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93화 (942/1,000)

00993    104. 제국의 길  =========================================================================

교회로 향하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관 앞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섭정 다섯 명이 천천히 행진했다. 관 뒤로 스웨덴 귀족들과 고위 관료들, 장군들이 묵묵히 따랐다. 길거리를 가득 메운 수많은 스웨덴 사람들이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

국왕의 장례 행렬은 스웨덴의 빛나는 승리를 널리 알리기 위한 개선식을 일부 겸했다. 그래서 스웨덴군이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노획했던 수많은 가톨릭군 군기가 기수단의 깃발에 섞여 있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오히려 스웨덴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국왕을 잃게 됐는지 실감시켰고, 뼈저린 상실감을 느끼게 했을 뿐이었다.

“크리스티나. 이제는 네가 국왕이란다.”

“아저씨! 어째서 엄마가 왕이 아니에요?”

“네 아버지의 딸은 엄마가 아니라 바로 너이기 때문이지.”

크리스티나가 시무룩해졌다. 이민호나 스웨덴 입장에서도 엘레오노라 왕비가 먼저 여왕으로 즉위하면 좋겠지만 냉엄한 왕위상속법은 왕통에 다른 핏줄이 개입하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크리스티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장을 하고 다녔다. 선왕 구스타브가 딸을 여왕이 아닌 여자 왕으로 교육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16세에 크리스티나가 친정을 시작했을 때도 여왕이 아닌 ‘소녀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는 거네요.”

“그래. 어?”

“저도 알아요. 시녀들이 쉬쉬했어도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요. 엄마가 우는 것을 보고 알았어요.”

“똑똑한 아이로구나. 왕비님과 섭정들이 널 도와줄 거다.”

마차가 서자 이민호가 크리스티나를 안아서 내렸다. 엘레오노라가 마차에서 내리기를 잠시 망설였지만 미망인 왕비로서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왕비의 남편이자 스웨덴 국왕을 이제는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다.

“자! 크리스티나 너는 왕이다. 남의 품에 안겨서 움직이지 말고 교회까지 네 스스로 걸어야 한다. 할 수 있겠지?”

“예. 아빠가 의무를 다한 것처럼 저도 의무를 다하겠어요.”

리다홀름즈 교회 정문 곁에 다섯 섭정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민들이 몰려있는 곳에 하급 관리들이 동전을 무더기로 던져서 잠시 소란이 일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 여왕 크리스티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민호와 엘레오노라 왕비 사이에서 크리스티나가 천천히 걸었다. 앙증맞도록 작은 장화를 신은 크리스티나가 아장아장 걸어 교회 정문을 통과했고, 이어서 계단을 힘겹게 올라 입구에 들어섰다.

“크리스티나님은 부왕만큼 훌륭한 국왕이 되실 겁니다.”

“아무렴요.”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와 섭정들이 눈물을 훔치며 뒤를 따랐다. 이들을 이어 나머지 귀족과 관리들이 교회에 들어섰다.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 표정들이 작은 여왕의 발걸음을 보고 조금 힘을 얻은 듯했다.

장례식은 성대하고 엄숙하게 거행되고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교회 지하 무덤에 묻혔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유럽 여러 나라에서 온 조문사절단이 스웨덴 국왕 전사 이후를 논의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고산국 국왕전하를 모신 자리에서 유언장을 개봉하겠습니다. 사실 구스타브 국왕께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스톡홀름 왕궁에 알려진 직후 목사와 변호사, 귀족들을 소집해서 개봉했습니다만, 중요한 상속인을 모시고 다시 개봉합니다.”

“이미 번역해놓았구려. 읽어보겠소.”

유언장을 낭독할 필요도 없이 이민호가 고산국 대사관에서 원본과 대조를 마친 유언장 번역본을 읽었다. 사실 이민호가 스톡홀름에 오는 동안 이미 읽었던 내용이었다. 선왕 구스타브가 구구절절하게 부탁한 내용을 이민호가 간단히 요약했다.

“선왕이 신뢰하는 다섯 명의 섭정이 크리스티나가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때까지 스웨덴의 국정을 운영한다. 왕비 엘레오노라와 고산국 국왕의 지명을 받은 자가 국정 전반에 대한 조언을 한다. 크리스티나의 교육은 전적으로 고산국 국왕이 맡는다.”

“그렇습니다, 전하.”

