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75 104. 제국의 길 =========================================================================
명나라 사천과 귀주, 운남에서 십 년을 끈 이족의 반란 사안지란(奢安之亂)이 총독 주섭원에 의해 완전히 진압됐다. 사안지란은 토사 사숭명과 안방언이 주도한 반란이라는 뜻이며, 토사(土司)는 명나라에서 서북, 서남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지배자들에게 제수한 선위사, 안무사, 지부, 지주, 지현 등 문무 세습 관직의 총칭이다.
만력삼대정 중의 하나인 양응룡의 난을 일으킨 선위사 양응룡도 역시 토사였다. 청나라 때 명목상 문관은 토관, 무관은 토사로 구분된다.
이족은 자칭 로로족, 명나라 명칭 이족(夷族)으로서, 청나라가 오랑캐 이(夷) 자를 싫어해서 나중에 이족(彝族)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이족은 티베트버마어 계통으로 티베트족, 라싸족, 강족 등과 가까운 관계였다.
갖가지 색을 넣은 원통형 모자 외에 여자들이 쓰는 다양한 모자가 예쁘고, 2014년 운남성에서 여자 가슴 만지기 축제를 열었다고 사기 친 원주민들이었다. 실제 이족의 축제에서 남자들이 가면만 쓴 채 홀딱 벗고 온몸에 문신을 칠한 다음 불가를 돌면서 논다.
“이족 중에서 참수된 자가 2만 7,900명, 포로가 된 자가 1만 2,600명. 관군 전사자가 2,688인. 관군 전사자 비율이 높군.”
“예, 도련님. 일반적인 소수민족이 일으킨 민란에서 명나라 관군이 입는 평균적인 인명피해 비율보다 훨씬 높습니다. 토이토부르크의 숲에서 로마군단이 게르만족에게 패했듯이 산악이나 밀림 지역은 역시 정규군이 강점을 발휘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어쨌든 이 영상이 입수됐다 이거지. 운남까지 잠입해 들어간 특전대가 수고가 많았겠어.”
고산국이 명나라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는 농민반란과 소수민족 반란에 개입할 의향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정보 획득을 위해 정예 병력을 내륙 깊숙한 운남의 오지에 투입했다. 이족이 아닌 묘족으로 변장한 특전대 1개 중대 12명이 무더위와 독벌레가 들끓는 밀림을 악전고투 끝에 뚫은 다음 이 영상을 촬영했다고 한다.
“중대원 전원 일 계급 특진시켰습니다. 길잡이로 나서준 묘족과 이족들에게도 상을 줬습니다.”
“잘했어. 한 번 더 보자. 국가를 세우지 못하거나 나라에 힘이 없으면 우리가 바로 저 꼴이 되는 거야!”
이민호와 계복, 참모본부 요원들이 이미 세 번이나 본 영상을 다시 돌렸다. 이족의 마을에 쳐들어간 명나라 관병들이 이족 여자와 아이들을 무차별로 학살하는 장면이 이 짧은 영상에 담겨 있었다. 거칠게 잘린 여자들의 목을 창대에 꽂아 세우고 배가 갈린 아이들 사체를 울타리에 걸어놓는 장면을 숱하게 볼 수 있었다.
죽일 만큼 죽인 다음 명나라 관병들이 젊은 여자들을 모아놓고 돌아가면서 겁탈했다. 관병들은 겁탈하는 중에 끝까지 저항하는 여자 얼굴을 주먹으로 치고 목을 조르고 칼로 난자하는 등 정신상태가 몹시 의심스러웠다. 관군 중간급 장수가 뒤늦게 마을에 도착했으나, 오히려 겁탈당한 여자 포로들을 어서 참수하라고 독촉했다. 결국 이족 주민들은 남김없이 몰살당하고 마을은 불태워졌다.
“현장에서 이런 식이면 반란진압군 장수가 아무리 투항하라고 목이 쉬도록 외쳐도 소수민족 전사들이 항복할 리가 없지.”
“예, 도련님. 졸병들이 보기에 반란을 일으키고 동료 관병을 죽인 야만인들은 모두 죽어 마땅하겠지만 이렇게 무자비하게 진압하면 반란이 길어지고 저항도 격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원정 비용이 무지막지하게 들어서 이번 달에 또 만리장성을 지키는 관병 5만을 귀가시켰답니다.”
“서광계가 관병들에게 밥만 먹인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이번에 해산된 관병들도 고스란히 농민반란군에 가담하겠군.”
“명나라 조정에서도 당연히 예상할 겁니다만, 어쩔 수 없겠죠.”
운남과 사천, 귀주에서 동료들이 전사할 때마다 관병들이 분풀이로 야만족 반란군의 처자들을 좀 쳐 죽였더니, 그때마다 반란이 계속 확산되고 저 북쪽 만리장성에서 관군 부대가 해체되고 또 그 숫자만큼 섬서에서 농민반란군 숫자가 불어났다. 세상사 모든 일이 이렇게 꼬이고, 저렇게 연결되는 법이었다.
