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47 102. 30년 전쟁 =========================================================================
가톨릭 동맹군 포로들에게 전장 정리를 시켰다. 아군에게 적군 전사자 시체를 옮기게 하는 끔찍한 일에 동원하지 않기 위해서기도 하고, 이런 일은 같은 편에게 시키는 게 오해가 없을 것 같아서기도 했다.
대신 적군 부상병들을 모아 병원선으로 옮겨 치료했다. 이 시대 유럽에서 팔다리 관통상은 여지없이 잘라내야 했으나 고산국 의사들이 최대한 살려냈다. 마취제가 없어 맨 정신인 사람을 쇠사슬로 묶고 톱질과 도끼질을 한 다음 지혈하기 위해 인두로 지지는 외과수술을 떠올리던 가톨릭 동맹 부상병들은 잠에서 깬 후 여전히 팔다리가 붙어있자 어리둥절했다,
발렌슈타인이 모아서 보낸 외과의사-이발사들은 간호사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돌려보냈다. 최소한 손을 소독하고 나서 다른 환자의 환부를 만져야 하는데 그런 기본 개념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르쳐줘도 실행하지 않아 부상병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과감히 내쫓았다.
“아군이 더 걱정이군.”
“기절하거나 구토를 심하게 하는 병사들, 무력감을 호소하는 병사들을 우선 입원시켰습니다.”
전장 정리와 부상자들을 구호하는 동안 콜링에 머물렀다.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이 땅을 떼어줘서, 큰 구덩이에 전사자들을 한꺼번에 매장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공병대 소속 삽차가 땅을 일정 깊이로 파고 포로들이 전사자를 한 사람씩 묻었다. 양쪽 군대의 군종신부들이 무덤마다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것으로 전장 정리가 대충 끝났다. 할 일이 없게 된 포로 7천 명에게 식량을 지급해 발렌슈타인이 주둔하고 있는 뤼벡 쪽으로 보냈다.
“멍하게 있거나 밤에 악몽을 꾸는 병사들도 입원시켜.”
“예, 도련님. 병사들을 수시로 관찰하라고 각급 지휘관과 부사관들에게 일러두겠습니다. 전투후유증으로 인해 입원하더라도 결코 겁쟁이가 아니며, 인사상 불이익도 절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잘했어. 전쟁 책임은 정치인에게 있는데 영광은 정치인이 취하고 피해는 병사들이 입는 건 모순이야. 참전자 전원에게 참전기장을 수여해줘. 저들에게 남은 평생을 국가가 책임져야 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니면 환경이 현대보다 혹독해서 그런지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현대보다는 덜했다. 그러나 상륙장갑차의 기관총 사수나 전차병 등 적에게 직접 사격을 가한 장병들 외에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던 보병이나 병참부대에서도 환자가 다수 발생했다.
이들은 자해, 사회부적응, 불면증 등으로 평생 고통을 받을 테고, 과다한 폭력적 반응으로 주변인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도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입는 사회적 부담이 물질적인 것보다 훨씬 큰 셈이었다. 이민호가 가급적 전투를 피하고, 어쩔 수 없이 하더라도 압도적으로 이기려는 이유였다.
“그리고 육군 6사단의 보고입니다.”
“상황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 보고하게.”
유틀란트 반도 북단에 상륙한 육군 6사단과 20개 독립보병연대는 각지에 분산돼 주로 치안유지 임무를 맡았다. 가장 큰 문제는 총칼로 무장한 채 덴마크 도시와 농촌마을들을 약탈하는 스코틀랜드 용병들이었다. 명목상 같은 편이라 처음부터 관리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현실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스코트 용병부대들 중에 지휘체계가 유지된 3개 여단은 여객선에 태워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다행히 덴마크 국왕께서 밀린 봉급을 용병부대 연대장들에게 지급해서 잘 떠났습니다. 그러나 지휘체계가 붕괴돼 흩어진 나머지 5개 연대가 문제입니다.”
“저항이 심한가? 약탈물은 줘버려.”
“그게 문제입니다. 용병들이 약탈한 물건은 물론 납치한 덴마크 여자와 아이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어서 문제입니다.”
북유럽과 서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이 시기에는 백인은 물론 흑인 노예를 소유하는 것도 인정받지 못했다. 얼마 후부터는 식민지처럼 본국에서도 흑인 노예를 소유하는 풍습이 은근슬쩍 유행하나 19세기 중반에 영국 법원에서 정식으로 노예 재산의 합법성을 부정한다.
