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45 102. 30년 전쟁 =========================================================================
전용기로 새강릉에 도착해 하룻밤 쉰 이민호는 다음 날 아침 백성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참모진과 함께 좌승함으로 지정된 전함에 올랐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조선이나 본토, 아일랜드와 북미 원주민 출신을 가리지 않고 항구에 가득 모인 백성들이 국왕 만세를 외쳤다. 세계 최강 국가의 지위를 유지해 달라는 백성들의 염원을 느낀 이민호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예인선에 이끌려 항구에서 벗어난 전함과 호위전대가 외항에서부터 속도를 올렸다. 새강릉 북쪽 해안을 따라 움직이며 내지르는 백성들의 함성이 기관소리와 파돗소리를 뚫고 이민호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역사상, 그리고 앞으로도 전하만큼 백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군주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낯이 몹시 뜨거우니 아부하지 말게, 전대장.”
파릇했던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세월이 흘러 이제는 해군 모든 제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패기만만하던 젊은 장교들이 이론과 경험을 겸비한 노련한 지휘관으로 자라나는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틀 먼저 출발하고 순항속도로 움직이는 원정함대를 엿새 만에 아이슬란드 남쪽 해역에서 따라잡았다. 대서양이 넓다지만 연료를 절약하기 위한 최단거리 항로, 즉 대권항로는 정해져 있어서 원정함대를 찾으러 이리저리 헤맬 필요가 없었다.
호위전대장과 함께 함교에 올라 원정함대의 위용을 살폈다. 이 시대에 걸맞지 않는 거대한 함선 수십 척이 동쪽으로 항진하고 있었지만 눈에 거슬리는 함선이 몇 척 있었다.
“전하! 함대사령관으로부터 환영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항모전단을 추월해 상륙전단에 합류하겠습니다.”
“알겠네. 그런데 여객선과 병원선이 뒤섞여서 해군 함대 같지 않군.”
해병사단을 수송하기 위해 민간 선박을 징발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현대에도 해병 1개 사단을 동시에 수송할 능력은 미국 말고는 없었다.
주력 상륙함은 만재배수량 3만 5천 톤급으로 비행갑판에 헬리콥터 8대를 탑재했고, 함 내부에는 강화된 해병대대 병력과 장비를 실을 수 있었다. 이런 거대한 상륙함이 이번 작전에 여섯 척 전부가 동원됐다. 해병사단 전체를 한꺼번에 수송하기 위해서는 상륙함이 열다섯 척 이상 필요했으나,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방비를 사용한다는 고산국 재정으로도 15척 다 갖추는 것은 무리였다.
호위항공모함은 겨우 2만 톤급으로서 고정익기와 헬리콥터 등 함재기 24기를 탑재했다. 아직 제트기에 대한 필요성이 적어서 본격적인 중대형 항공모함을 도입하지 않아, 항공모함보다 상륙함이 더 컸다.
“해병사단 상륙지를 퓐 섬 건너편 콜링 동쪽 평원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는군.”
이민호가 함대사령관이 보낸 전문을 호위전대장에게 보여줬다. 해군이 없는 가톨릭 동맹은 뤼벡에서 배를 빌리지 못했는지, 작은 배를 잔뜩 동원해 유틀란트 반도에서 퓐 섬으로, 그리고 다시 셸란 섬으로 건너뛰기를 할 계획인 듯했다.
덴마크 서쪽 영토 유틀란트 반도 동쪽에 퓐 섬이 있고 그 동쪽 셸란 섬 동쪽 끝에 쾨벤하운이 위치했다. 가톨릭 동맹군이 유틀란트 반도에서 쾨벤하운으로 진격하려면 퓐 섬과 가까운 콜링에서 건너가야 했다.
지리상 덴마크에서 지상전을 벌이는 외국 군대는 무조건 콜링에서 싸우게 돼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1658년 폴란드와 덴마크 연합군이 이곳에서 스웨덴 군을 물리쳤고, 1849년 슐레스비히 1차 전쟁 때 독일군과 덴마크군이 격전을 벌였다.
