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61 103. 명나라의 혼란 =========================================================================
“새목포 항만을 따라 북쪽으로 작은 단층이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해군 관상대에 문의한 결과 지난 십 년간 이 지역에서 3.0 이상 규모의 지진이 발생한 기록이 없었습니다. 이 지역 원주민 라 호야 노인들의 증언도 일치했습니다.”
“아니 내 말은, 왕도로 어떤가 하는 질문이었소. 단층대 조사에 이은 두 번째 임무 아니오?”
“여기 보고서를 제출하겠습니다, 전하.”
두툼한 책으로 된 보고서의 첫 장을 열었다. 지질연구소에서 제출한 보고서는 왕도 후보 지역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실로 다양한 방면에서 평가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공조의 보고서와 전혀 달랐다. 한 지역의 지리와 지질을 뼘 단위로 세세하게 조사한 목차를 넘기자 보고서 요약문이 나왔다.
“조건부 통과라. 연구원들의 평가를 직접 듣고 싶소.”
“전하! 먼저 주도와 비교해서 말씀드립니다. 예를 들어 새순천은 북미 대륙 북부의 광대한 숲을 제외하면 북미주의 지리적 중심에 위치합니다. 대륙뿐만 아니라 멕시코 고원이나 카리브해 섬들에서 가기에도 딱 중간입니다.”
북미주는 새순천, 남미주는 페루 리마, 호주는 새부산, 태평양주는 루손 섬 북부 바기오, 시베리아주는 부동항이 없어 일단 동해여진의 본거지인 곰나루를 주도로 삼았다. 지방을 뜻하는 주(州)가 아닌 대륙 이름에 붙는 주(洲)로 불러야 할 것 같지만 큰 상관없었다.
“그렇소. 새순천은 북미주의 주도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오. 여름에 지독히 더워서 문제지만.”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에 반해 새목포는 새 왕도의 후보 중 하나이온데, 아국 영토의 지리적 중심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하와이를 왕도로 결정하소서.”
새 왕도를 선정하는 사업이 벌써 십 년을 넘겼다. 현재 왕도 고북은 중국 대륙에 너무 가까워서, 호주는 남반구라서, 시베리아는 추워서, 북미와 남미는 아직 개발 중이라서 등등 갖은 이유로 선택을 받지 못했다. 영토가 넓은 건 좋은데 가운데에 태평양이 떡 버티고 있어서 어딜 왕도로 선택하든 주변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북미 인구가 최근 꾸준히 늘어나면서 북미 서해안, 특히 새인천에 새 왕도를 건설하는 게 좋겠다는 공감대가 정부와 왕실에서 형성됐다. 현대 LA는 서부를 대표하는 대도시이므로 이민호도 새인천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헐리웃 재난 영화를 봤었음에도 미처 생각도 못했던 거대한 단층이 발목을 잡았다. 지진이 잦아 주민들이 불안해하는 새인천을 왕도 후보에서 탈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지질학자들이었고, 잘해야 지리학까지만 조예가 깊은 순수 학자들이었다.
“하와이는 외따로 떨어진 섬이라서 문제요. 연구원 여러분이 오해한 모양인데, 왕도가 반드시 영토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소. 연구원 여러분의 의견대로라면 고산국 영토의 중심은 이집트나 아부다비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아! 지구가 둥그니까 이집트가 아국 영토 중심이 맞습니다. 평면적인 저희들에 비해 국왕전하께서는 역시 입체적으로 보는 눈을 갖고 계십니다.”
이민호가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지질학자들이 전형적인 이공계 공돌이들임이 다시 한 번 드러났기 때문이다. 수도를 선택할 때 여러 가지 요소를 감안해야겠지만 정치적, 군사적인 면은 절대로 빠뜨리면 안 된다.
“덩그러니 떨어진 이집트를 왕도로 선택할 수는 없지 않겠소?”
“황공하옵니다, 전하! 하오나 저희들은 정치나 군사적인 것보다는 지질만을 탐구할 뿐입니다.”
“좋소. 새목포의 지질은 어떻소?”
