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95화 (944/1,000)

00995    104. 제국의 길  =========================================================================

발트해를 남쪽으로 가로지른 고산국 함대가 폴란드 북쪽 해안 푸츠크에 입항했다. 해병원정여단 병력을 상륙시키는 동안 항공사진을 본 이민호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오호! 이래서 푸츠크를 해군 기지로 결정했군.”

폴란드 귀족들이 국왕 선거에 입후보한 브와디스와프에게 요구한 공약 중의 하나가 푸츠크를 요새화하고 이곳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푸츠크는 최근 스웨덴 군대가 몇 번이나 공격했으나 끝까지 저항하며 폴란드에 대한 충성을 증명한 그단스크, 즉 단치히의 바로 북쪽에 있었다. 그러니 폴란드가 푸츠크에 군항을 건설하는 목적은 발트해 제패보다는 그단스크 보호가 우선이었다.

폴란드 북부 땅 끝에서 남동쪽으로 길이 20km, 폭 200미터 정도의 가느다란 사주(砂洲)가 쭉 뻗어있었다. 그 사주 중간에서 다시 남서쪽을 향해 수중 사주가 10km 정도 뻗어 나왔는데, 육지 가까운 쪽에 500미터 가량이 출입로로 남아 있었다. 적 함대가 이 지역 해저 지형을 모르고 푸츠크를 공격하기 위해 접근했다간 수중의 사주에 좌초되기 십상인 곳이었다.

“국왕전하! 고산국에서는 비행기를 띄워 사진을 찍는다는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러나 고산국 함대는 비행기에서 사진을 찍기 전에 이미 수중의 사주를 피해 입항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신기하오? 혹시 귀하는 고산국 배가 발트해 연안에서 좌초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소?”

호위 병력과 함께 이민호가 바르샤바로 가겠다고 통보했지만 푸츠크로 직접 쳐들어올지 몰랐던 폴란드 귀족이 안절부절못했다. 이 귀족은 폴란드 국왕 당선자 신분인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의 명을 받아, 파도가 전혀 없는 천연 항구인 푸츠크에서 요새와 부두 건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푸츠크는 이 시대의 군항으로서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췄다. 사방 5km나 되는 널찍한 만은 파도가 없어 잔잔했고, 적 함대가 공격해오더라도 돛대 꼭대기 망루에 오른 견시들에게도 안 보이는 수중 사주가 최고의 방어선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이민호가 보기에 배 두세 척으로 입구가 간단히 차단될 수 있는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스캐퍼플로우나 진주만은 영국과 미국의 군항으로 유명하지만 군항 입구에서 배가 침몰할 경우 항구 전체가 장기간 봉쇄될 위험이 있었다.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합니다.”

“고산국 군함은 물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오.”

고산국 군함과 대형 상선은 정밀한 해도를 보유했음에도 항해 중에 음파탐지기를 수시로 작동해 해저 지형을 살핀다. 폴란드에서 회심의 장소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고 있었지만 고산국 함대에게는 아무런 방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귀족이 벌벌 떨었다. 혼란에 빠진 폴란드 귀족에게 수중 음향탐지기의 존재를 알릴 이유가 없었다.

상륙함 여러 척에서 해병 상륙장갑차 대대와 기병연대가 차례로 내렸다. 폴란드와 전쟁을 하자고 동원한 병력이 아니라 국왕 즉위를 축하하러 온 이민호의 호위 병력이므로 그 이상 동원하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그러나 이 병력만으로도 폴란드 귀족이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출발!”

이민호가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상륙장갑차 대대와 기병연대가 차례로 남쪽 길을 달려갔다. 무전기를 통해 해병원정여단에 지시를 내리므로 다른 나라 군대처럼 나팔을 불고 북을 칠 필요도 없었다. 이민호가 마법을 부리는 게 아닌지 폴란드 귀족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해병원정여단은 폴란드 귀족 영지와 프로이센 공작령의 영지가 뒤죽박죽으로 섞인 길을 쭉 달려 나갔다. 그단스크를 중심으로 폴란드 회랑이 만들어지고 결국 이차대전 초반 폴란드 분할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폴란드 영토 내에 성립된 독일인들의 프로이센 때문이었다.

“국왕전하께서는 저들과 함께 가시지 않습니까?”

“하루 뒤에 출발해서 바르샤바에 도착할 예정이오.”

고산국 비행기는 이미 유명해서 따로 설명해줄 필요가 없었다.

“고산국 함대의 출현에 그단스크 상인들이 기겁할 것 같습니다.”

“그 사건은 프로이센 탓이 아니오? 도시가 금방 재건됐다니 참으로 다행이오.”