“자칫 적전 상륙을 하게 됩니다. 크게 상관없지만 말입니다.”
“해군하고 합동 작전하기는 이곳이 더 좋겠지.”
정확한 상륙 예정지는 유틀란트 반도와 퓐 섬 사이 좁은 해협을 지나, 서쪽으로 깊이 콜링 피오르에 들어서기 직전 확 트인 지역이었다. 전체가 평평한 밭으로 이루어져 야전에 이상적인 지역이었다. 호위항모에서 띄운 정찰기들이 상륙예정지를 샅샅이 촬영하고 돌아왔다.
함대는 남동쪽으로 침로를 바꿔 페로제도와 셰틀랜드를 지나 덴마크로 향했다. 새 영토들을 들러보지 못해 섭섭했으나 덴마크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어서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다만 쾨벤하운에 육군 1개 연대를 수송기 편으로 먼저 파병하고 순양함 1개 전대 4척이 외레순 해협을 지키고 있어서 덴마크가 멸망할 위기는 아니었다.
9월 12일에 콜링 동쪽 평원에 상륙작전을 펼쳤다. 가장 먼저 상륙장갑차 대대가 허연 물살을 일으키며 해안으로 향했다. 피오르라고 하지만 이 지역은 절벽이 아니라서 야트막한 해안 곳곳에 어선용 선착장도 있었다. 전함 함교에 오른 이민호가 쌍안경으로 상륙 예정지를 살폈다.
사실 이미 전날에 해병 수색대가 상륙해 교두보를 확보하고, 주변으로 활발하게 정찰 활동을 펼쳤다. 지금도 호위항모와 아이슬란드에서 출격한 정찰기들이 유틀란트 반도 상공을 떠다니며 가톨릭 동맹군의 주력을 찾고 있었다. 상륙예정지 주변에 위협 세력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공식 보고가 오자 나머지 병력도 상륙을 실시했다.
군복으로 갈아입은 이민호는 호위들과 함께 단정을 타고 해안에 접근한 다음, 선착장이 아니라 일부러 물이 얕은 모래사장에 내렸다. 군화부터 무릎까지 바닷물을 적시며 걷자 해안에 대기하고 있던 사진사들이 플래시를 펑펑 터뜨리며 이 장면을 찍었다. 그저 맥아더 원수 흉내를 내본 것뿐이었다.
“전하! 제국군에서 전하께 알현을 신청했습니다. 틸리 백작이 장군들과 함께 직접 왔다고 합니다.”
“복잡해 죽겠는데! 오라고 하게.”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해도 상륙작전은 엉망으로 꼬이게 마련이었다. 공병대가 선착장과 중장비용 도로를 건설하는 사이 마구 뒤섞인 전투부대 병력을 피해 보급부대가 움직였다. 대기하고 있던 장갑차에 오른 이민호는 정찰장교를 보내 적군 지휘관을 안내해오게 했다.
그러나 궁궐에서처럼 편하게 적국 사절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화약무기 시대에 전시가 되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 테러 위협에 대비해야 했다. 남자 호위들이 가톨릭 동맹군의 장군들을 샅샅이 몸수색하고 무장을 해제한 다음 이민호에게 보냈다.
틸리 백작과 장군들이 타고 온 말들은 잠시 압수했다. 말 뱃속에 다량의 폭탄을 장치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기 때문이다.
“허허! 그래도 저는 귀족인데 말입니다. 저는 전쟁터에서 항상 신사적으로 행동했다고 자부합니다.”
“틸리 백작!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오.”
전쟁터에서 암살 시도에 대비해 검색은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틸리 백작이 전쟁터에서 신사적이었을지 몰라도 그는 용병들을 이끄는 장군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진격로 주변이 피아 영지를 불문하고 초토화됐고,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마그데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학살과 약탈로 악명을 떨치게 될 자였다.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호위들이 탁자와 의자를 준비해줘서 거기에 앉았다. 이민호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의 뒤로는 여전히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리가 되겠지만 아직은 한참 뒤죽박죽인 상륙작전 초기였다.