“북미서부 단층 남단의 작은 단층이 새목포 항만에서 방파제로 쓰는 사주를 남북 방향으로 지나갑니다. 그렇다 해도 전반적으로 지반이 안정적이고 앞으로도 큰 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극히 적을 것 같습니다.”
보고서를 들춰보니 새목포와 바로 그 남쪽 지역에 대한 자세한 평가가 이어졌다. 지중해성 기후로서 연중 쾌적하고 여름에는 습도가 낮아 무덥지 않고 겨울에는 춥지 않다는 사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새목포 안쪽 내륙은 확 트인 지형이 아니라 200여 개의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전반적으로 언덕이 많은 곳이었다. 대도시를 건설하더라도 거주하는 주민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 것 같고 대중교통의 효율이 떨어지는 점이 약간 걸렸다. 반면에 남동쪽은 확 트인 평지 중심에 큰 언덕 하나가 서 있었다.
그래서 항구와 공동주택은 해안에, 단독 주택가는 새목포 내륙 협곡에 분산해서, 왕궁은 남동쪽 평지의 언덕에, 행정부처 건물들은 언덕 주위 평지에 지으면 좋을 것 같았다. 배후에 큰 호수 몇 개는 왕도의 수원지로 적당하고, 새목포 동쪽 100km에 위치한 장폭 30km 정도인 아주 큰 호수와 주변 평지에는 농경지와 위성도시를 건설할 만했다.
이민호가 환경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에 따르면 새목포 남동쪽, 육지로 깊이 들어온 캘리포니아만 혹은 코르테스해는 대왕고래를 비롯해 동태평양 해양생물들의 요람이었다. 이곳만 잘 보호하면 동태평양은 풍요로움을 영원히 잃지 않을 것 같았다.
“국왕전하께서는 북미 매입 초기에 별다른 사전 조사 없이 새목포를 주요 군항의 하나로 지정하셨습니다. 지나고 나서 지리와 해류, 항만의 입지조건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검토해 보니 아주 탁월한 선택임이 밝혀졌습니다. 대양을 내해로 삼으신 전하의 혜안에 저희 연구원들은 그저 탄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만의 선택이 아니었소.”
연구원들은 다른 사람들, 특히 해군 총함장 이순신을 떠올렸겠지만 사실 새목포 즉 샌디에이고가 미 해군의 태평양 함대 모항이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새동래가 고산국 대서양 함대 모항임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을 대동할 때는 새강릉 항구를 더 자주 이용했다. 새강릉이 미 해군 대서양 함대의 모항인 노포크였기 때문이다.
미 해군이 갖은 시행착오와 오랜 고민 끝에 좋은 곳을 골랐을 테니 이민호는 그저 안심하고 이용할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카리브해가 완전히 안정되면 대서양 함대 모항을 새강릉으로 옮길 계획을 벌써부터 세워두었다.
“새목포는 그럭저럭 괜찮다 치고, 새남포는 어땠소? 단층지대를 피하다 보니 북미 서해안에 왕도 후보지가 많지 않구려.”
“보고서를 바치겠습니다, 전하.”
“이곳도 조건부 통과로 평가했구려.”
새남포라는 이름이 붙은 뱅쿠버와 시애틀 지역은 다 좋은데, 기후도 여름에 따뜻하고 겨울에 선선한 해양성 기후인데 일 년 내내 궂은 날씨가 문제였다. 일 년에 150일 동안 0.25밀리미터 이상 비가 내리니 말 다했다. 특히 100일 동안 구름이 끼고 200일 동안 구름이 잔뜩 끼는 곳이었다. 당연히 일조량도 북미 대륙을 통틀어 매우 적은 편에 속했다.
“일 년 내내 우중충한 새남포에 비해 런던은 매우 화창한 곳입니다.”
“무릎 쑤시는 노인들이 살기 좋은 곳은 절대 아니겠구려.”
“새남포 이북은 추워서 후보지가 없습니다. 그 남쪽은 단층지대라서 빼버렸으니 새남포와 새목포 둘만 남았습니다.”
왕도 후보지에서 새남포는 빼고 결국 북미 서해안에 새목포만 남겨두었다. 나머지 왕도 후보는 루손 섬 북부 바기오, 본토 동부 화련, 규슈 남쪽 가고시마 정도였다. 북쪽에는 부동항이 없어서, 적도 가까운 곳은 말라리아모기 때문에 다 빼버렸다.