예전에 프로이센 공작이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그단스크와 프로이센 공작령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가 고산국 함대의 포격을 받아 쑥대밭이 됐었다. 그러나 그단스크는 폴란드 최대의 곡물 무역항으로서 큰 이익이 생기는 곳이라 이렇게 금방 재건됐다. 반면에 거액의 채무에 시달린 쾨니히스베르크는 아직 절반도 재건하지 못했다.

“그래도 선원들이 고산국 함대를 두려워해서 그단스크 항구에서 배가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농담 마시오. 폴란드 배는 많지 않고 대부분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 보낸 배가 아니오?”

“죄송합니다, 전하. 저는 그저 고산국 국왕전하와 함대의 위엄을 드높이고자 과장한 것뿐입니다.”

거대한 고산국 군함들과 약간 거리를 두고 그단스크 만에 범선들이 떠다녔다. 네덜란드와 베네치아 배들의 갑판에 나온 선원들이 대놓고 고산국 함대에 환호를 보냈다.

“물어봅시다. 폴란드는 여전히 농사가 잘되는 것 같소만 예전에 비해 생산량이 많이 떨어졌소. 요즘에는 외국에 수출할 정도로 잉여 식량이 남아도는 것은 아니지 않소?”

“사실이 그렇습니다, 전하. 농노제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생산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단스크를 통해 수출하는 잉여 농산물은 우크라이나의 농노들을 짜내서 나온 것입니다.”

“벨로루스도 그 피해를 심하게 받고 있다고 들었소.”

“맞습니다, 전하. 이대로라면 언제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폴란드 귀족들은 고산국의 선진 농법을 배우길 열망하고 있습니다.”

자기들 몫만 챙기는 폴란드 귀족답게 생산력 하락의 원인이 되는 농노제 확산은 내버려두고 농법 개선만을 원했다. 이런 귀족들이 20여 년 후 대홍수 시대에 조국을 침략한 스웨덴에 붙어 매국노 짓을 하게 된다. 러시아와 코사크, 타타르, 프로이센, 몰다비아, 스웨덴군을 물리치고 폴란드를 구한 세력은 국왕도 귀족도 아닌 무기를 들고 일어난 소작농들이었다.

“발전된 농법이야 어느 나라에든 전수해주고 있소. 그러나 소작농들의 노동의욕을 고취시키지 않으면 아무리 선진 농법을 동원해도 생산력 증가가 미미할 것 같아 걱정이오.”

“바로 그래서 귀족들이 있어야 합니다. 농민들은 짐승과 같아서 그저 눈에 띌 때마다 때려줘야 말을 들어먹기 때문입니다.”

자유농이 소작농으로 전락할 경우 노동의욕이 떨어져 생산력 저하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이 귀족도 잘 알고 있었다. 폴란드 귀족들이 우크라이나의 농노들과 코사크 마을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해서 반란이 일어난 결정적인 이유가 되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작농을 쥐어짜면 당장에 돈이 되지만, 자작농으로 풀어주면 다른 귀족들이 다 얻는 기대 수익을 얻을 수 없다. 그런 단순하고 경제적인 논리가 적용됐을 뿐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관행이 폴란드의 전반적 국력 저하로 나타나게 된다.

“쯧! 다 알면서 무식한 척하지 마시오.”

“아닙니다, 전하.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폴란드 귀족들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든 자기 이익을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 이민호도 충분히 인정했다. 그러나 고산국처럼 모두가 다 잘 살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욕심을 부려 다 함께 망하는 길을 택한 귀족들을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오전에 호위항모와 상륙함 갑판에서 직승기들이 차례로 이륙했다. 편대 대형을 갖춘 직승기들이 고정익 정찰기를 선도기로 내세워 바르샤바로 직행했다. 이 시대에 안 어울리는 항공기들은 단 30분도 안 돼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해병원정여단 소속 상륙장갑차 대대와 기병연대는 이미 바르샤바 서쪽 볼라 마을에 도착해 숙영지를 세워놓았다. 지난 11월에 국왕 선거를 위해 이곳에 모였던 폴란드 귀족들이 이번에는 고산국 국왕의 바르샤바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잔뜩 모여 있었다.

“맙소사!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고산국 국왕전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상상하는 건 신성모독이네. 연날리기나 봉화처럼 그저 인간이 하늘을 이용하는 것뿐이야. 국왕 선출을 축하하네.”

직승기에서 내린 이민호를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와 고위 귀족들이 열렬하게 환영했다. 그 전에 먼저 착륙한 강습대대 장병들이 사방에 포진하고 호위들이 내린 다음 이민호가 탄 직승기가 마지막으로 착륙했다. 이민호는 이런 이벤트를 통해 브와디스와프의 광신을 완화시키고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고산국에 도전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들기를 원했다.

