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51화 (900/1,000)

00951  103. 명나라의 혼란  =========================================================================

1627년 9월, 북경 왕공창의 기사(奇事) 이후 일 년 넘게 드러누웠던 천계제가 23세의 연치로 붕어했다. 그리고 후사가 없는 선 황제의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복동생 주유검이 숭정제로서 제위를 이어받았다.

환관 위충현을 실각시킨 다음 산 채로 포를 뜬 것을 시작으로 즉위 초부터 숭정제가 한 일은 참으로 많았다. 명나라의 관료와 백성들은 나라가 부흥할 징조라며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저러나 이민호는 환갑이 넘은 명나라의 퇴직 관리를 만나 편하게 담소를 나눴다.

“대행(大行) 황제께는 망극한 말씀이지만 당금 황상께서는 참으로 영명하시면서 동시에 바지런하시오. 그렇지 않소, 바오로 선생?”

“그렇습니다, 전하. 대명 제국의 앞날에 드리운 암운이 드디어 걷히는 듯합니다. 국왕전하께서도 황상께 충성을 다하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그야 물론이오.”

이민호는 전 예부 우시랑 서광계가 요구하는 것이 공개적인 충성서약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넘어갔다. 고산국이 명나라의 제후국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날 때가 조만간 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은 형식적 책봉과 조공 관계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명나라와 아예 관계없는 외국이 돼버리면 차후 명나라 문제에 개입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미묘한 시기에는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즉위식에 경하 사절단을 보내고 새 황제의 등극 조서를 국내에 반하하는 절차를 밟았으나 이민호나 세자가 북경에 직접 가서 조회에 참가하는 입조를 하지 않았다.

태창제가 사망했을 때는 이민호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가서 새 황제 천계제를 옹위했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도 않았다. 명나라가 위기에 처했다는 증거도 없고, 또한 명나라 조정에서 오히려 명나라가 고산국의 속국처럼 보일 수 있다며 파병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꾸준한 견제를 받으면서도 이민호는 애써 모르는 척하며 실리를 챙겼다.

“어쨌든 대명 제국과 고산국이 지금처럼 잘 지내면 되는 일입니다.”

“바로 그렇소. 그런데 바오로 선생께서 언제 조정에 출사하실지 모르니 황도에 계셔야 하는 게 아니오?”

“예. 이곳 왕도에서의 일도 마쳤고 조정에 계신 레오 형제님이 자꾸 부르시니 저도 선교사 분들과 함께 북경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서광계와 선교사들은 남경교안이라는 천주교 박해가 지속된 지난 몇 년 동안 마카오와 고산국 왕도를 오가며 머물고 있었다. 명나라 중앙 정부에서는 군사상 요구 때문에 서양 선교사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지방 관료들 중 일부는 기독교를 박해하면서 신도들을 만리장성에 군졸로 충군시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서광계가 번역하거나 저술한 서양 학문과 천주교 관련 서적이 수십 권이고 그가 편찬한 <농정전서>는 60권짜리였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했으니 기독교를 옹호하는 관료들과 선교사들이 다시 적극적으로 활동을 재개할 때가 왔다. 모든 종교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이민호는 명나라 내 가톨릭 선교 활동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별로 많지는 않지만 황도에 가시면 선교 자금으로 쓰시오. 학처럼 고고한 선비에게 이런 물건을 드리는 것은 모욕이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진리에 접근하기 쉽도록 돕는 것이 신도의 의무 아니겠소? 출사하신 다음 조정에서 선교에 유리한 분위기를 만들 때 사용하도록 하시오.”

“아아! 그 어느 쪽도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이민호가 서광계 앞으로 들이민 보따리 안에는 묵직한 100원 금화 백여 개와 함께 잘 쪄서 말린 고려홍삼 수십 뿌리가 꼼꼼히 포장돼 있었다. 묵직한 고산국 100원 금화는 명나라 관료집단에서 주로 뇌물로 활용되고 있으며, 아무리 부유한 고관대작이라도 고려홍삼을 선물하면 눈을 크게 뜨고 반기기 마련이었다. 뇌물이 일상화된 명나라 말기였다.

이 시기 명나라 지식층에 퍼진 기독교는 신의 사랑을 강조하기보다는 세상을 보는 진리의 창에 치우친 편이었다. 그래서 천문학을 배운 선교사들이 외국 궁정에서 일식과 월식 계산의 정확성을 선보이며 선교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래도 신앙의 종착지는 언제나 같기에 선교사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고 지식층과 꾸준히 학문을 교류했다.

“어째서 받기를 망설이시오? 바오로 선생은 조정 관리가 아니니 뇌물이 아니오. 고관대작들을 만나 선교사들을 측면에서 지원해달라는 뜻으로 맡기는 종교 관련 사업비일 뿐이오. 고산국에서는 불교나 회회교에도 매년 선교자금을 지원하고 있소.”

“제가 개인적으로 쓰지 않을 것이기에 고맙게 받겠습니다. 저희 성도들을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런데 탕 선생은 장성에 가셨다면서요?”

