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84화 (933/1,000)

00984    104. 제국의 길  =========================================================================

“전하! 이집트 초대 국왕으로 훌륭한 왕자님을 선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석영 왕자님이 구사하시는 이집트 구어체 아랍어가 저보다 능숙하시더군요. 실현 가능한 정책부터 꾸준히 추진하실 계획이라 하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오랜만에 왕도에 왔군. 오크남 총독 대리도 그 동안 고생이 많았다.”

남자로서 지나치게 잘 생겼던 정옥남도 나이가 들면서 다행히 미모가 시들었다. 덕택에 왕도에서 얼굴을 내놓고 다녀도 기축옥사의 수괴 정여립의 아들임을 아무도 몰라봤다. 더욱이 아랍식 복장을 입고 다녀서 흔히 아라비아 토후로 오해하고 넘어갔다.

이집트 국왕은 예상대로 헤드비히 공주의 시녀, 요한나의 아들 석영이 최종 선발됐다. 브루나이 공주들의 아들 두 명이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내세워 도전했지만 종교는 국왕 선발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했다. 이민호는 이집트가 종교와 관련 없는 세속 국가가 되길 원했다.

물론 수월한 통치를 위해 신교도인 석영이 곧 무슬림이 될 예정이었다. 가톨릭이었던 석천이 핀란드 국왕이 되면서 신교도로 개종하고, 신교도였던 석영은 이집트 국왕이 되기 위해 무슬림으로 개종하게 됐다. 백성들을 국왕의 종교로 강제로 개종시키다가 반란이 일어나게 하는 것보다는, 백성들 다수가 신봉하는 종교로 국왕이 개종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이제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전하. 이만 퇴직해서 쉬고 싶습니다.”

“그 나이에 벌써 퇴임하겠다고? 이순신 상원수님을 봐! 오크남 자네가 퇴직하려면 아직 20년은 일러.”

시무룩해진 정옥남이 불쌍해서 다독여줬다.

“총독 대리를 위해 특별히 작은 땅을 알아봐두었다. 건국을 하기엔 아직 이르겠지만 그 동안 대리인을 고용해 천천히 성장시켜 봐라.”

“아닙니다, 전하. 국왕전하께서 제가 꿈꾸던 세상 그 이상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굳이 제가 나라를 세워 꿈을 펼칠 이유가 없으며 저는 더 이상 젊지도 않습니다. 거둬주시옵소서.”

“고산국의 속국으로서 큰 역할을 하게 하려고 준비해뒀는데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겠군.”

“그곳이 어딘지 몰라도 현지인들은 외부 지배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는 해남도나 이집트처럼 현지인들로 군사를 일으켜 영역을 지키는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마 대월 남쪽 땅이겠지요? 차라리 이집트에서 새 국왕을 돕는 편이 낫겠습니다.”

옥남이 젊었을 때 나중에 땅을 떼어줘 나라를 세우게 해주겠다고 이민호가 약속했었다. 옥남은 현대 사이공에서 호치민 시로 이름이 바뀐 그 도시 일대를 예상하는 모양이었다. 마닐라의 에스파냐 총독이 식민지 개발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던 곳이 바로 메콩강 하구 지역이었다. 그러나 옥남의 예상은 틀렸고, 이민호가 이 시점에 새로 속국으로 들일 지역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그럼 지금처럼 이집트에 있으면서 석영이를 돕게나. 자네 가족들도 다 카이로에 있지? 하지만 재상 일은 총독 대리일 때와 많이 다를 거야. 이집트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되면 몹시 바빠질 테니까. 내 아들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석영이가 전혀 만만치 않다네.”

“군주가 이미 준비돼 있으니 재상 일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그때 가 봐야 알 수 있겠지.”

석영이 이집트의 발전을 위해 준비한 정책들이 전혀 만만치 않았다. 물론 현지 사정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스원 댐을 건설하거나 나일 강 하구 농경지에 제방을 쌓는 얼빠진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북미 면화 때문에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 목화 재배 면적을 절반으로 줄여 최고급 면직물을 직접 생산할 계획이었다. 재배 면적을 줄여도 고용을 늘리고 부가가치가 더 커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632년 2월, 아프리카 왕국 대사관에서 므부투 국왕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보고했다. 조문이 될지 문병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전우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나중에 후회하느니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인도양에서 활동하는 해군 전단에서 상륙함과 경항모를 잔지바르로 미리 보내고, 이민호는 여객기 편으로 잔지바르 공항에 도착해 합류했다. 아프리카 왕국의 제1 수도 음지지마는 잔지바르 섬 남쪽, 동아프리카 해안에 있었다.

- 두두두두두두!