브와디스와프는 정식 국왕이라고 하기에는 절차상의 문제가 아직 약간 남아 있었다. 국왕 선거에서 당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관식은 내년 2월 초, 의회에서의 정식 대관식은 3월에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런데 호위 병력이 대단히 많습니다.”

“혹시 자네가 곤란에 처해 있었다면 구해주기 위해서지.”

물론 농담이었다. 이민호는 주로 경호를 빙자해 기회가 생길 때마다 병력을 과도하게 동원해서 주변 국가들에 과시했다. 예산이 드는 정치적 선전행위였지만 덕택에 고산국을 만만하게 볼 나라는 더 이상 없었다. 덴마크에서 보여준 학살에 가까운 전투도 과장된 소문을 거쳐 이제는 전설이 되어 있었다.

유럽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이민호에 대한 암살 시도가 거의 없었다. 암살 시도가 실패하면 군사강국인 고산국에게 호되게 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군사적 보복을 가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가 장난 한 번 쳤다가 고산국에 페르가나 명마를 엄청나게 뜯기고 말았다.

그리고 세자가 정해진 이후 이민호를 암살할 실익이 없었다. 그래도 이민호는 말이 잘 통하고 가급적 전쟁을 피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기마대군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를 관통해 티베트 원정을 성공시킨 세자가 도대체 어떤 인물일지 몰랐기에 더욱 두려워했다.

“저번 일로 혹시 국왕에게 미움을 받지 않았소?”

“그래봤자 저 분은 선거로 뽑힌 국왕일 뿐이고 저는 종신직이며 실 병력을 지휘하는 헤트만입니다, 전하.”

“참으로 담대하고 솔직하시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헤트만 세 명과 차례로 악수를 나눴다. 공석인 폴란드의 야전 헤트만은 내년 3월에 의회에서 폴란드 국왕이 임명할 예정이었으나, 주 폴란드 고산국 대사와 협의해 적당한 인물로 이미 내정해두었다. 고위 귀족들과 차례로 악수를 하던 이민호가 걸음을 멈췄다.

“자넨 혹시 프로이센 공작이 아닌가?”

“헉! 그렇습니다, 전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 게오르그 빌헬름이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이 사람은 요한 지기스문트로부터 두 영지를 모두 상속받는 바람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신하인 동시에 폴란드 국왕의 신하가 됐다. 부친 요한 지기스문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서 프로이센 공작령의 섭정으로 일하다가 시기스문드 3세 바사에 의해 정식 공작으로 봉작된 자였다.

게오르그 빌헬름 선제후는 프로이센 공작의 자격으로 폴란드 선거 의회에 참석하길 원했었다. 그러나 그가 국왕 후보자로 나설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의원들에 의해 참석 자체가 거부당했었다. 덕택에 브와디스와프는 국왕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단독 후보로 출마할 수 있었다.

“설마 폴란드 영토에 눈독을 들이는 건 아니겠지?”

“흐억! 저는 폴란드 국왕폐하의 신하이기도 합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야 모르지.”

물론 지금은 아니겠지만 대홍수 시대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폴란드 서부를 침공한다.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공작령을 연결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수백 년, 그리고 앞으로도 수백 년에 걸쳐 이 지역에서 벌어졌고 또 벌어질 전쟁은 튜튼 기사단이 프로이센 지역을 정복한 탓이었다.

18세기 초에 성립할 프로이센 왕국의 본체는 프로이센 공작령이 아니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이었다. 두 지역의 인구와 경제력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지금도 선제후 겸 공작은 프로이센이 아니라 브란덴부르크에 주로 거주했다.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을 합치면서 브란덴부르크 왕국이 아니라 프로이센 왕국이 된 것은 명목만 남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존중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설마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돌보시는 폴란드를 감히 어느 나라가 욕심을 내겠습니까?”

“그런 면도 있겠군.”

왕위 상속 문제가 남아있는 스웨덴의 침공을 막아주지는 못하겠지만 고산국이 루스 차르국이나 오스만 제국, 기타 폴란드 남서쪽에 위치한 국가들로부터 확실한 방어막이 되어줄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착취가 심해질수록 코사크의 반란 가능성이 커진다. 욕심 많은 폴란드 귀족들의 발호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미래의 문제를 풀기 매우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고산국 국왕전하! 이제 기병들의 축제를 구경하시겠습니다.”

그래도 이곳 주인인 폴란드 국왕이라고 브와디스와프 4세가 축제 개회를 선언했다. 외국 국왕의 바르샤바 방문 환영식치고는 꽤나 거창한 행사가 준비돼 있었다.

============================ 작품 후기 ============================

사건이 없어서 쓰는데 시간이 더 걸리는 반면 글에 역동성이 없네요. 주인공은 미래의 사건들을 막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어질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