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36 102. 30년 전쟁 =========================================================================
거리에 돌아다니는 자동차와 자전거가 늘면서 도시 경관이 급격히 변했다. 자동차 도로와 자전거 도로를 분리하고 교통안전 교육에 힘을 쏟았으나 사고는 항상 작은 실수에서 비롯됐다.
인명사고가 발생할 경우 가해 운전자에게 선고되는 형량이 현대에 비해 무척 가혹한 편이었다. 고산국에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이 없기에 일반 형법의 적용을 받는 탓이었다.
그리고 만약 음주운전이 적발되면 가차 없이 면허 취소를 시키고 차는 강제로 압수해 폐차시켰다. 운전자 소유가 아닌 회사나 관용차라면 음주운전을 한 운전자가 배상해야 했다. 비싼 차량 가격보다는 면허를 따느라 소모한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허무하게 날아가고, 평생 다시는 운전면허를 딸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타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도 차량 판매량은 꾸준히 증가했다.
“주행 중 소음을 줄이는 연구를 하는 모양인데, 차량 외부에는 적당한 소음이 나는 게 좋겠다. 옛날에도 길에 말이나 마차가 많이 다녔지만 말발굽 소리 덕에 치이는 경우가 적었잖니?”
“예, 아바마마. 항상 안전이 우선입니다. 차량 내부 소음을 줄이되 보행자가 차량이 이동하는 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자동차 제작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더구나. 세자가 수고가 많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전거로 인한 인명피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죽는 사람이 드물어 그렇지 운전자와 보행자를 합해 매년 천 명 정도 사상자가 생깁니다.”
자동차와 관련된 문제는 세자 개똥이에게 거의 전권을 맡겼다. 그래서 이민호도 세자의 결정을 존중했다.
“주행 중에는 자전거도 차량 취급하니까 번호판과 운전면허 제도를 도입하든지.”
“차가 다니지 않는 동네에서만 탄다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단거리에는 자전거가 자동차보다 확실히 좋은 교통수단입니다. 그래서 자전거 운행에 제한을 가하기가 어렵고, 안전교육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교통안전 교육 대상에 유치원 아동까지 확대하면 어떻겠습니까?”
“총리부와 협의해서 진행해라.”
시간이 흐르면서 자동차 외에 철도와 선박운송, 항공운항과 교통법 등 교통 관련 전반을 세자가 맡게 됐다. 총리 혜영과 세자빈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개똥이의 발언을 경청했다.
“그리고 일요일마다 몇몇 교회 주변 도로가 온통 주차장으로 변한다는 민원이 최근 폭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찰반을 관할 경찰서로 보냈습니다. 며칠 이내에 감찰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훌륭한 판단이다. 신자인 경찰서장이나 간부가 비호했겠지.”
“제가 보기엔 경찰서장보다 더 상부 기관에서 압력을 행사했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나 성직자들, 또는 신자들 중에 간혹 세속 권력과 법질서를 무시하는 자들이 있다면 반드시 바로잡아줘야 했다. 특히 고위 공직자가 경찰서에 압력을 가해 교회와 신자들의 사소한 불법을 눈감아주게 했다면, 반드시 색출해내서 죄과를 치르게 한 다음 공직에서 추방해야 했다. 부당한 압력을 받고 굴복한 경찰서장도 책임을 지워야 마땅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만약 이조나 호조의 참판 정도가 그 교회를 비호했다면 어떡할래?”
“당연히 법대로 해야 합니다. 왕법을 무시하고 종교, 혹은 종교공동체를 우선하는 위험한 자를 조정에 둘 수 없습니다. 세상 어느 종교에서 불법을 저지르고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라고 가르치겠습니까? 목회자나 고위 관료의 권력 과시행위일 뿐입니다.”
“만약에 그 자가 이면 항공대장이나 예조판서라면? 수십 년 동안 왕실을 위해 봉사했지 않느냐?”
“그분들이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나 그런 오해를 받게 됐다면 공직에서 사퇴하라고 정중히 권하겠습니다.”
