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55 103. 명나라의 혼란 =========================================================================
“이번에는 남미 남단 파타고니아에서 온 테우엘체 족의 청원을 들어주세요.”
“그 거인족 말이오? 어디, 봅시다.”
북미여대공 비올레타가 호위들에게 신호해 키가 큰 남미 원주민들을 대전에 들게 했다. 새강릉 별궁에서 비올레타와 헤드비히, 포카혼타스와 함께 편히 쉬다 왕도로 귀환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자꾸 늘어났다.
대전에 입장한 테우엘체 족 대표들은 다섯 명이었고, 그 중 네 명은 키가 아주 컸다. 과연 마젤란이 이들과 마주친 지역을 거인의 땅, 파타고니아로 이름 지을 만했다. 왕궁에 비해 아담한 별궁의 대전을 확장할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와! 동아프리카 흑인이나 새순천 원주민 정찰대만큼 큰 인간들은 처음 보네.”
“저들이 농구 선수로 나서는 것만으로 반칙이겠어요.”
마젤란을 비롯해 16세기 유럽인 탐험대와 해적들의 기록에는 과장이 심해서 작아도 3.7미터, 크면 4.6미터 이상이라는 기록이 예사였다. 그러나 18세기 들어서서는 접촉이 잦아지고 현실적인 기록 관행이 정착돼 2미터 정도로 기록했다. 어느 기록이든 신체 비율이 좋다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이민호가 예상한 대로 이들 중에 키가 가장 작아 머리가 좋아 보이는, 185cm 정도 되는 자가 발언했다. 테우엘체 족이 마푸체 족에게서 얼치기로 배운 스페인어라 통역관이 알아듣기 힘들어 진땀을 흘렸다.
“큰 나라의 큰 추장님! 저희들을 마푸체 족과 동등하게 대해주십시오. 병원과 학교를 세워주고 식량을 꾸준히 공급해달라는 뜻입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이민호가 퉁명스럽게 나왔다. 마푸체 족의 일에서 드러났듯이 에스파냐와 체결한 남미 매매 조약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이 나중에서야 확인된 탓이었다.
알려진 것과 달리 남미 남부, 마푸체 족과 테우엘체 족 등의 거주 지역은 에스파냐가 제대로 지배하지 못한 땅이었다. 남미 해안에 건설한 항구와 요새 몇 개를 증거로 내륙까지 지배하고 있다고 큰소리 뻥뻥 치던 에스파냐는 일종의 먹튀를 한 셈이었다.
매양 이런 식이면 남미에서 계속 문제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매매 계약은 이미 체결됐고, 앞으로 생길 모든 문제를 온전히 감당해야 할 이민호는 속이 쓰렸다.
“어어?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큰 추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되죠.”
“너희들은 내 백성이 아니잖아? 조상 대대로 내려온 너네 땅에서 너희들끼리 잘 살 거라면서?”
“에이~ 오해하셨나본데 화내지 마시고 저희들 말씀 좀 들어보세요.”
에스파냐를 상대로 100년 넘게 맞서 싸운 용감한 마푸체 족으로부터 ‘흉포한 전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테우엘체 족 대표들이 처음부터 저자세로 나왔다. 요즘 사정이 몹시 안 좋기 때문이라고 이민호는 판단했다.
우여곡절 끝에 파타고니아에 진입해 기초 조사를 마친 탐사대의 보고에 따르면, 주로 농사를 짓는 마푸체 족과 달리 테우엘체 족은 사냥과 채집 경제를 영위하는 유랑민족이었다. 마젤란과 유럽 탐험가들에게 거인족으로 기록되고 마푸체 족을 두려움에 떨게 했지만 그저 큰 체구를 활용한 개인적인 용맹에 불과했다.
이들은 집단의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유랑민족이었다. 만약 마푸체 족이 마음만 먹는다면 에스파냐 상대로 그랬듯이 만 단위로 전사들을 동원해 그냥 휩쓸어버릴 수도 있었다. 현실은 결혼을 통해 천천히 세력을 확대하는 마푸체 족에게 야금야금 잡아먹혀서 조만간 완전히 흡수될 운명이었다. 지금도 테우엘체 족에서 마푸체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더 많았다.
