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91 104. 제국의 길 =========================================================================
1632년 가을에 ‘천사가 절하는 자’ 수세니오스 1세의 아들 파실리데스가 ‘세상이 절하는 자’로서 에티오피아 황제로 즉위했다. 에티오피아 황제를 배출하는 솔로몬 왕조는 고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메넬리크 1세로부터 계속 이어지고 악숨 제국의 후계 왕조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수세니오스 1세가 에스파냐 선교사 페드로 파에스의 설득과 포르투갈, 에스파냐를 동맹으로 삼으려는 욕심에 로마가톨릭을 국교로 선포한 것에 있었다. 황제가 국교로 개종하지 않는 자들을 처형하자 예전 국교였던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도들과 무슬림, 팔라샤 즉 에티오피아 유대교 신자들이 대거 반란을 일으켰다.
말년에 반란이 더욱 격화되자 수세니오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1632년 9월에 퇴위하고 파실리데스에게 제위를 물려줬다. 파실리데스는 즉각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국교로 복귀시켰다. 그런데 1667년 파실리데스의 아들 요하네스 1세가 황제가 된 다음에는 반대로 가톨릭교도들을 추방하고 무슬림과 팔라샤들을 격리시킨다.
“포르투갈 함선이 왜 에티오피아 해안도시를 포격한 건가?”
“아무리 선교사들의 추방에 화가 났다지만, 그 선원 놈들이 미쳤나 봅니다. 에티오피아 황제로부터 그 일의 배후에 선교사들이 있다는 오해를 받아 나머지 예수회 선교사들도 죄다 에티오피아에서 쫓겨났습니다. 파실리데스 황제가 국교를 로마가톨릭에서 에티오피아 정교회로 복귀시킨 일에 대의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공작 주앙 4세가 답답하다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시기를 앞두고 선원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는 바람에 예수회의 선교사업과 포르투갈 함선들이 홍해를 항해하는 일이 아주 곤란하게 됐다. 그러나 현재 브라간사 공작은 포르투갈 선원들을 처벌할 어떠한 권한도 없었다.
포르투갈이 예전 수세니오스 1세 황제에게 군사력을 빌려준 적이 있었지만 에티오피아는 전혀 만만치 않은 나라였다. 몇 년 전 반란에서 양쪽이 군대를 3만씩 동원하고 옛날 십자군 전쟁 때는 흑인 기사들이 예루살렘까지 가서 무슬림들을 상대로 싸운 나라였다. 이 시대 에티오피아의 성채 도시들은 이슬람보다는 중세 유럽의 성곽을 닮았다.
“올해 벵골 지방에서도 쫓겨났지?”
“휴우! 한심하게도 벵골에서 추방된 사건 역시 현지 문화를 무시했던 포르투갈 상인들의 오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상인과 군인들이 아직도 반성하지 못하고 남을 함부로 대하는 짓거리가 여전합니다.”
“에티오피아 대사관이 이곳 왕도에 있으니까 대사와 협의해서 오해를 풀라고 지침을 내리게. 종교 문제에 개입하기는 어렵겠지만 홍해 통행 문제에 한해서는 내가 중재를 서주지.”
“감사합니다, 전하. 그렇다면 공식적인 외교 경로보다는 개인적인 사절을 따로 보내겠습니다. 에스파냐로부터 감시의 눈길을 받는 제가 나서면 안 되겠지만 포르투갈의 국익이 걸린 일이라서 이번 일은 무시하고 넘어가기 어렵습니다.”
브라간사 공작 주앙 4세는 1630년 11월 부친의 사후 공작위를 계승했다. 그는 올해 28세의 젊은 귀족으로서 이익을 따라 이합 집산하는 포르투갈 귀족들을 규합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친과 함께 포르투갈의 독립을 위해 10년 넘게 꾸준히 포르투갈 귀족 사회를 장악하는 일에 매진했다. 물론 이민호가 내준 자금이 큰 도움이 됐다.
“공작! 내가 포르투갈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일을 오해하지 말게나. 나는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정복해서 지배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네. 비록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을 군대로 정복한 건 아니지만 비슷하단 말일세. 포르투갈이 독립하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도와주는 거라네.”
“알고 있습니다, 전하. 고산국은 일본이나 후금처럼 남을 침략하지만 않는다면 굳이 정복해서 다스리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포르투갈이 실론 서부와 브라질을 지배하면서 현지 주민들을 탄압하고 현지 종교를 박해한다는 소식을 자주 듣는다네. 그럴 때마다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지 의심이 들어. 포르투갈이 독립한 다음 해외 영토나 인도의 무역도시에서도 비슷한 일을 저지를 것 같아 걱정된다네.”
