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76화 (925/1,000)

00976    104. 제국의 길  =========================================================================

1631년 벽두부터 명나라 농민반란이 격화되면서 이민호가 참모본부로 출근하는 날이 늘어났다. 특전대와 정보국 요원들이 명나라에 잠입해 몰래 촬영해서 왕도로 보내는 영상도 늘었다.

“전하! 산동성 제녕 동쪽에서 대규모 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 영상입니다.”

“계투라면 닭싸움?”

이민호의 시답잖은 농담을 무시하고 정보참모가 실내조명을 껐다. 영사기가 차르르 돌아가면서 수많은 농민들이 무기를 들고 벌이는 처절한 싸움의 현장을 보여줬다.

투구와 갑옷을 입은 일부 농민들이 칼과 방패를 들고 대열을 짓거나 집단으로 활을 쏘는 것이 정규 관군 못지않았다. 지역 신사와 지주들이 지휘를 맡고 중국 전통의 자경단, 민병대 조직인 향용과 지주들에게 고용된 호협(豪俠)들도 싸움에 적극 가담했다.

“우와! 단칼에 사람 머리가 날아오른다! 민병들 맞아?”

“참가자 일부가 관병이나 녹림거사 경력이 있을 겁니다.”

계투(械鬪)는 중국에서 토지 경계, 수리시설, 분묘 등으로 인해 농민 집단 사이에 생긴 갈등을 무기를 동원해 해결하는 싸움이다. 특히 이 시대의 계투는 다른 지역에서 밀려난 유민들이 현지 주민들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대규모 패싸움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천계령, 해금령 등으로 강제 집단 이주가 잦았던 청나라 초기에는 계투 과정에서 농민들이 수만 명씩 죽기도 했다. 현대 중국에서도 심심찮게 계투가 발생하고, 한창 계투 중에는 정부의 치안 조직이 개입하지 못할 수준으로 치열하고 대규모로 진행됐다.

이 시대나 현대나 중국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과 가족을 지켰다. 현대 중국인들이 사소한 이유로 시작된 싸움에서도 잔혹하게 무기를 휘둘러 상대를 끝장내려는 것은, 농담이지만 중국인들이 사는 세계가 무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관부와 강호무림이 서로 관여하지 않는 정수불범하수(井水不犯河水) 원칙이 현대에도 지켜지기에 중국인들이 범죄자를 경찰에 신고하는 법이 없다. 현대 중국인들은 범죄현장을 그저 멀뚱멀뚱 지켜보거나, 아니면 주변 사람들과 힘을 합쳐 범죄자를 박살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참가 인원은?”

“양측에서 각각 3만과 3만 5천씩 동원했습니다.”

“내란이나 다름없네. 와! 진이 살아 움직인다. 양쪽에 병법가가 있나봐. 패싸움 정도를 넘어 꽤나 심각하군.”

“양쪽 다 악착같이 싸웁니다. 먹고 살려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의 요인으로 인해 발생한 유민은 다른 향토 사회의 소작농, 빈민, 날품팔이 등 하층민으로 흡수되어 소멸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반대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강한 조직력을 갖춘 유민 집단은 계투를 통해 종종 기존 토착 세력을 몰아내고 토지를 차지한다.

그럼 패한 쪽은 다시 다른 지역으로 흘러가 새로 계투를 벌인다. 농민반란군이 차지한 지역, 또는 관군과 싸우는 지역에서 이탈한 유민들은 이렇게 다른 지역에 와서 계투를 벌임으로써 전 명나라 영토에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농민반란군이 점거한 섬서뿐만 아니라 명나라 모든 지역에서 현재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네? 농민반란군과 관군이 벌이는 전투에서 생긴 사상자는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겠어.”

“향용은 보통 체제 유지 세력이 운영합니다만, 여차하면 삼국지나 수호지 인물들처럼 언제든 반체제로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관군과 농민반란군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지만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면 일제히 가담할 겁니다.”

“그때 결판이 나겠지.”

명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은 자제하되 결정적인 순간까지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칙사가 매일 같이 왕도에 와서 만리장성 밖의 후금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리가 멀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고산국이 농민반란을 진압해주면 복건과 절강, 혹은 복건과 광동을 고산국왕의 영지로 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했다.