“어떻게 살든지 너희들 자유겠지만, 우리 탐사대와 군대의 통행을 거부하면서 우리의 도움만 요구할 수는 없다.”
“저희들이 주제를 모르고 뻔뻔했습니다. 큰 추장님께서 원하는 모든 것이 테우엘체 족의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희 부족이 점유한 모든 땅을 바칠 테니 제발 마푸체 족과 동일한 혜택을 주십시오.”
바로 옆 안데스 지역에 사는 마푸체 족이 고산국이 선정을 베푼 일에 대해 신나게 떠들어대지 않았다면 자존심 강한 테우엘체 족이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올 이유가 없었다. 덕택에 전쟁을 하지 않고도 아직 복속하지 않은 원주민들을 백성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동안 너희들이 워낙 폐쇄적이라 탐사대를 통해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테우엘체 족의 사정에 어둡다는 것을 전제로 대화하자. 일단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가장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해주겠다.”
“저희는 무조건 마푸체 족과 동일한 대우를 원합니다.”
“아무래도 마푸체 족과 경쟁의식이 있는 모양이군.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는 식량을 거저 나눠주는 게 아니다. 부족 사람들이 배불리 먹기에 충분한 너른 경작지를 만들어주고 종자를 나눠주는 것에 그친다. 그러니 농사는 너희가 직접 지어야 한다. 대신, 앞으로 배를 곯을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가르쳐주시면 일을 하겠습니다.”
도움을 받아들이기에 훌륭한 자세였다. 그러나 진작 이랬다면 테우엘체 족 대표들이 멀리 새강릉까지 찾아와 청원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냥을 하다 보면 사냥감이 줄어들 걱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짐승을 키우면 굶주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마푸체 족처럼 양을 키우란 말씀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마푸체 족을 통해 대략 듣긴 했지만 가축 사육법과 번식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가르쳐주십시오. 저희들이 사는 곳은 다른 지역보다 춥기에 털이 긴 양이 필요합니다.”
호전적인 마푸체 족이 두려워한다는 테우엘체 족이 고분고분 따르는 꼴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리고 농사에 대해 말할 때보다 목축에 훨씬 큰 관심을 보였다. 뭔가 이유가 있겠다 싶어서 이민호가 물어봤다.
“혹시 요즘 사냥감이 확 줄어들었나?”
“그, 그, 그렇지는 않습니다.”
“나를 속이면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해. 나를 만나기로 작정한 이상 테우엘체 족의 문제는 더 이상 약점이 아니야.”
“휴우~ 그렇습니다, 큰 추장님. 요즘 구아나코가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외상을 찾을 수 없는 구아나코의 사체가 자주 발견되고 있어서 몹시 두렵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사는 저희 동족들이 어느 날부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늙은 현자의 말에 따르면 다들 굶어죽었을 거라고 합니다.”
이민호의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다. 구아나코는 주로 남미의 산악지역에 서식하는 낙타과 동물로서 가축으로 사육되는 라마와 알파카의 조상격인 동물이었다.
“야생동물에게 퍼지는 전염병인 모양이구나. 몇 년 후에 수를 회복할 수도 있지만 그 지역에서 멸종할 수도 있다.”
“구아나코가 사라지면 저희 테우엘체 족은 다 굶어죽습니다. 옷도 신발도 구아나코의 털가죽으로 만들므로 구아나코가 없으면 저희들은 얼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테우엘체 족의 가장 큰 약점은 사용하는 도구에 있었다. 이들은 흑요석과 현무암을 이용해 무기와 도구를 만드는데, 단단하긴 해도 잘 부서진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남미 남부에서 산출지가 적어 도구를 새로 구하기 위해 이들은 매년 긴 거리를 여행해야 한다.
매년 도보로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는 것은 무거운 물건을 지고 다니는 데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여유 식량을 많이 보유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생활방식은 아주 약간의 생태계 변동에도 생존에 큰 타격을 받는다.