조선의 왕세자는 국왕의 후계자라는 허울뿐인 예비 권력자에 불과하지만 고산국 왕세자는 정치의 일정 부분을 관할하는 정식 통치자였다. 아무리 고관대작이라도 세자의 권유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래. 문제를 일으켰으면 누구든 책임을 져야지 왕실에 부담을 주면 안 된다. 대신 왕실에서 잘못할 경우 괜한 희생양을 만들지 말고 왕실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바마마. 그런데 교회 주차 문제 말입니다. 그리 멀지도 않은데 걸어 다니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좀 좋습니까.”
“신도들의 승용차 보유율이 유독 높은 건 봤지? 말이 좋아 경건한 신앙생활을 추구한다지만 결국 사회집단이나 공동체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남들과 비교되니까 무리해서라도 승용차를 사서 타고 다니는 모양이야.”
“당연히 남들에게 과시할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겠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목사나 성직자들이 아무리 신도들을 말려도 소용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목사나 성직자들이 기본 의식도 책임감도 없어 신도들을 말리지 않아서 더 큰 문제였다. 현대에서 이민호는 교회에서 나온 자원봉사자들이 신도들의 불법 주정차를 말리는 게 아니라 도리어 도로를 막아 주차시키거나 이웃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는데 앞장서는 꼴을 봤었다. 남의 집 주차장 앞을 가로막고는 예배 중이라 차를 빼줄 수 없다고 버티는 인간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회집단이 그렇듯 그 구성원들의 소속감과 충성도가 높을수록 외부인들에게 배타적이고 적대감을 표출하기 쉬워진다. 교회 공동체의 경우 외부인이란 무신론자나 타 종교 신자는 물론 같은 종교의 신도로서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까지 포함된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훌륭한 가르침을 신도들이 현실에서 실천하기 어렵다. 율법을 엄숙히 지키는 유대인들만 이웃으로 규정되는 당시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에서 이웃은 원수나 모르는 사람까지 포함되는 넓은 개념이다.
“아국에서 인종이나 출신지로 인한 차별은 크게 문제가 안 되는 것 같다만, 같은 종교 신도들이 서로를 도와주고 외부인을 차별하는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이 문제에 꾸준한 관심을 두도록 해라.”
“국왕과 후계자, 그리고 고위 공직자는 종교를 가질 수 없도록 하면 안 되겠습니까?”
“통치자라 해서 신앙의 자유를 빼앗길 이유는 없다. 다만 종교로 인한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너무 이상적인가?”
물론 이것이 쉬운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 몽골 같은 경우 칸의 어머니가 가진 종교에 따라 칸의 종교가 정해지고, 이는 몽골 사회 전체에 정치적 격변을 몰고 오기도 했다. 역대 칸들의 종교가 네스토리우스파, 불교, 이슬람교를 넘나들면서 해당 종교도 흥망을 거듭했다.
현대에도 같은 종교를 핑계로 권력자와 친분을 만들어 권력 중심에 접근하려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권력자가 가진 종교를 중심으로 이너 서클이 형성된다면 그 권력 집단은 폐쇄성을 갖게 되고 아주 쉽게 부패한다. 청렴하고 유능한 이교도보다는 종교도 같고 개인적으로 친한 부패 관료가 인간적으로 더욱 신뢰가 가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타 종교를 가진 자들을 이교도 야만인 취급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은연중에 타도해야 할 적으로 규정한다는 데에 있었다. 타 종교 신자를 불신하고 같은 종교 신자를 더욱 신뢰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인지상정이지만, 명백히 불법적인 차별대우가 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남의 종교를 존중하는 교육이 충분히 실시됐고 실제로 종교로 인해 분란이 생긴 적이 거의 없어요. 하지만 같은 종교인들이 서로를 우대해주는 관습을 제지하는 어떠한 법규도 없어서 문제예요.”
