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46 102. 30년 전쟁 =========================================================================
이민호가 잠망경 배율을 올려 가톨릭 동맹군 병사들의 표정을 살폈다. 열을 지어 창을 세워들고 전진해오는 병사들 대부분은 무표정했으나 일부는 턱을 치켜들어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들도 속으로는 몹시 긴장했을 것이 분명했다.
- 사단장이다. 각 연대는 예정된 작전을 실행한다.
해병 2사단장이 통신망을 통해 예하 부대들에 이동을 지시했다. 5연대가 전진해서 상륙장갑차 대대를 지원하고, 4연대는 남쪽으로 이동해 적 기병대의 우회 공격을 경계했다. 그 사이 6연대는 현 위치를 고수해 본대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포병연대는 적 본진과 보급부대에 포탄을 쏟아 부었다.
현대 한국군의 전통과 다른 고산국에서는 단대호에서 굳이 4자를 피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기피하는 숫자인 13도 무시했다. 다만 인간적으로 18은 단대호에서 뺐다.
그 사이 귀를 찢는 소음이 뒤쪽에서 연속 울렸다. 이민호가 고개를 들었다가 정면, 테르시오 쪽으로 향한 순간이었다.
- 콰쾅! 쾅! 콰콰쾅!
창대가 빽빽이 서 있어 마치 고슴도치 같던 테르시오 중심부에서 로켓탄이 연속 폭발했다. 창병들 대부분이 폭발 화염에 휘말리고 팔다리가 날아가는 것이 장갑차 안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보통 연대 단위로 구성되는 테르시오의 병사들이 창대와 함께 우수수 넘어지는 꼴을 지켜보던 계복이 혀를 찼다.
“도련님. 인간을 상대로 다연장포는 좀 심한 것 같습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강해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덜 죽어. 나중에 부담 가느니 지금 적 숫자를 줄여놓는 편이 나아.”
지난해 루터 전투 초기에도 테르시오가 전진하면서 덴마크군의 총탄과 포탄에 불쌍할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고 확인해보니 사상자는 겨우 200에 불과했다.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집중 포격으로 적 진지를 초토화시켜 생존자가 거의 없을 것 같아 보여도 나중에 확인해보면 대다수가 살아남았다.
“그렇긴 합니다만. 참! 아침에 발렌슈타인 휘하 고위 장교들이 관전무관으로 왔더군요. 황제의 총신이라는 자도 참관단에 끼어 저 언덕에서 구경 중입니다. 발렌슈타인이 직접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표정을 보고 싶군.”
“그러실 것 같아 언덕에 우리 종군기자들을 보내 촬영 중입니다.”
다연장포 대대가 보유한 무유도탄을 한꺼번에 모두 쏟아 부었다. 테르시오 중심부에서 폭발한 탄은 드물었으나 땅에 접촉할 때마다 수많은 파편을 사방에 흩뿌려 어디에 떨어지든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흉갑과 투구로 중무장한 창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고 병력 밀집도도 떨어지는 총병들이 특히 포격에 취약했다.
막대한 피해를 입고도 테르시오 6개는 계속 전진해왔다. 앞 열의 창병들이 쓰러져서 생긴 빈자리를 뒷 열에서 메우고, 파편이 박힌 상처에서 붉은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병사들은 창을 꼿꼿이 세워들고 전진했다. 전쟁터에서 파편이란 포탄 껍질의 쇳조각만이 아니고 동료의 이빨이나 뼛조각일 경우도 흔했다.
- 거리 700이다. 기관총 사격!
- 두두두두두!
상장대대가 보유한 상륙돌격장갑차는 33대였고, 장갑차마다 구경이 크고 작은 기관총 2정이 탑재돼 있었다. 장갑차 몇 대에서는 박격포를 쐈다.
여기에 하차한 상장대대 보병들이 장갑차 사이에 전개돼 분대당 기관총 한 정씩을 발사했다. 상장대대 뒤에 배치된 해병 5연대는 사격에 가담하지 않고 대기했다.
결과는 일차대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모했다고 평가받는 일차대전 참호전에서는 방어군의 기관총을 의식해 공격군이 최소한 넓게 산개해서 적의 참호로 뛰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르시오는 기본적으로 보병 밀집방진이었고, 대열을 맞추기 위해 걷느라 이동속도가 느렸다. 정면을 향하지 않고 서로 교차해서 쏘는 100여 정의 기관총 앞에서 자칭 ‘신의 가호를 받는’ 가톨릭 동맹 병사들이 무수히 쓰러졌다. 빽빽했던 창대의 숲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이래도 틸리 백작이 후퇴 명령을 안 내리는군.”
“기병대를 아직 투입하지 못했으니까요.”
