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74 104. 제국의 길 =========================================================================
“제국과 일반적인 나라는 전혀 다르다. 제국의 위상을 누리면서 그 책임을 회피하고 싶지 않아! 남들에게 욕을 먹지 않을 제국이 되려면 미운 놈들에게 식량과 재산을 나눠주고 싫다는데도 공짜로 치료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 백성들과 왕족의 목숨마저 인류를 위해 바쳐야 하느니라.”
“아바마마. 요즘 심신이 괴로우신가 봅니다. 힘을 내시옵소서.”
생전 처음으로 이민호가 병실에 드러눕자 깜짝 놀란 세자가 부리나케 병문안을 왔다. 병실 밖에서 혜영이 진지하게 병세를 묻고 주치의가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젓는 것이 어렴풋이 그림자로 보였다.
이민호는 자기 수명이 여기까진가 보다 생각하며 몹시 낙담했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정책,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일도 많아 무척 안타까웠다. 그러나 잠시 후 밖에서 주치의가 ‘꾀병입니다.’라고 자그맣게 대답하고 혜영이 소리 죽여 웃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의 병이 나으려면 한겨울 얼음계곡에서 열린 산딸기를...... 됐다.”
이민호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줄리아가 천국에 간 이후 이민호가 상실감에 빠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슬픔보다는 부러움이 앞섰다. 줄리아는 원하던 모든 것을 기쁘게, 그것도 남들의 존경을 받아가며 하다가 갔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민호는 어렸을 때 세웠던 계획의 절반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가 벌써 50이 넘었는데 아직도 제국을 세우지 못했고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기대한 만큼 큰 존경을 받지도 못했다. 한때 폭발적이던 과학 발전도 지금은 조금 느려진 듯했다. 남들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고 했지만 이민호는 욕심이 많았다.
“줄리아는 내가 질투한 이 시대의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이순신 상원수님, 퇴계 선생과 율곡 선생, 갈릴레오 공작, 데카르트 백작, 그로티우스 자작, 케플러. 아! 케플러는 올해 죽었지. 몇몇 작곡가와 화가들까지. 천재로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그런 사람들이 나는 부럽다.”
“아바마마께서는 유사 이래 그 어느 군주보다도 성군이십니다. 물론 아부입니다.”
“효도라고 해두지. 으쌰!”
침상에서 일어난 이민호가 세자와 함께 탁자에 앉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세자도 즉위하기까지 준비가 더 필요하다고 진지하게 요청해서, 지금 왕위를 넘겨준다 해도 넙죽 받아먹을 인간이 아니었다.
“아바마마! 내일이 노동자들의 내년 최저 임금을 결정하는 날입니다. 혹시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실 거라면 지침을 내려주십시오.”
“농민들이야 자기가 맡은 땅을 열심히 일궈서 돈을 번다지만, 노동자들보다 지나치게 많이 버는 것 같다. 직종 간에 빈부격차가 심하게 나면 안 되니 노동자들의 임금을 대폭 올리는 게 어떻겠느냐?”
“어느 정도 말씀이십니까?”
“기업과 고용주들의 지불 능력을 감안한 인상 여력은 기존 임금의 4할 정도 된다고 계산됐으니까 최소 3할 이상은 올려라. 그럼 업주들이 그 기준에 맞춰 기존 임금도 인상하겠지. 관리들과 군인들 녹봉도 올려야 한다. 통화량 증가를 감안해서 총리인 네 어머니와 함께 결정하도록 해라.”
고산국에서 중요한 정책은 왕가 2대, 즉 이민호와 혜영, 세자와 세자빈이 참석한 국무회의에서 결정했다. 요즘은 국초에 비해 대신들의 발언권이 커진 편이었다. 관리들의 능력이 높아져 이제 실무 정도는 충분히 맡길 만했다.
“아바마마! 예전에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면 농민들과의 소득 격차가 줄어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더더욱 열심히 일해서 다시 소득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과연 불굴의 농민, 진격의 농민들이야. 조선인들이 게으르다고 말한 명나라 장수가 도대체 누구냐?”
농민들에게 일주일 중 하루나 이틀 쉬라고 해도 도대체가 들어먹지 않았다. 부업으로 채소나 좀 키우라고 유리온실을 지어줬더니 전깃불 켜놓고 늦은 밤까지 일했다. 농민들이 젊을 때 바짝 일해서 노후에 여행이나 다니면서 편하게 지내겠다는데 더 이상 말리기도 어려웠다.
