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58 103. 명나라의 혼란 =========================================================================
9월 2일, 제국군에게 포위공격을 받고 있는 슈트랄준트에서 남동쪽 40km에 위치한 볼가스트(Wolgast)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그 전에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가 볼가스트에서 해협 건너편 우저돔(Usedom) 섬에 7천 병력을 상륙시킨 다음 볼가스트를 무혈점령했다. 포메라니아 공작령의 수도인 이곳 볼가스트에 주둔하고 있던 소수의 제국군을 쫓아낼 때까지만 해도 덴마크군은 기세가 등등했다.
그러나 덴마크군은 다시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제국군에게 대패했다. 크리스티안 4세는 땅거미를 이용해 소수의 부하들만 수습해 배를 타고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처음 상륙할 때 기병이 1,500이었는데 말은 한 마리도 못 데리고 돌아갔다. 같은 신교도인 덴마크군을 해방군으로 여겨 열렬히 환영했던 볼가스트 시민들은 그 보복으로 제국군에게 철저히 약탈당했고 시가지는 불타올랐다.
“똑같은 용병군을 이끌고 똑같은 전술로 똑같은 제국군과 상대하면 결과는 당연히 똑같이 나오지. 도널드 맥케이 연대의 스코트 용병 400은 또 뭐야? 스코틀랜드 용병들이라면 아주 치가 떨린다. 크리스 이 욕심 많고 멍청한 녀석! 우리가 쾨벤하운을 지켜주는 동안만이라도 좀 얌전히 있든지!”
이민호가 열을 내는 이유는 발트해의 균형 문제 때문이었다. 스웨덴이 치고 오르는데 반대로 덴마크가 가라앉는다면 발트해는 스웨덴의 바다가 돼 버린다. 멀리 떨어진 고산국 입장에서는 발트해를 어느 나라도 제패하지 못하고 균형을 맞추는 상태가 가장 바람직했다.
이 전투 전 1628년 4월에 제국군 총사령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대양과 발트해의 장군’ 직책을 하사받았다. 이는 신성로마제국이 대서양과 북해, 발트해에서 활동할 제국 해군을 건설하려는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소식을 접하고 바짝 긴장한 덴마크와 스웨덴이 잠시 동맹을 맺고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에 대항하려 했다. 크리스티안 4세의 과감한 상륙작전으로 슈트랄준트가 제국군의 포위에서 풀렸으나, 볼가스트 전투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발트해에 접한 신교도 국가와 영지들 입장에서는 크나큰 위기였다.
그러나 이민호는 제국 해군이 발트해를 제패할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판단했다. 해군 건설에는 돈이 무지막지하게 들고 승조원을 숙련시키는데 못해도 10년은 걸리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제국 해군은 덴마크나 스웨덴은 물론, 심지어 폴란드 해군을 이길 가능성도 없었다.
제국 해군을 단기간에 성장시킬 유일한 방법은 한자 동맹 도시들을 위협해 군함과 선원을 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교도가 우세한 무역도시들이 종교적으로 편협한 황제의 편을 들 리가 만무했다.
“아바마마! 사관학교 저학년이 배우는 기초 전술교범이 제국군에게도 전해졌을 겁니다. 제국군과 덴마크군 양쪽에서 우리 전술교범을 활용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러게. 같은 전술을 썼다면 덴마크가 돈도 많은데 병력이라도 많이 투입하지 말이야!”
말이 기초 전술교범이지 손자병법이나 위략 등의 군사서적과 동서양 전쟁사의 교훈을 모아 정리해놓은 책일 뿐이었다. 문제는 이 책이 유럽에 흘러 들어가 필사(筆寫)에 필사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오류와 오탈자가 한두 가지가 아니게 됐다는 것이다.
화를 가라앉히던 이민호가 세자 개똥이의 얼굴을 봤다. 갑자기 슬쩍 웃음이 나왔다.
“군대를 지휘해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으냐? 꿈 깨라! 너는 정복왕이 아니라 평화왕이 돼야 할 것이다.”
“휴우! 아바마마.”
“좋은 걸 내가 다 차지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네 치세가 나하고 비교되지 않으려면 나를 흉내 내는 것보다는 전혀 다른 일을 해야 해.”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세자도 건국왕의 후계자가 해야 할 일이 내정과 문화중흥에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자도 사나이인지라 아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이민호는 사실 정복왕보다는 구매왕이라고 해야 정확했다. 외국을 침공해 강제로 복속시킨 경우는 일본과 건주 여진 등 얼마 없었다. 그 세력들도 먼저 침공했기에 반격을 가한 것에 불과했다. 나머지 대부분 영토는 협상과 구매를 통해 늘렸다.
“남들한테 우습게 보이더라도 웬만하면 전쟁을 하지 마라.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면 확실히 이겨버려라.”
“물론입니다. 사관학교 나오고 현역으로 복무했던 제가 모르겠습니까? 전쟁의 영광 운운하는 자들은 전투경험이 없거나 야전병원에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일 겁니다.”
