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77 104. 제국의 길 =========================================================================
올해 들어서 왕도에 오는 칙사들은 기본이 오체투지였다. 그리고 무조건 눈물을 흩뿌리며 이민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려 했다. 오늘도 칙사가 기어서 옥좌에 다가오기에 이민호가 발로 머리를 밟아 밀어내고, 호위 두 명이 칙사의 두 다리를 잡아 질질 끌어냈다.
자부심 강한 태감들이 이렇게 자세를 낮추는 것을 보아 명나라가 다급하긴 한 모양이었다. 남몽골에서 후금이 만리장성을 수시로 공격하는 바람에 삼변총독으로 내정된 홍승주와 다른 성(省)의 순무들이 농민반란군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왕전하! 제발 농민반란군이나 후금 둘 중 하나만 해결해주십시오. 이렇게 머리를 찧어가며 비옵니다.”
“어허! 황상폐하의 제후로서 도적을 잡는데 힘을 보태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섬서와 몽골은 바닷가에서 너무 멀다니까?”
현재 명나라는 후금이 요동과 요서를 점령하고 영원성을 우회해 산해관을 노리던 실제 역사보다 상황이 훨씬 나빴다. 농민반란이 원래 역사보다 더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산국은 식량을 싼 값에 제공하고 만리장성 둔전에서 키울 내한성 볍씨를 제공하는 등 꾸준히 명나라를 도왔다. 하지만 원래라면 명나라가 차지했어야 할 무역 흑자의 상당 부분을 고산국이 가로챘기에 명나라 조정은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고 백성들은 세금으로 낼 은을 구할 수 없었다.
명나라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도자기와 비단, 차가 고산국과의 품질 및 가격 경쟁에서 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또한 유럽 상인들이 열광적으로 주도하던 금과 은 재정거래에서 생기는 은의 대량 유입도 사라졌다. 고산국의 존재 자체가 명나라의 경제 상황을 크게 악화시키고, 이것이 농민반란의 확대로 나타난 것이다.
“국왕전하께서는 만력 연간에 영하까지 가서 보바이의 몽골족 반란군을 제압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배 타고 말 타고 간신히 갔었는데 병참 문제로 소규모 병력밖에 못 보냈지. 지금은 병참소요가 더 늘어나서 그때보다 많이 못 보내. 그런데 몽골이나 농민반란군이나 기본이 5만이잖아?”
이민호가 들은 척도 않자 칙사로 온 태감이 기어코 회심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태감의 제안은 몹시 실망스러웠다.
“황명으로, 국왕전하께 복건을 드리겠습니다!”
“엥? 저번보다 줄었네?”
“국왕전하의 영지로 드리는 게 아니라 고산국의 영토로 드리겠다는 말씀입니다. 고산국에 필요한 땅은 해협 건너편이면서 차밭 경영이 가능한 복건뿐이지 않습니까?”
“필요 없어. 어차피 차밭은 산지의 일부에만 분포하니까. 그런데 요즘 차 도둑이 들끓더군.”
이민호가 노려보자 태감이 움찔했다. 차밭 일꾼들이 찻잎을 옷에 숨겨 훔쳐가는 것 정도는 애교였고, 간수군들이 얼마든지 눈감아줄 수 있었다. 작은 도둑을 잡으려고 검색을 철저히 하다가 자칫 일꾼들이 집단으로 태업하거나 봉기를 일으키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민호가 그런 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천여 명 단위로 떼를 지어 발효 창고를 습격한다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졌다.
고산국 왕실에서 대규모로 경영하는 차밭 덕택에 일자리가 많고 식량 사정도 넉넉한 복건에서 민란이 일어나거나 떼도둑이 횡행할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그래서 환관들이 운영하는 비밀정보 조직인 동창이 유민들을 배후 조종해 차 발효 창고를 습격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발효 창고 하나만 제대로 털면 명나라 웬만한 성(省)의 일 년 세입을 넘는다.
그러나 간수군 100여 명이 떼도둑 천여 명을 가뿐하게 물리치자 명나라 조정이 큰 충격을 받았다. 간수군이라고 해서 고산국 군대가 보유한 단발총이나 연발총으로 무장한 것도 아니고 유민들과 똑같은 화승총에 날붙이 무기를 사용했다.
그럼에도 도둑들이 일방적으로 당한 어이없는 결과가 나타난 것은 구르카 용병들이 오랜만에 힘을 좀 썼기 때문이다. 간수군 100명에게 단시간에 300명 정도가 바로 썰려나가자 나머지 도둑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도주 중에 다시 200명 정도가 생포돼 탄광으로 직행했다.
“몽골 동부와 북부, 서부가 고산국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산국이 몽골 남부의 후금을 제압해주고, 그 대신 몽골 전체를 고산국의 영토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 자리에 몽골인들이 없는데 누구 마음대로 몽골 영토를 처분해? 몽골을 내가 가졌다 치자. 그럼 내가 몽골 초원에서 양을 키울 거야, 소를 키울 거야? 몽골 땅은 내게 별로 필요가 없어.”