유언장에서도 구스타브는 크리스티나를 여왕이 아닌 왕으로 교육시켜주길 당부했다. 이민호는 이 난감한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 여자 국왕을 여자 왕비와 혼인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크리스티나 국왕을 고산국에 데려가도 괜찮겠소? 이곳 스톡홀름은 너무 추운 것 같아서 말이오.”

“국왕폐하는 모든 스웨덴 사람들의 구심점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공부하는 것은 아무래도 곤란할 것 같습니다.”

섭정들끼리 이미 말을 맞춰놓은 것 같았다. 그 뜻은 이민호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스웨덴 국왕이란 자리가 다른 나라 군주들하고 의미가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구스타브의 아버지 카를 9세는 스웨덴 국왕 겸 폴란드 국왕 시기스문드 3세를 추방하고 신교를 국교로 삼는 과정에서 하층 계급 사람들에게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구스타브는 적극적으로 광산을 개발해 경제 발전에 크게 공헌하면서 하층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덴마크나 이 시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용병이 아닌 하층민들을 적극 참가시킨 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하면서 스웨덴 모든 계층의 사랑을 받았다. 구스타브는 단순한 지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들의 대표나 다름없었다. 구스타브가 직접 말을 타고 돌격하거나, 병사들이 국왕의 복수를 하기 위해 적진으로 돌격한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래서 크리스티나가 어린데도 왕좌를 위협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국왕이 오랫동안 외국에 체류한다면 이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섭정들이 우려한 것이었다.

“좋소. 섭정들과 왕비는 들으시오. 내가 두 가지를 제안할 테니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오.”

“어지를 받들겠습니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기에 미리 준비했던 제안을 설명했다.

“하나는 고산국이 스웨덴을 외국의 침공으로부터 지켜주고 경제 기반을 닦아주는 대신 스웨덴군이 독일에서 철수하는 것이오. 현재 스웨덴이 점령한 독일 영토는 스웨덴의 영토라고 보기 어렵고, 독일이 북부 지역을 계속해서 회복하려고 할 때마다 스웨덴의 국력이 크게 깎일 것이오.”

“달콤한 제안입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야 하기 때문에 고산국 국왕전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다른 제안은 무엇입니까?”

독일 내전에서 중립을 유지해야 하는 고산국 입장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사실 이민호는 내륙지역에서 기아와 페스트로 죽어가는 독일인들을 생각하면 스웨덴군이고 제국군이고 그냥 다 쓸어버리고 싶었다. 신교도들을 탄압해서 독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신성로마제국 황제나, 외국 영토를 정복하고 싶어 남의 나라 전쟁에 종교를 핑계로 끼어든 스웨덴이나 이민호가 보기에는 똑같았다.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신교도 연합에 계속 가담하면서, 그 모든 책임을 스웨덴이 지는 것이오. 이 경우 고산국에서는 크리스티나 국왕의 교육만 신경 쓰겠소. 스웨덴을 지켜주거나 경제 지원을 해주지 않겠다는 뜻이오.”

“국왕전하! 저희들에게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왕비와 함께 의논을 하시오.”

이민호는 왕비와 섭정들을 남겨두고 크리스티나를 데리고 나왔다. 아이들과 잘 노는 이민호가 그 동안 크리스티나와 하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해서 그런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민호는 어린 여자 국왕을 데리고 왕궁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곳에 이민호가 크리스티나에게 줄 선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역관과 호위들, 궁내부 귀족 관리들, 그리고 스웨덴 귀족 출신 시녀들이 줄줄이 뒤따랐다.

“와! 황금색 망아지다!”

“그래. 크리스티나가 탈 망아지야. 뒤에 엄마 말, 아빠 말이 있지? 이 망아지도 나중에 저렇게 클 거란다.”

고삐에 매인 말들과 달리 망아지는 마구간 안을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민호가 선물한 아할테케는 몸집이 굵고 근육질인 사역마가 아니라 쭉 빠진 경마용 말에 가까웠다. 그래도 어깨 높이가 이 시대 웬만한 성인의 키와 비슷했다.

“망아지가 너무 커요.”

“마음에 안 드니?”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아저씨!”

“이제 국왕이 됐으니 뽀뽀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좋으면서 괜히 하는 소리였다. 호위가 준비한 당근을 받아 크리스티나 손에 쥐어주자, 망아지가 쫄래쫄래 다가왔다. 앞으로 평생을 함께 할 어린 주인과 망아지의 상견례는 잘 이뤄진 것 같았다.