남대서양 중앙에 남북으로 산재한 여러 섬에 측후소 근무자, 항만 관리인, 전파중계소 직원, 천문대 근무자들을 비롯해 농민과 어민 가족들을 이주시켰다. 세인트헬레나 섬과 트리스탄다쿠냐 제도는 이미 이름이 있지만 어센션 섬은 고산국 대서양탐사단에서 처음 발견해 ‘남대서양 1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민호가 붙인 이름이 절대 아니었다.

“영토가 넓어서 지킬 곳은 많고 지킬 사람은 적다. 근무자들은 격오지 수당을 두 배로 받고 근무평정은 무조건 최상을 줄 것이다. 그대들을 외따로 떨어진 섬에 보내는 이 국왕은 가슴이 몹시 아프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절벽에 등대나 측후소 달랑 하나만 있는 곳보다 근무환경이 훨씬 나으니 심려 마시옵소서.”

“정말 고맙네. 보름에 한 번씩 보급선이 섬에 들를 테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요청하게.”

남대서양의 섬들은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선원들이 먼저 발견했으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이래 모두 버려진 섬들이었다. 네덜란드가 세인트헬레나 섬의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그 동안 섬에 거주한 사람도 없고 요새나 기타 축조물을 건설한 흔적도 없어서 그 주장은 간단히 무시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 항로에서 크게 벗어나고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섬은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장래에 200해리 경제수역이 일반화된다면 높은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이민호는 이 섬들을 일단 전파중계기지와 어업기지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절해고도에 인구가 희박한 곳에서 살아야 할 주민들이 외로울까봐 걱정이 많았다.

“농민들에게 매년 보조금을 지급할 테니 절대 농토와 목장을 확장하지 말게나. 식량과 야채를 섬사람들이 자급자족할 만큼만 일하고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데 힘쓰게.”

“예, 전하. 처음에는 10년 동안 살아보고 다시 본토나 북미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사진을 봤더니 정착할 만합니다.”

“생활수준은 확실히 보장해줌세. 다만 외로움이 문제지.”

섬 세 곳에 세운 학교는 교사가 달랑 두 명씩이었다. 부부교사 두 명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학생까지 전부 다 가르쳐야 한다. 교사들에게는 10년만 근무하면 평생 먹고 살 연금을 주기로 약속했다.

의료인 지원자가 부족해서 병원은 두 곳에만 세웠다. 그런데 섬들이 뚝뚝 떨어져 있어서 문제였다. 만약 병원이 없는 남대서양 1섬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비행기를 보내거나 환자를 배에 태워 천여 km를 달려야 한다.

“어민들에게도 보조금을 지급할 테니 필요 이상으로 고기를 잡을 필요가 없네. 바닷가재 외에는 다른 곳에 팔 방법이 없으니까. 그리고 어민들의 첫 번째 임무는 섬에 화산이 폭발했을 때 주민들을 다른 섬으로 피난시키는 일일세. 무엇보다 안전이 최고라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아리수 항에서 남대서양 도서 근무자들과 이주민들을 태운 1만톤 급 해군 수송함이 출항했다. 부두까지 영송을 나온 이민호와 세자가 손수건을 흔들어 작별을 고했다.

“아바마마! 절해고도에서 산다는 게 평안할지, 아니면 지긋지긋할지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놀 곳이 없으니 끔찍하게 지겨울 거라고 봐야지. 10년이 뭐야? 일 년도 되지 않아 젊은이들부터 차례로 섬에서 뛰쳐나올 거야. 그때마다 지원자들을 보내서 적정 인구를 유지해줘야 한다. 섬에서 나온 사람들도 도회지에 잘 정착시키도록 해라.”

“섬에 오래 산 사람이 도시생활에 제대로 적응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래저래 문제였다. 절해고도에 산다는 것 자체가 그 인간과 가족의 큰 희생을 전제로 했다. 그래서 단순히 ‘국가와 미래를 위해’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5월 중순에도 이민호는 참모본부에 거의 매일 출근했다. 얼마 전 스웨덴군이 독일 서부 프랑크푸르트 시 말고, 북동부 오데르 강변의 프랑크푸르트 마을을 점령했다. 발렌슈타인이 해임된 다음부터 제국군은 각지에 분산된 채 제대로 집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세기말적 분위기였던 독일 북부에 온갖 예언서가 퍼지고 대표적으로 100년 전에 지었다는 파라켈수스의 예언이 크게 유행했다. 주요 내용은 ‘독일은 화염과 칼에 찢겨지리라. 거의 파멸하기 직전에 그들을 구할 황금의 야수가 먼 북쪽 땅에서 떠오르리라.’였다. 또한 독일 전역에서 ‘기도해라, 아이야. 기도해라. 그럼 내일 아침에 스웨덴 사람들이 온단다.’라는 내용의 자장가도 유행했다. 참혹한 시대가 어서 지나가길 원하는 독일 신교도들에게 스웨덴의 정치적 선전공세가 제대로 먹히고 있었다.