“내 백성이 된 이상 굶어죽는 꼴은 절대로 볼 수 없다. 내가 사람들을 보내 양을 키우는 법을 가르쳐주고, 한 가족에게 양 300마리씩을 나눠주겠다. 매년 100마리는 잡아먹고 100마리는 다른 물건을 사기 위해 교역을 하도록 해라. 에스파냐 사람들이 버리고 간 항구와 요새 위치를 알지?”
“예. 바닷가에 몇 곳 있습니다.”
“항구와 요새를 통해 종자와 양 외에도 매년 식량을 지원하겠다. 그리고 단단한 쇠로 만든 무기와 도구를 주겠다. 돌로 만드는 도구를 구하기 위해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테우엘체 대표들에게 도끼와 긴 칼, 짧은 칼, 창, 활과 화살 등등을 사용 방법과 함께 보여줬다. 대표들의 눈에 불신이 어려 있었다.
“마푸체 족이 저희들에게 아주 비싸게 팔던 무기를 그냥 주시겠다고요?”
“주면 일단 감사히 받고, 값은 나중에 치르도록 해라.”
금광과 구리 노천광산을 보유한 마푸체 족과 달리 테우엘체 족이 사는 지역에는 딱히 자원이랄 것이 없었다. 춥고 해발고도가 높아 생산력도 낮았다. 그러나 테우엘체 족이 거주하는 광활한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매우 적어 예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마푸체 족처럼 나중에 전쟁하자고 할 건 아니지?”
“저희들은 그런 무례하고 신의 없는 족속과 다릅니다. 부족 전체가 대추장님을 따르겠습니다. 하온데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어느 지역에 계속 사는 것만으로도 내게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너희 부족의 인구가 어느 정도 회복될 앞으로 50년 동안 세금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다.”
워낙 춥고 척박한 지역이라 50년이 지나고도 테우엘체 족에게서 세금 걷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연구자나 여행자들의 안전이 보장되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한 가지 임무를 맡길 계획이었다.
오록스를 관리하는 수의사들은 기후와 환경을 감안해 오록스 보호구역으로 새섬을 추천했다. 현대에서 뉴질랜드 쇠고기의 명성을 알고 있는 이민호도 잠시 솔깃했다. 그러나 새롭거나 강한 것은 마나를 흡수하기 위해 일단 입에 집어넣고 보는 마오리 족을 믿을 수가 없었다.
“큰 추장님께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혹시 큰 추장님을 위해 저희들이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다. 혹시 퓨마가 두렵나?”
“퓨마라면 그 순하고 늘씬한 짐승 말씀이십니까? 육식동물이 분명한데 사람을 보면 얼른 도망가 버립니다.”
“너희들이 보통 사람이어야 말이지.”
유럽에 비해 조금 춥지만 인구가 적고 오록스의 생존을 위협할 천적이 적다는 것이 파타고니아를 오록스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유일하게 퓨마가 파타고니아에도 서식하고 있었고, 열대 우림에 주로 서식하는 재규어는 한참 북쪽부터 살았다. 그리고 파타고니아에서는 소를 키우거나 야생 들소가 살지 않아 오록스가 혼혈이 될 염려도 없었다.
“구아나코보다 훨씬 커다란 짐승이 있다. 오록스라고 하는데, 힘이 세고 머리에 긴 뿔이 달려 사람을 들이받으면 반드시 죽는다.”
“말로만 들어도 무서운 짐승이군요. 혹시 육식동물입니까?”
사람과 함께 찍힌 오록스의 사진을 보여주자 테우엘체 대표들이 갸웃거렸다. 처음 본다는 뜻이었지, 사진에 찍힌 사람과 오록스를 작은 동물로 착각한 것은 아니었다.
“초식이다. 사나운 대신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공격하지 않는다. 이 동물을 너희 부족이 사는 지역에 풀어놓을 테니 죽이지 말고 퓨마로부터 잘 보호하도록 해라. 혼자 알아서 잘 사는 짐승이니 따로 먹이를 줄 필요는 없다.”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 오록스라는 짐승이 살 공간은 충분합니다. 저희들이 오록스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혹시 퓨마가 접근하면 여자나 아이들을 시켜 쫓아내겠습니다.”