- 푸르르~

옆 마구간에서 다른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민호가 걸음을 옮기자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말이 거친 숨을 내몰아 쉬고 있었다. 말의 목에 난 큰 상처를 보고 놀란 이민호가 궁내부 관리에게 물었다.

“이 말은 뭔가?”

“예, 전하. 선왕께서 타신 말입니다.”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를 태우고 돌격에 나섰던 말이었다. 이름이 스트라이프, 혹은 슈트라이프라고 했다.

“목에 총탄이 박힌 것 같은데, 상처 치료는 안 해주는 건가?”

“주인을 잃은 말은 주인과 함께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 말은 그 의무를 회피했습니다. 그리고 선왕의 죽음에 이 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전사 과정을 직접 본 사람의 기록이 없으므로 모두 추정에 불과했다. 그 추정에 따르면 먼저 말의 목에 총탄이 박혀 구스타브가 말을 통제하기 어려워졌고, 그래서 기병대 주력에서 구스타브가 이탈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는 전투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로 말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구스타브의 전사가 스웨덴 사람들에게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순장이라면 사람이 먼저 해야지. 자네가 궁내부 관리라면 당연히 선왕 구스타브 생전에 그를 모셨겠지?”

“그, 그렇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선왕의 즉위 때부터 모셨습니다.”

“그럼 자네하고 나머지 궁내부 관리들, 그리고 재상과 장군들을 선왕의 무덤에 함께 순장하게나.”

순장 제도는 처자와 노비 등 종속적인 인간들을 주인의 무덤에 함께 묻어 주인이 내세에서도 권세를 유지하길 기원하는 야만적인 제도로 오해하기 쉽다. 현대 인도에서 죽은 남편과 함께 부인을 화장하거나 죽이는 악습, 고대 중국에서 어린아이들을 산 채로 무덤에 함께 묻은 것, 미망인에게 자살하도록 암묵적으로 강권한 다음 신이 나서 열녀문을 세우는 조선의 풍습은 확실히 야만적이었다.

그러나 고대 여러 문화권에서 순장은 대체로 자의적인 죽음이었다. 고구려 동천왕 때 왕을 따라 죽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중천왕이 금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살했을 정도였다. 신라도 지증왕 때 순장을 공식적으로 금지해서 그 전에 순장 풍습이 있었음이 확인되고 가야 고분에서도 호위무사의 부장이 확인된다. 근세에 일본 무사들이 주군을 위해 복수를 마친 다음 자결한 것도 비슷했다.

순장은 원래 고대 중앙아시아의 풍습이었다. 군주의 의형제라고 칭하는 자들이 군주와 함께 먹고 자고 전쟁에 나서서 싸우고 하다가 군주가 죽으면 나머지 의형제들이 일제히 자결했다. 말 그대로, 명실 공히 군주와 의형제들은 공동운명체였다. <삼국지>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맺었을 때는 그저 한 날 한 시에 죽기를 ‘바라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고대에 의형제들은 진짜로 죽었다.

이 풍습은 주변 여러 문화권에 영향을 미쳐 마케도니아 왕의 근신들인 ‘가까운 자들’이나 게르만족의 기사제도에도 그 유제가 남아있었다. 선왕을 모셨던 기사들이 선왕을 따라 죽지는 않았지만 고향에 돌아가서 죽은 듯이 조용하게 살았다. 주인이 죽었는데도 기사들이 살아남았다고 일반 자유민들에게 욕을 먹으면서.

“말도 안 됩니다. 그런 야만적인 순장 제도는 없습니다!”

“유럽에도 비슷한 관습이 있었지. 선왕의 전사 책임을 말 못하는 말에게만 미루지 말게.”

그러나 궁내부 관리는 말을 치료하라는 이민호의 지시를 끝내 거부했다. 결국 호위 기병중대에서 근무하는 마의를 불러 슈트라이프를 치료했다.

이민호가 슈트라이프의 수술 과정을 지켜봤다. 뤼첸 전투가 끝나고 몇 주가 지났어도 목에 여전히 총탄이 박혀 있어서 주변 살이 썩어 고름이 가득 나왔다. 마취가 되어 누운 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원래 역사에서 슈트라이프는 1633년에 상처가 악화돼서 죽었다고 기록됐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박대를 받아 굶어죽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서자 구스타브 구스타브슨을 만난 다음 폴란드로 넘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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