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87화 (936/1,000)

00987    104. 제국의 길  =========================================================================

갈릴레오가 천문학에 혁신을 일으킬 저서를 발간했다. 그는 오랫동안 행성의 원운동을 신봉한 고집쟁이였으나 타원 궤도로 견해를 바꾼 다음 내행성의 역행에 관한 보다 정확한 예측치를 얻을 수 있었다. 책은 대화체로 구성됐고 정밀한 삽화와 함께 천문학 초보자들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했다.

고산국 출판국에서 이 책을 주요 언어로 번역해 전 세계에 배포했다. 과학이 앞선 고산국에서 번역 사업을 주도하자 지동설에 대한 반발이 대폭 줄어들었다. 이 책의 출간 이후 종교계 일부에서 지키고 싶어 하던 천동설을 지동설이 완전히 압도하고 말았다. 과학과 종교의 영역이 점차 분리되면서 종교의 세속적 영향력이 시간이 갈수록 급속히 약화됐다.

독일에서는 3월에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군대가 바바리아, 즉 바이에른을 공격해 들어갔다. 4월 15일 레흐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승리하면서 틸리 백작을 전사시켰다. 실제 역사에서는 부상이 악화된 틸리 백작이 4월 말에 죽지만, 고산국이 등장한 이래 총기의 화력이 약간 강화돼서 그 날 바로 전사했다. 5월에는 바이에른의 주도 뮌헨이 스웨덴군에 함락됐다.

“흐흐! 간식과 후식 종류가 이렇게 많다니. 너무 행복하다.”

왕도 고북 시에서 박람회를 개최했다. 고산국의 발전상을 국내와 세계에 선전할 산업박람회였지만 개장 첫 날 이민호는 별관인 의식주 생활전시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외국인들이 정밀기계류를 구경한다고 똑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전시 품목 선정에 여유가 넘쳤다.

“배 나와요, 주인님. 조금씩 맛만 보세요.”

“먹고 싶을 때 실컷 먹고 운동으로 빼지 뭐.”

“운동으로요? 설마요.”

이민호가 혜진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연신 포크질을 했다. 그리고 진작 영토를 넓히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베링해에서 어부들이 목숨을 걸고 잡은 왕게 찜, 알래스카 연안에서 잡은 연어, 남미의 구아바, 수마트라의 두꾸, 대추야자 중에서 최고라는 두바이의 칼라사 등 다양한 음식을 왕도까지 싸게 들여왔다.

케이크, 약과를 비롯한 세계 여러 가지 과자, 치즈나 과일 종류를 한 조각씩 먹고 식혜로 입가심한 다음 다시 본격적으로 집어먹었다. 공짜라서 더 맛있었지만 혜진이 자꾸 눈치 주기에 변명했다.

“내가 이렇게 많이 먹는 건 탄산수를 마셔 소화 효능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어.”

“핑계도 좋아요. 탄산수에 소화 효능은 없어요.”

조선 청주에서 대량 수입한 초정리 광천수와 깨끗한 지하수에 탄산을 가미한 탄산수, 단맛을 넣은 탄산음료가 다양하게 개발됐다. 레몬 등 과일 향을 가미한 제품도 개발했다. 고산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이제 물도 맛과 기분으로 먹는 시대가 왔다.

특히 콜라를 개발할 때는 이민호가 기억하는 맛을 내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코카 잎과 콜라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원액에 캐러멜과 각종 향료를 추가하고 탄산 농도를 조절해 3년 만에 결국 비슷하게 만들어냈다.

“탄산수나 탄산음료는 민간 회사에 개방하고 콜라는 각 지역 국영기업에서만 생산하도록 독점권을 줘.”

“왜 콜라만요? 카페인 때문에 위험해서 그러세요?”

“탄산음료는 향에 따라 시기별, 지역별로 인기가 갈리겠지만 콜라는 앞으로도 맛에 큰 변화를 줄 필요가 없거든. 장기적으로 각 주의 재정자립도를 올릴 상품이 될 거야.”

“아하!”

고대 국가들이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독점했듯이 주정부에 콜라 전매권을 넘기기로 했다. 주의 독립 가능성을 재정적으로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겠지만, 콜라는 수송비 부담 때문에 원액을 소비지역 공장에 보내 병이나 깡통에 포장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전시 상품보다 건물이 더 인기가 높겠어요.”

“주거용이나 관공서 건물로 쓰면 안 돼.”

박람회장은 왕도 남쪽 산기슭에 지은 유리 궁전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글라스 커튼 월 방식이 아니라 단순 철골구조에 유리를 입힌 것뿐이었다. 재료비 들인 것에 비해 화려해 보여 좋긴 했다.

유리 건물은 통풍과 보온 등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싸고 건축기간이 극히 짧다는 장점이 있었다. 예전에 유리가 비싼 귀물이었고, 사방에 천장까지 확 트인 특이한 건축 양식이라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열대 지역인 왕도, 그것도 남쪽 산자락에 막혀 햇빛 반사가 없다는 점에서 당장 단점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 이런 건물을 지으면 단점만 보이게 된다.