제국군 일부는 작년 11월부터 포위한 마그데부르크를 최근 두 달 동안 본격적으로 공격하는 중이었다. 틸리 백작과 파펜하임 백작이 지휘하는 제국군 병력이 2만을 넘은 반면, 마그데부르크 수비군은 2천여 명에 불과했다. 스웨덴군에서 디트리히 폰 팔켄베르크 대령을 마그데부르크에 파견했으나 병력 차가 열 배 가까워 방어는 불가능해 보였다.

“도련님, 그 종이는 뭡니까? 프랑스어 같은데요.”

“이건 ‘가제뜨 드 프랑스’라고, 프랑스 최초로 인쇄해서 발행할 주간신문이야. 5월 말부터 나올 거야.”

“최초로 인쇄한 신문이라고요? 우리 일간신문은 물론 조선의 조보(朝報)보다 한참 늦네요.”

앞으로 10여일 후인 1631년 5월 30일에 프랑스 최초의 신문 ‘가제뜨 드 프랑스’가 창간된다. ‘라 가제뜨’로 바꾸기 전의 제호였다. 그 전에는 손으로 일일이 베껴 신문을 제작하다가, 이때부터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인쇄 매체 시대로 접어든다.

신문을 인쇄한다는 것은 그 사회에 대량의 정보 수요가 있다는 뜻이다. 또한 신문 발행을 위해 정보를 한 곳에 집중시키고 다시 국내 모든 곳에 전파할 수 있다면 중앙집권체제의 유지, 발전에 봉사할 수 있다. 정치적 선전수단으로서도 신문이 몹시 유용하다는 것은 권력자들이 먼저 알아봤다. 리슐리외 추기경과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가 이 신문에 제재하기 위해 기고문을 써서 잔뜩 쌓아 놓았다는 소식을 이민호도 듣고 있었다.

현대 헌법에서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국민에게 보장된 표현의 자유로서 민주주의에서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 같은 언론사는 국민이 아니므로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누릴 주체가 아니라, 국민이 가진 수많은 표현 도구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신문사라는 기업은 정치와 경제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하고, 라 가제뜨 역시 태생부터 권력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라 가제뜨는 1915년 폐간할 때까지 왕당파, 정통왕조주의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 혁명의 거센 파도가 프랑스 전역을 휩쓸고 지나갈 때는 침묵했고, 심지어 바스티유 감옥 사건도 기사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앞으로 이런 신문이 프랑스 신민들을 지배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거야. 성직자의 설교는 두 번째로 밀리고 말겠지.”

“그 종이 쪼가리가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역시 도련님이 특기를 발휘하셨겠죠? 자본금 51퍼센트를 확보하셨나요?”

“아니. 단 한 푼도 투자를 못했어. 공식적으로는.”

“저런! 어쩌다가 그렇게 되셨어요?”

“루이 13세와 리슐리외가 개입했거든.”

“음. 역시 리슐리외 추기경은 대단한 사람이군요. 스웨덴이나 바바리아하고 비밀 동맹을 맺은 것도 그렇고, 도련님처럼 돈으로 해결해버려요. 도련님이 도전을 받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죠?”

이 주간지의 경영권을 놓고 고산국 외교부와 프랑스 왕실이 한 판 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이 언론사에 외국 자본의 참가를 금지하는 법률을 발표하는 바람에 이민호가 완패했다. 이민호는 프랑스인 꼭두각시를 내세워 겨우 35퍼센트의 지분을 확보했을 뿐이다. 그래도 이민호는 지배 지분을 확보할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당연하지. 원활한 경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전체 지면의 3분의 1을 광고면으로 돌리는데 성공했어.”

“프랑스에는 신문을 통해 광고할 만한 상품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고산국 상품들로 광고면이 도배되겠군요.”