“예. 원소 선생의 초청을 받아 만리장성 몇 곳에 홍이포 포대를 건설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 역사에서 탕약망, 아담 샬은 1622년에 31세의 젊은 선교사로서 마카오에 처음 도착했다. 바로 그 해에 네덜란드가 배 8척과 병력 800명을 동원해 소수의 포르투갈인들이 지키는 마카오를 공격한 적이 있었다. 네덜란드는 마카오의 전투병력 대부분이 황명을 받아 후금과 싸우기 위해 북방으로 이동해 텅 빈 때를 노렸다.

이때 아담 샬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건설 중인 언덕 요새에서 네덜란드 상륙군을 향해 대포를 쏴서 결정적인 전공을 세웠다. 네덜란드군은 졸전 끝에 마카오 수비군보다 훨씬 많은 전사자와 포로를 남겨둔 채 배로 도주했다. 전투 막바지에 아담 샬이 사제복을 입은 채로 네덜란드 군을 향해 돌격해서 선장 한 명을 생포하는 용맹을 떨치기도 했다.

선교사는 외국에 파견되기 전에 수학과 천문학, 의학 등을 배우고 머스킷은 물론 대포도 능숙히 다루는 훈련을 받는다. 아담 샬도 본직은 선교사지만 그야말로 이 시대 선교사답게 충분한 군사적 훈련이 돼 있었다. 그래서 병주를 지키는 원숭환이 아담 샬을 비롯한 포르투갈 선교사들을 군사고문으로 초빙해 변경의 방비를 두텁게 했다.

“선교사들이 뜻밖에 천조의 명을 잘 수행하는구려.”

“조정의 일에 적극 협조해야 선교 사업이 원활해지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굳이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서양 사람들은 생긴 것보다 훨씬 예의바른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렇지요.”

비록 19세기부터 아시아가 만만한 지역으로 전락했지만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이 아시아에서 매우 공손하게 행동했다. 사나울 것 같은 원시인과 파푸아 식인종들이 타인에게 극히 정중하고 친절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뒤통수에 도끼 자국을 남기거나 남의 뱃속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동 시대 유럽인들이 만만한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인도와 아랍 지역에서 얼마나 예의 없게 구는지 이민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힘이 있다면 망나니를 신사로 만들 수 있고, 분노조절 장애인은 분노를 아주 잘 조절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였다.

“홍이포는 여진과 몽골의 기마군단을 제압할 만한 좋은 대포요. 되도록 많이 만들어서 국경에 배치하는 것이 좋겠소. 구리가 부족하면 보내주겠소.”

“감사합니다, 전하. 고산국 대포와 포탄이 워낙 비싸다 보니 홍이포라도 많이 갖춰야지요. 사실 전하께 섭섭한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만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명나라에서 가장 욕심을 낸 고산국 무기는 야전에 동원할 정도로 경량이며 포탄으로는 파편을 사방에 흩뿌리는 작렬탄을 사용하는 76밀리 견인포였다. 그러나 뇌관 및 포탄 제조법을 국내에서도 국가기밀로 지정한 마당에 외국에 수출할 수는 없었다.

“허허허! 워낙 비싸기도 하지만 5년 이상 조작법을 배우지 않으면 다루기조차 어려워서 말이오.”

“혹여 건주 여진 도적들이 장성을 넘어 공격해 오면 고산국에서 파병을 해주십시오.”

“그야 물론이오. 그 전에 칙명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오. 어허! 후금의 잔당들이 초원으로 쫓겨나고도 도적질하던 옛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구려.”

이민호는 몽골로 쫓겨난 건주 여진의 홍타이지가 기존에 혼인관계를 맺은 몽골 부족들과 합세해 세력을 불리고 있다는 정보보고를 받았다. 과거 누르하치 때의 성세를 절반 이상 회복한 요즘은 매우 조심스럽게 만리장성을 넘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건주 여진의 세력이 내륙 깊숙이 위치했기에 자세한 정보를 얻기 힘들어서 내버려두고 있었다.

“건주 여진이 요동에 있었을 때보타 오히려 지금이 황도에 더 가까워져서 문제입니다. 군사비가 급증해서 재정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요동을 지키는 병력을 빼서 북직예에 배치하기도 그렇고 참 곤란하겠소. 홍타이지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몽골 부족들이 문제요.”

일반적으로 전선이 축소될수록 병력 밀집도가 높아지고 보급선이 짧아져 방어에 유리해진다. 그러나 지금 명나라는 그 반대로 늘어난 방어선과 길어진 보급선 때문에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고산국의 개입으로 후금이 패하자 요동의 명나라 성곽도시들이 건재하게 되었다. 덕택에 명나라는 넓은 지역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느라 방어력이 낮아진 반면 병참선 유지비용과 주둔비가 끝도 없이 들어가 도저히 감당 못할 지경이 됐다. 그리고 이 시대 산해관은 최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북경을 지키는 관문 역할로 그 중요도가 떨어졌다.