“강력하기로 유명한 고산국 군대에도 잠시나마 취약점이 드러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기회에 공격하겠다면 그것은 백작의 정당한 권리요. 동양에서는 송양지인이라 하여, 전쟁에서 상대방의 곤경을 이용하지 않는 것을 비웃는 말이 있소.”
“저는 장군입니다. 조금 비겁한 수단을 쓰더라도 승리를 얻을 수 있다면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산국 군대라면 아무리 곤경에 빠졌다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틸리 백작의 눈길은 굉음을 울리며 좁은 농로를 따라 움직이는 자주포들의 행렬에 가 있었다. 틸리 백작은 장갑차와 자주포를 구별할 줄 아는 듯했고, 자주포 상판에 달린 기관총의 위력도 잘 아는 듯했다.
사실 선봉으로 상륙한 상륙장갑차 대대만으로, 아니 전날 상륙한 해병수색대의 화력만으로도 덴마크 영토에 진입한 가톨릭 동맹군을 물리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번 전쟁이 가톨릭 동맹군의 주력을 격파하는 것을 넘어, 고산국의 강함을 유럽 각국에 얼마나 강렬하게 각인시키느냐에 있는 만큼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키는 복잡한 과정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만약 제국군이 덴마크 영토에서 퇴각한다면 안전을 보장해주겠소.”
“저는 장군이기 전에 군인입니다. 황제폐하와 상관이 싸우라고 했으니 싸워야겠지요. 다만 고산국 군대가 아직 준비가 안 갖춰진 듯하고, 아군 병력이 분산돼 있으니 전투는 사흘 후가 좋겠습니다.”
“전장은 어디가 좋겠소?”
19세기 이후부터는 드물어졌지만 전쟁을 벌일 장소와 시간을 양쪽 지휘부가 만나거나 사절을 보내 합의하는 것은 기원전부터 시작된 오랜 전통이었다. 기원전에는 전차가 굴러다닐 평원에서 돌을 골라내는 일을 양군 합동으로 했으며, 민간인을 대피시키거나 부상병 후송을 위해 잠시 휴전하는 일은 현대전에서도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중립국을 빙자한 주변국들의 관전무관들이 아직 덴마크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번 전쟁의 주요 목적에 고산국의 강력함을 과시하는 것이 포함돼 있기에 참관단이 도착하는 사흘 후라면 적당할 것 같았다.
“멀리서 오신 손님들을 피곤하게 움직이도록 요청하면 안 되겠지요. 어디든 좋으나 다만 고산국 함대의 포격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으면 합니다.”
“장소는 상관없지만, 함대가 포격을 하지 않도록 지시해두겠소.”
“감사합니다. 비행기에서 아군을 공격하는 일도 금해주셨으면 합니다.”
“백작이 마푸체 족보다 훨씬 낫구려. 그렇게 하겠소.”
남미에서 100년 넘게 에스파냐를 괴롭혔던 마푸체 족을 언급하자 틸리 백작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처음으로 백작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난 듯했다.
상륙작전을 마무리하는 동안 사흘은 금방 지나갔다. 사흘에 해병 1개 사단을 상륙시키기 위해 지휘부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병사들도 호되게 고생했다. 주둔지 축성을 마친 병사들은 어제 저녁에야 간신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관전무관들도 대부분 도착해서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았다.
그 사이 상륙전단은 아이슬란드로 가서 육군 병력을 실어왔다. 정규 사단이 운용하는 중장비가 많았으나 보병연대 장비가 가볍기에 두 번에 나눠 전체 병력을 싣고 올 수 있었다. 육군은 스코틀랜드 용병들이 약탈을 진행하고 있는 유틀란트 반도 북쪽에 차례로 상륙시켰다.
“제국군의 포진이 아주 멋지군. 계복이 잘 지휘해 봐.”