세자의 말을 듣고 이민호는 조금 안심이 됐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참전 군인들의 인생이 망가지는 판인데 부상자나 유족의 고통은 말도 못했다. 전사자에게는 그의 세상이 멸망한 셈이다.
“전에 말했듯이 피는 내 손에 묻히고 욕은 내가 먹고 가겠다. 너는 그 동안 너희 치세를 준비해라.”
“아바마마!”
왕좌에서 물러난 다음 이민호는 과학 연구에 여생을 바칠 셈이었다. 펀칭 카드가 이미 사용되고 기초적인 전자계산기가 시중에 판매되고 있었지만 디지털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이민호 세대에 최소한 애니악 정도는 만들어 놔야 이후 발전이 빨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주인님! 덴마크 국왕께서 전보를 보내셨어요.”
“읽어봐.”
이민호는 크리스티안 4세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전보에 손도 대기 싫었다. 미카가 봉투에서 꺼낸 전문을 또박또박 읽었다.
“친구야 미안하다. 그대의 신실한 벗, 크리스.”
“그걸로 끝이야?”
“예. 이걸로 끝이에요.”
“어휴! 크리스티안이나 구스타브나 하나 같이 멍청이들이야. 이놈들을 믿고 후원해준 내가 바보지.”
그러나 크리스티안 4세는 덴마크 역사 통틀어 가장 높은 인기를 구가한 국왕이었다. 이 시대의 유럽 여러 나라들과 달리 덴마크가 경제적 번영을 구가한 데에는 크리스티안 4세의 지도력이 크게 작용했다.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북방의 사자’라는 별명 때문에 외정에 힘쓴 듯 보이나 실은 농업과 광업 등 내정에서 더욱 눈부신 발전을 이뤄낸 군주였다.
“죄송하지만 다른 군주 분들을 주인님하고 비교하지 마세요. 빈손으로 시작해 세계 절반을 영토로 만드신 주인님과 그분들은 비교 자체가 안 되잖아요. 하지만 그분들도 나름 그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을 거여요.”
“미카 네가 내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구나. 고맙다. 하긴 다른 조선 수군 장수들을 이순신 총함장님과 비교하면 억울하겠지.”
기분이 조금 풀렸으나 우호국의 국왕들이 여전히 한심해 보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경찰청에서 주관하는 청원경찰 임용시험을 세자와 함께 참관했다. 응시자들 대부분이 군 복무를 마쳤기에 체력검정과 소총, 권총 사격 등은 가뿐하게 통과했다. 그러나 필기시험 과목 중 경찰관 직무집행법은 꽤나 까다로워 과락이 다수 발생했다. 이번 분기에도 수요에 맞게 신규 청원경찰을 충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바마마! 이런 식이면 봉급 많이 주는 민간 기업에 청원경찰 인력을 다 빼앗기고 맙니다. 추가시험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민간 기업은 그냥 민간 경비원을 쓰지 말이야.”
“청원경찰이 훨씬 믿음직하니까요.”
이민호와 세자가 청원경찰의 인력부족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총과 활 같은 전쟁무기를 들고 다니는 시대라서 무장한 청원경찰이 필요한 곳은 많은데 응시하는 인원은 적었다. 그렇다고 필기시험 수준을 낮춰서 일정 지역 내에서 경찰권을 대리하는 청원경찰의 질적 하락을 감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산국의 청원경찰은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국가기관이나 민간의 중요 사업체에 배치되는 경찰이다.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는 주체는 정부가 아닌 한국수력원자력주식회사라는 민간 회사이기 때문에, 원전에 군대가 주둔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청원경찰을 배치하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유사시 군부대가 증원되고 2012년 이후에는 소수 군 병력이 상시 배치된 원전도 있었다.
고산국에서 청원경찰은 군 전역자에게 인기 있는 직종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은행이나 관공서, 항만뿐만 아니라 학교와 기업체, 심지어 농장에서도 청원경찰들이 경비와 치안보조 업무를 맡았다. 공동주택도 청원경찰이 경비를 해서 주민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대신 괜히 술 취해서 시비를 걸었다간 즉각 체포당했다.
“청원경찰이 인기 있어서 군 병력 유지에 어려움이 많다더라.”
“저 같아도 훈련과 격오지 근무가 힘든 군보다는 청원경찰을 하면서 여유를 즐기는 편이 낫겠습니다.”
마치 현대 민간 항공회사로 숙련 조종사를 꾸준히 유출시키는 공군처럼 고민이 많았다. 그렇다고 군인 봉급을 민간 기업 이상으로 무턱대고 올려줄 수는 없었다. 군인 봉급이 올라가면 청원경찰 봉급은 더 많이 올라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영광과 명예라는 게 있는데 말이야.”
“덜 주고 일 많이 시키려는 악덕 고용주 같은 말씀이십니다. 저들은 이미 몇 년 동안 국가에 충분히 봉사한 이들입니다.”
“맞아. 어쨌든 전역 군인들 일자리는 확실히 보장되는구나.”
