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64 103. 명나라의 혼란 =========================================================================
1629년 8월 19일 네덜란드 동부 상업 중심지인 베젤의 에스파냐 수비대가 소규모 네덜란드 군의 기습을 받아 도시를 버리고 도주했다. 베젤은 네덜란드 독립전쟁 와중에 주인이 수차례 바뀐 곳이었고, 1590년부터 4년 동안 대규모 에스파냐 군대의 포위공격을 받은 끝에 점령되기도 했던 주요 격전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렇게 소수에 의한 기습작전이 성공한 것은 처음이었다.
“고석찬 대위!”
“예!”
총함장 이순신이 해군대학 학생 하나를 지명하자 기립한 채 바짝 얼어붙었다. 다른 학생들도 긴장한 채 이순신의 질문을 기다렸다. 해군대학 전략학 수업에 참관한 이민호도 어떤 질문이 나올까 몰라 긴장했다.
고산국 장교는 사관학교 졸업 후에 장교로 임관해 근무하다가 일정 시기에 육군대학이나 해군대학을 졸업해야 한다. 그 후에 다시 국방대학원까지 다녀야 하니 직업군인인 장교의 길도 결코 만만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석찬은 왕자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주상아 공주의 막내아들 고석준을 보좌하겠다고 군에 입문한 공주 시녀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고석준을 육군이 아닌 해군에 보냄으로써 군에 사조직이 형성될 가능성을 아예 뿌리째 뽑아버렸다.
왕실에서도 이민호의 조치가 심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시대가 시대이니만치 아무리 공주 아들과 시녀 아들이라도 이제는 동등한 고산국의 왕자라는 사실을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너희들은 해군대학 졸업반으로서 조만간 다시 지휘관이 될 자들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머리를 써라. 너희들의 머리에 국왕전하의 평안과 아군 장병들의 생명과 백성들의 안전과 행복이 달려있다. 너희들은 사관학교 생도가 아니라 해군대학 학생이니 긴장하는 대신 머리를 쓰라고 했다.”
“주의하겠습니다!”
지난 5월에는 프랑스 국왕군이 프리바 포위작전을 어떻게 성공시킬 수 있을지 이순신이 학생들에게 물었다. 프리바는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마을로 라로셸이 함락된 뒤 위그노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킨 곳이었다.
마을을 단단히 둘러싼 목책과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강 때문에 학생들은 프랑스 국왕군의 포위가 길어져 최소 몇 달을 넘길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프리바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언덕을 지목하며, 이곳에 대포 몇 문을 올려놓으면 위그노들이 버티지 못하고 항복할 것으로 예상했다.
길이 없다시피 하고 언덕이 가파르기 때문에 학생들은 물론 이민호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며칠 후 프랑스 국왕에게 고용된 스위스 용병들이 몇 톤이나 되는 대포를 순전히 맨몸으로 이고지고 옮기더니 기어코 언덕에 올려놓고 말았다. 위그노들의 저항은 그것으로 끝장났다.
“자!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곳 베젤이 일시적으로 주 연합군의 손에 넘어갔다. 고석찬 대위는 이 사건에서 비롯될 전략적 의의를 논하라.”
“예! 주 연합에 대한 에스파냐 군대의 동쪽 방위선에 일시적으로 구멍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소규모 부대로는 베젤 점령을 유지할 수 없고, 에스파냐에서 주변 지역에 동원한 병력이 많기에 베젤을 곧 탈환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다시! 어째서 주 연합군이 소규모 부대를 베젤에 보냈을까 하는 작전 목적부터 생각해야지.”
이순신은 학생들을 윽박질러 사고를 마비시키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제자가 놓친 중요한 요점부터 지적해 논리의 전개를 도왔다. 해군대학 학생들 뒷좌석에 앉은 이민호도 배우는 바가 많았다.
“예! 주 연합의 소규모 부대는 베젤에 집적된 에스파냐 군의 보급품을 소각한 다음 도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난 4월부터 주 연합 주력부대에 포위된 셰토검보쉬를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에스파냐의 헨드릭 반 덴 베르그의 증원군은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조만간 퇴각할 것이며, 이는 에스파냐의 동부 포위망이 완전히 무너질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습니다.”