전장을 주시하는 이민호와 달리 계복은 적 기병대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과연 가톨릭 동맹의 기병대가 본진에 남은 테르시오 뒤에서 나타나 이동했다. 해병사단장도 적 기병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는지 즉각 명령을 내렸다.
- 적 기병대, 추정 규모 5천기가 남쪽으로 우회한다. 4연대 응전하라!
해병 2사단장은 원정군 직할 기병연대 대신 보병으로 대응했다. 그 사이에도 가톨릭 동맹군 기병대가 해병사단의 측면을 향해 시시각각 접근하고 있었다.
고산국 해병연대가 아무리 시대를 앞서 간다 해도 대규모 기병대가 접근해오는 상황에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병대원들은 각자 위치를 지키며 전투에 대비했다.
- 우두두두두두~
가톨릭 동맹 기병대가 속도를 높여 돌격해왔다. 남들은 천지가 진동한다고 표현하겠지만 평소 장갑차나 공병용 중장비가 굴러가는 소리에 익숙한 해병대원들은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리며 사격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 콰쾅! 쾅!
가톨릭 동맹 기병대가 해병 4연대 남쪽 2km까지 접근했을 때 포성이 연이어 울렸다. 자주포 대대가 적 기병대를 향해 거의 직사로 발포하고 있었다. 강력한 155밀리 포탄이 터질 때마다 기병과 말 예닐곱씩이 한 번에 쓰러졌다. 고산국 자주포는 현대 자주포보다 사거리는 짧지만 위력은 거의 비슷했다.
적 기병대는 막심한 피해를 감수하며 계속 돌격해 해병 4연대와 거리를 1km로 줄였다. 이때 엄폐호에 숨어있던 해병 2사단 직할 전차 중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 쿠웅!
말이 전차지 포 구경도 90밀리로 작고 장갑도 얇아 현대 전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병대 상대로는 충분히 위력적인 무기체계였다.
게다가 전차 중대가 초탄에 발사한 것은 벌집탄이었다. 작은 쇠화살을 가득 담은 탄통이 쪼개지며 한 발에 기병 수십 명씩을 쓸어버렸다.
- 따다다다닷!
전차 한 대에 4명이 탑승하는데 기관총도 4정을 탑재했다. 포수는 주포에 달린 공축 기관총을, 조종수는 볼마운트 기관총을, 단차장과 탄약수는 포탑 상면에서 차재 기관총 발사했다. 해병 사단 직할 전차 소대가 4량, 전차 중대가 3개 소대에 중대장과 부중대장 단차를 포함해 14량으로 구성됐으므로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화력이었다.
- 끼히히힝~
총탄에 맞아 쓰러진 군마들이 숨 끊어지는 비명을 질러댔다. 총상을 입지 않더라도 낙마하거나 말에 깔린 기병들은 전투 의지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일어서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으며, 전장에 드러누운 채 그저 하늘만 바라보았다.
기병대 뒤쪽 대열에서 말을 달리던 가톨릭 동맹 기병들은 폭음과 자욱한 연기에 가려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기병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돌격했다. 알아도 딱히 다른 방법이 없어 그저 앞으로 말을 몰았다.
전차의 주포 발사와 기관총 발사에 의해 앞과 똑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제국군 기병대의 말과 말이 겹쳐 쌓이고 기병의 시체를 또 다른 기병의 시체로 덮었다.
가톨릭 동맹 기병대가 전차 중대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상태에서 해병 4연대가 전차 사이를 보강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방적인 학살 현장에 기관총 수십 정이 추가돼 불을 뿜었다.
“이래도 후퇴를 안 하네? 틸리 백작은 이 기회에 테르시오의 종말과 함께 기병대의 종말도 함께 선언하려는 모양이야.”
“우리 군이 특별한 예외라서 꼭 그럴 필요는 없는데 말입니다.”
압도적인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동맹군은 결코 등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서쪽에서 전진해오는 테르시오와 남쪽에서 돌격하는 기병대는 이미 반 이상이 몰살당했는데도 꾸역꾸역 몰려왔다. 전투 의지가 박약한 군대가 작은 충격에도 쉽사리 무너지는 꼴을 자주 봤던 이민호는 가톨릭 동맹군 병사들에게 존경심까지 들 정도였다.
틸리 백작이 원했든 말든 이번 전투는 한 시대의 끝을 선언하는 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한때 유럽의 전장을 지배했던 테르시오나 기병대 모두 고산국 군대를 상대로는 움직이는 표적에 불과했다.
“고산국 국왕전하! 전하!”
“무슨 일이요?”
이민호가 탄 장갑차에 접근한 자들은 관전무관의 명색을 빌어 전투를 구경하던 발렌슈타인 휘하 장군들이었다. 화려한 갑옷과 깃털 장식이 달린 투구를 쓴 자들이 울상을 지으며 호소했다.