가고시마는 화산 때문에 탈락시켜야 할 듯했다. 영토가 넓어도 너무 넓어서 왕도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보고서를 공조에 이첩시키고 군사적, 경제적 판단을 더해 최종 선택을 하겠소.”
“새 왕도를 정하는 일은 국가의 천년대계이옵니다. 부디 신중히 결정을 내리도록 신료들에게 신칙해주옵소서.”
“그 동안 수고하셨소. 두 달 가량 푹 쉬다가 본직에 복귀하도록 하시오. 바깥에 금일봉을 준비해놓았소.”
“성은이 망극하오이다, 전하.”
이것저것 따지다간 영원히 선택을 못하게 될 것 같았다. 태평양 중심에 위치한 하와이 제도가 지금보다 열 배 정도 컸다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1629년 3월, 한동안 잠잠하던 파푸아 섬에서 식인종 원주민 부족들이 또 반란을 일으켰다. 식인종 원주민들은 고산국의 지배에 완전히 복속하는 척했다가 심심하면 뒤통수를 쳤다. 고산국 군대의 인명피해가 다른 전역(戰域)에 비해 큰 것은 밀림이 원주민들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파푸아 섬에서 순교한 선교사가 52명, 특전부대를 비롯한 아군 전사자와 행방불명자가 177명, 중상자가 524명이야. 행방불명자의 운명이 어떻게 됐는지 상상하는 게 가장 무섭군. 북미와 남미에서 발생한 사상자 숫자의 열 배가 넘어.”
“북미와 남미의 사상자 숫자에는 말라리아와 황열병 환자가 포함돼 있습니다. 몽골에서의 전투 이후 가장 심각한 전투 손실입니다.”
“차라리 우리에게 대놓고 적대하면 저번처럼 한꺼번에 쓸어버릴 수라도 있지. 이건 뭐 생활 속의 반란이야.”
참모본부에서 만난 대원수 계복과 이민호가 한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주민과의 전투는 2~3년에 한 번 발생하고 사상자도 10여 명 이내에 불과했다. 사상자 대다수는 오래 전 파푸아 섬 점령 초기에 생겼다. 원주민보다는 밀림과 모기, 보급 곤란이 가장 큰 적이었다.
물론 반란이 일어날 때마다 고산국의 사상자보다 몇 배나 많은 사상자가 원주민들에게 발생했다. 접근하기 곤란한 지역에서 반란이 발생할 경우 항공기를 동원해 지도에서 마을을 지워버린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래도 반란은 잊어버릴 만하면 다시 일어났다.
“도련님! 설마 파푸아 섬을 포기하실 건 아니죠?”
“물론 아니지! 지금까지 희생한 장병들에게 미안해서라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술루 놈들에게 진압을 맡기면 원주민들 씨를 말려버릴 것 같아서 무섭고. 휴우~”
이 시기에 파푸아 섬을 내버려두면 네덜란드나 독일 같은 유럽 국가가 점령할 테고, 나중에는 인도네시아가 섬 절반을 차지할 것이다. 파푸아 섬을 적극 이용할 계획이 지금 당장은 없더라도 주인이 없을 때 챙겨놓는 편이 나았다. 나중에 제국주의 소리를 듣게 되겠지만 호주 바로 북쪽 큰 섬에 비우호적인 세력이 자리를 잡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주둔지 장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에게 종교를 강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아군의 인명피해는 주로 선교사가 원주민 마을을 방문하는 동안 호위 임무 중에 생겼습니다.”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 집 지어줘, 교육시켜줘, 병 고쳐줘, 밥 먹여줘, 가축까지 나눠줬는데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식인을 금하면서 강력하게 처벌한 탓도 있습니다. 새섬의 마오리 족이 의식의 하나로 식인을 한다면 파푸아 종족들 중 일부는 식인이 식생활의 하나입니다.”
비록 얼마 전까지 신석기시대 도구문화에 머물러 있었지만 파푸아 주민들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같은 시기에 독립적으로 농경을 시작한 이들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식인습관을 문화적 차이라는 미명 아래 인정해줄 이유는 없었다.