과도하게 일하는 농민들을 위해 장님들을 마사지사로 훈련시켜 농촌에 파견했다. 한때 정부에서 장님들을 시각장애인이라고 불렀다가 비하하는 명칭으로 오해할 우려가 있다 해서 다시 장님으로 바꿨다. 시각장애인을 지칭하는 소경이나 장님, 봉사는 죄다 벼슬 이름이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하는 일이 답답해서 명나라 사람이라면 장수와 군졸을 떠나 다 그렇게 말했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봐도 예전 조선 사람들이 좀 굼뜨긴 했지.”
<실록> 1593년 3월 20일 경략 유황상이 조선에 보낸 자문이나 같은 해 3월 22일 명나라 병부에서 전라도 순찰사 권율에게 상을 내리며 조선 조정에 보낸 자문, 명나라 장수들이 호통을 쳤다는 인용문 중에서 조선인들은 위나 아래나 다 똑같이 게으르고 굼뜨다는 이야기가 숱하게 나온다. 심지어 부총병 양원은 1597년 5월, 모화관까지 나와 영위례를 거행하는 선조 임금을 앞둔 자리에서 대놓고 조선은 하는 일마다 게으르고 느리다고 비난했다.
1990년대에 중국에 공장을 둔 한국인 경영자들은 중국 노동자들이 워낙 굼떠서 아주 학을 떼었다. 그러나 이 노동자들은 중국 공산당에서 직장과 수입을 보장했기에 부지런히 일할 동기가 결여돼 있었다. 고산국 농민이나 현대 중국인이나 가릴 것 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익 앞에서는 매우 열심이며 또한 재빠르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고산국이 괜히 경제체제로 자본주의를 선택한 게 아니었다. 물론 기본 소득과 왕토사상, 상속 제한 외에 여러 가지 제도로 보완해 자본주의의 냉혹함과 과도한 경쟁을 완화시켰다.
“몇몇 관료들은 백성들이 배가 부를수록 게을러진다고 했습니다만 그 말이 엉터리란 게 우리 농민들로 인해 증명됐습니다.”
“그럼 세자의 생각은 어떠냐?”
“유교에서는 의식이 족해야 예의를 안다고 하고, 옛 일본 지배층들은 백성들이 지배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쉽게 다스리려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사람은 일단 배불리 먹고 나서야 다른 것들을 찬찬히 생각해볼 수 있다고 봅니다. 명나라나 조선처럼 가난해서 가족 전체가 끼니를 거르게 된다면 어린애들은 도대체 무슨 죄입니까?”
“백성들이 배가 부를수록 게을러진다는 말은 어느 돼지가 했던 말 같구나. 그 같은 말을 한 관료들은 필시 뇌물을 받아 집안에 가득 숨겨놓고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철저히 조사해 보거라. 분명히 일러두겠지만 이건 사상 탄압이 아니다.”
1977년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만난 김일성은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인민들은 사상적으로 나태해지고 행동은 더 산만해진다.’고 말했다. 북한 지배층이 겉으로 내세운 사회주의 지상낙원이나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목표는 성취할 의향이 전혀 없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다.
“예.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만약 관료가 뇌물을 받거나 몰래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한다면 반역자, 국사범입니다.”
“지금은 왕실과 나머지 백성으로 신분이 간단히 구별된다지만 특권층, 지배층은 언제든 출현할 수 있다. 항상 눈에 불을 키고 지켜보도록 해라. 몸과 머리가 조금 편해진다는 이유로 특권층이 생기는 것을 방조해 그들에게 의존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저는 천계제나 펠리페 3세와 4세의 전철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말 한 번 잘했다. 도대체 그것들이 군주더냐? 아비 잘 만난 백수건달이지. 군주의 무능은 백성들의 불행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바마마.”
고위 관료, 장군, 법관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특권층을 형성할 가능성이 가장 높아 계속 주시해야 할 직업들이었다. 아직 국초라 다행히도 관료와 장군들이 파벌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법관과 검사, 변호사들이 자기들끼리 사적으로 모이는 꼴이 좀 수상해서 감시를 강화했다.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한 판사와 의사들도 판결문과 논문을 통해 슬슬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국가에서 매일 같이 생겨나는 온갖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군주에게 있어서 정치란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었다.
“내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왕위 승계 문제에서 직계 혈통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혹시 네 자식들이 무능하다 싶으면 조카나 동생에게 옥좌를 넘겨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바마마. 다음 대의 세자는 형제들이 다 성년이 된 다음에 결정하되, 여차하면 왕실 어른들로 구성된 세자 선발위원회에 넘기겠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아바마마께서 저와 마르그레타 둘을 두고 고심하신 줄 압니다.”
