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68 104. 제국의 길 =========================================================================
104. 제국의 길
1630년 7월 초순,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지휘하는 스웨덴 군대가 독일 북부 포메라니아에 상륙한 다음 슈테틴을 점령했다. 스웨덴 병력은 13,000에 불과했으나 구스타브의 군제 개혁 이후 유럽에서 최초로 근대화된 군대라는 평가를 받았다.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가 실패하고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군제 개혁은 엉뚱하게 루스 차르국에서 크게 진일보했다. 루스 차르국에서 꾸준히 편제와 전술을 개발하고 무기와 병참을 표준화시키더니, 어느덧 전력이 폴란드를 압도해 버렸다.
“도련님. 슈테틴과 스몰렌스크 전역을 번갈아 보신 감상이 어떠십니까?”
“시대가 달라. 도대체 누가 가르쳤어?”
참모본부에서 계복과 함께 영상을 감상한 이민호가 혀를 내둘렀다. 스웨덴 군대는 신성로마제국 군대를 상대로 아주 잘 싸웠으나 딱 이민호가 예상한 만큼이었다. 발렌슈타인이나 틸리 백작의 제국군을 상대로 야전에서 선전을 기대할 수 있을 정도였으나, 그 한계도 명백했다.
그러나 스몰렌스크 전투는 슈테틴 전역과 차원이 달랐다. 폴란드 귀족들이 동원한 사병 3만 명이 스몰렌스크를 선제공격했다가 공성전도 아니고 야전에서 아주 박살이 나면서 쫓겨났다.
루스 차르국 육군은 길고 뾰족한 총검이 달린 머스킷과 경량화된 야전용 대포, 유기적인 선형 전술을 활용해 동유럽의 강자 폴란드군을 철저히 농락했다. 폴란드 군은 단시간에 1만 남짓한 사상자가 발생하자 두려움에 휩싸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폴란드군의 악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코사크 기병대가 후퇴하는 폴란드군의 행렬을 일주일 밤낮으로 추격하면서 다시 그 만큼의 사상자와 행방불명자를 발생시켰다. 폴란드 군이 집결해 반격하면 잠시 물러섰다가, 이동하면서 행렬이 길어지면 다시 습격하는 식으로 폴란드 패잔병들을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공주님이 어렸을 적부터 궁금증이 많았잖아요? 공주님이 도련님의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군사 쪽으로 모르는 것은 제게 물어봤거든요. 그때마다 제가 아주 약간의 조언을 해드렸습니다.”
“범인이 여기에 있었군.”
“헤헤! 도련님은 원정으로 왕궁을 비우신 적이 많았잖습니까?”
“계복이 잘 가르친 것 같아. 오늘 영상을 보니까 지나치게 잘 가르쳐서 문제가 생겼어.”
“잘 성장한 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으로서 저는 아주 뿌듯하답니다. 하지만 루스 차르국에 넘어간 고산국 신기술은 전혀 없습니다. 공주님은 가지고 계신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결과가 저 모양이고.”
영상에서는 사방으로 지평선이 보이는 평원에 폴란드 병사들이 끝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영상 마지막에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 속에서 손을 흔드는 차르 표도르의 활짝 웃는 얼굴이 비쳤다. 잘생긴 놈이 화려한 원수 제복을 입으니 더 늘씬하게 잘 빠졌다.
이민호의 사위 차르 표도르, 정식 명칭은 어마어마하게 길지만 간략히 ‘모든 루스인의 황제’ 표도르 2세 보리소비치 고두노프가 똑똑한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전술의 정교함을 이민호는 기대하지는 않았다. 현재의 루스 차르국과 그 군대가 발전한 모든 것에는 차르의 황후 마르그레타에게 원인이 있었다. 마르그레타의 국혼을 진행하면서부터 이민호가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그 예상을 벗어나 루스 차르국이 지나치게 빨리 발전해서 문제라면 문제였다.
“스몰렌스크처럼 방어에 중점을 두면 좋겠는데 차르 부부는 부동항을 노려서 문제야.”
“예. 이스탄불을 점령하거나 오스만 제국을 아래에 두지 않는다면 흑해에 항구를 마련해도 큰 의미가 없지 말입니다.”
“마르그레타는 장기적으로 루스 차르국을 고산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만들려는 걸까?”
만약 그런 우려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고산국으로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시베리아 철도가 서쪽에서 막히고 핀란드는 고립된다. 우랄산맥과 토르구트의 서쪽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상시 배치해야 하는 문제도 생긴다. 그러나 계복은 전혀 부정적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루스 차르국 입장에서는 시베리아 철도가 생명선인데요. 그리고 새로 제정된 국기를 보십시오. 어이! 영상 마지막 부분을 다시 돌려주겠나?”
“맙소사! 저게 뭐야?”
영상 마지막에 루스 차르국의 국기가 떠올랐다. 그런데 흰색, 청색, 적색의 삼색기 왼쪽 상단에 태극기가 통째로 들어가 있었다.
