 고산국에서 내정과 군정을 맡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아직도 루스 차르국의 차르, 혹은 모스크바 대공 칭호를 유지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브와디스와프에게 실권이 돌아갈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 우두두두두~

가장 먼저 사열대 앞을 지나간 집단은 등록 코사크들이었다. 복장과 무기가 자유로운 자포로제 코사크들과 달리 등록 코사크들은 제법 통일된 군복을 갖추고 열을 지어 달려갔다.

사열대를 지난 코사크 기병들이 180도 회전한 다음 허수아비들이 세워진 곳을 향해 돌진했다. 마상권총을 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 다음 코사크들이 칼을 뽑아 허수아비들에게 휘둘렀다. 게릴라 전술에만 강점이 있다는 소문과 달리 코사크들은 전면 공격도 제법 괜찮은 수준이었다.

- 짝짝짝!

사열대에 오른 귀족들이 의례적인 박수를 쳐주었다. 일반적인 자포로제 코사크와 달리 등록 코사크들은 직업 군인, 혹은 정예 기병부대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갑옷에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셔서 제대로 쳐다보기 어려운 윙드 후사르가 나섰다. 이들은 기마 500명 단위로 밀집하더니 허수아비들을 창으로 찌른 다음 부러진 창을 버리고 그냥 달렸다. 말 몸체로 밀치면서 내달리는 것만으로 허수아비든 뭐든 앞에 걸리는 것은 죄다 날아가 버렸다.

후사르가 지나간 길에는 아무 것도 서 있지 못했다. 이 시대 유럽의 보병방진 2천이나 3천 정도는 돌격 한 번에 그냥 쓸어버릴 정도의 강력한 위력이었고, 실제로 그런 사례도 많았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인상적이군. 그렇지 않나, 프로이센 공작?”

“그렇습니다, 전하. 하하! 폴란드 후사르는 역시 대단하군요.”

이민호가 옆에 앉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에게 말을 걸었다. 이어질 질문을 예상한 프로이센 공작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으나 지금은 폴란드 평원에 칼바람이 몰아치는 12월 중순이었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은 스웨덴과 동맹 중이지 않나? 그런데 스웨덴은 폴란드의 숙적이란 말이야.”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 공작은 폴란드 국왕의 충성스런 신하입니다. 유럽에서는 이런 경우가 흔한 편이니 국왕전하께서는 부디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고산국이 제각각 원수 사이인 스웨덴과 폴란드, 루스 차르국과 오스만 제국을 동시에 도와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게오르그 빌헬름 공작이 아수라 백작 같은 대답을 하며 이민호의 공격에서 스리슬쩍 빠져 나가려 했다. 틀린 말은 물론 아니었지만 바로 이것 때문에 스웨덴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 큰 문제가 된다.

쾨니히스베르크와 그단스크가 곡물 무역에서 오랜 경쟁관계이므로 그단스크가 스웨덴에게 공격당했을 때 프로이센 공작령에서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그 전에는 음모를 꾸며 고산국 함대가 그단스크 시가지에 포격을 가하도록 유도했었다. 20여 년 후 대홍수 시대에는 오히려 프로이센 공작령과 브란덴부르크가 폴란드 영토를 침공한다.

“이솝 이야기에도 나오지만 박쥐는 양쪽 진영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한다네. 지금이야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가 가까운 관계라서 별 문제가 없지만,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다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잉글랜드처럼 프로이센이 고산국의 견제를 받는다는 사실도요.”

“쾨니히스베르크에 함포 사격을 가한 것은 그단스크에서 벌인 음모 때문이었지. 어쨌든 계속 지켜볼 걸세.”

“예. 꼼짝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프로이센의 영토 경계가 변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민호가 프로이센과 브란덴부르크를 주시하는 것은 유럽 역사가 흘러간 방향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렇게 꾹꾹 눌러주었다.

실제 역사에서 독일은 프로이센 왕국, 실체는 브란덴부르크를 중심으로 재통일을 이룩한다. 문제는 1701년에 성립된 프로이센 왕국이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폴란드를 침탈하고 독일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외국 영토를 자주 침공한다는 것이다. 프로이센 왕국의 군국주의는 일차대전과 이차대전을 일으킨 먼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 두두두두두~

이번에는 토르구트 기병들이 떼를 지어 사열대를 지났다. 기병들이 말 안장 위에 우뚝 서서 양팔을 벌리거나 팔짱을 끼고 있었다. 말 두 마리의 안장에 다리 한 짝씩 올리고 말을 모는 자들도 있었다.