이민호는 포르투갈이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기 전에 이 문제에서 단단히 다짐을 받으려 했다. 중요한 시기를 앞둔 주앙 4세는 막강한 후원자인 이민호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실론과 브라질 일은 송구하게 됐습니다. 실론을 점령한 포르투갈 병력은 어느 정도 제 영향력 아래에 있으니 당장 침략을 멈추도록 지시하겠습니다. 브라질도 포르투갈이 국권을 회복하고 나면 원주민들을 동등한 포르투갈의 신민으로 대하겠습니다. 인도의 여러 무역도시도 마찬가지로 조심하겠습니다.”
“브라질 원주민들이 국가를 세워 독립하기 어려우니 조만간 좋은 일이 있은 다음에 공작이 선정을 베풀기를 기대하고 넘어가겠네. 앞으로는 다른 나라에서 잔인한 지배자로 행세하지 말게나.”
17세기 전후로 포르투갈은 해외영토를 많이 획득해서 제국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민호가 보기에 에스파냐 국왕의 지배 아래에서 불만이 팽배한 주제에 다른 나라를 열심히 침략하는 포르투갈의 꼴이 좀 우스웠다. 사실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고산국이 남미를 매입하던 시기에 브라질을 침공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입장이었다.
얼마 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브라질을 공격하지 못하게 막은 사람이 이민호라는 사실을 브라간사 공작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민호가 지분을 보유한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포르투갈령 브라질을 점령하는 편이 훨씬 나을 텐데도 예상과 전혀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브라간사 공작 주앙 4세는 이민호를 극도로 신뢰했다.
“전하!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말입니다. 만약 고산국 영역 내에서 어느 민족이 독립운동을 일으킨다면 전하께서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독립하고 싶다면 독립시켜 줘야지. 그 전에 국가를 세워 유지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제정신이라면 절대 고산국으로부터 독립하지 않겠지만, 권력에 영혼을 판 인간들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거짓말로 미혹시킬지도 모릅니다.”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자들도 마땅히 책임을 져야지. 신생 독립국의 백성이 되어 지배자들에게 착취당하는 것도 책임을 지는 방법이겠지.”
이민호가 씩 웃었다. 거짓말에 넘어간 백성들을 내버려두고 그들의 고난을 구경하는 것이 아주 잔인한 처벌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고산국 본토 영역 내에서 인구가 100만을 넘으면서 독립을 시도할 만한 민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여진족들은 원래부터 한 몸뚱이가 아니고 그것은 몽골 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원나라나 후금처럼 주변 부족들을 대거 흡수하지 못한다면 제국은커녕 독립국을 유지할 규모도 되지 않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유일하게 테우엘체 족이 인구는 적어도 자존심과 전투력이 강해 독립국가 건국이 가능했다. 그러나 안데스 산맥에서 구리가 대량으로 산출되자 너무 기뻐한 혜영이 미친 듯이 지원을 해줘서 테우엘체 족 사람들의 뇌리에서 독립할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규슈를 중심으로 한 일본을 제외하고 아이누와 토르구트는 본토가 아닌 속국이었으므로 독립하겠다면 얼마든지 밀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더 간절히 고산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원래 토르구트는 사회기반을 더 갖추도록 한 다음 독립시켜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타이지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전혀 원하지 않고 오히려 본토에 속하길 원했다. 타국 백성들에게 있어서 고산국 본토 백성이 되는 것은 극적인 신분 상승이며 속국 백성이 되는 것은 특권이자 행운으로 받아들여졌다.
영토가 광대하고 국가를 구성하는 민족이 다양하므로 건국왕 이민호가 죽은 다음 빠르게 분열하리라는 예상은 전혀 근거가 없었다. 고산국의 통신과 교통이 이 시대 기준으로 지나치게 빠르고 인종갈등 문제는 현대 미국보다도 훨씬 적기 때문이다.
건국 초부터 이민호가 통신과 교통 분야에 집중 투자하고 인종차별을 엄격히 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자 이후의 후세 군주들 중에서 연속해서 암군이 나오지만 않는다면 고산국 내부에 치명적인 균열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은 편이었다.
“고산국 국왕전하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포르투갈이 궐기를 할 정확한 시기는......”
“그만하게. 나는 모르는 일이네.”
“예, 전하.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독립한 후에 고산국의 국기를 포르투갈 국기의 좌상단에 넣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지는 말게나. 앞으로도 고산국은 에스파냐와 우호관계를 유지할 생각이니 서로 민망해지지 않도록 도와주게나.”
“알겠습니다, 전하. 약속대로 포르투갈 서해안에 좋은 항구를 내드리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하의 만수무강을 빌겠습니다.”
