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66 103. 명나라의 혼란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바타비아 총독 쿤이 왕궁에 데려와 이민호에게 소개한 인물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에서 이사를 맡은 사람이었다. 정식 알현이 끝나고 소파에 편히 앉아 대화를 이어갔다.
“국왕전하! 아주 가볍고 부드러운 과자입니다. 혹시 재료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옥수수 알을 식용유나 버터에 튀겨서 만들었소.”
“간단한 방법으로 아주 맛있는 식품을 만드셨군요. 과연 고산국입니다. 정말 감탄스럽습니다.”
“아니오. 북미 원주민들의 전통 조리법이오.”
몇 년 전에 이민호가 포우하탄 원주민 마을을 방문했다가 팝콘을 발견한 이후 전국적인 인기 식품으로 유행했다. 그때 갑자기 뻥뻥 터지는 소리에 놀란 호위들이 이민호를 땅바닥에 엎어놓고 권총을 사방으로 겨누었다. 원주민들이 억지로 웃음을 참는 사이 원주민 아이가 내민 나무그릇에 담긴 팝콘을 이민호가 한 입 먹고 나서야 비상상황이 해제됐다.
“북미 원주민들도 고산국 국왕전하의 충성스런 신민들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아무 옥수수나 튀긴다고 이런 모양이 되는 게 아니고 특별한 품종이 있소. 돌아가는 길에 종자와 재배법, 조리법을 챙겨주겠소. 심심풀이나 아이들 간식으로 좋을 것이오.”
이민호도 아무 옥수수나 튀기기만 하면 강냉이가 되고 팝콘이 되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옥수수 알을 튀기면 둥근 모양이 대부분이고, 옥수수 알 내부에 고립된 수증기가 제대로 폭발해 활짝 퍼지는 모양이 되려면 품종과 재배법, 조리법이 달라져야 했다. 이른바 버섯모양보다 나비모양이 훨씬 부드럽고 잘 부서진다.
“저희 주 연합이 국왕전하께 항상 신세만 지는 것 같습니다.”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그런데 네덜란드가 포르투갈 영토인 브라질을 침공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소.”
실제 역사에서 더치 브라질이나 뉴 홀란드라 해서 브라질 북부를 네덜란드가 점유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25년이 지나지 않아 포르투갈 농민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이 지역을 포기하고 물러난다.
이민호가 네덜란드를 위해 남미대륙 북부 해안 지방을 조차해줬으므로 브라질을 공격할 경제적인 동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네덜란드는 세계에 퍼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공격함으로써 본국에 대한 에스파냐의 군사적 압박을 해소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었지만, 사실 경제적인 동기가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포르투갈은 주 연합의 적인 에스파냐 국왕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연합의 해군이나 서인도회사가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공격하는 것은 독립전쟁의 일환입니다.”
“식민지 쟁탈전이라고 솔직히 말하시오. 요즘 포르투갈의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사실은 네덜란드에서도 알고 있지 않소? 차라리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힘을 합쳐 에스파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편이 낫겠소.”
쿤 총독과 서인도회사 이사가 전혀 몰랐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총독과 이사는 포르투갈의 분위기 운운하는 이민호의 발언에 꽤나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다른 분이 그런 말을 했다면 반론을 제기했을 겁니다. 그러나 국왕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소. 하지만 이건 신앙 문제가 아니니 능력껏 알아보도록 하시오.”
“아닙니다, 전하. 굳이 조사하지 않고도 전하의 말씀을 믿겠습니다. 괜히 조사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가 에스파냐로 넘어가면 피차 곤란하니까요.”
서인도회사에서 간부 정도 하려면 외교적 능력도 출중해야 했다. 이사는 포르투갈 내부에서 뭔가 예상하지 못한 다른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채고 더 이상 브라질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포르투갈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네덜란드의 독립을 앞당기는 일이오. 이 사실을 회사의 다른 간부들에게도 인지시키시오.”
“예, 전하. 여러 주 의회에도 비밀리에 통보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대주주로서 회사를 잘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
“험! 험! 모두의 이익을 위해 힘을 합쳐 앞으로 나아갑시다.”
덴마크 서인도회사처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도 이민호의 자본적 지배 아래에 놓여있었다. 설립 초기 ‘먼 나라 회사’ 여럿을 합병해 주식회사로 출범한 이래 큰 위기 없이 성장시킨 뒷면에는 이민호가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북대서양 무역에 주력하는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더더욱 이민호 개인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회사 간부들은 서인도회사의 대주주로서 이민호가 절대 네덜란드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고산국 국적 취득 문제에 있어서 프랑스의 위그노와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불만이 있습니다. 북미에 도착한 즉시 국적을 취득하는 프랑스 출신과 달리 네덜란드 출신 이민자는 정식으로 국적을 취득하는데 3년에서 5년이나 걸립니다. 이 불만을 해소시켜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프랑스의 위그노는 종교 문제로 인한 난민이란 점에서 에스파냐의 모리스코나 잉글랜드의 청교도와 비슷하오. 독일과 발트해 연안 이민자들도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난민으로 인정했소. 그러나 네덜란드에는 그런 문제가 없어서 다른 나라와 동일한 규칙을 적용시키고 있소.”