음지지마 왕궁 후원의 임시 착륙장에 직승기 10여 대가 차례로 내려앉았다. 남자 호위 50여 명이 먼저 주변에 자리를 잡고, 여자 호위 20여 명이 본궁 방향으로 길을 만들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황자 60여 명과 황후 200여 명이 도열해 고산국 국왕 일행을 맞이했다. 황자들은 고산국에서 최소 대학 4년 동안 유학이 의무화됐기에 대부분 이민호가 아는 얼굴이었다.

두 왕도 사이에 정기 항공편이 있기에 흑인들이 직승기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다만 이민호는 황후가, 그것도 수백 명이나 있다는 아프리카 왕국의 개념에 놀랐다. 몰라서 후궁을 황후라고 칭한 게 아니라, 여러 부족과의 결속을 위한 정치적인 의도였다.

“어서 가봅시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이민호가 바로 므부투의 병실을 찾아갔다. 거대한 석조 건물의 넓은 침실에서 근무하던 의료진, 호위병들이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는 가운데 이민호가 므부투의 병세를 살폈다.

“므부투! 정말 오랜만이야. 나를 알아보겠나?”

“국왕전하. 내 친구시여. 이렇게 누워서 전하를 맞이하게 되어 송구하옵니다.”

“므부투 자넨 언제나 내 친구야. 그대로 편히 누워 있게.”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는 므부투의 머리칼은 새하얗게 변했고 얼굴과 온몸에 주름이 가득했다. 몸에 뼈만 남아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주치의! 므부투 국왕의 지병이 뭔가?”

“노환이십니다, 전하.”

“엥? 나하고 동갑이라고 했는데, 므부투 자네 혹시 조로증인가? 아니면 나보다 열두 살이 많은가?”

이민호가 젊었을 때부터 지독히 노안이었던 므부투의 나이가 예전부터 항상 의문이었다.

“전하께서 예상하셨듯이 동갑이라고 해서 같은 소띠라는 뜻인 줄 알았습니다. 저는 전하보다 서른여섯 살이 많습니다. 그리고 고산국 군에서 안 받아줄까 봐 나이를 적당히 줄였습니다.”

“그렇게 많았어?”

“그 정도 나이 차이가 나더라도 친구로 괜찮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친구 먹을 때 므부투가 많이 양보했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나이가 이렇게 많을 줄 알았다면 아프리카를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므부투가 인생을 걸고 훌륭하게 대업을 완수했으니 이민호도 불만은 없었다.

“고맙네.”

“노예상인들이 활개 치는 아프리카 북서부를 깨끗이 밀어버리지 못한 죄인을 용서해주십시오.”

“아니야. 자넨 잘해왔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잘했어. 욕심내지 말고, 이제 나머지는 후계자에게 맡기게.”

므부투는 실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현재의 이민호와 비슷한 나이에 아프리카 왕국을 세워 30년 넘도록 줄기차게 정복과 부족 연합을 추진해 광대한 영토를 통합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 다시 돌아왔을 때 이미 50 넘는 나이였는데 수많은 후궁, 이른바 황후들과 결혼해서 자식들을 열심히 낳았다. 지금은 이민호보다 훨씬 많은 처자식을 거느렸는데, 아프리카 제국의 후계구도에 관심이 많은 이민호가 알기로 다들 제법 괜찮게 성장했다.

“예, 전하. 제 출신 부족의 관습대로 아들놈들에게 나라를 공평히 나눠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후계자 한 명에게 몰아주기로 했습니다.”

“잘 생각했네. 기껏 통일했는데 다시 분열시킬 수는 없지. 나머지 왕자들도 이해할 거야.”

“그렇습니다, 전하. 황태자여! 인사드려라. 너의 주군이시다.”

황자들 중에서 얼룩무늬 전투복을 입은 이십대 중반의 흑인 청년이 이민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키가 아주 큰 편은 아니었으나 체격이 다부지고 인상이 선해 보여 이민호도 안심했다.

그저 강해 보인다고 멍청한 깡패나 말만 잘하는 사기꾼을 차기 황제에 앉히지 않은 므부투의 눈높이에 이민호는 몹시 고마웠다.  나이로 미루어 그저 나이 많은 장남을 뽑은 것도 아니고, 수백 명이나 되는 황자들 중에서 고르고 고른 인재임을 알 수 있었다. 므부투도 제국을 일궈낸 영웅으로서 평생 수많은 사람들을 다뤘으므로 이민호는 그의 사람 보는 눈을 믿기로 했다.

“예! 황제폐하! 고산국 국왕전하께 아프리카 제국 황태자 므부투가 인사 올립니다. 송구하오나 고산국이 상국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으니 호칭은 괘념치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래. 늠름하고 지적으로 생겼군. 앞으로 좋은 국왕, 아니 황제가 될 것 같아서 다행이야. 아프리카 대륙 최강의 대국이며 여러 왕국들을 속국으로 거느렸으니 당연히 제국이 돼야겠지.”