“어? 해병사단장에게 지휘권을 넘겼는데요?”
“뭐, 그럼 우린 구경이나 하자.”
이민호와 대원수 계복은 지휘장갑차의 관측창을 통해 서쪽 평원을 바라보았다. 틸리 백작이 지휘하는 가톨릭 동맹군 2만 명이 평원을 가득 메운 채 대기하고 있었다. 틸리 백작이 가톨릭 동맹군 총사령관 발렌슈타인에게서 최소 5천 병력을 지원받았다는 계산이 된다.
항공정찰에 의하면 발렌슈타인의 본진은 뤼벡 서쪽에 진을 친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번 전투만 승리하면 발렌슈타인의 본진은 퇴각할 것으로 예상됐다.
“도련님 말씀처럼 제국군이 특별히 다른 준비는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화약을 도로변에 묻거나 야습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에스파냐를 통해서 우리를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 겁니다. 3분 남았습니다.”
계복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보고했다. 해병사단 포병연대도 정각 9시에 첫 포격을 실시하도록 일러두었다.
그러나 가톨릭 연맹군 진영 곳곳에서 허연 연기가 연속 솟아올랐고, 몇 초 후 포성이 맹렬하게 울렸다. 아군 전면에 배치한 상륙장갑차들 주변에 흙먼지가 연속 일었다.
둥그런 포탄들이 땅에서 몇 번 튄 다음 굴러다녔다. 만약 그 위치에 보병을 배치했다면 꽤나 큰 인명 피해를 볼 수도 있었겠지만, 상륙장갑차에서 한참 후방에 배치한 아군 보병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저런 비겁한!”
“비겁한 게 아니고, 저쪽에는 정확한 시계가 없을 수도 있겠지. 가능성은 적지만 말이야.”
그러나 고산국에서 유럽으로 매년 수출하는 손목시계 물량이 꽤 된다고 이민호도 알고 있었다. 유럽의 군대와 선박, 교회 종탑에서 정밀한 고산국 시계를 활용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가톨릭 동맹군이 보유한 대포의 위치는 항공정찰과 해병사단의 관측을 통해 이미 파악해두었다. 표적 분배도 마친 상태였다. 가톨릭 동맹군의 선공에도 불구하고 해병 사단장은 정각 9시까지 기다린 다음 포격 명령을 내렸다.
- 쿠쿠쿵!
해병사단 예하 포병연대는 자주포 1개 대대, 견인포 3개 대대, 그리고 다연장포 1개 대대로 구성된 강력한 제대였다. 언젠가 해병사단 대부분이 기계화되고 포병 세력도 포병여단급으로 확장될 수 있겠지만 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 보유한 포병 세력만으로도 이 시대에 상대할 만한 적이 없었다.
- 콰콰쾅!
밀집한 장창의 날들이 현란하게 햇빛을 반사하는 테르시오 뒤쪽에서 시커먼 연기가 연속 치솟았다. 아무리 고산국 군대가 시대를 앞서가고 유럽 대포에 장전하는 포탄이 쇳덩어리에 불과하다지만 눈 먼 포탄에 아군 보병이 상할 가능성이 있었다. 아군 포병은 가장 위협적인 세력부터 제압해나갔다.
발렌슈타인의 본진으로부터 지원받은 숫자를 포함해 가톨릭 동맹군의 대포 40문이 고산국 해병사단 포병으로부터 평균 2발의 포탄 공격을 받았다. 1차 포격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대포 3문은 몇 초 후에 추가된 포격에 의해 완전히 박살났다.
“테르시오 여섯 개가 먼저 전진해옵니다.”
“멋지군. 지휘관은 자포자기했다 치더라도, 병사들까지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나봐.”
이민호는 용감하게 전진해오는 병사들이 몹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가톨릭 동맹 병사들의 용기와 자부심을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전장의 학살자라는 비난을 받을 각오도 미리 해두었다. 그리고 학살의 실행자 입장이 될 아군 병사들의 정신 건강이 심히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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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