만약 고산국에서 명나라 영토를 몇 개로 갈라놓을 계획이라면 이번에 입수한 영상이 결정적인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었다. 명나라 내륙 오지의 지배자인 이족이나 다른 종족의 족장들 중에서 명나라에 호의적인 주화파가 있더라도, 이 영상을 보게 되면 창끝을 명나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 영상을 몇 개 복제해서 기밀로 분류하고 각각 다른 장소에 잘 보관하도록 해. 나중에 이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혹시 소수민족의 반란에 이렇게 잘못 대응하지 않았는지 반성의 기회로 삼자고.”
“에이! 우린 절대 안 그렇습니다. 원주민이라 해도 다 도련님의 백성인데 어떻게 함부로 죽여요? 그리고 파푸아 식인종들 외에는 반란도 안 일어납니다.”
“그건 모르지. 총독 주섭원이라도 부하 관병들이 현장에서 그럴 줄 알았겠어?”
원정 작전이 진행 중인 지역이나 점령지에서 만약 아군 병사가 현지 주민을 약탈하거나 여자를 겁탈할 경우, 그로 인해 발생할 손실과 추가로 사용해야 할 비용은 아예 계산도 못한다. 성범죄에 관대한 현대 한국에서도 괜히 전지강간죄의 형량이 일반 강간죄는 물론 심지어 살인죄보다 훨씬 높은 사형 하나뿐인 것이 아니었다.
전투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데 적을 지원하는 자로 의심되는 점령지 여자 하나쯤 벌을 내리는 의미에서 덮치는 게 무슨 큰일이냐고 항변해봐야, 기다리는 것은 총살뿐이다. 군 지휘부가 휴머니스트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단순한 범죄행위가 아군의 점령지 작전에 큰 차질을 주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대원들에게 점령지에서 약탈을 금할 것을 명하고 조선 백성들은 생업에 종사하라고 포고문을 발표했다. 각 지역 세창과 관아에 보관된 곡식을 먹으면서 고니시군이 한성으로 급속 진군하는 동안 경상도와 충청도 등 왜군 점령지에서는 의병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제대로 활동도 못했다. 오히려 세상이 바뀌었다고 부역자들만 날뛰었다.
그러나 보급선이 길어지고 관아의 창고도 비어 굶주리게 된 왜군 후속부대가 민가를 약탈하자, 점령지에서 의병들이 떼를 지어 일어나 저항했다. 왜병들이 점령군 기분 좀 내려고 조선 여자를 겁탈했더니 의병들이 더더욱 구름처럼 일어나 실처럼 가느다란 왜군의 보급선마저 끊어버렸다.
다음 해 초 왜군 지휘부가 한성에서 각 부대 잔여 병력을 세어 봤더니 왜병들 절반 정도가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다. 임진년에 왜군 17만이 처음 조선에 건너왔으나, 일본에서 매년 병력과 하인, 수부들을 새로 징발해 조선에 보내야 했다.
“진행 좀 빨리 안 되나? 기다리기 답답하다.”
“지금은 관군과 반란군, 후금군이 균형 상태입니다. 명 조정에서 홍승주를 삼변총독으로 삼고 순무 몇이 군사를 동원했다 하니 조만간 결판이 날 겁니다.”
“전황이 어정쩡하면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반란이 수습되더라도 그 이후가 더 문제야.”
농민반란이 대규모로 확대되기 직전, 아주 적절한 시기에 둔전을 일군 서광계 덕에 관병들이 굶어 죽을 염려가 확 줄어들었다. 그러나 서광계가 아무리 부자이며 열심히 둔전을 확장하더라도 겨우 군량만 해결했지, 막대한 군인들의 봉록과 군대 운영비까지 마련할 수는 없었다. 군인이 녹봉을 받지 못하면 군인 가족들이 굶주리게 된다.
이때 명나라 조정에서는 예산도 없이 무리하게 군을 움직이는 기적을 연출하려 했다. 당연히 이 부담은 고스란히 그 지역 백성들에게 전가됐고, 또 다시 유민들이 속출했으며, 자연스럽게 농민반란군이 세를 불렸다. 이런 악순환을 끊을 유일한 방법은 황제가 내탕고를 여는 것이었지만, 숭정제가 그럴 일은 절대 없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도련님은 초대 황제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면서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괜히 우리가 개입하지 말고 명나라가 이대로 망하도록 내버려두면 됩니다.”
“그야 그렇지만, 복잡한 문제를 세자에게 미루고 싶지 않아서.”
“세자 저하도 할 일이 남으면 좋아하시겠지요. 건국왕과 초대 황제 자리를 나눠 갖는 것도 괜찮고요.”
“흐음. 그럼 그렇게 할까?”
물론 서로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계복하고만 통하는 농담이었다. 이제 고산국이 제국을 선언하는 일과 명나라 멸망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왕도에 칙사로 온 환관들이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각도를 보면 고산국이 어떤 결단을 내리든 명나라에서는 이미 포기한 듯했다.
“도련님! 그 막강한 페르시아에서 어떻게 그런 아편쟁이에 까막눈이 황제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잘 나가던 사파비 왕조에 망조가 들었습니다.”
“전 황제가 아들을 다 죽이거나 장님을 만들어 버렸잖아. 제위를 이을 손자 하나만 남겨뒀는데 그 모양이 된 거지.”