“그땐 그랬지. 마르그레타가 그걸 눈치 채고 너를 위한답시고 멀리 시집가버렸지만. 섭섭하더냐?”
마르그레타가 표도르에게 시집간다고 했을 때 이민호는 평균적인 아버지의 질투 이상으로 난리를 쳤었다. 이민호는 내심 마르그레타가 평생 국내에 남길 원했고, 왕위를 물려줄 생각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혹시 외국에 시집가더라도 가까운 나라에 살아서 가끔 의견을 묻고 싶었기에, 아직도 아쉬움이 짙게 남아있었다.
그렇게 뛰어난 인재인 마르그레타가 루스 차르국에 가더니 유럽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를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평균 이상으로 부강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바깥으로 눈길을 돌려서 이민호를 무척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루스 차르국 군대가 폴란드 귀족 사병군을 격파하고 그 총구를 남쪽으로 돌린 사건은 동유럽과 흑해 일대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크림 칸국과 노가이 칸국 등 타타르들이 절규하자 그 등쌀에 떠밀린 오스만 제국 대재상이 걸핏하면 왕도에 사신을 파견했다.
그때마다 루스 차르국의 남방 진출 문제를 해명하느라 이민호가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런데 협상을 아주 잘 진행하면 루스 차르국의 흑해 항구가 전쟁 없이 만들어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러시아가 아예 이스탄불과 오스만 제국 전체를 점령하려 했기에, 루스 차르국이 과도한 욕심을 내지 못하도록 자제시키는 일도 중요했다.
“섭섭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알고 있었기에 아바마마와 마르그레타에게 더욱 송구할 뿐입니다.”
“너와 마르그레타, 네 어미처럼 한 나라를 맡아 운영할 만한 인재는 극히 드물다. 사실 군주는 보통 사람의 능력이면 충분한 자격을 가졌고 인재를 재상으로 등용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최종 결정권자로서의 책임을 결코 피할 수 없다. 군주가 어느 상황에서도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게 쉽지 않아. 우리도 실수를 자주 했잖느냐.”
“아바마마는 상상 이상으로 잘해오셨습니다. 제가 부족하더라도 신료들의 의견에 더욱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건국왕과 비교될 바로 다음 대 군주라는 점에서 네 위치는 쉽지 않아. 내가 준 자료를 바탕으로 세종대왕처럼 문화 군주가 될 것을 권한다.”
이민호는 표절 작가의 부담을 세자에게도 나눠줄 준비를 해두었다. 몇몇 동화와 소설 원고, 다양한 장르의 악보가 세자의 금고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저번에 새강릉에서 만났던 빨간 머리 가수도 꽤 유명해졌더군요. 음악이 시끄럽고 바위 굴리기라는 장르 이름이 좀 이상하지만, 아바마마께서 지은 이름인 줄을 알겠습니다.”
“험! 험! 내 다른 예명으로 곡을 몇 개 주었다.”
“역시 그러셨군요. 제가 즉위한 다음에는 특히 음악과 미술, 문학을 부흥시키겠습니다. 이를 위해 초등교육 교과과정 개편안을 준비 중입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잘 만들어봐라. 예산안은 바로 승인해주마.”
건축과 토목 사업은 경제 상황에 따라 추진해야 하고 현재 고산국의 경기가 극히 과열돼 있다는 판단에서 예비로 빼두었다. 선진국이 돼서도 전체 GDP에서 서비스업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는 산업이 바로 건설이었다.
영토가 광대한 고산국에서 만약 지금이라도 대놓고 건설 사업을 추진한다면 경기를 두 배로 활성화할 수 있겠지만 통화량, 즉 금 보유량이 부족해진다. 금 보유량은 고산국 재정정책에서 명백한 한계선이며 경제정책 담당자들의 영원한 화두였다.
“다 잘 될 거야. 걱정 말고 준비나 열심히 해라.”
“아바마마께서 예전처럼 일을 즐겁게 하시면 좋겠지만, 지나친 기대일 것 같습니다.”
“너도 나처럼 나중에 의욕이 떨어질 날이 올 거야. 그 전에 후계구도를 정하면 돼.”
국가의 군주라는 가업을 물려줄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민호는 그 전에 딱 하나만 더 해결하고 싶었지만 명나라에서 돌아가는 꼴이 사람을 몹시 답답하게 만들었다.
============================ 작품 후기 ============================
아침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