장례의식의 하나로써, 혹은 부족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 중에 발생한 희생자의 인육을 먹는다면 눈감아주겠지만 몇몇 부족들은 명백히 인간을 사냥했다. 그리고 가장 인기 높은 인육이 원주민들 입장에서 특이하게 생긴 선교사의 것이었다.
“파푸아 주둔군 홍보실에 구역질나는 일을 시켜야겠군. 그 전에 파푸아 주둔군이 원주민 마을마다 노천극장을 만들어줘야겠어.”
“영화를 제작해서 보여주려고요?”
“그래. 우리에게 우호적인 마을에서도 식인 행위가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을 거야. 외부 종족과 전쟁을 즐기지 않더라도, 장례식 때 친족의 살을 먹는 이른바 종족 내 식인을 한다는 보고가 여러 차례 있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어느 마을에든 제대로 서지 못하고 비틀거리거나 죽을 때까지 웃는 원주민 아이들이 있을 거야. 이들을 촬영해서 보여줘.”
“아이들 말입니까? 그런 건 보통 어른들이 독차지하지 않습니까?”
“어른들은 고기를 먹고 아이들은 부스러기나 뇌를 먹거든. 엄마 옆에서 구경하다가 요리가 충분히 익기 전에 손가락으로 찍어먹는 탓이기도 해. 끓여도 소용이 없겠지만.”
식인종들에게서 자주 나타난 쿠루병의 적나라한 증상은 20세기에 촬영된 영상에도 명백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병의 감염자는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많았다. 쇠고기에서 비롯된 인간 광우병의 잠복기가 길다고 알려져 있지만 쿠루병은 어린아이들에게 발현될 정도로 빨리 진행됐다.
“끔찍하군요. 촬영을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식인을 하면 병으로 죽는다고 위협하면 그만둘 가능성이 높아지겠죠.”
머나먼 열대의 땅에서, 그것도 생명의 위험 속에서 끔찍한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을 격려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건국 후 지금까지 수많은 원정을 다녀왔지만 이민호가 걱정했던 불미스러운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우리 군에 자부심을 느낀다. 전투 중에 상관 살해 사건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거든.”
“유럽 군대는 참혹하더군요. 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투 중에 대열을 맞추기 위해 상관이 부하를 때리고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부하 병사들도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상관을 죽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휘관과 병사들이 서로 눈치 보는 것은 조선 군대의 전통이지. 장수가 병졸들을 함부로 대했다간 병졸들이 단체행동을 일으키니까.”
조선 중기까지는 병졸들이 지휘관을 죽이거나 무장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외국에 비해 드문 편이었다. 열 받은 병사들이 성 밖에 모여 으쌰으쌰 하면 장수는 그저 싹싹 비는 수밖에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병졸이 임금에게 상소를 하거나 장수를 상대로 재판을 걸기도 했다. 이 시대 유럽 군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선조 임금이 이런 관행에 제동을 걸기 위해 장수에게 벌을 내리고 주모자 병사들 몇을 처형했다. 그러나 문관들마저 선조 임금의 과도한 처벌을 비판했다.
현대 한국군에서 벌어지는 가혹행위와 구타,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조선군이 아니라 구 일본제국군의 유습이었다. 전투 중에 상관에게 수류탄을 던지는 쩨쩨한 미군과 달리 일본군 병사들은 탄약고에 불을 질러 전함을 자폭시켰다.
“우리 군대에서는 그럴 일도 없죠. 상관이 싫으면 언제든 부대를 옮기거나 관두면 되니까요.”
“계복이 네가 병사들이 보낸 편지를 반드시 읽는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아. 나한테는 그런 편지가 오지도 않더라.”
“대부분은 감사 편지입니다. 읽을 맛이 나거든요.”
대원수 계복의 비서 역할을 하는 십여 명의 아내들이 군내 비리 척결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기독교 여러 종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부다처제를 법적으로 용인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군내 비리 척결 문제도 조만간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전환해야 할 때였다.
============================ 작품 후기 ============================
1629년이 진행중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