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32 101. 1624년 =========================================================================
“여기가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야. 풍경이 어때?”
“세상은 참으로 드넓고 아름다운 곳이었군요. 놀랐어요.”
평지에서 설산의 정상 바로 아래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거의 완공됐다. 도로 준공식을 며칠 앞두고 리투아니아 출신 언어학자 자매를 차에 태워 구름이 흘러가는 정상 주차장까지 올라왔다. 앞자리 운전석과 조수석에는 호위 두 명이 타고 이민호는 알비노 자매와 함께 뒷자리에 앉았다.
나타샤와 스텔라는 햇빛에 약한 알비노들 중에서도 특히 민감했다. 둘은 직사광선이 아닌 반사광에 잠깐 노출된 것만으로 피부가 벌겋게 익을 정도로 약했다. 자동차 유리 전체를 색유리로 만들지 않았다면 자외선이 쏟아지는 높은 산에 오를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자매는 알비노들이 흔히 그렇듯 시력이 약했으나 특별히 제작한 안경 덕분에 멀리 볼 수 있게 됐다.
“높은 곳에서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지?”
“예. 하지만 이 높이에서도 지평선이 그리 멀지 않은 걸로 미루어 지구가 평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겠어요.”
“오오! 똑똑하구나.”
지난 10년 사이에 인문학, 특히 철학과 언어학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여러 언어권에서 학자들을 불러 모아 재정적으로 지원해 연구시킨 성과가 서서히 나타난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특히 리투아니아 출신 자매가 연구를 주도하는 비교언어학 분야에서 발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나타샤와 스텔라는 원시인구어, 즉 인도유럽 공통조어 연구를 논문으로 발표해 고산국과 유럽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인도유럽어족들 사이에서도 현재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어파와 게르만어파가 오히려 그 중간 지역에 분포했던 켈트어파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는 사실을 증명해, 역사학계와 인류학계에 인도유럽어족의 발원지에 대한 연구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물론 켈트어파가 더 먼저 원시인구어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전체 백인의 발원지에 대한 호기심이 일반인은 물론 학계에서도 강하게 확산됐다.
“전하께서 저희보다 훨씬 지혜로우시죠. 성인이 되고서도 우유를 소화하는 능력이 모든 인종에게 일반적이 아니며, 오히려 포유류 전체에서 볼 때 돌연변이라고 가르침을 주셨잖아요. 덕택에 언어의 전파 문제를 심각히 고려해서 어족을 더 확실히 구별하게 됐어요.”
“인류의 연원 문제가 일반인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내가 듣기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조상을 찾게 된다고 한다. 분자생물학 분야가 좀 더 발전하면 함께 연구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인간의 유전자 구조를 명확히 파악하고 민족 고유의 유전적 특징을 비교할 날이 올 거여요. 그때는 언어학과 인류학뿐만 아니라 의학 분야에서도 급격한 관점 변화가 이루어질 거여요.”
외출을 못하는 대신에 연구에 매진한 알비노 자매는 언어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학자로 자리매김했다. 이민호가 현대에서 주워들은 몇 가지 가설 수준의 이론을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입증해내면서, 지금은 자매의 학문 수준이 이민호보다 훨씬 높았다.
나타샤와 스텔라는 리투아니아어와 러시아어 외에도 고전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 페르시아어를 완벽하게 구사했고 산스크리트어와 히타이트어에도 능통했다. 그리고 자매는 최근에 원시인구어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이를 바탕으로 사어(死語)로서 문서에만 남은 토카리아어의 언어 구조를 파악한 다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휘와 활용법을 예측했다. 이는 나중에 다른 토카리아어 문서를 새로이 발견함으로써 예측의 정밀함이 입증됐다.
“남들이 200년 동안 연구해서 낼 성과를 너희들은 겨우 10년 만에 이룬 것 같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전하. 알수록 모르는 게 더 많거든요. 그리고 여러 언어를 연구하다 보니 원시인구어와 아시아 여러 언어집단과의 연관성이 조금 드러났어요.”