“무슨 일이라뇨! 전하! 일방적인 학살이 지속되고 있는데 역겹지도 않으십니까? 당장 전투를 중지시켜 주시길 청원합니다.”
“적군이 계속 공격해오고 있소. 이 상황에서 전투 중지 명령이 유효할 거라 보시오?”
“기병대가 지휘관을 잃어 새로 명령을 내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전투가 지속되는 것은 오로지 저들의 책임이오. 돌아가시오!”
그 사이 가톨릭 동맹군 기병대 5천은 거의 전멸하고 겨우 100여 기만 살아서 도주했다. 기병대답게 평원에 널린 기병과 군마의 사체가 최소 2만 정도는 돼 보였다.
더 이상의 전투가 의미 없다는 사실은 이 전투를 지켜보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틸리 백작이 사선에 병력을 밀어 넣는 동안에는 전투를 종결시킬 방법이 없었다. 다만 해병 2사단장이 이 모든 책임이 적 지휘관에게 있다고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 사단장이다. 상장대대 전진! 적 지휘부와 보급부대를 추격해 격멸하라!
- 사단장님! 상장대대장입니다. 전방에 다수의 부상자가 관측되고 있고 우회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아군 기관총 사수들의 정신 상태가 한계에 달했습니다. 장갑차를 적진으로 돌격시키면 조종수들도 정신적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부디 명령을 재고해주십시오.
통신망을 통해 해병 2사단장과 상륙장갑차 대대장의 대화 내용이 들려왔다. 이민호와 계복이 서로 눈을 마주친 다음 주의 깊게 긴장감 넘치는 대화를 들었다.
- 불허한다. 상장대대는 즉각 전진하라!
- 죄송합니다. 어명과 부하 장병들을 지키기 위해 명령을 거부합니다. 전투가 끝나면 군법회의에 자진 출두하겠습니다.
“험! 험!”
결정적인 순간에 계복이 통신망에 끼어들자 폭발 직전이던 해병 2사단장이 간신히 감정을 추슬렀다. 계복 덕택에 전투 중에 주요 지휘관을 직위해제 시키는 사태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다.
이민호가 계복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항명에도 불구하고 상륙장갑차 대대장의 판단에는 잘못이 없었고, 사단장도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사단장과 상장대대장의 잘잘못을 논하는 일은 전투 뒤로 미뤄두었다.
- 알았다. 상장대대는 현 위치를 고수하라. 해병 2사단장이다. 원정군단 직할 기병여단 출격! 5연대 대기.
해병 2사단에 임시 배속된 기병여단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기병여단 3천기는 이미 붕괴된 테르시오 사이를 지나 파랗고 흰 마름모들이 사선으로 이어진 가톨릭 제후연맹의 깃발과, 노란 배경에 까만 쌍두독수리가 그려진 신성로마제국 깃발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후방에 배치된 테르시오 4개는 공격선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궤멸됐다. 보급부대도 마찬가지로 뒤집힌 마차 잔해들이 말 시체와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틸리 백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도련님. 왜 틸리 백작을 포격 대상에서 빼라고 하셨죠? 명령체계를 유지시켜주려고요?”
“아니. 틸리 백작의 신병을 크리스티안에게 맡기려고. 참패한 동맹국 국왕의 체면 정도는 세워줘야지.”
“자타가 공인하는 상승장군이니 포로로서 가치는 확실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고산국이 벌인 전투에서 가장 먼저 날아갔던 적 지휘관이 이번에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그러나 단지 살아있을 뿐이었다.
조선과 본토와 여진과 몽골 출신 기병들이 기세 좋게 적 본진에 뛰어든 순간 백기가 올랐다. 틸리 백작은 무장을 갖춘 채 고산국 본진으로 백마를 타고 왔다.
“고산국 국왕전하께 항복의 상징으로 이 군도를 바칩니다.”
“계속 차고 계시다가 덴마크 국왕께 바치시오.”
“전하께서는 몹시 잔인하시군요.”
“틸리 백작은 덴마크 국왕이 아닌 고산국 국왕에게 패한 사실을 널리 알려주겠소.”
“고맙습니다, 전하.”
이로써 전투는 끝났다. 그러나 이곳 콜링 전투만 끝난 것뿐 전쟁은 계속됐다. 가톨릭 연맹의 총사령관 발렌슈타인은 덴마크 영토에서 물러났으나 골치 아픈 난병들을 진압하는 문제가 남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덴마크에 가장 큰 인적 물적 피해를 입힌 외국 군대는 한때 덴마크의 동맹군이었던 스코틀랜드 용병연대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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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전투는 예상하신 대로입니다만, 뒷이야기는 조금 다를 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