북미에 가급적 이민을 많이 받아들이려는 국가적 요구와, 선원과 광부에 대한 수요가 높다는 현실 사이에서 이민호도 고민이 많았다. 고산국 본토 출신 백성들이 인구가 폭증하고 있다 하나 아무래도 선원과 광부는 기피 직업이었다. 주로 이 부분을 유럽이나 명나라 이민자로 채우고 있었다.
“고산국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동맹 같은 조직이 설립되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희 같은 약소국들이 강력한 고산국의 우산 아래에 들어가 안전과 번영을 누릴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거 참으로 흥미로운 제안이오.”
“오! 전하께서도 찬동하시는군요. 국왕전하께서는 혹시 황제로 등극하실 계획이 있으십니까? 영토와 인구로 보면 이미 제국의 기준을 넘어섰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유럽에서는 고대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아야 제위에 올라설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차르가 시저의 러시아어 발음이며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하나 인정해주는 유럽 국가는 단 하나도 없었다.
“별 의미가 없지 않소? 황제나 왕이나 대공이나 다 똑같은 군주일 뿐이오. 마찬가지로 고산국이나 네덜란드나 다 마찬가지로 독립된 주권국이라 생각하오.”
“감사합니다, 국왕전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이사는 아주 가벼운 걸음걸이로 왕궁을 나섰다. 이민호는 이사의 입도 가볍지 않기를 바랐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포르투갈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고, 이민호로 인해 네덜란드도 국제정세 변화에 대비할 수 있게 됐다.
3월 밀라노에서 사육제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지난 가을 흑사병의 공포에 짓눌려 지내던 밀라노 주민들과 만토바에서 전쟁 중이던 병사들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축제를 마음껏 즐겼다.
“밀라노 주민들은 주인님께서 신경을 써줬다고 고마워하지만, 몇몇 귀족들 중에는 주인님께서 과도하게 반응했다고 비웃는 자들이 있어요. 만토바에 대한 정치적 노림수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는 자들도 있어요.”
“만토바를 내가 왜 노려? 미카! 나에 대한 평판은 신경 쓰지 마. 이대로 흑사병이 소멸되면 좋은 일이니까. 의료진에게도 이탈리아 귀족들이 의심할 만한 행동은 자제하라고 해줘.”
이민호는 날이 풀리면서 밀라노에 흑사병이 창궐할 경우 무책임한 귀족들이 오히려 고산국 의료진에게 덤터기 씌울까 겁이 났다. 아직도 마녀사냥이 횡행하는 유럽이었다. 전염병을 비롯한 여러 가지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지배층들이 주도해 이런 극단적인 이벤트를 연출하곤 했다.
“예. 고산국 이름을 내걸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의료진 보호에 최선을 다할게요.”
밀라노 입경을 거부당해 제노바에 머무르고 있는 고산국 의료진은 두 달 단위로 인원을 교대하며 계속 대기 중이었다. 줄리아를 비롯한 수녀들은 고산국 대사관 직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행히 로마로 돌아갔다.
베네치아에서도 더 이상 흑사병 환자가 발생하지 않아 의료진이 다른 진료를 하고 있었다. 3월 9일에 크레타 섬에서 큰 지진이 발생해 병원선을 급파했으나 인명피해가 몇 명 되지 않았다. 대신 헤라클리온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수많은 집과 교회 건물이 쓰러져 이재민이 많이 발생했다. 결국 의료지원보다는 식량과 식수 공급에 주력했다.
대부분 모르고 지나갔는데 지진으로 인한 진정한 피해는 바다에서 발생했다. 쓰나미가 덮쳐서 해안마을과 연해에서 항해하던 상선, 어선들을 쓸어버렸다. 생존자가 없어서 정확한 피해를 추산할 수 없었고, 다만 난파한 배의 잔해들과 선원들 사체가 바다에서 발견됐다.
1630년 3월에 우크라이나에서 비등록 코사크와 농노들이 일으킨, 일명 ‘페도로비치의 반란’이 일어났다. 1625년 반란을 마무리하는 조약에서 등록 코사크를 6천으로 제한하고, 폴란드 귀족들이 소작농들을 농노로 만드는 일에 대한 반발로 발생했다. 동방정교회 신자들인 농민들을 가톨릭으로 강제로 개종시키는 정책도 원인의 하나였다. 폴란드에서 귀족은 종교의 자유를 누리지만 농민은 아니었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등록 코사크들의 대표이며 친 폴란드파인 코사크 헤트만, 흐리호리 초르니를 붙잡아 처형하고 타라스 페도로비치를 새 헤트만으로 선출했다. 반란이 커지면서 여러 영지에서 코사크와 소작농들이 귀족과 토지소유자인 유대인들에게 저항하는 일이 확산됐다.