공업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규슈에서 산출되는 구리로 부족해 한때 몽골의 동광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안데스 산맥에서 대규모 노천광산을 개발한 이래 이제는 구리를 구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국왕전하! 몽골 여러 부족의 족장들이 왕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하! 그 사람들은 칙사와 비슷한 제안을 하러 왔는데, 별 필요가 없어서 거절하고 있어.”
“대명의 억조창생과 초원의 야인들이 한 마음으로 국왕전하께 청하고 있지 않습니까? 홍타이지라는 한 마리 미친개를 제거하여 천하를 편하게 하소서!”
이번 칙사는 꽤나 집요했다. 그리고 이민호가 기다리던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부러 한숨을 깊이 내쉰 다음 호위를 시켜 지도를 가져오게 했다.
“그럼 국경을 정하자. 후금을 정벌한 다음 대명과 몽골의 국경은 장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동의하나?”
“황, 황공하여이다, 전하!”
“좋아. 현재 대명이 수축하거나 재건한 장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중간에 끊긴 곳이 있으면 강이나 산 같은 자연지물을 경계로 이용하고, 황무지일 경우 기존 장성에서 가상의 선을 연장해 국경을 정하기로 하지. 자세한 것은 실무자들에게 맡기세.”
만리장성의 위치는 현대 중국의 북쪽 국경보다 훨씬 남쪽이다. 만리장성을 국경으로 정하면서 농사가 가능하고 기름진 초원이 펼쳐진 현대 내몽골 전 지역이 고스란히 고산국 영역으로 들어오게 됐다. 물론 고비사막도 고산국 영토로 들어왔다.
“국왕전하의 합리적인 제안에 동의하옵니다! 그리고 감사하옵니다, 국왕전하!”
임무를 완수하게 된 칙사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황명을 받은 대로 복건성도 고산국 영토로 하자고 졸랐으나 이민호가 조건을 달아 거절했다.
차라리 요동반도를 준다면 이민호가 좋아했겠지만, 북경의 방위를 신경 써야 하는 명나라가 그런 조건을 제시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 입장에서 현재 요동 방어선이 지나치게 얇고 길기 때문에, 나중에 북경 북쪽 땅을 명나라에 내주고 그 대신 요동을 고산국이 갖는 영토교환 협정도 생각해두었다.
동해여진에는 루스 차르국처럼 부동항이 없어서 매년 겨울마다 상품, 특히 모피 수송에 큰 차질이 생겼다. 그래서 조선에서 두만강 하구 남쪽 땅 일부를 할양받고 그 대신 두만강이나 압록강 북쪽 땅을 조선에 넘겨주는 영토교환 조약을 구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쇄빙선 두 척을 진수한 다음 그런 문제는 싹 사라졌다. 차르에게 시집간 마르그레타가 제발 쇄빙선을 팔아달라고 이민호에게 사절과 편지를 연달아 보냈다.
“복건은 차밭으로 충분해. 다만 요즘 차 도둑 때문에 불안하니까 복건성에 한해 조정의 허락 없이 고산국 병력이 자유롭게 이동하거나 주둔, 혹은 작전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게 어떤가? 복건성의 행정과 치안은 여전히 대명에서 맡아야 할 것이야.”
“그렇다면 대명의 영토는 단 한 치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고산국 국왕전하께서는 과연 대명의 충신이십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전하!”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린 칙사가 절을 하고 돌아갔다. 정식 국경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예부 고위 관료가 실무진을 대동하고 왕도를 곧 방문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이민호는 명나라와 조선의 영토에 전혀 욕심을 내지 않았다. 복건 차밭은 황제에게서 상으로 받았고 울릉도와 독도는 조차하는 조건으로 매년 꼬박꼬박 값을 지불했다. 해남도는 이국공의 영지로 하사받았고, 세금 일부를 명나라 조정에 바쳤다.
그래서 이민호는 두 나라로부터 높은 신뢰를 받는 입장이었다. 괜히 작은 땅을 욕심냈다가 나중에 큰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다음 날 왕도에 체류하고 있는 몽골 족장들을 왕궁의 대전으로 불렀다. 족장들끼리 서로 사이가 안 좋은 듯 널찍널찍하게 늘어섰다.
북몽골과 동몽골의 할하부는 고산국의 강한 영향권 내에 들어온 지 오래됐으며, 서몽골 오이라트부는 북서쪽으로 이주한 일족인 토르구트의 성공에 잔뜩 고무돼 있었다. 토르구트를 맹주로 삼아 오이라트 부족들 전체가 고산국의 속국인 토르구트라고 우기자는 제안이 높은 지지를 받을 정도였다. 다만 차하르부를 비롯한 남몽골 부족들은 후금과 결혼동맹으로 엮여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탱그리가 내린 대칸이시여! 어리석은 초원의 백성들이 위대한 대칸께 인사 올립니다.”
“잘 오셨소. 명나라의 요청으로 후금을 치기로 했소. 후금을 정벌하면서 명나라와 몽골의 국경을 정하게 됐으니 여러 부족에서 병력을 적당히 동원하시오. 싸움이 끝나면 몽골 전체를 고산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일까 하오.”
“대칸이시여! 몽골이 고산국의 본토 영역이 된다는 뜻이옵니까?”