“현지에서 결혼했다고 우기는 모양이군.”
“맞습니다. 여자들도 자포자기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지금도 약탈을 지속해서 문제인데 말로 해서는 절대 안 듣습니다. 스코트 용병들의 약탈과 방화를 제지하던 덴마크 치안관리 몇 명이 사살 당했습니다.”
“우리 군에는 피해가 없나?”
“용병들의 공격으로 비보르에서 한 명, 올보르그에서 아군 보병 두 명이 부상을 입어서 각각 용병 100여 명씩을 사살했습니다.”
“잘했어. 기한을 사흘 정도로 정해서 지정된 장소에 집결시키고, 그 사이에 소요사태를 일으킨 자들을 사살한다고 경고해.”
그런데 문제는 스코틀랜드 용병들에게만 있지 않았다. 전쟁범죄는 실제 총탄이 오가는 최전선보다는 후방 점령지역에서 더 많이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항상 그랬듯이 이번 원정에서도 전지강간죄나 약탈죄로 체포된 아군 병사들이 생겼다.
“정복자 행세를 하느라 강간을 범한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인데, 적지가 아니라 동맹국 영토에 진주해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놈들이 있습니다.”
“기회니까.”
“그런 놈들을 체포하면 왜 국가와 군 조직이 자기를 보호해주지 않느냐고 악을 씁니다.”
“규정대로 해. 그리고 상관의 명령보다 군법과 규정이 앞선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도록 주지시켜. 일이 잘못 되면 명령을 내린 지휘관뿐만 아니라 그 명령을 수행한 병사도 책임을 면할 수 없으니까.”
이차대전 때 당연히 나치 지휘부의 책임이 먼저지만, 하부 계층에 위치하는 실행자, 즉 조력자들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력자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해서 범죄행위를 저지른 경우가 더 흔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는 변명은 군사법정에서 통하지 않는다.
어떤 조직이든 외부인에게 잔인하기 마련이지만, 무장한 군대의 경우 민간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반인도주의적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다. 지휘관의 강압적 명령이 없더라도 동료들과의 유대감 향상을 위해 이런 범죄의 유혹에 빠지기 쉬웠다. 다행히 이번 원정에서는 대부분의 고산국 병사들이 동맹국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고산국 국왕전하! 제국군 총사령관 프리틀란트 공작이 보낸 알드링겐 백작 요한이 인사 올립니다.”
“마침 잘 오셨소. 일단 저쪽 참관단석 빈자리에 앉으시오.”
발렌슈타인 공작이 수시로 고산국 원정군에 사절을 파견했고, 이번에는 부사령관 알드링겐 백작까지 보냈다. 다른 중립국 관전무관들도 자리에 앉아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구경거리가 있나봅니다?”
“그렇소. 대화는 나중에 나눕시다.”
이민호가 쌍안경을 들어 북쪽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너머에 작은 점들이 나타나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민호의 시선을 따라 작은 점들을 보던 관전무관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말로만 듣고 그림으로만 보던 비행기들이 하늘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 그아앙~
- 콰콰콰콰쾅!
표적으로 지정된 야트막한 언덕에는 흰 천을 두른 허수아비 수백 개가 꽂혀 있었다. 덴마크 쾨벤하운에 자주 나타나던 여객기나 수송기보다 작은 비행기들이 수평비행으로 언덕 상공을 지나가면서 날개에 달린 항공폭탄 네 개씩을 떨어뜨렸다. 그 직후 거대한 폭연이 일며 굉음이 울렸다.
폭음이 울릴 때마다 관전무관들이 기겁했다. 그리고 비행기 4기가 순식간에 지나간 다음 언덕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허수아비 대부분이 뽑혀 날아가거나 혹은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국왕전하께서는 관대하십니다.”
역시나 관전무관들 대부분이 정치적 소양이 풍부한 제후나 그 자식들이었다. 놀랍다느니 두렵다느니 하는 잡소리를 생략하고 처음부터 이민호가 원하는 답이 나왔다. 주요 목표에 비행기만 보내면 끝나므로 국왕인 이민호가 굳이 원정군을 이끌고 와서 지상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틸리 백작이 지휘하는 병력 2만 중에서 절반 이상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힌 이번 전투로 인해 자칫 고산국이 잔인하다고 낙인찍힐 뻔했다. 그러나 이처럼 공습을 자제함으로써 가톨릭 동맹군 병력 2만 명 중에서 절반이나 살려준 셈이 됐다. 그리고 큰 비용을 들여 아이슬란드에 항공대를 전개했으므로 이렇게라도 고산국의 진정한 힘을 과시해야 했다.