토르구트 기병들은 말고삐를 잡지 않은 상태에서 말의 방향 전환도 자유롭게 해냈다. 표적 멀리서 활을 쏘고, 접근하는 중에 마상 소총을 쏘고, 그 다음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었다. 사열대에서 지켜보던 귀빈들이 술렁거렸다.

“완벽한 만능 기병입니다! 승마술이 이 정도라면 거의 켄타우로스 수준입니다.”

“활 사거리가 어마어마하군요. 마상창술과 마상검술도 뛰어납니다.”

이민호 양쪽에 앉은 폴란드 국왕과 프로이센 공작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이민호는 시큰둥했다. 토르구트 족이 기병으로서의 강점을 충분히 갖고는 있지만 이 시대의 이상적인 기병이 아닌 탓이었다.

“전하! 과연 몽골족 기병입니다! 크림 칸국과 노가이 칸국의 타타르들이 토르구트에게 겁을 집어먹은 이유가 있었군요.”

“정확히는 몽골화된 투르크지만 한때 몽골 초원의 주인이긴 했지.”

표적인 허수아비 잔해를 치우는 동안 사열대에 앉은 귀빈들이 토르구트 기병의 강함에 놀라 떠들어댔다. 그 동안 이민호는 브와디스와프 4세와 함께 앞으로 폴란드의 국정 운영을 어떻게 이끌어나갈지에 대해 논했다. 국정 운영을 재상이 맡기로 했으므로 사실상 일방적 통보나 다름없었다.

현재 폴란드의 재상은 시기스문드 3세 시절부터 봉직해온 야쿠브 자드지크로서, 정치에서 종교적 중립을 보장할 수 없는 가톨릭 주교를 겸하고 있는 자였다. 그래서 폴란드 총독부나 다름없는 고산국 대사관에서 새로운 재상을 폴란드 귀족들 중에서 선발하고 있었다.

“폴란드의 가장 큰 문제는 전체 인구 비중에서 귀족이 너무 많고, 귀족의 특권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걸세.”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전하. 일단 국왕을 선거로 뽑는 것 하나로 말 다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국왕을 뽑을 때마다 이것저것 제한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귀족 의회는 국왕의 독주를 견제하는 훌륭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한도를 넘어서 국가 발전을 저해할 정도네. 무엇보다 수가 너무 많아.”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다 포기하고 궁정생활만 즐기려는 겁니다.”

폴란드 귀족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5퍼센트로, 유럽에서도 이례적으로 매우 높은 편에 속했다. 슬라흐타(szlachta)라 불리는 폴란드 귀족은 최상위 마그나트부터, 경제적 상황에 따라 대지주 귀족, 소지주 귀족과 소작농 귀족은 물론 거지 귀족도 있었다.

그러나 직책의 고하나 소유한 땅의 넓이와 무관하게 폴란드 귀족의 특권은 동등했다. 문제는 이렇게 수많은 귀족들의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농노들이 일방적인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귀족들의 사치가 심해지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농노들의 경제적 부담이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였다.

귀족들이 하층민들을 착취하더라도 최소한 먹고살도록 해줘야 하는데 현재 폴란드, 특히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이미 한계를 넘었다. 종교 문제를 떠나 경제적인 문제만으로도 우크라이나 농노와 코사크들이 반란을 일으킬 만했다.

“그래서 농노를 해방시켜 자작농으로 만들어주는 귀족의 장원에만 특혜를 베풀기로 했네. 황무지 개간과 신품종 파종, 신농법으로 생산력이 세 배, 농노가 자작농으로 전환되면서 생산력이 네 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네.”

“그럼 농업 생산력이 일곱 배나 늘어납니까?”

“곱해서 열두 배지. 앞으로는 귀족이 농노들을 동원해 직영하거나 소작농에게서 소출 절반을 받는 방식에서, 농민에게서 국가의 세금 수취를 대행하는 방식으로 전환할 걸세. 그럼 국가 재정이 풍족해지고 귀족들의 수입은 두 배 정도 늘 걸세.”

유럽의 봉건제에서 근대 국가의 직접 수취체제로 전환하기 위해서 반드시 중앙집권제로의 변화나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민호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처럼 비옥한 농경지대에서는 토지 소유자인 귀족들에게 경제적인 유인을 제시함으로써 그런 변화가 가능하다고 봤다.

“예? 그러니까 농노를 해방하지 않는 귀족들의 토지는 개간을 해주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당연하지. 그딴 시대에 뒤떨어진 귀족들은 좁은 땅에서 농노들과 함께 곡괭이질이나 하면서 지내보라고 하지 뭐.”