“그렇지. 정치가 별 거 있어? 프랑스는 앞으로 우리의 경제와 문화 침략에 시달릴 거야. 물론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프랑스의 저력이 만만치 않아 잘 버텨나가겠지만.”

그러나 발행인과 편집자들의 면면이 전혀 만만치 않았다. 발행인은 내과의사이며 박애주의자인 테오프라스트 르노도라는 비교적 중립적 인물이지만, 편집위원들은 족보학자 피에르 도지에르, 시인 겸 외교관이며 리슐리외 추기경의 부하인 기욤 보르투, 근위연대 장교 고티에 드 코스테 등 극히 보수적인 인사들이었다.

“전하! 틸리 백작과 파펜하임 백작이 이끄는 제국군이 마그데부르크를 결국 함락시켰습니다. 그런데 제국군 소속 용병들이 마그데부르크 시민 2만여 명을 학살했다고 합니다.”

“틸리 백작이 미쳤구나! 전쟁에서 패하기로 작정했나봐.”

정보참모가 이민호에게 내민 전보에는 간단한 내용만 적혀 있었다. 자세한 내용이 참모본부에 도착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마그데부르크 내부에서 학살 현장을 촬영한 영상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마그데부르크가 함락된 직후 틸리 백작은 약탈에 나선 용병들에 대한 통제를 잃고 말았다. 반면에 파펜하임 백작은 마그데부르크 시민들을 전원 학살하고 도시 자체를 완전히 파괴하도록 용병들을 부추겼다. 파펜하임이 처음에는 마그데부르크를 소유하기 위해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가,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내 것이 되지 못한다면 남에게도 못 준다.’는 개념으로 파괴와 학살을 주도했다고 한다.

마그데부르크에는 학살 전에 3만 명의 주민이 살았으나 30년 전쟁이 끝난 후에 인구를 조사해보니 겨우 450명만 남았을 정도로 도시가 완전히 초토화됐다. 이 전투 이후 개신교 쪽에 가톨릭 포로가 잡힐 때마다 ‘마그데부르크의 정의’니 ‘마그데부르크의 자비’를 들먹이며 잔인하게 죽여 버렸다.

상원수 계복이 수화기를 들고 이민호에게 물었다.

“도련님! 당장 해병 원정군과 육군을 유럽으로 출동시킬까요?”

“아니. 동원 준비태세 해제해. 이젠 그럴 필요가 아예 없어졌으니까. 틸리 백작은 멍청이야!”

이민호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명나라 관군이 소수민족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할수록 반란이 더욱 확산되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독일에서도 일어났다.

마그데부르크의 참상이 알려지자 독일의 신교도 영주들이 일제히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동맹을 맺었다. 그 동안 스웨덴군에게 등을 돌렸던 신교도 영주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급변했고, 특히 제국군이 북상하는 길 주변의 모든 영주들이 스웨덴 편에 가담했다.

브란덴부르크 대공과 작센 공작의 진영이 스웨덴 군에 합류한 사건이 제국군에 대한 신교도 군의 우세를 확정지었다. 결국 마그데부르크 학살 사건은 30년 전쟁에서 전혀 새로운 전기로 작용한 셈이다.

“도련님. 이번 학살 사건은 독일에 개입할 강력한 명분이 됩니다. 우리가 병력을 파견하면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제국 수뇌부에 강한 압력을 가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전쟁을 끝내려면 이번이 좋은 기회긴 하지. 음. 일단 진영을 따지지 말고 식량부터 공급해.”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큰 강을 끼고 있는 지역에나 식량 공급이 가능합니다. 내륙 지역은 식량 공급이 불가능합니다.”

“알아.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는데.”

전쟁이 길어지면서 독일 전 지역에 식인행위가 일상화되고 있다는 보고를 여러 번 받았다. 무덤이 파헤쳐진다고 해서 반드시 식인귀나 마녀의 소행이라고 볼 수 없게 됐다.

그 와중에 뷔르츠부르크 주교령에서는 10년 넘게 대규모 마녀사냥이 진행되고 있었다. 뷔르츠부르크 주교와 재상이 주도한 재판을 통해 900여 명을 말뚝에 묶어 불태워 죽였다. 독일 신교도들 사이에 마녀 재판에 대한 악명이 하도 높아서 스웨덴군이 이곳을 먼저 치려고 병력을 급히 이동시켰다.

============================ 작품 후기 ============================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