“백작은 무슨 일로 오셨소?”
뜻하지 않게 폭격 시범을 참관한 알드링겐 백작이 몹시 떨면서 발렌슈타인 공작의 친필 서신을 바쳤다. 친서를 호위들이 접수해 현장에서 번역했다. 라틴어를 번역하는 호위가 친서와 이민호를 번갈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 게 특이했다.
“슈트랄준트를 공격하는 것을 양해해 달라? 그거야 내부 사정이니 알아서 할 일이오.”
“감사합니다, 국왕전하. 총사령관 각하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덴마크와 싸우면서 해군의 필요성을 절감한 발렌슈타인이 뤼벡 동쪽, 쾨벤하운 남쪽에 위치한 슈트랄준트에 눈독을 들이게 된 모양이었다. 이곳은 발트해의 제해권을 노리는 위치였고, 조만간 발렌슈타인이 공격함으로써 스웨덴의 참전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런데 발렌슈타인이 이민호에게 양해를 구한 이유가 조금 웃겼다. 이민호가 허락한다면 당장 오늘부터 주군으로 섬기겠으며, 차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 때 이민호를 지지하겠다는 것이다. 이민호는 가톨릭과 신교도 양쪽 선제후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기에 가톨릭에 경도된 현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아들, 헝가리 국왕 페르디난트 3세보다 훨씬 유리하다는 상황판단도 덧붙였다.
실제로는 황제 선거를 기다리지 말고 함께 현 황제를 쫓아내고 제위를 차지하라는 유혹이나 다름없었다. 몇 년 후 발렌슈타인은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비슷한 협정 체결을 시도한다.
“백작은 친서 내용을 알고 계시오?”
“아닙니다, 전하. 내용은 모르나 제가 발렌슈타인 공작께 몇 가지 조언한 것은 있습니다.”
“나는 독일 국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소. 괜히 나를 끌어들이지 말고 알아서들 하라고 전하시오.”
“프리틀란트 공작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프리틀란트 공작과 저는 고산국 국왕전하를 흠모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세계 어느 곳에든 투사할 능력을 가진 이민호는 자국에서 권력을 노리거나 반란을 도모하는 자들에게 아주 훌륭한 동맹 대상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오스만 제국에서도 비슷한 제안이 왔었으나 거절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동남아 무역소국이나 남태평양 섬의 원주민 부족들에게서도 비슷한 동맹 제안이 수시로 날아왔다.
현대 미국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는 국가의 상류층이나 고위 관료, 장성이 미국 정부나 정보기관에 자국의 비밀을 알아서 갖다 바치는 일이 흔하다. 국내정치에서 미국의 힘을 업어 호가호위하겠다는 의도겠지만 미국 정부의 눈에 든 다음 유사시 국가의 정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이 반드시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고산국이 외국의 국내정치에 개입할 거라는 오해는 하지 마시오. 예외는 오직 오스만 제국과 루스 차르국, 아일랜드, 명나라, 조선, 브루나이, 동남아 무역소국들... 음. 너무 많군. 하여튼 독일은 아니오.”
“남유럽에도 예외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남유럽이요? 어느 나라를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고산국의 군사적 개입은 없다고 단언하겠소. 신성로마제국도 마찬가지요.”
알드링겐 백작이 패전 배상금 겸 포로 몸값으로 커다란 보물상자를 몇 개 바치고 돌아갔다. 발렌슈타인 공작이 군자금을 모으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이민호는 피에 젖은 금은보화를 잘 소독하라고 호위들에게 일러두었다. 그리고 이 자금으로 원정군 전체에게 승전수당을 지급했다.
“덴마크 국왕께서 주인님을 승전 기념 왕실무도회에 초대했어요.”
“춤출 기분은 전혀 아니다만, 내가 크리스티안의 편에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야겠지.”
단 한 판으로 끝낸 가톨릭 동맹과의 전투보다 북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코틀랜드 용병부대 진압 작전이 훨씬 치열하고 길게 진행되고 있었다. 콜링 전투에서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은 전사자가 며칠 사이 열 명이나 생겼다. 보병연대들이 시가전 훈련을 철저히 받지 않았다면 훨씬 많은 사상자가 생겼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이제는 넘사벽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