브라간사 공작 주앙 4세가 이민호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인 다음 돌아갔다. 공작은 알현실에서 나온 즉시 모자를 깊이 눌러 써서 정체를 감췄다.
나폴레옹 시대가 아직 멀었는데도 의외로 이 시대 유럽에 민족주의 운동이 알게 모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민호가 아일랜드와 포르투갈을 도와준 결정적인 이유였다. 물론 대서양을 고산국의 내해로 만들어줄 군항을 두 지역에서 획득할 기회이기도 했다.
- 고산국 국왕전하이십니까?
‘이름이 누구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통화 상대방은 통신관이 이미 알려주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잔뜩 상기된 목소리는 이민호도 기억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서 자정 가까운 늦은 밤에 무전을 받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유럽 왕족들은 대륙마다 시간대가 다르다는 사실을 배웠어도 도무지 전화, 혹은 무전 에티켓을 실천하는 법이 없었다. 보통 고산국 대사관을 통해서 이민호에게 무전을 치므로 그 전에 설명을 들을 텐데도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정 이전까지 왕궁에 무전을 칠 수 있도록 유럽 각국에 주재하는 고산국 대사관들에 훈령을 내렸다.
사실 이 시대에는 통신실 벽에 커다란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경도 30도마다 벽시계를 부착해놓은 고산국 왕궁이 더 이상했다. 왕도에서 태평양과 대서양 건너 유럽까지 장거리 전보와 무전이 가능한 것도 더욱 정상이 아니었다.
“구스타브인가? 나 고산국왕일세.”
- 전하! 정말 반갑습니다. 무전기라는 게 진짜 멀리서도 말이 통하게 만드는 기계로군요. 시간 지연이 약간 생기는 모양입니다만.
“우리 관전무관을 통해서 연락하고 있구먼?”
- 뭐라고요? 관전무관이 특별히 장갑차 시동을 꺼줬는데도 전하의 말씀이 잘 안 들립니다.
잡음이 심해 이민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인공위성이 없어서 독일 상공을 비행하는 정찰기가 통신 중계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덴마크 대사관 통신실에서 이 무선 신호를 증폭하는 방법으로 고산국 왕도와 무선통신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내가 외국의 전쟁에 중립인 건 알지? 섭섭하게 여기지 말게나.”
-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 뤼첸에서 제국군과 전투를 앞두고 있습니다. 제국의 명장 발렌슈타인이 총사령관으로 복직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우리 스웨덴군이 더 강하니까 실수하지만 않으면 가뿐히 이길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 동안 고산국 국왕전하의 도움이 컸습니다.
라이프치히 남서쪽 18km에 뤼첸이라는 작은 읍이 있었다. 주변 지형이 넓어서 이 시대에 유행하는 보병 방진을 갖추고 포병과 기병을 전개해 전투를 벌이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대인 1813년에도 이곳 뤼첸에서 양측이 도합 17만 이상을 동원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이 60만 병력을 동원하고 나폴레옹이 결정적으로 패한 라이프치히 전투와 다른 뤼첸 전투였다.
“이기더라도 총사령관의 신변에 위험이 생기면 안 돼. 몸조심하게나.”
- 저는 왕인 동시에 이 자리에서는 용맹한 스웨덴 군인들 중의 하나입니다. 전쟁터에서 군인이 죽는 게 뭐가 이상합니까? 오히려 영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민호는 근세 유럽 역사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군제를 개혁해 한동안 승승장구했지만, 독일 땅에서 전사한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 말을 듣게. 전쟁에서 승리하고 자네 뜻을 펼치기 위해서라도 꼭 살아남아야 해.”
-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자넨 신교도 연맹을 지원한다는 구실로 독일 내전에 개입했지만 기본적으로 외국 국왕이야.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단기간에 독일 땅 전체를 다 잡아먹겠다는 만용은 부리지 말게나. 욕심이 생기더라도 천천히 진행하게.”
- 좋은 조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친구 악셀도 제게 국왕전하와 비슷한 말을 했었습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재상이야. 악셀 옥센셰르나의 말을 믿고 따르게.”
갑자기 통신상태가 무척 나빠졌다. 이민호는 구스타브가 걱정돼 어렵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 혹시 제가 잘못되면 전하께 제 딸 크리스티나와 스웨덴을 부탁하겠습니다. 스톡홀름에 남겨두고 온 유언장에도 그렇게 써놓았습니다.
“그런 걱정은 접어두고, 위험 지역에 몸을 드러내지 말게.”
이민호가 말하는 중간에 송수화기에서 지직거리는 잡음이 계속되더니 통화가 끊겼다. 이민호는 정체 모를 불안감에 잠시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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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사자가 죽을 때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