“좋다. 비록 에스파냐와 주 연합군의 지휘부가 아무리 멍청이들이라도 그 정도 생각은 할 것이다. 내가 예상하기로 셰토검보쉬가 함락되거나 항복하는데 앞으로 한 달도 안 걸릴 것이다. 다음 수업시간에 실제 전황을 확인해보도록 하자.”
이순신과 해군대학 학생들이 예상한 대로 5개월 동안 포위공격을 받은 셰토검보쉬의 수비대는 결국 9월 14일에 항복했다. 네덜란드인들이 흔히 숲, 뎀보쉬(Den Bosch)라 부르는 셰토검보쉬의 함락 이후 다른 여러 요새 도시들이 네덜란드에게 함락된다.
고산국 육군과 해군은 유럽의 전쟁에 직접 참가하는 대신 이렇게 예측을 하거나 전투 결과를 분석함으로써 간접적인 경험을 쌓았다. 고대의 전사 연구는 학생들에게 따분할 수도 있겠지만 현 시기의 전쟁을 다루기에 참모본부 요원들과 군사학교 학생들은 바짝 긴장한 채 연구에 임했다. 물론 변수도 많고 양측 지휘관의 어이없는 판단착오도 많았지만 고산국 장교들에게 큰 배움의 장이 되었다.
“수업 수준이 아주 높습니다, 형님.”
“과찬이십니다, 전하. 설마 국방대학원이나 육군대학만큼 높겠습니까? 참모본부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해군 장교들이 많아서 전쟁론과 전략학 수업도 보강하고 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이순신과 함께 차 한 잔을 나눴다. 이순신은 해군사령부에 있을 때보다 이곳 해군대학에서 강의할 때 훨씬 의욕에 차고 초롱초롱한 눈빛이었다. 말년에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은 스승이 된 이에게도 큰 힘을 주기 마련이었다.
“혹시 제 아들놈들이 게으름 피우거나 말썽을 부리면 호되게 나무라주십시오. 요즘 왕자들이 줄줄이 해군과 육군에 입대해서 형님께서 곤혹스러우신 것 같아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왕자님들이 다른 인재들과 함께 의욕적으로 배우려 하시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습니다. 공부하라고 제가 좀 다그치기는 해도 다른 학생들에 비해 특혜를 베푼 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역시 형님이십니다. 이번에 새로 만든 홍삼차를 형님 맛보시라고 가져왔습니다. 홍차나 커피처럼 따로 달일 필요 없이 끓인 물을 넣어 드시면 됩니다.”
“이 귀한 걸!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이민호가 이순신에게 홍삼차 100포 상자를 선물했다. 학교에 작은 음료수 박스를 싸들고 가는 학부모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가격이 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비쌌다.
1629년 하반기에 이탈리아에서 선페스트가 광범위하게 유행했다. 선페스트는 흑사병 중에서 가장 흔한 가래톳 흑사병이며, 환자의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의 림프절이 부어오르고 발열과 두통, 구토 등의 증상을 나타냈다.
1629년 흑사병이 발생한 곳은 이탈리아 북부 만투아, 만토바 공작령이었다. 만토바 공작령과 몬페라토 공작령의 영주인 프란세스코 4세가 사망하고, 추기경이었던 동생 페르디난도 1세와 성직자였던 동생 빈센초 2세가 연달아 환속까지 해가면서 공작위를 승계했으나 그들 역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줄줄이 죽었다. 곤자가 가문의 대가 끊기자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지원을 각각 등에 업은 친인척들이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만토바 계승전쟁이 일어났다.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 프랑스, 사보이 공작령, 베네치아, 그리고 교황청까지 끼어들고 동맹 내부에서도 첨예하게 갈등이 빚어진 만토바 계승전쟁이 한창일 때 신성로마제국이 독일인 용병들을 대거 참전시켰다. 바로 이들에게서 처음 증상이 발견됐으니 흑사병은 30년 전쟁이 한창인 독일 땅으로부터 전염된 것으로 의심됐다.