“위험합니다, 전하. 사병을 소유한 귀족들이 반발하면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자네가 오해하고 있군. 그 낡은 사고방식의 귀족들에게서 기득권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 정책에 순응하는 귀족들의 수입을 늘려주는 것뿐일세. 명분 없는 반란을 일으키려면 일으키라지.”

“수입을 두 배로 늘리거나, 아니면 반란을 일으키다 죽으라는 거군요.”

“지금 그대로 살아도 돼. 물론 새 체제를 받아들인 다른 귀족들에 비해 수입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겠지.”

폴란드에서 농업 생산력을 증대하려면 먼저 기득권을 지키려는 귀족들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가능했다. 그러나 강제로 귀족의 특권을 회수하면 엄청나게 반발할 것이므로 경제적 유인을 써서 회유하기로 했다.

현재 폴란드는 국가나 헤트만보다 귀족들이 더욱 많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루스 차르국으로 쳐들어갔던 폴란드 병력은 대체로 토지를 넓히려는 귀족들의 사병이었다. 귀족들은 사병을 유지하면서 서유럽이나 북유럽 용병도 많이 고용했다.

“그럼 우크라이나에 배치할 토르구트 기병은 반란에 대비한 병력이겠군요.”

“그렇지. 헤트만이 항상 상비군을 동원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저들을 동원해야지.”

그러나 이민호가 토르구트 기병을 폴란드에 주둔시킨 것은 실제 전투보다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용도였다. 그리고 폴란드 귀족들은 토르구트의 배경에 도사린 고산국의 존재를 의식해야 했다. 고산국은 말만 강대국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든 실제 군사력을 투사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 두두두두~

대화하는 중에도 이른바 기병들의 축제, 사실상 서열화를 위한 승마술과 전투력 과시가 계속되고 있었다. 고산국 기병연대에서는 1개 대대만 차출해 내보냈다. 그리고 표적으로 허수아비 수백 개가 아니라 풍선 수천 개를 현장에 매달았다.

“어? 전하! 어째서 기수 없이 말만 달리고 있습니까?”

“말안장에 장갑 낀 손이 보이지? 기수가 말 몸통 뒤에 숨었잖아.”

마상재란 말 그대로 말을 타고 부리는 재주였다. 몽골 기병이 유목 생활에서 비롯된 다양한 잔재주를 부린다면, 고산국 마상재는 화약시대에 적용 가능한 전술적 효과를 노리고 제식화됐다.

기병 일개 대대의 전투병력 400여 명이 말 뒤에 숨어 있다가 호각 소리에 맞춰 일제히 안장에 올랐다. 다시 말에서 내려 땅을 차고 올라 말의 몸통 너머로 사라지더니, 이번에는 말의 배 쪽에서 나타났다.

“와! 대단합니다. 저걸 모든 기병이 다 하는 겁니까?”

“보다시피. 하지만 저들은 육군이 아니라 해병일세. 기마전투가 전문 분야는 아니라는 소리지.”

고산국 기병의 승마술에 놀라 사열대에서 벌떡 일어난 귀족들이 이어서 본 것은 도저히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군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벤트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화력시범이었다.

- 두두두두두! 콰쾅! 쾅!

말을 달리는 중에 자동소총뿐만 아니라 기관총을 연사할 수 있는 국가는 이 시대에 고산국이 유일했다. 분대에 한 명씩인 유탄사수들이 유탄을 발사하자 풍선들이 동시에 수십 개씩 터졌다.

“그 많던 풍선이 죄다 터집니다! 적이 수천 명이라도 단숨에 전멸하겠습니다.”

사실 고산국 기병대대가 사기를 약간 쳤다. 소총사수들 사이에 산탄총을 가진 기병들이 산탄을 연사한 탓에 풍선들이 깨끗이 터져 나간 것이다.

볼라 마을의 기병 축제는 고산국 기병의 압도적인 전투능력을 선전하는 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날은 폴란드의 귀족제도와 봉건제에 큰 변화가 시작된 날이었다.

소빙기에 대비하려는 이민호 입장에서는 유럽의 곡창인 폴란드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앞으로 한동안 유럽 여러 나라가 폴란드 덕택에 먹고살게 될 것이므로 폴란드의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일에 주력했다. 더불어 동유럽 여러 국가들을 안정시킬 수 있기에 폴란드에 적극 개입했다. 이렇게 해서 길고 긴 1632년의 해가 저물었다.

============================ 작품 후기 ============================

챕터를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