“인사위원회에 공직 후보자와 같은 종교를 가진 위원의 심사권을 제한하거나, 특정 종교 신도가 일정 비율 이상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총리 혜영과 세자 개똥이의 의견을 들은 이민호는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현대에도 종교 문제를 심각히 여기면서도 누구나 납득할 만한 제도를 만들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집단이든 내부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혈연, 지연, 학연, 종교 등 개인적 친소관계에 기댈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민호도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딱히 제대로 대처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세자가 데카르트 백작을 만나 조언을 구하도록 해라.”
“이 시대의 현자라는 칭송을 받는 그 분이라면 객관적인 해결책을 갖고 있을 것 같습니다.”
데카르트는 이원론자이면서도 평생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려고 퇴위한 배경에는 데카르트가 영향을 끼쳤다는 설이 있다. 데카르트는 철학과 수학, 과학뿐만 아니라 모든 사안에 대해 고산국 왕실에 적절한 조언을 해주었다.
이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항공대장 이면이 비서를 밀치고 집무실에 들어섰다. 허옇게 뜬 얼굴로 미루어 사고가 난 것이 틀림없었다.
“국왕전하!”
“어서 와, 조카. 무슨 일이야? 또 비행기가 추락했나?”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안나푸르나 등반로를 정밀 촬영하던 정찰기가 갑작스레 발생한 측풍에 밀려 실속에 빠진 다음 추락했습니다. 안나푸르나 성역이라 불리는 지역에 추락하고 있다는 보고를 마지막으로 통신이 끊겼습니다.”
“아아!”
세자 개똥이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면과 개똥이가 속한 히말라야 등반대가 그 동안 비교적 안전하게 14좌를 차례로 등정한 것에는 항공대의 도움이 컸다. 수송기나 정찰기가 항공촬영을 해서 미리 안전하고 편한 등반로를 정해주었기에 희생자가 예상보다 적은 편이었다.
만약 실제 역사처럼 등반로를 산악인들의 힘만으로 일일이 새로 개척해가면서 산에 올랐다면 무수히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개똥이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빙벽에서 추락하거나 눈사태에 휩쓸리거나 동사했을 수도 있었다.
“저는 지금까지 등반대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만 봤을 때는 괜찮았습니다. 저도 동료들처럼 언제든 죽을 수 있었으니까 가책이 덜했습니다.”
“세자!”
“어마마마! 그러나 우릴 도와준 항공대 동료들이 죽는다면 가슴이 아플 것 같습니다. 그들은 우리 등반대처럼 명예를 얻지도 못했으니까요.”
모자지간에 대화하는 사이 이민호는 추락한 정찰기 승무원들을 구조하기 위한 원정 작전을 승인했다. 항공대장 이면이 직접 현장으로 가서 항공구조대와 히말라야 등반대, 그리고 티베트 주둔군을 지휘해 구조작전, 사실상 유해 수습 작업에 나서기로 했다. 다들 고지대에 적응한 인원이었다.
히말라야 초모랑마를 비롯해 8천 미터를 넘는 14좌 중에서 순위가 낮더라도 지형 또는 잦은 악천후 때문에 등반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봉우리들이 있었다. 안나푸르나와 카라코룸 산맥의 최고봉이며 현대에 K2로 불리는 초고리, 그리고 낭가파르바트가 대표적인 악마의 산이었다.
특히 낭가파르바트는 등반 중 사망률이 1990년대 이전까지 77퍼센트에 달했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즉 초모랑마는 오히려 등반하기 쉬운 산에 속해서 21세기에는 하루에 20여 팀 수십 명이 줄지어 오르기도 했다.
“세자! 올해는 산에 오르지 마세요.”
“어마마마께 죄송하지만 저는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후대 산악인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저와 동료들이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세자!”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상 등반은 강풍과 눈사태가 끝나는 초여름에 시도하겠습니다. 일단 숙부를 도와 구조작전에 참가하겠습니다.”
“안 돼요!”
“세자빈은 걱정 마시오. 아바마마, 어마마마! 소자, 다녀오겠습니다.”