한때 유라시아 대륙이 좁다고 활개 치던 몽골족이 곱게 고산국에 흡수되리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물어보는 몽골 족장이 무서워서 이민호가 좋은 말로 조심스레 대답했다.
“몽골은 예전 원나라 때에 비해 세력이 너무 많이 줄었소. 그러니 당분간 속국으로 있다가 힘을 기른 다음 적당한 시기에 독립하는 게 좋지 않겠소?”
“대칸이시여! 저희 몽골 부족들끼리 지난 수백 년 동안 싸워왔습니다. 몽골을 고산국의 속국으로 만들 경우 지금처럼 계속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몽골을 고산국의 본토 일부로 삼아주십시오. 이왕이면 본토에 속해야 기본 소득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하! 본국과 속국에 그런 차이가 있었군요. 현재 몽골 인구가 다 합해서 백만이 살짝 넘는 줄 아는데, 총리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총리 혜영의 눈길이 잠시 허공에 가 있었다. 어제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몽골을 속국의 지위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었다. 몽골을 고산국 본토로 받아들일 경우의 장단점을 두고 머리를 맹렬하게 굴리던 혜영이 입을 열었다.
“북쪽 땅이 너무 넓으니 몽골주, 여진주, 동서 시베리아주로 나누면 적당하겠어요.”
“본토의 내정을 총괄하는 총리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오. 족장들은 알아들었소?”
“감사하옵니다, 대칸이시여!”
족장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몽골인들은 이제부터 ‘네 살 된 황소의 꼬리가 얼어 부러지는 추위’가 겨울 내내 찾아와도 굶주리지 않게 됐다. 그리고 남몽골에 넓게 분포된 노천탄광을 개발해 화력발전소를 세운다면 매년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고산국 영향권 내의 여러 세력에 병력 동원을 명했다. 후금 정벌뿐만 아니라 고산국의 힘을 과시할 기회도 되기에 병참 능력 한도 내에서 최대한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 병참과 병력 수송 문제 해결에 시베리아 철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참모본부장! 동맹군 동원 현황은?”
“원정에 참가하는 동맹군 총원 20만을 기병 위주로 편성하는 동시에 최소 절반 이상 병력을 각자의 본거지에 남겨뒀습니다. 할하부 3만, 오이라트 3만, 토르구트 2만, 여진 3만, 카자흐 2만, 티베트 1만, 노가이 칸국 1만, 크림 칸국 1만, 루스 차르국 보병 2만에 기병 1만, 코사크 기병 1만입니다.”
“초원에 이 병력의 두 배 이상이 있다는 뜻이지? 무섭군. 폴란드-리투아니아 정도는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겠어.”
노가이 칸국과 크림 칸국은 토르구트와 루스 차르국이 두려워 각각 기병 일만을 내어 이번 원정을 도와주기로 했다. 고산국이 주도하는 동맹군으로 참전하면 나중에 토르구트나 루스 차르국이 자기들을 노리기 어려우리라는 계산이었다.
“남몽골로 진군할 예정이라 기병이 임무에 적합하므로 루스인 보병 2만을 울란바토르와 철도 경비대에 분산 배치하겠습니다.”
“우리 군은?”
“본국은 제1 기병 사단이 참전합니다. 사실 이번 작전에서 1기병사단이 주력이라 동맹군 기병들은 분위기 띄우는 역할밖에 못할 것입니다.”
본토와 동해여진에 나눠서 주둔하는 제1 기병사단은 꾸준한 개편을 거쳐 현대 미 육군 편제와 비슷하게 변했다. 기계화 보병 사단처럼 전차대대 4개에 장갑차대대 5개로 3개 전투여단을 구성하고 포병여단이 뒤를 받쳤다. 그리고 소대 단위에서 전차와 장갑차가 혼성 편제된 수색대대가 있었다.
제1 기병사단의 가장 큰 특징은 무지막지한 화력과 기동력을 자랑하는 항공여단이 따로 편제돼 있다는 것이었다. 공격대대 2개, 수송대대 2개, 강습대대, 정찰대대, 항공지원대대로 이루어진 항공여단은 웬만한 보병사단 서너 개의 몫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운영 예산은 그 이상 들어갔다.
“20만의 인간과 말을 먹여 살리며 하는 전쟁이다. 이번 원정을 끝내면 군수지원사령부의 역량이 확 늘겠어.”
“군지사의 역량 절반이 1기병사단이 소모할 석유류와 탄약 수송에 투입됩니다.”
“그렇겠지.”
구소련의 전차군이 시베리아에서 기동할 때 전차 수보다 유조차 숫자가 몇 배나 많았다. 작전 지역이 광대하고 유조차가 먹는 기름도 유조차로 수송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번 원정은 시베리아 철도에서 그리 멀지 않으므로 그 정도로 병참 부담이 크지는 않았다.
“바로 시작하자.”
대군을 일단 동원했으면 즉각 움직이는 게 상책이었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보급 능력 고갈로 대군이 자체 붕괴하거나 이런저런 일을 계기로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존재 자체가 명나라에 비수. 순리대로. 2편 올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