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81화 (930/1,000)

00981    104. 제국의 길  =========================================================================

“저번에 페르시아의 미친 왕이 국서를 보내 국왕전하께 헛소리를 늘어놓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군주는 그 나라의 얼굴이며, 군주에 대한 모욕은 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만 국왕전하께서는 조금 다르신 것 같습니다.”

“됐소. 내가 모욕을 참는 대신 국가가 이익을 챙기면 그만이오.”

“과연 국왕전하이십니다.”

페르시아 샤한샤가 이민호에게 직접 입조하라는 건방진 요구를 했는데도 꾹 참았다가, 페르시아 대재상으로부터 꽤 큰 선물을 받아냈다. 쿠웨이트 북쪽, 바스라를 기점으로 그 남쪽과 남동쪽, 샤트 알 아랍 강 이남 지역 전체를 할양받은 것이다.

이곳은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가 전쟁을 진행하면서 1625년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페르시아 영토가 된 것도 아니었고 전쟁 와중에 그 지역 유목민 족장들이 얼떨결에 독립 세력을 구축한 지역이었다. 어떻게 보면 페르시아가 남의 땅으로 선심을 쓴 셈이었다.

페르시아는 이 지역 족장들을 구슬리거나 추방하거나 모두 고산국의 선택에 맡겼다. 한때 오스만 제국 영토였다는 사실을 께름칙하게 여긴 예조에서 이 사실을 오스만 제국에 문의했더니, 영토 획득을 축하한다는 인사와 함께 샤트 알 아랍 수로의 자유통행권을 요청했다.

이민호는 페르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고산국에게 이 작고 골치 아픈 황무지를 떠넘겨 샤트 알 아랍 강을 영구히 통행이 자유로운 국제하천으로 만들려는 의도라고 판단했다. 고산국을 포함한 세 나라의 이익이 합치된 셈이다.

어쨌든 막대한 석유 매장량을 가진 이 지역이 저절로 굴러들어와 이민호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스위스 용병 1개 대대를 바스라에, 연안 경비정 1개 편대 3척을 샤트 알 아랍 강에 즉각 파견했다. 아부다비에 1개 중대만 보낸 것과 차이가 컸다.

장기적으로 바스라를 고산국이 주도하고 세 나라가 함께 운영하는 국제 항구로 변모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무역으로 얻을 이익보다 땅 속에서 잠자고 있는 석유가 훨씬 큰 가치를 가졌다.

“국경선 협상이 끝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저는 왕도에 오기 전에는 전하께서 대명이 곤란을 겪고 있는 시기를 이용해 요하나 대능하를 국경선으로 정하자고 하실 줄 알았습니다. 예부 관료들도 그에 관한 자료를 많이 준비했었습니다. 조정 신료들 중에는 심지어 전하께서 산해관 동쪽을 모두 내놓으라고 윽박지를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옛날부터 대명이 건주 여진을 상대로 죽기 살기로 요동을 지킨 것을 아는데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할 리가 있겠소? 요동이 옛날 고구려 땅이라 하나 지금은 한족 백성들이 더 많이 살고 있으니 현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국경을 정하는 수밖에요.”

속으론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굳이 전쟁을 해가면서 영토를 늘릴 이유도, 여력도 없었다. 21세기 미국처럼 굳이 침략을 해서 영토를 늘리지 않더라도 원하는 방향으로 외국을 조종할 수 있다면 그로 족했다.

“매우 합리적인 판단이십니다만,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할지 우려스럽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좋은 기회에 명나라 영토를 많이 취하지 못하셨다고 비판을 받고, 저는 지나치게 많이 내줬다고 비판을 받을 것 같습니다. 영토 교환으로 단 한 뼘의 땅도 늘고 줄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후대 사람들은 편하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이 시대 기준으로는 우리가 결정한 국경선이 최선이라 믿겠소.”

사실 명나라의 위기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민호가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지은 셈이었다. 고산국 영역이 이미 충분히 넓어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다거나, 이민호 개인이 영토적 야심이 크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영토가 쓸모없다고 판단하더라도, 그 판단할 기회를 후세에게 줘야 한다는 주장이 옳을 수도 있었다. 조상의 실지 회복은 후대의 의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백성과 국가 자산을 전쟁으로 몰아넣어 소모시키고, 이후 계속해서 땅을 빼앗긴 나라와 원수로 지내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국가를 직접 운영하다 보면 그저 쉽게 말할 수 있는 개인보다 책임감을 훨씬 크게 느끼기 마련이었다.

“전하! 복건 말씀입니다만.”

“왜 그러시오? 혹시 복건에 주둔한 고산국 군대가 천조의 백성들에게 민폐라도 끼쳤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군기가 엄정한 고산국 병사들이 민폐를 끼칠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이왕이면 고산국 해군도 바다 건너 복건에 주둔시켜 주십사 하고 말씀드립니다.”

“아! 요즘 절강과 광동의 해적들이 복건 해안 마을을 노략질한다는 보고를 들었소.”