“여러 가지 단점을 알겠어요. 그래도 도시마다 하나쯤 있으면 좋겠어요.”

“응. 오후와 초저녁에만 사람들이 몰리는 백화점 건물로 괜찮겠어.”

정식 개장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일반 관람객들을 위해 이민호와 왕족들이 자리를 비워줘야 했다. 박람회장 입구에서 4km 떨어진 전철역까지 네 줄로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일반 백성들 사이사이에 외국 상인, 과학자들이 가슴을 조아리며 입장을 기다렸다.

몇 달 후 관람객 숫자가 줄어들 때쯤에는 여러 지역의 학생들에게 단체 관람을 시키기로 계획이 돼 있었다. 다들 고산국의 대표 도시 왕도 고북 시의 화려함을 눈에 담고 고향에 돌아갈 것이다.

왕도가 고산국의 평균이 아니라 최고 수준의 도시지만, 언젠가 여러 도시가 지향해야 할 발전의 기준이 된다. 왕도를 본 사람들에게 유럽이나 명나라의 대도시는 그냥 지저분한 시골 마을로 전락할 것으로 기대했다.

박람회 개최를 계획하면서 당연히 여러 지역에 분산 거주하는 백성들의 통일의식과 충성심을 고취시킬 목적이 가장 중시됐다. 앞으로 4년마다 주별로 박람회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축구협회를 비롯한 각종 체육협회가 주최하는 경기도 매년 전국 단위로 열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경기가 열리는 지역마다 몰려다니면서 고립주의나 지역 이기주의가 발생할 여지를 줄였다.

“국왕전하! 유럽 왕족들은 선거로 뽑는 국왕이라고 무시합니다만, 폴란드가 강대국이니만큼 국왕도 나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게다가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까지 지배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이오. 가끔 국왕이 왕좌를 버리고 고국으로 도망가고, 군대가 그 국왕을 붙잡으러 쫓아가지만 말이오.”

“하하! 헨리크 발레지 폐하는 예외 중의 예외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에서도 폴란드 왕위를 탐내지 않았습니까?”

폴란드에서 귀족 몇 명이 다시 왕도에 찾아와서 이민호에게 폴란드 국왕에 출마하라고 권했다. 이번에는 단숨에 거절하지 않고 일단 정중히 사양해서 폴란드 귀족들의 애를 태웠다.

폴란드 국왕 헨리크 발레지는 나중에 프랑스의 앙리 3세로 등극한 사람이었다. 폴란드 귀족들이 내민 문서에 내용도 모르고 서명한 헨리크 때문에 국왕의 권한이 크게 제한됐다고 알려졌다.

“나는 지금 대륙 몇 개를 경영하고 있소. 폴란드 같은 작은 나라에 신경을 분산하고 싶지 않소.”

“쿨럭! 폴란드는 작은 나라가 맞습니다.”

이 시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현대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에스토니아 북쪽 절반 정도는 현재 스웨덴이 점령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고산국의 주 하나보다 훨씬 작고 속국을 자임하고 있는 루스 차르국보다 작았다. 반면에 국내외적으로 꽤 복잡한 문제가 산재해서 딱히 왕위를 차지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게 만들었다. 일단 오스만 제국과 루스 차르국에 문의한 결과 폴란드와의 전쟁을 줄일 수 있다는 기대로 찬성 입장을 전달해왔다.

“나는 딱히 폴란드 왕위에 관심이 없소만, 유럽에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폴란드의 협조를 얻어야 할 것 같소.”

“유럽 철도 노선이 어떻게 계획되어 있는지요? 모스크바에서 바르샤바까지 철도를 연결하실 생각이십니까?”

“역시 대단하십니다. 하지만 폴란드 국왕으로 등극하셔야 이런 거대한 사업을 쉽게 추진할 수 있겠습니다.”

철도 건설 계획도가 그려진 지도를 가져와서 귀족들에게 보여줬다.

“보다시피 모스크바와 바르샤바를 잇는 것으로 끝이 아니오. 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프라하를 거쳐 프랑크푸르트, 파리, 마드리드, 리스본까지 연결할 예정이오. 바르샤바에서 남서쪽으로 비엔나와 베네치아를 거쳐 로마까지 이어지오. 바르샤바 남동쪽으로는 이스탄불을 거쳐 바그다드와 바스라, 최종적으로 아부다비까지 연결할 계획을 세워두었소.”

“오오! 철도가 이렇게 연결된다면......”

“그렇소. 철도가 완공되면 도시로는 바르샤바가, 국가로는 폴란드가 유럽의 중심으로 우뚝 설 것이오. 철도가 사방으로 뻗어나가 폴란드 국내 개발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오.”