예전에 아이슬란드가 헤드비히 여왕과 이민호를 공동 군주로 한 한시적인 독립국이 되면서 아이슬란드 국기 왼쪽 상단 4분의 1 면적에 태극기를 넣은 적이 있었다. 토르구트 국기와 이집트 임시 국기에도 마찬가지로 국기 일부 면적에 태극기가 들어갔다.
그런데 이것을 외국에서는 고산국 속국 국기의 양식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고산국에게 보호를 받는 브루나이와 동남아 무역소국들이 일제히 국기를 제정하고 왼쪽 상단에 태극기를 집어넣었다.
덴마크에서도 고산국 국왕과의 합작회사인 서인도회사 소속의 상선 깃발을 제정하면서 덴마크 깃발의 좌상면에 태극기를 집어넣었다. 이민호는 이런 국기나 상선기의 모양이 뜻하는 바를 알면서도 그 나라, 혹은 회사들을 보호해줄 생각으로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고산국의 보호를 받긴 하나 독립국이 명백한 루스 차르국마저 이런 국기를 제정할 줄은 몰랐다.
“루스 차르국이 고산국을 종주국으로 받드는 영방(領邦) 중 하나라는 뜻입니다. 도련님께 어서 제국을 세우라고 독촉하는 마르그레타 공주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자칭 황제국이면서 어째서 왕국의 속국으로 들어오겠다는 거야? 차르 부부의 독단인가?”
“아닙니다. 루스인들의 귀족회의를 거쳐 나온 결정입니다. 도련님이 받아주지 않아도 됩니다만, 차르 부부와 귀족들은 대외적으로 고산국의 속국을 자처하는 것이 이익이 크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폴란드와 전쟁을 하면서, 저 깃발 하나로 스웨덴과 오스만 제국, 토르구트의 개입을 막으려는 거군.”
루스 차르국의 국기 제정에 명백한 정치적 의도가 들어 있었다. 이민호는 나중에 루스 차르국의 국기가 바뀌더라도 지금 당장은 인정해주기로 결정했다.
비록 폴란드에서 외교적 항의가 들어오겠지만, 폴란드 귀족들의 압제 아래서 신음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차지한 다음 루스 차르국이 또 다른 지배자 행세를 한다면 실망하게 될 것 같았다.
“도련님! 명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곤란한 줄은 압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고산국은 이미 제국입니다. 우린 오래 전부터 제국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유럽이나 아시아 대부분 국가들은 건국 초부터 우리나라를 제국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밀라노에서의 일을 봐. 우리 백성이나 도움을 받는 나라나 우리가 다른 나라를 도와주는 걸 별로 반기지 않아.”
“저번에 도련님 말씀이, 내정간섭으로 오해하더라도 문명국이라면 다른 나라를 돕는 게 맞다면서요? 그런데 그건 문명국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여러 나라를 아우르는 제국의 기본적인 역할이기도 합니다. 물론 조선 이민 1세대는 외국 원조에 거부감이 매우 클 겁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 그런 일은 돈이 아깝고 괜히 자기가 손해 본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고산국에서 나고 자란 백성들은 처음부터 대국의 백성들이라 익숙해질 것입니다. 외국 원조가 우리에게 일방적인 손해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제국에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아니까요.”
“제국이나 왕국이나 무슨 차이가 있다고. 에스파냐도 왕국이면서 제국 역할을 하고 있잖아?”
고산국에 미 대륙 영토를 팔았지만 원래는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 불과했고 지키는데 비용이 더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와 지중해 세계에서 왕국 여러 개를 소유한 에스파냐는 여전히 완벽한 제국이었다. 하지만 에스파냐는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인 신성로마제국에 양보하느라 제국 명칭을 쓰지 않은 것뿐이었다.
“어쨌든 우리가 명나라와의 관계를 신경 쓸 때는 이미 지났습니다. 우리가 제국을 칭하든 말든 명나라 황실에서도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 지금 이대로도 큰 문제는 없잖아?”
“아! 해군 상원수이신 이순신 총함장님께서 말입니다. 나중에 행록이 작성되고 신도비가 세워질 텐데, 유명 수군도독이 첫 번째 직함으로 기록될 것을 우려하고 계십니다. 고산국이 제국이 되지 않을 거라면 괜히 명나라에서 관직을 받았다고 지금도 후회하고 계십니다.”
“끄응!”
계복은 대원수보다 높은 육군 상원수, 이순신은 해군 상원수였다. 만약 해군 상원수보다 더 높은 관직을 설치할 수 있다면 원수 계급이 아니라 나라 명칭에 달려 있었다.
제국원수나 연방원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민호도 총함장 이순신에게 추서가 아닌 현직에 있을 때 더 높은 관작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고산국이 제국으로 승격돼야 했다. 다른 모든 나라들이 이미 인정하고 있으므로 이 문제는 온전히 이민호의 결심에 달려 있었다.
“사실 고산국이 별로 좋은 이름도 아닙니다. 이 기회에 국호도 바꾸자고요. 국호 건에 한해서는 제발 도련님 의견은 배제하고 싶습니다.”
“으휴!”
사람과 상황에 따라 이름이 중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민호도 충분히 인정했다. 그러나 한 번 바꾸려면 보통 문제가 아니라서 지금까지 내버려두었다.