북미는 원주민 지원자가 많아 청원경찰 공급이 원활한데 일자리가 많은 본토에서는 심각하게 부족했다. 청원경찰은 유사시 군과 경찰의 예비 병력으로 편입되기에 왕실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었다. 결국 추가 시험을 통해 부족한 인원을 충원하기로 했다.
“올해도 복건성 차밭 경비를 현지 간수군과 구르카 용병에게 맡겨야겠습니다. 원체 부족하기도 하지만, 청원경찰 봉급이 많더라도 누가 외국에서 일하고 싶겠습니까?”
“쳇! 현지인이나 구르카나 안심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야. 숭정제 이 녀석 두고 보자! 지가 황제라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입을 닦아?”
환관 위충현이 복건 차밭과 발효숙성용 창고에 군대를 배치해줬었는데 숭정제가 농민반란 진압을 핑계로 그 병력을 다시 빼앗아갔다. 물론 군대가 사적 소유인 차밭과 창고를 지키는 것은 말도 안 되므로 숭정제의 조치는 정상적인 상황으로 돌린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민호 입장에서는 황실 어주로 진상한 진주 두 알의 값을 떼먹힌 셈이 됐다.
지금까지 복건성에서 꾸준히 차밭을 늘려 세계 차 무역 비중 3분의 2 이상이 이민호 손에 들어왔다. 이 시대 잉글랜드 귀족과 몽골 유목민이 품종은 다르더라도 같은 복건 지역에서 생산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현재 복건성의 산과 창고마다 녹차, 홍차, 백차, 청차 즉 우롱차 등 다양한 차를 생산하고 있었다. 차 종류마다 온갖 근거 없는 낭설과 풍문과 전설이 뒤섞이기 마련이지만 이 시기에 철관음 등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차 만드는 법이 이미 확립돼 있었다. 최고급 홍차로 평가받는 무이산의 정산소종(正山小種)은 명나라 황실용을 제외하곤 고산국 왕도에만 들여와 소비됐다.
운남성의 차 산지와 수출로인 차마고도도 해남도를 통해 고산국이 어느 정도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차 산지로서 경쟁 상대가 될지 모를 실론 섬은 이 시기에는 차보다 주로 커피를 재배했다. 콜롬보와 서부 해안을 장악한 포르투갈과 뒤늦게 뛰어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현지인 국가 칸디 왕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어서 커피와 차 모두 해마다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복건에서 일하는 구르카는 제 친구들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사고 칠 녀석들이 아닙니다.”
“뭐, 그렇긴 하다만.”
외국 땅인 복건성의 차밭과 발효숙성 창고를 현지인도 아닌 또 다른 외국인 용병들이 경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목상 제후국인 고산국의 속국 병사라고 무시하거나 완제품을 훔쳐가는 노무자들을 현지 관청을 등에 업고 호되게 곤장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구르카 용병들이 그럴 일은 없지만 예니체리나 맘루크 같은 노예 병사들은 주인인 황제를 잘 섬기다가도 그 후계자에게 반란을 일으킨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세자가 히말라야 14좌 중에서 13봉을 등정하는 10년 넘는 기간 동안 구르카와 셰르파 등 고산족들과 친분을 다져놓았다. 세자가 말한 친구란, 그저 말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욕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진짜 친구들이었다.
“명나라에 위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린 최소한 복건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래. 외국이긴 해도 어쨌든 차밭은 우리 왕실 재산이니까.”
“아바마마께서 차나무를 산꼭대기에서 옮기고 차밭을 일일이 개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투자금을 손해 볼 이유가 없습니다.”
“명나라 황실과 관료들에게 바친 뇌물만 해도 말도 못하게 많이 들었지.”
습도가 높은 저위도 고지대에 산재한 복건 차밭 전체가 고산국 왕실 재산이었다. 이민호가 명나라 영토에는 관심이 없어도 꾸준히 명나라 상황을 지켜보는 가장 큰 이유였다. 복건에서 경제적 영향력을 극대화함으로써 해협 건너 고산국 본토 방어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복건성 주민들이 대단위 차밭에서 일하게 되면서 고구마가 아니더라도 더 이상 굶지 않게 됐다. 명나라 건국 이후 해외 화교의 주요 유출지로서 꾸준히 인구가 줄어들던 일은 이제 옛날이야기였다.
“복건성의 민심이 아바마마께 있습니다. 복건 사람들을 황제가 아니라 아바마마께서 먹여 살리셨으니까 저들이 사람이라면 은혜를 알 겁니다.”
“식민지로 오해할 여지도 있어.”
“예. 조심하겠습니다. 명나라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더라도 복건성만 독립시켜 보호령으로 삼으면 됩니다.”
“쯧! 말을 아끼거라.”
“예, 아바마마.”
섬서에서 대규모로 봉기한 농민반란군의 움직임을 왕도에 앉아있으면서도 꾸준히 보고를 받고 있었다. 몽골 초원에 들어간 건주여진의 움직임도 적절한 수준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용가치가 높을 수도 있기에 명나라 칙사를 만날 때에는 그저 모르쇠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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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가 살짝 드러났는데 과연 원하는 상황으로 흘러갈지는 의문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