“후계자로 지명된 아들이 아비를 두 번이나 죽이려 했으니까요. 새 황제도 만만치 않던데요? 즉위한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황실의 남자라곤 죄다 죽여 버리고 웬만한 장군들의 목도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샤 아바스의 손자 샤 사피는 글을 제대로 읽거나 쓰지 못하고 국가 운영에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잘하는 일이라곤 술 마시고 아편 피우기뿐이었다. 아편중독자 주제에 담배 연기 냄새를 무척 싫어해서 담배를 피우는 자가 눈에 띄면 끓는 납을 목구멍에 부어 죽였다.
군주 개인이 이 모양인데도 대재상을 비롯한 페르시아의 정밀한 관료체제가 어떻게든 내정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바스 1세에게 눌려 지내던 주변국들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서쪽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사피가 즉위한 해부터 공세를 펼쳐 끝내 바그다드를 탈환하고, 동쪽 국경에서는 우즈벡과 투르크멘이 난리를 쳤다. 남동쪽에서는 무굴 제국이 칸다하르를 노리고 공세를 펼쳐 잠시 점령했다.
“아바스 1세 때는 페르시아가 제법 막강했는데 황제 하나 바뀌었다고 이젠 아주 만만해졌어. 왜? 페르시아를 치고 싶어?”
“그건 아닙니다만, 페르시아 주변이 한동안 몹시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요. 저 같은 직업군인은 평화로운 세상이 좋습니다.”
근대에 제국주의 국가들은 주로 종교 박해를 침략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중동이나 동남아시아에 순교를 불사하는 선교사 몇 명만 풀어놓으면 현지 주민이나 지배자가 알아서 탄압을 해준다. 프랑스가 1858년 베트남을 공격해 식민지로 삼고 조선에서 병인양요를 일으킨 구실이 로마가톨릭 선교사 박해였다.
고산국이 전쟁을 영토 획득의 수단으로 거의 이용하지 않았고 종교 박해를 외국에 개입할 명분으로 삼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필요할 때 개전을 할 명분은 충분히 쌓아두고 있었다. 주화파 계복을 분기탱천한 주전파로 만드는데 한 마디면 충분했다.
“그래? 얼마 전에 페르시아에서 보낸 국서를 받았는데 말이야. 황제가 즉위한 지 일 년이 다 돼 가는데 왜 아직도 내가 입조하지 않느냐고 난리더라고.”
“도련님보고 이스파한에 직접 입조하라고요? 사피가 미쳤군요. 이스파한에 폭격기를 보내서 평탄화 작업을 해주겠습니다. 아니면 토르구트 기병을 3만 정도 보내서 사피의 목을 따야 그 주둥이를 다물 것 같습니다. 해병사단이 상륙해서 200km만 북진하면 바로 이스파한입니다.”
사파비 왕조의 왕자와 왕실 남자들 중에 서류상 고산국에 유학한 자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가짜 대리인을 보낸 경우도 많고 진짜 왕자가 오더라도 몇 달 잠깐 머물다가 돌아갈 뿐이었다. 앞서가는 고산국의 새로운 문물을 배울 좋은 기회였지만 현대에도 부잣집 유학생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저 놀면서 시간을 때우고 말았다.
차라리 폴란드 귀족 자제들이 고산국의 대학에서 훨씬 열심히 공부했다. 폴란드는 왕보다 귀족들의 권한이 강하고 일본 다이묘처럼 잡아먹지 않으면 먹히기 때문에 공부도 생존을 위한 투쟁의 일환이었다. 이들은 오랜 숙적인 루스 차르국이 급속히 발전하는 현실에서 어떻게든 따라잡으려 노력했다. 폴란드 유학생들이 워낙 좋은 이미지를 남겨서 고산국이 루스 차르국을 일방적으로 지원해주기 어렵게 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됐어. 국서를 들고 온 사신들이 나한테 싹싹 빌더라.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니까 내용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더군.”
“참! 어이가 없습니다. 외국 군주들 중에 미친놈이나 돼지가 왜 이리 많죠? 험난한 등극 과정에서 홱 돌아버리거나 과보호를 받아서 그럴까요?”
“그러게 말이다. 저런 것들은 후보일 때부터 미리 걸러줘야 하는데 그런 제도가 마비됐나봐.”
“선대가 세운 영광스런 나라를 못난 후손들 손으로 끝장낼 때가 된 거죠.”
다사다난했던 1630년의 해가 저물었다. 그러나 1631년도 별로 조용한 해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연말에 스웨덴 국왕이 보낸 연하장을 받았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독일 북부 포메라니아에서 보낸 그림 엽서였다. 독일의 신교도 제후들이 등을 돌린 가운데 지원이 끊긴 스웨덴군은 틸리 백작이 이끄는 제국군이 북상하길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 리슐리외 추기경이 보낸 사절이 스웨덴 국왕을 비밀리에 만나고 있는 것이 고산국 해외정보망에 포착됐다. 그러나 프랑스는 병력 파병 없이 자금 지원에 그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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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두 편 올렸고 다음부터 1631년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