명나라 조정에 돈이 없어서 복건과 절강 등의 수군을 전폐했더니 해적이 발호하고 있었다. 이것을 잡아달라는 소리였다.

해적은 고산국이 매년 토벌해도 그 다음 해가 되면 새로 생겼다. 고산국 해군은 홍콩 일대와 복건성 복주와 금주 등 항구도시 주변만 토벌했기에 다른 지역 해안마을들은 해적의 노략질로 인해 고통 받고 있었다. 영해나 작전권 문제가 있어서 함부로 나서기도 어려웠는데 명나라가 먼저 요청한다면 차라리 잘 됐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천조 남방의 해적은 상업에 의존하는 고산국에게도 큰 위협이오. 작전에 드는 비용을 분담해준다면 대명 남해안의 해적을 소탕해 주겠소.”

“그 작전 비용을 분담할 능력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흠! 천조의 급박한 사정은 알겠지만 토벌 비용을 우리가 전담한다면 총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말이오.”

예산권을 쥐고 흔드는 자가 진정한 권력자였다. 꼼꼼한 아내에게 월급통장을 맡기면 집안 살림이 피겠지만, 그 대신 남편은 돈 벌어오는 기계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이민호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정부 재정과 왕실 재정, 국왕 개인 계정을 명확히 분리한 다음 혜영에게 정부 재정과 총리를 맡겼다. 그러나 자국 영토를 보호하는 일도 아닌 명나라 남해안의 해적을 소탕하는 일에 군 예산을 쓴다면 이민호도 혜영에게 눈치 볼 수밖에 없었다.

“반란을 진압하는 일에도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동림당의 어느 관리가 모든 관료들이 일정액의 재산을 조정에 헌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오호! 천조에는 충신들이 많구려.”

실제 역사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부패가 만연한 명나라 조정 관료들이 진짜로 전 재산, 혹은 재산 일부를 헌납한 경우는 없었다. 대부분 관료들이 그런 제안을 무시하거나, 겨우 한 달 녹봉도 되지 않는 적은 금액을 내면서 생색을 있는 대로 내고 다녔다.

“그런데 그 관리가 황실에서도 홍콩행정청의 지분 일부를 양도해서 반란 진압 비용을 마련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황상께 진주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다른 이유로 능지처사 형을 당했습니다.”

“어허!”

누구에게나 재산은 소중했다. 그러나 국가의 중요한 일에 군주가 개인 재산을 아낀다면 신하들에게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신하들이 재산 일부를 바치지 않더라도 말이다.

홍콩은 국제무역항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고산국 왕도의 외항 역할을 담당하는 아리수 항보다 거리도 가깝고 범선이 물길을 타기에도 좋아 곡물과 석탄 등 부피가 큰 물자는 모두 홍콩 쪽으로 몰아주었다. 작고 비싸고 가격 변동이 큰 것은 아리수 항에서, 크고 무겁고 가격이 일정한 것은 홍콩에서 전담하는 식으로 분업화했다. 물론 아리수 항이 물량에 비해 훨씬 알토란같은 항구였다.

명나라 황실에서 홍콩 개발과 관련해 보유한 지분 덕택에 황실이 예전보다 훨씬 부유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숭정제가 의외로 구두쇠 기질이 있어서 자기 것을 넘보는 신하들을 몹시 미워했다.

“그런 극형을 내리다니, 군주에게 미움을 받은 충신의 최후로군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래서야 어찌 충신이 바른 말을 상주하겠습니까?”

<실록> 1597년 2월, 정유재란이 발발한 해에 함경 북병사 오응태가 어명에 의해 휘하 병력 절반을 한성에 보낸 이후, 오랑캐의 침범이 우려된다며 길주 이북 9개 고을의 내수사 노비들을 군역에 충당하자고 조정에 건의했다. 내수사 노비는 왕실과 국왕의 개인 재산이었다. 이들은 군역을 부담하지 않고 수입도 높았으므로 양인 처녀들에게 신랑감으로서 양인 총각보다 인기가 높았다.

선조 임금이 이 건의를 처음에는 윤허하는 척하다가 거부하자, 오응태가 한성에 파견했던 병력을 함경도로 귀환시켰다. 두만강 너머 여진족들 분위기가 뒤숭숭해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그러나 열 받은 선조는 오응태가 비천한 사람이라는 둥 북병사로 제수할 때부터 불만이 많았다는 둥 별의별 이유를 들어 결국 파직시켰다.

그리고 1597년 12월, 비변사에서 전직 고위 무관들을 한성으로 불러 거주시킬 때 오응태가 명예직인 영직을 보유하지 않고 있어서 요미(料米)를 지급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비변사가 선조 임금에게 허락을 구했으나 선조는 법이 아니라고 요미 지급을 거부했다. 그 실록 기사 아래 사신 논에서 ‘술사(術士)인 의인(醫人)에게는 작록을 주고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재신(宰臣)이나 무장(武將)은 법규에 구애받아 채용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어찌 힘을 다하려 하겠는가.’라면서 비판했다.