이면과 개똥이가 나가고 집무실에는 혜영과 세자빈만 남아 흐느껴 울었다. 이민호는 세자를 말리지 않았기에 두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걸기도 어려웠다.
“주인님! 왜 세자가 가도록 내버려두었나요? 꼭 그렇게 고산국 왕실의 육체적 강인함을 과시해야 하나요? 그리고 산에 오르더라도 직승기로 정상에 착륙하면 되잖아요!”
“혜영 당신은 다 알면서 내게 묻는구려. 개똥이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소?”
혜영이 이민호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가만히 앉아 흐느껴 우는 세자빈이 더 불쌍해보였다.
“아가야. 동궁으로 돌아가서 동생들과 함께 있거라.”
“제가 세자 저하를 안나푸르나까지 옹위하지 못해서 죄송하옵니다.”
“무슨? 안나푸르나 정상까지 갈 사람은 고산국, 아니 세계를 통틀어 20명도 안 된다. 세자빈은 자책하지 마라.”
셰르파나 구르카를 포함한다면 좀 더 많아지겠지만 그 지역 주민들이 힘들여 산꼭대기에 오를 이유가 없었다. 이민호가 비서실에 연락해 세자빈을 동궁으로 모시도록 지시했다.
“나도 처음에는 개똥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말렸소. 하지만 딱 두 개가 남은 이제는 자식의 꿈을 이뤄주고 싶소. 그리고 이를 이용해 차기 국왕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좋게 만들어주고 싶소.”
“알아요. 아니까 더 안타까운 거여요. 제가 도와줄 수 없어 더욱 안타까워요.”
혜영이 벌떡 일어나 나가버리고 이민호 옆에는 호위대장 선영만 남았다. 옛날과 달리 선영을 앉힌 다음 허벅지를 베고 드러누웠다. 세월이 좀 더 흐르면 등을 긁어달라고 할 것 같았다.
“개똥이 때문에 내가 늙는다. 등반대가 얼른 14좌를 완등하면 좋겠다.”
“예전에 하신 주인님 말씀이 옳아요. 앞으로 전쟁이 줄어들 테니 영토를 늘린 정복자보다는 자연의 정복자가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여요.”
“그래. 이번 유럽 전쟁이 끝나면 한동안 전쟁이 없겠지. 명나라도 의외로 잘 버티는 편이야.”
“에스파냐 외교관들이 멕시코 영토 매매 문제로 내일 도착해요. 예조에 어떤 지침을 내리실 건가요?”
“항상 같지 뭐. 적당히 상대하고 결렬시키라고 해.”
고산국 입장에서 급할 일은 없었다. 다만 멕시코에서 태어난 에스파냐 귀족 소생들과 농장을 경영하는 이달고들이 어서 영토 매매 조약을 체결하라고 에스파냐 왕실에 압력을 가한다고 들었다. 매년 파산 위기에 몰리는 에스파냐 덕택에 영토 매매가가 오를 일이 없으니 느긋하게 지켜보기로 했다.
“주인님은 6억 원, 금 6백 톤을 제시하셨는데 멕시코와 쿠바의 실제 가치가 얼마나 될까요?”
“왕실과 정부가 보유한 모든 금과 은을 줘도 아깝지 않아. 하지만 굳이 그 땅을 얻지 않아도 상관없어.”
“애매하네요.”
“영토란 그런 거지. 지금도 그 땅 없이 잘 살고 있잖아? 하지만 일단 영토로 편입된 다음에는 모든 힘을 다해 그 땅을 지켜야 해. 영토는 후손들의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후손들이 아주 훌륭한 조상이었다고 주인님을 칭송할 거여요.”
“그럼 고맙지. 후손을 더 만들어볼까?”
이민호가 선영의 손을 잡고 별실로 걸어 들어갔다. 선영이 말로는 근무시간을 들어 거절했지만 손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 채 끌려갔다. 이민호의 등만 긁어주기에 선영은 아직 너무 젊었다. 그리고 꾸준한 운동으로 몸매를 관리하는 고산국 왕실 여자들은 현대인처럼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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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영토문제부터 해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