폴란드 귀족들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유럽의 중심이란 말에 귀족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해군이 약해 발트해와 흑해의 제해권을 얻지 못한 폴란드는 육상교통에 눈을 돌렸으나, 대량 운송이 가능한 철도는 아직도 고산국의 전유물이었다.

물론 이 철도 노선도는 폴란드를 중심으로 그려진 1차 건설 계획일 뿐이었다. 2차 계획에서는 여러 노선이 이리저리 서로 연결돼 폴란드가 유럽의 중심이라는 인상은 사라지지만, 나머지 연결 노선은 의도적으로 지워버렸다.

“오스만 제국 노선에서 남쪽 지선은 알레포나 안티옥을 지나 다마스쿠스를 통과한 다음 텔아비브, 최종적으로는 카이로까지 연결할 예정이오. 텔아비브와 예루살렘 사이에 철도가 이미 건설돼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예! 예! 성지 순례가 아주 손쉬워지겠습니다.”

성지순례를 육로를 통해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유럽의 촌구석 동네가 졸지에 중심지로 변할 수 있다는 말에 귀족들의 사고가 마비됐다. 이들에게 이민호가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덧붙였다.

“철도 연결로 폴란드가 부강해지면 귀족들도 큰 부자가 될 것이오.”

‘큰 부자가 될 것이오.’라는 달콤한 말이 귀족들의 귀에 끝없이 맴돌았다. 이민호가 뭐라고 몇 마디 더했지만 폴란드 귀족들의 귀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들은 얼이 빠진 채로 폴란드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르샤바 의회에서 이민호의 국왕 선출을 위한 선거 운동을 맹렬하게 전개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세계적인 부자 이민호를 국왕으로 초빙해서 팔자를 고쳐보자는 파벌과, 고산국의 군사력이 너무 강해 위험하다는 파벌로 나뉘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왕권을 압도하는 폴란드 귀족들만의 특권을 계속 누리고 싶은 욕심이 아직 남아 있었다. 결국 왕권을 극도로 약화시킨 헨리크 조약을 폐기하는 문제가 대두됐다.

양쪽 귀족 세력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주 폴란드 고산국 대사관에서 반대파 귀족들에게 돈을 좀 뿌렸다. 반대파가 기대 이상으로 대거 찬성파로 돌아서서 보고를 받은 이민호가 당황할 정도였다. 불안해진 브와디스와프 왕자가 외가인 오스트리아를 들먹이며 난리를 쳤지만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

“아바마마께서는 정말 폴란드 국왕에 출마하실 겁니까?”

“왜? 세자는 싫어? 폴란드 왕위는 상속 안 하고 남에게 맡겨도 돼.”

헨리크 조약에 의해 왕위 상속이 부정됐지만, 그건 선거로 뽑는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도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의 세력이 분산돼 있기에 조금만 유화책을 쓰면 황제나 국왕이 얼마든지 아들에게 군주의 위를 물려줄 수 있었다. 실제 폴란드 역사에서도 브와디스와프 왕자가 부왕 시기스문드 3세의 왕위를 이었다.

“일이 많아질 게 걱정되긴 하지만, 아바마마 뜻대로 하십시오. 다만 아바마마께서는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 등을 분리하실 계획이신데 과연 폴란드 귀족들이 그 조건을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욕심쟁이들에게 강력한 당근을 제시해서 받아들이게 해야지. 농업개혁을 통해 수입을 서너 배로 늘려주는 대신 그 전에 농노를 해방시키라고 권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연방 헤트만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우크라이나를 자연스럽게 분리할 수 있을 것이다. 자포로제 코사크들과는 일전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딱히 폴란드 왕위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세자에게도 장기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분리, 독립시키고 폴란드에 공짜로 철도를 놓을 카드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앞으로 장기간의 기후 변화에 대비해 폴란드와 독일의 곡물 생산량을 증가시킬 필요가 있었다.

“철도나 선로는 외국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기관을 베껴서 만들려면 한참 세월이 걸리겠지요.”

“글쎄. 바퀴 제작도 당분간 쉽지 않을 거다. 어쨌든 유럽과 오스만 제국의 내륙 교통 사정이 극악해서 그 동안 무역 확대에 한계가 있었다. 여객은 그 지역 사람들이겠지만 기차에 실린 화물 거의 대부분이 고산국 상품일 것이다.”

철도가 통과하는 나라에 운임 일부를 제공해 철도 부지를 얻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철도 개통으로 인해 고산국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전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철도가 완공되면 유럽이나 오스만 제국에서 더 이상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지겠습니다.”

“그래. 명나라 땅에도 어서 철도를 놔야 하는데, 황실과 조정 입장에서는 농민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야 하니까 철도를 받아들일 수 없겠지. 저놈의 명나라가 도대체 언제 망할지 모르겠다.”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면서도 이익과 동시에 항상 인간을 생각하는 이민호였다. 1632년 상반기는 이렇게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2편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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