흑사병 발생에 놀란 베네치아 군대가 급히 퇴각했지만 바로 이것이 흑사병을 베로나와 베네치아로 확산시킨 경로가 됐다. 10월에는 신성로마제국 영토 밀라노 공작령의 총독인 곤살로 데 코르도바의 군대를 통해 밀라노에도 전해졌다.
밀라노에서 처음 흑사병이 발견된 곳은 금융 및 상업 지구인 롬바르드였다. 그러나 밀라노는 예전부터 공중위생이 발달한 도시이며 격리검역소가 마련돼 있기에 초기 대응은 아주 잘 이루어졌다. 독일인 용병들의 도시 접근을 차단하고 무역상품 교역에 제한을 가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조기에 흑사병 확산을 저지하는 듯했다.
“그래서 내년 3월에 사육제를 강행하겠다고?”
“예, 주인님. 흑사병 유행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기념으로 축제가 대대적으로 열릴 예정이래요. 만토바 계승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밀라노 공작령 병사들뿐만 아니라 제국군 소속 독일인 용병들에게도 축제를 개방하기로 했어요. 흑사병이 두려워 그 동안 집안에서 숨죽이고 지내던 밀라노 시민들의 기대가 커요.”
“이놈들이 미쳤구나! 겨울이라 잠시 소강상태인 걸 몰라?”
미카에게 보고를 받은 즉시 밀라노 총독부에 외교관을 급파해 의료진 파견을 논의하도록 했다. 총독이 밀라노에 없어서 외교관은 전쟁이 한창이던 만토바까지 가서 총독을 만났다.
그러나 총독 코르도바는 밀라노에서 흑사병이 이미 소멸됐다는 이유를 들어 고산국 의료진의 파견에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고산국의 힘이 두려워 비록 말은 좋게 했지만 새원산에서도 제대로 막지 못한 흑사병을 밀라노에서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막아냈다며 깐족댔다.
이미 전쟁터가 된 만토바에는 어느 한 편을 들어 고산국에서 의료진을 파견할 수가 없었다. 총독 코르도바는 자국군 부상병들의 외과 수술을 원했고 고산국에서는 흑사병 확산을 우선 막으려 했기에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밀라노에 의료진을 파견하지 말까요? 비웃음을 사면서까지 도울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도 보내. 오만한 정치가가 문제지 시민들이 무슨 잘못이야? 그런데 밀라노와 베네치아 인구가 요즘 얼마나 돼?”
어느 조직이든 대표자나 말단 관리나 관계없이 모두가 책임이 엄중하므로 공인이라면 항상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1930년 결혼식을 진행 중이던 원주민 족장의 손자가 바친 포도주를 일본인 순사가 더럽다고 거절한 것을 넘어 곤봉으로 족장 손자를 두들겨 팼다가, 초등학교에서 운동회 중이던 일본인 134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게 됐다. 이것이 대만 원주민 아타얄족이 봉기한 우서 사건의 첫 날이었다.
이민호는 외국 관리가 예의에 어긋난 언행을 하더라도 웬만하면 참고 넘어갔다. 이민호가 그런 일에 일일이 반응해 화를 냈다면 벌써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현재 시민으로 등록된 자와 시에서 파악한 비등록 거주자가 밀라노에 13만, 베네치아에 19만이에요.”
“베네치아는 그 사이 인구가 많이 늘었구나. 지금 바로 움직여서 두 도시 시민들을 다만 절반이라도 구하자.”
결국 전쟁터인 만토바는 빼고 밀라노와 베네치아에 자원자만으로 구성된 의료진을 파견했다. 바닷가에 위치한 베네치아에는 군 병원선도 함께 파견했다. 그러나 연말에 미카를 통해 어이없는 소식을 두 가지나 듣게 됐다.
“주인님! 밀라노에서 우리 의료진의 입경을 거부했어요. 그리고 성녀님이 어제 만토바로 출발하셨어요!”
“줄리아가 만토바에? 안 돼!”