사태가 커지자 폴란드 대 헤트만이 대군을 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항상 그랬듯이 보급품이 부족했고, 코사크와 싸우기는 무섭고, 그래서 만만한 도시들을 약탈하고 다녔다.
진압군과 반란군이 만나 싸우기도 했으나 서로 몸을 사리느라 어느 한쪽이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하고 협상에 들어갔다. 폴란드는 코사크의 요구 사항 일부를 들어주는 대신 반란군 수괴 페도로비치를 구속하길 원했으나, 자주 그랬듯이 이 문제도 흐지부지 넘어갔다.
“국왕전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구원 요청을 하고 코사크 헤트만 페도로비치가 모스크바에 정식 사절을 보냈습니다. 저는 같은 루스인 입장에서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차르는 곡창이라고 소문 난 우크라이나를 갖고 싶은 거냐?”
예쁜 딸을 훔쳐간 얄미운 놈이 이민호에게 도와달라고 왕궁을 방문했다. 비록 딸보다 더 예쁜 손자와 손녀들을 이민호의 품에 안겨주긴 했지만 이민호는 그때 일을 아직도 잊지 않았다.
“영토를 늘릴 필요는 없습니다, 전하. 하지만 드네프르 강 유역에 사는 우크라이나 사람들 대부분은 저와 같은 루스인, 즉 동슬라브 족입니다. 얼마 전까지 같은 역사를 공유했고 말도 통하며 심지어 종교도 같습니다. 그들의 자유와 생명, 신앙을 위해......”
“잠깐!”
이민호가 차르의 발언을 중단시켰다. 딸 마르그레타만 아니었으면 차르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쳤을지도 몰랐다.
“뭘 위해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차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솔직히 말해봐.”
“국왕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부동항을 원합니다.”
루스 차르국의 내정이 안정되면서 차르가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왔다고 이민호도 인정했다. 역사상 러시아는 항상 부동항을 찾아 헤맸다. 실제 역사에서는 물론 지금도 영토가 그리 넓은데도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실제 역사에서 러시아는 희생을 무릅쓰고 핀란드와 우크라이나, 블라디보스토크를 손에 넣는다. 그래도 끝내 마음에 드는 부동항을 얻는 데 실패하고 만다. 우크라이나 남부와 세바스토폴을 통해 흑해로 진입할 수 있게 됐더라도 러시아 함대가 아시아와 유럽의 가교라는 이스탄불, 금각만을 통과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차르를 위해 핀란드를 독립시켜줬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 보구나. 모스크바까지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해 줬는데도 부족하겠구나.”
“죄송합니다. 미래와 후손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폴란드는 작년까지 스웨덴의 침공에 시달렸고 지금은 코사크의 반란에 크게 약화됐으므로 지금 공격한다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나라가 부흥하는데 영토 확장이라는 요소가 빠지기 어렵다는 사실은 이민호도 인정했다. 그러나 차르의 혼인과 토르구트의 이주 이후 기묘한 균형이 잡힌 상태가 지속된 동유럽에서 루스 차르국이 남쪽이나 서쪽으로 확장하도록 내버려두기는 어려웠다.
“폴란드의 진정한 힘은 귀족들이 보유한 사병에서 나온다. 쉽지 않겠지만 귀족들이 위기를 느껴 사병을 내놓는다면 폴란드는 여전히 강력해.”
“이번 스웨덴의 침공 사건에서 보듯이 폴란드 귀족들은 자기 영지만 챙기는 이기주의자들입니다. 지금 이 시기가 가장 좋다고 마르그레타도 동의했습니다.”
마르그레타는 루스 차르국뿐만 아니라 고산국의 국익에 더해 주변국들의 균형까지 감안하는 전략가로서 자질을 보였다. 마르그레타도 그렇게 판단했다면 이민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내정을 다진 루스 차르국의 현재 군사력은 폴란드의 귀족 사병들에게 털리고 코사크와 타타르에게 털리던 1600년대 초반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군제 개혁의 성과는 이민호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럼 차르 마음대로 해. 다만 토르구트를 지원해줄 수는 없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게도 동의를 얻어라.”
“토르구트가 중립이라면 제 입장에서 많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폴란드의 오랜 숙적입니다. 당연히 저와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협공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미 사절단을 이스탄불에 보냈습니다.”
“그럼 차르에게 좋겠지만 과연 그럴까 모르겠다.”
근세에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 부단히도 싸워 꾸준히 영토를 빼앗는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영토에 속한 두 곳의 해협 때문에 영원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러시아는 무작정 남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루스 차르국의 외교가 성공했는지 오스만 제국이 루스 차르국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동의했다. 그러나 황제는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파병하지 않았고, 크림 칸국과 노가이 칸국 등 타타르의 지원을 금했다. 다만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코사크들이 루스 차르국의 용병으로 참가하는 것은 묵인해주었다.
============================ 작품 후기 ============================
챕터 이름과 내용이 다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