이후 선조 임금은 오응태가 인사 물망에 오를 때마다 꼼꼼하고 집요하게 개입해서 엿을 먹였다. 노량해전이 끝나고 명나라에 승첩을 보고할 때는 충청수사 오응태가 직접 참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참전자 명단에서 빼버리기도 했다.

“이제 보니 고산국 말이 많이 느셨소. 원 순무는 혹시 한글도 읽을 줄 아시오?”

“물론입니다, 전하. 고산국 말은 어렵고 한글은 극히 쉽습니다.”

이민호가 보고서 한 권을 원숭환에게 내밀었다. 원숭환이 표지를 읽고 놀란 다음 목차가 수록된 서너 장을 넘겨 요약본을 훑었다.

“제목에 있듯이 이 보고서는 이번 후금 정벌 작전에 소요된 비용을 집계한 것이오. 보병 위주였던 덴마크 원정 때보다 네 배나 돼서 한숨이 나온다오.”

“와! 고산국 금화 4억 원이라면 은으로 1억 냥이 넘습니다! 고산국이 원정 때 드는 비용이 많은 줄은 예전부터 알았는데, 실로 어마어마한 재원이 소요되는군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고산국은 돈으로 전쟁을 한다오. 고산국의 장군과 관료들은 평화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소.”

물론 탄약 가격을 열 배 이상 부풀리고 항공기와 기갑차량의 감가상각비를 넉넉하게 배정했기에 이런 천문학적인 비용이 나왔다. 기병사단과 항공대, 동맹 기병들에게 지급한 승전수당, 기차로 수송한 비용, 후금 포로들의 호주 이주비와 정착 비용도 원정 비용에 모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 금액도 4분의 3 이상이 정부 재정과 왕실 재정, 혹은 이민호 개인 계정 사이로 오가는 숫자상의 변동에 불과했다. 결국 오른쪽 주머니에서 왼쪽 주머니로 옮기는 숫자 장난이었다. 그래도 기계화된 고산국 군의 원정 비용이 다른 나라에서 행하는 동일 규모의 원정에 비해 몇십 배나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 보고서를 제게 몇 권 주신다면 황상에 대한 고산국의 충정을 조정에 널리 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황상께도 바칠 보고서였소. 한역이 곧 끝날 테니 그 보고서도 함께 갖고 가시오. 그리고 해적 토벌은 올해까지만 고산국 해군 예산으로 진행하겠다고 전해주시오.”

“감사하옵니다, 전하. 국왕전하의 충심은 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이민호가 후하게 인심을 썼다. 그러나 요동 절반 이상을 받고 몽골의 사막과 초원 일부를 내주면서 얻은 이익에 비하면 훨씬 싼 편이었다. 나진항을 조선에서 빌리지 않고도 여진주에 부동항이 생겼다는 사실도 중요했다. 그리고 후금 정벌에 든 비용이 명나라에 자세히 알려진다면 원숭환과 함께 논의한 국경조약이 추가 협상이나 내용 변경 없이 추인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봤다.

명나라도 주둔 비용 부담이 적었다면 쉽게 내놓지 않을 지역이 요동이었다. 하지만 일단 반란 진압이 급하다 보니 요동 지역을 고산국과 나누게 되었다. 명나라가 어떻게 되든 말든 앞으로 문제가 될 소지를 깨끗이 정리했다는 점에서 이민호는 마음이 무척 가벼워졌다.

9월 12일부터 13일까지 벌어진 슬라크 해전에서 함선 약 100척을 동원한 에스파냐 함대가 50여 척의 네덜란드 함대에게 거의 전멸을 당하고 포로 4천 명이 붙잡혔다. 이렇게 표현하면 넓은 바다에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진 듯하지만 상황은 일반적인 상식과 전혀 달랐다.

네덜란드와 현대 벨기에 접경지역 서쪽은 섬과 해협, 암초와 작은 강이 도처에 산재한 지역이었다. 에스파냐 군대는 안트베르펜에서 나룻배 백 척에 병력 5,500명을 가득 실어 로테르담 남쪽 구레-오버플라케 섬에 기습 상륙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작전 계획이 사전에 누출되고, 급히 모은 네덜란드 나룻배 함대가 에스파냐 나룻배 함대의 진로를 차단했다. 에스파냐군은 안개 자욱한 밤에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한 다음, 다른 지점을 목표로 변경해 상륙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용병으로 구성된 1개 연대 2천 명과 네덜란드 농민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분산된 채 차례로 상륙해오는 에스파냐군을 거의 모조리 붙잡았다.

이 시대 해전에서 붙잡힌 포로를 처분하는 일반적인 관습은 갑판에서 늘어뜨린 널빤지 끝까지 포로를 걷게 한 다음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암스테르담의 해사위원회는 에스파냐 포로 4천 명에게 그런 처분을 결정했으나 오라녜공이 급히 전령을 보내 참사를 막았다.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네덜란드가 평화협상을 진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물론 협상은 결렬됐다.

============================ 작품 후기 ============================

이어지는 내용이라 오늘은 2편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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