이후로도 계복은 고산지대 원주민으로 오인할 수 있는 국호를 바꾸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이민호를 설득했다. 계복에게 제국은 덤이었다.
“주께서 베네치아의 흑사병을 물리쳐주신 데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을 짓는다고요? 그런데 왜 고산국에 건축비용 분담을 요청하지요?”
아무리 문명국의 의무라지만, 배은망덕한 이탈리아 사람들 때문에 이민호도 은근히 화가 나 있었다. 그런데 올해 초에 선출된 ‘가장 평화로운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니콜로 콘타리니는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었다. 도제가 왕도에 보낸 외교관이 유쾌하게 대답했다.
“하하!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몹시 섭섭하셨던 모양이군요. 하지만 베네치아 시민들도 다 압니다. 고산국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시민들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항생제라는 약과 고양이가 흑사병 퇴치에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도 잘 압니다. 병원선을 베네치아에 보내 장기간 운영하는 비용이 어마어마하다는 것도요.”
“쳇! 알긴 뭘 안다는 말이오?”
“전하! 고산국에서 보내준 의료진은 더 이상 흑사병 희생자의 사체를 불태우지 않고도 병의 확산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베네치아 의사들이 포기하고 검역소에 격리한, 사실상 버려진 중증 환자들도 대부분 살려냈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나쁜 자라도 밀라노에서 대거 발생한 희생자 숫자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흑사병이 유행할 때마다 베네치아에서는 바깥 사주 또는 작은 섬에 검역소를 세워 환자들을 격리했다. 그러나 흑사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몰랐기에 환자를 격리한다는 것은 곧 혼자 죽으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흑사병 유행시기가 지난 다음 격리 검역소가 있던 곳을 대규모 공동묘지로 활용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도 좁은 베네치아 땅에 왜 교회를 더 짓죠? 베네치아에는 가톨릭교회가 이미 충분히 많다고 봅니다만.”
“독실한 신자들이 고산국 국왕전하를 주로 모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일은 사람이 하더라도 영광은 하늘에 계신 주께 돌려야지요.”
“그건 그렇소만. 그래도 국내 종교시설이라면 정부 재정으로 건축을 지원하겠지만 굳이 외국의 교회 건립에 우리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보오. 로마는 예외에 불과하오.”
이민호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외교관이 가방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그리고 외교관이 갑자기 큰절을 해서 이민호가 화들짝 놀랐다.
“이제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은 고산국에게 더 이상 외국이 아닙니다. 국왕전하께 이것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기로 새로 제정됐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게 돼서 무척 기쁩니다.”
“또?”
“또라뇨? 자국 국기에 고산국 국기 문양을 넣은 곳은 독립 국가로서는 베네치아가 최초인 걸로 압니다.”
“루스 차르국도 있소.”
“그곳은 전부터 고산국의 보호국이었으니까 다릅니다. 어떠십니까? 열악한 베네치아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들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이민호가 한숨을 내쉬면서 시선을 돌렸다. 베네치아 공화국 사람들의 결정이 고맙긴 하나 이것은 고산국의 국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 둘 중에서 양자택일하라고 강요한다면, 고산국은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 정치인, 성직자, 상인들도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런 결정을 하게 됐겠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별로 원하지 않는 일이오. 베네치아는 그 동안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아주 잘해왔소. 앞으로도 혼자서 잘할 수 있을 것이오.”
“그게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해졌기에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외교관이 울먹거렸다. 직접 말은 못해도 그 동안 베네치아에 문제가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장 올해 초만 해도 베네치아 육군은 만토바 계승전쟁에서 제국군에게 크게 패했다. 오랜 숙적인 오스만 제국에 이어 이탈리아 북부에서 야금야금 영토를 확장 중인 신성로마제국,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장악한 에스파냐도 베네치아에게는 너무 강대한 위협이었다. 강대국을 등에 업은 전통적인 무역도시들과의 경쟁도 이제는 버거워졌다.
유일한 구원줄이었던 교황청과의 사이도 더욱 나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흑사병이 크게 유행해 인구 다수를 잃게 됐다면 베네치아는 약소국으로 전락했다가 결국 어느 강국에 흡수될 운명이었다. 고산국 의료진이 도와주긴 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나빴다.
“고민 좀 해보겠소. 일단 베네치아로 돌아가 계시오.”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 명백한데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뻗친 나라는 세상에서 오직 고산국밖에 없습니다. 저희 베네치아 공화국 시민들은 고산국 국왕전하의 신민으로서 영원한 충성을 맹세할 것입니다.”
“왕정이 싫어서 공화국을 유지하는 것 아니오? 그리고 국제적으로 문제가 많을 것 같아서 일단 검토를 해보겠소.”
이민호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외교관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외교관은 대사관에 머물면서 계속 눈물로 호소했다.
다음 날에는 아일랜드에서 아이레 공화국의 사절단이 왕궁을 방문했다. 외교 사절들이 손에 들고 흔드는 작은 깃발의 모양이 아주 익숙해서 이민호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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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고 겸양을 부리곤 하지만 제목처럼 결국은 갈 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