퓨마에게 굴욕 같았지만 테우엘체 족이 워낙 특이해서 넘어가기로 했다. 다른 원주민 부족들의 복속 과정에 비해 테우엘체 족의 경우는 매우 쉽게 받아들이게 된 편이었다. 선물을 가득 안은 테우엘체 족을 수송기에 태워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원주민들이 수송기에 탈 때마다 문에 이마를 찧은 것 외에 큰 문제는 없었다.
건국 이후 항상 그랬듯이 복속된 원주민들의 경제와 교육, 의료 수준을 일정 이상 올리는 것은 정부가 할 일이었다. 얼마 후 파타고니아로 사람과 가축, 건설용 중장비가 몰려갔다.
남미대륙 남단까지 영토가 확보됐다. 이로써 남미에서 아무리 호전적인 원주민 부족이라 해도 고산국에 적대적인 부족은 없게 됐다.
섬서 안새현 사람이며 말 장수인 고영상이 감숙성에서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고영상은 이자성의 친척인데 나중에는 장인으로 칭해지기도 했다. 고영상을 따르는 자들이 아직 수백에 불과해 큰 영향력은 없었다.
하지만 다음해 1628년에 섬서에서 반란을 일으킨 왕가윤의 세력에 가담하며 몇 년 동안 큰 활약을 하게 되는 사람이었다. 왕가윤이 전사한 뒤에는 잔존 세력을 흡수해 급성장하며 틈왕을 칭했고, 그 지위는 다시 이자성에게 넘어간다.
“국왕전하! 고적(高賊)이 겨우 수백에 불과하다고 무시할 수 없습니다. 원래 말 장수답게 고영상과 수하들이 전원 기병이기 때문입니다. 대막의 마적단도 수백을 넘어가면 관병이 감당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태감. 그 수괴를 고적이라고 부르지 말아주면 좋겠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전하. 제 주둥이가 방정입니다.”
칙사로 온 환관이 나불거리는 꼴을 본 이민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필 고영상이 고산국의 국성(國姓) 고 씨라서 이민호가 명나라에서 놀림 받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진 이민호는 적당한 핑계를 대서 거절하기로 했다.
“문제는 도둑떼가 활동하는 지역이 해안 가까운 지역이 아니라 저 멀리 감숙이란 말일세. 우리 군을 투입하기에는 너무 멀어. 그 동안 우리가 천조에 가서 반란 진압을 도와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언제 감숙까지 간 적이 있었나?”
“비행기를 타면 어디든 갈 수 있지 않습니까? 천조에서 관병을 동원하기 어렵고 보병으로 기병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전하께 파병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비행기는 하늘을 날기 위해 가볍게 제작하느라 바닥이 얇아. 그래서 무거운 것을 싣기 어렵네. 사람은 타도 말, 특히 체구가 큰 전마를 태울 수가 없어. 전마를 실을 수 있는 튼튼한 수송기가 네 대밖에 안 돼. 겨우 3, 40명을 보내서 뭘 한단 말인가?”
“예. 고산국 전마는 천리마나 한혈마라서 특히 크고 무겁죠.”
말보다 훨씬 무거운 경장갑 전술차량을 수송기에 싣고 한성에 투하한 적이 있었다. 감숙에 파병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본격적인 농민 반란의 시대를 맞이해 고산국 군대를 명나라에 파병해서 반란군의 초반 기세를 꺾고 싶지 않았다.
“태감에게 고산국 비행기의 약점까지 알려줬네. 자네가 조정에서 잘 설명해주길 바라네.”
“그렇군요. 아주 잘 알겠습니다, 전하. 제게 맡기십시오!”
환관은 고산국의 중요한 군사기밀이라도 알아낸 것처럼 신이 나서 돌아갔다. 고산국이 병력 파견 거리에 한계가 있다는 정보를 명나라가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고산국이 홍타이지의 건주 여진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 정보를 믿음직스럽게 만들었다.
============================ 작품 후기 ============================
1627년 마지막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