이민호가 벌떡 일어났다. 조선 양반 가문의 딸로서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 소서행장의 수양딸이었던 서 줄리아는 친구 두 명과 함께 수녀가 되어 로마에 있었다.
그 동안 수녀원에서 지내면서 의과대학을 졸업해 로마 인근에서 빈민과 병자들을 구호한 일은 이민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흑사병이 만연한 전쟁터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졌다.
“주인님은 예전에 줄리아님과 수녀님들이 전쟁터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종군 간호사가 되길 바라지 않으셨나요?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돌보는 백의의 천사로 평가받길 원하셨잖아요.”
“그야 일반 수녀 겸 간호사였을 때 이야기지! 지금은 성녀잖아! 의사 겸 성녀가 흑사병에 걸리면 남들이 어떻게 보겠어? 당장 전령을 보내서 말려!”
“잘못하면 의학과 가톨릭의 권위가 크게 하락할 수 있다는 뜻이군요. 하지만 만토바에는 고통 받는 환자들이 있어요. 그분들은 성녀이기 전에 수녀이며 의사예요. 말린다고 들을 분들이 절대 아니에요.”
“그래도 가면 안 돼.”
“주인님의 명이시니 로마에 주둔 중인 스위스 용병연대에 연락해서 성녀님들께 전령을 보내라고 지시할게요.”
이민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카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이민호가 미카를 다시 불렀다.
“줄리아 등을 우리 고산국에서 파견한 밀라노 의료지원단에 합류하라고 해. 거긴 방역복이나 여러 가지 장비를 갖췄으니까.”
“예, 주인님!”
미카가 기쁘게 대답했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해결책이 있었다. 줄리아가 흑사병 환자나 부상병들이 너무 불쌍해서 설마 방역복을 벗고 활동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환자들에게 흑사병을 감염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의료진은 반드시 방역복을 착용해야 한다는 것이 고산국 의료계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걱정은 남았다. 수녀들이 과연 전쟁터인 만토바가 아닌 밀라노에서 일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이민호는 가끔 조선소에 가서 진수식을 주관했다. 고산국 조선소라고 해서 무조건 기관이 달린 철선만 제작하는 것이 아니었고, 이렇게 명나라 선박인 사선이나 조선의 한선 등 목선도 다수 건조했다. 다만 선박 구조가 약간 다르고 견고함이 일반 목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차이가 있었다.
“국왕전하! 이 배의 첫 번째 선장으로 임명된 니콜라스 이콴이라고 합니다. 고산국 한자 발음으로 정일관으로 불러주십시오.”
“그래. 젊은 선장이 기개가 넘쳐서 좋구나. 선장이 비록 외국인이지만 선원들을 잘 이끌어 고산국의 화물을 안전하게 운반해주기 바란다.”
고산국이 영유한 남태평양 영토가 너무 넓어서 고산국과 류큐의 해운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 해역에는 명나라의 사선을 투입하고 선원으로는 복건성이나 광동성 출신의 해민들을 활용했다. 해민이란 명나라 남부의 바닷가 주민들로서 옛날 같으면 어업이나 밀무역, 해적업에 종사하던 자들이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그리고 일 년 반만 지나면 저도 당당한 고산국 백성이 됩니다.”
“그래. 그때는 기관이 달린 큰 배로 옮겨서 근무할 수 있을 거야. 봉급도 최소 두 배로 뛰겠지.”
“그때가 기대됩니다. 이번에 새로 태어난 아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축하하네, 선장. 앞으로도 기대하겠네.”
백성들을 강력히 통제하는 명나라 출신에 한해 약간 문제가 있긴 해도 외국인들은 보통 5년 동안 광산이나 고산국 해운업계에서 근무하면 고산국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정일관은 복건 출신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마카오에서 일한 탓에 고산국 해운업계에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정일관은 정지룡의 본명이며, 정지룡은 정성공의 아버지였다. 고산국의 건국으로 인해 역사가 많이 바뀌면서 정지룡은 일본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고, 아들의 이름을 똑같이 정성공이라 지었지만 해적 두목으로 성장하지도 않게 됐다. 물론 이민호는 이런 일들을 전혀 모르고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1629년도 다 넘어갔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