므부투를 따라 황족들은 고산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고산국어는 황실 외에도 아프리카 제국 흑인들이 사용하는 수백 가지 언어들 사이의 통역을 위한 가교, 링구아 프랑카 역할을 담당했다.

흑인들은 출신 부족에 따라 최소 서너 가지 언어를 배워야 했는데 고산국어를 비롯해 통역을 위한 공용어 다섯 가지가 생김으로써 부족들 사이 의사소통의 효율성을 크게 높였다. 현대 아프리카 국가들이 유럽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나서도 기존 식민 종주국 언어가 공용어로 지정되는 이유였다.

므부투가 노예로 잡힐 때 출신 부족이 와해됐고, 그 부족이 쓰던 언어가 워낙 소수 언어라서 므부투가 자기 언어를 백성들에게 강제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반투어군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언어 3개와 동부 해안지대의 스와힐리어, 고산국어, 이렇게 다섯 가지 언어를 제국 공용어로 지정했다. 아랍어는 일부 무슬림들 사이에서만 통용됐고, 고산국어는 통역용 외에 상인과 학자들의 언어로 쓰였다.

“황송하옵니다. 고산국도 조만간 제국을 칭할 것으로 믿습니다.”

“상관없어. 고산국 국왕은 현 아프리카 제국 므부투 황제로부터 후계자 지명을 받은 황태자 므부투를 차기 황제 므부투 2세로 인정하겠다. 므부투 황제가 재위했을 때처럼 앞으로도 두 나라가 서로 돕는 우방국이 되길 바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고맙습니다, 나의 오랜 친구시여.”

이민호가 므부투의 앙상한 손을 꼭 잡았다. 노예사냥꾼들에 의해 망해버린 옛 부족과 가족을 생각하는지, 아니면 못 다한 과업을 안타까이 여기는지 눈주름 사이로 회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날 저녁 므부투가 숨지고, 다음날 아침 황태자가 므부투 2세로 즉위했다. 이민호가 직접 대관식을 주재해 새로운 황제의 머리에 화려한 금관을 씌워주었다.

닷새 후 장례식에 전사 20만과 일반 백성 100만이 모여들었다. 아프리카 대륙 남북과 동서로 뻗은 철도를 통해 지금도 수십 만 명이 더 몰려오는 중이라 했다.

병사들은 전투복을 입고 부사관과 장교들은 흰 예복을 입었는데 다들 아주 강인해 보였다. 일반 백성들도 잘 먹어서 혈색이 좋고 화려한 원색의 옷을 입었다. 백성들이 어린아이까지 다들 가죽샌들 종류의 신발을 신어서 다행이었다.

다만 며칠째 하늘을 향해 울며 절규하느라 백성들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흑인들이 처음 가져보는 성군으로서 므부투가 가는 길이 섭섭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민호가 확성기 수화기를 잡았다.

“므부투 황제는 북위 4도 이하의 광대한 아프리카 대륙을 통일하고 노예상인들이 웅거하는 북서 해안으로 진군할 발판을 마련하는 대업을 이룩했다. 전 세계에서 노예제는 곧 사라질 것이며, 흑인들은 아프리카 제국의 영도 아래 행복한 날들을 맞이할 것이다. 위대한 므부투 황제를 위하여, 묵념!”

메카토르 도법의 한계로 열대지방이 실제보다 작아 보이지만 콩고 하나만으로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영토보다 넓었다. 빽빽한 밀림과 풍토병이 만연한 늪지대를 2천 km나 돌파해 동서 횡단을 한 아프리카 제국의 힘을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통일전쟁 중이라 그 동안 민생을 등한시한 줄 알았는데 뜻밖에 므부투는 내정도 잘 돌보고 있었다. 농촌에도 흙집이나 오두막은 찾아볼 수 없고 벽돌이나 최소한 돌로 벽을 세워 집을 지었다. 의료 외에 교육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이 분은 아프리카 제국의 새로운 황제 므부투 2세이시다. 노예제도 근절과 아프리카 통일이라는 부황의 업적을 완성하고 모든 흑인들을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어주실 분이다. 새로운 황제 므부투 2세를 위해, 만세!”

“만세에~ 만세에~ 만세에에에에~”

저 멀리 지평선 끝까지 늘어선 흑인들이 내지르는 만세 소리가 메아리를 불러일으켰다. 흑인들이 보라고 일부러 이민호가 새 황제와 악수를 나누었다. 다양한 의미를 가진 악수였다.

흑인들의 열망을 새로운 황제가 이뤄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래를 몰라 불안하더라도 인간은 그저 오늘도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가 내용전개가 바빠 살려두었던 므부투가 드디어 죽을 틈을 찾았습니다. 2편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