“제가 국왕전하께 알현을 신청한 것은 변방에서의 쌀 재배 문제 때문입니다.”

“오호! 문제의 핵심과 해결책을 제대로 짚으셨구려.”

“과찬이십니다. 아시다시피 남방의 쌀을 장성으로 옮기는 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변방에 둔전을 꾸려 자급자족을 할까 하는데, 장성 인근 지역에서도 쌀을 생산할 수 있을지 교시하여 주십시오.”

“어디 보자. 농업국에서 품종별로 벼가 생장할 수 있는 최저기온을 조사해서 지도에 표시한 게 있다오. 이것이오.”

동아시아 경제의 모든 모순은 원나라 말기 교초 증발로 인한 가공할 인플레이션의 기억 때문에 개선될 길이 없었다. 명나라는 상업을 억제하고 해금 정책을 취했으며, 무역제국 고려를 이은 조선은 상업을 억제하는 것을 넘어 아예 화폐 발행을 포기했다.

상인이 폭리를 취할 것을 두려워한 명나라 조정에서는 유통비용을 가급적 계산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명 초기에는 농민이 수조권을 가진 군인의 근무지에 직접 가서 쌀을 전달해야 했다. 광동에서 만리장성까지 쌀을 지고 가느니 차라리 산적이나 수적이 되는 편이 생존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상인들이 군량을 군 주둔지까지 수송하면 일정한 양의 소금 전매권을 받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명나라 중기 이후 절상이나 휘상 등 각 지역 이름이 붙은 상인집단들이 출현한 이유였다. 쌀 산지에서의 군량 가격보다 유통비용, 즉 소금 전매권으로 인한 국고 손실이 훨씬 크므로 서광계는 이 문제를 개선코자 했다.

“오오! 잘하면 황하 하류에서 자라는 벼를 장성 이북에서도 재배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농업국에서 내한성 품종을 다양하게 개발했으니 좀 더 여유가 있는 편이오.”

서광계가 퇴직 관리라 하나 원체 유명한 인물이라서 조만간 조정에 출사할 것을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서광계가 조정에서 활동할 때 필요한 대부분의 자료를 넘겨주었다. 명나라가 망하는 순간까지 고산국이 계속 우호적인 세력으로 비쳐져야 하기 때문이다.

고산국이 대명관계에서 아무리 조심해도 문제를 일으키는 말썽꾸러기들이 설치면 만사휴의였다. 국제자선단체 연합회라는 불법 단체의 대표와 간부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이들이 명나라 절강성 태주에서 빈민구호를 빙자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간접적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외에도 기부금 모집 과정에서 공갈협박 등 강요행위가 빈발했으며 예산집행 후 다른 합법적인 사회단체와 달리 정부 감사도 받지 않았고, 구호활동 과정에서 여러 가지 민폐를 끼쳤다.

자선단체라는 곳들이 하나 같이 대차대조표는커녕 재무 관련 서류가 극히 부실했고 영수증도 보관하지 않았다. 절반 이상의 자선단체들이 자선과 구호보다 기부금 횡령이 목적인 집단이었다.

“가난한 자들을 구호하는 일은 교육, 기본 소득 급여, 산업시설 육성, 경기활성화 등의 정책을 통해 전적으로 국가가 할 일이다. 전통적으로 종교단체와 사창 등이 지역사회에서 구호사업을 해왔기에 예외적으로 인정할 뿐, 국내든 국외든 민간단체 주도의 빈민 구호사업을 금하는 이유이다. 이번에 명나라에 크게 민폐를 끼쳤더군.”

“국내에 빈민이 없어서 명나라까지 가서 자선 활동을 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내 탓이라는 건가? 얼레? 칭찬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명나라에서 통치체계가 점차 무너지면서 반드시 흉년이 들지 않더라도 기근이 만연했다. 그래서 고산국에서는 주상아 공주와 왕명명에게 충분한 자금과 조직, 수송편을 제공해 명나라에서 꾸준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빈민을 구제하고 있었다. 복건과 광동에서 지난 몇 년 동안 농민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는 두 사람이 지도하는 체계적인 구호 활동의 역할이 컸다.

그런데 왕도에서 활동하는 자선단체들이 연합해 바다 건너 절강성 태주 한 곳에 쌀 삼십만 석을 한꺼번에 풀어버렸다. 부패한 명나라의 지방정부들 중에서 유일하게 뇌물을 요구하지 않은 곳이 태주뿐이라는 이유였다.

이민호가 미리 알았다면 경악해서 막았겠지만, 이미 사건은 벌어진 뒤였다. 퍼주기나 호구 짓도 대규모로 하면 극히 치명적일 수가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실 규모 탓보다는 제대로 된 준비나 예측을 못했다는 말이 어울렸고, 태주 한 곳에 집중된 것이 더 큰 문제였다.

============================ 작품 후기 ============================

이어질 내용이 다음 회차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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