“뭐? 설마 황인종의 다양한 언어가 인도유럽어와 공통점이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공통점이 많은 것 같아요. 가족 호칭이나 신체부위 명사 같은 기본어휘를 빼고도 말이에요. 인도유럽어족과 우랄어족, 어족으로 단정하기 곤란한 알타이제어, 독립적인 조선어와 일본어를 합한 유라시아 공통조어를 학문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요.”
세계적으로 발음과 뜻이 비슷하더라도 가족의 호칭은 가짜동계어로 본다. 아기가 부모를 칭하는 단어로 마마와 파파 혹은 바바가 여러 언어권에서 흔한 이유는, 로만 야코브손의 이론에 따르면 언어 습득 과정에 들어간 아기가 처음 발음할 수 있는 ‘단어 비슷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유라시아 공통조어라니, 상상이 안 간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북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에서 사용하는 아프로-아시아어족과 드라비다어족, 유라시아어족의 공통조어에 해당하는 상위의 언어가 있을 수도 있어요. 여기서 중국-티베트어족과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아프리카의 반투어족 등은 빠져요.”
“그래? 조금 더 진행하면 진정한 세계어를 연구할 수도 있겠네?”
유라시아 공통조어의 상위 개념으로 Nostratic 가설이 있다. 형질인류학이 발전한다면 비교언어학의 연구결과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고산국에서는 아직 분자생물학도 초기 단계에 불과했다. 여러 민족별 언어와 유전적 특성이 타 집단과 분명히 구별된다는 결론이 나올 경우 코카서스 인종과 몽골로이드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남방 몽골로이드가 북방 몽골로이드보다 먼저 갈라져 나왔다는 이론이 성립한다.
나타샤가 이민호의 눈치를 살폈다.
“전하께서 예전에 말씀하시길, 바람직하진 않지만 학문연구도 정치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하셨어요. 이 연구를 진행할지 말씀해주세요.”
“응? 오해가 있었군. 학문이 정치에 종속되는 현실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내 결론이야. 그러니 그런 건 내게 묻지 말고, 학문적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면 둘이 알아서 해.”
“정말요?”
“그럼! 나는 사실을 바탕으로 둔 학문이 정치에 우선한다고 믿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지나치게 광범위한 연구가 될 것 같아. 둘이서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 필요한 연구인원과 예산은 예조에 신청하도록 해.”
“고마워요, 전하.”
언어는 일반적으로 그 사용자, 즉 특정 민족이나 인종 구성과 연결되기 마련이었다. 아일랜드와 영국인들이 같은 조상을 두었다거나, 독일인과 루스인들이 그리 머지않은 과거에 분화됐다는 이론은 일부 인종우월주의자들에게 극렬한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흑인과 중남미 원주민들이 인간의 영혼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노예로 부려도 된다고 믿는 일부 기독교 사제들도 창세기 기록을 들먹이며 반대할 것이 뻔했다.
그러나 국내 여러 민족을 평등하게 대하는 이민호 입장에서는 인종의 분화가 기원전 6천 년에 시작됐든, 기원전 3만년에 시작됐든 전혀 상관이 없었다. 이 연구가 기독교의 창조론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한 다음에 내린 결론이었다. 굳이 종교 영역과 충돌할 필요는 없지만, 어차피 성서의 창세기는 조만간 신화나 은유의 영역으로 물러나게 돼 있었다.
“너희들이 내 여자가 된 지 벌써 10년이나 됐구나. 여전히 예쁘다.”
나타샤와 스텔라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둘은 연구에 매진하는 도중에 가끔 의상발표회나 잡지에 모델로 나서기도 했고, 그때마다 남성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알비노가 유전될 가능성을 두려워해 둘은 임신을 극력 기피했다.
“백색증을 유전적 열성이나 결핍이라고 단정할 필요 없어. 만약 지구에 다시 빙하기가 찾아온다면 백색증이 생존에 유리할 거야. 그러니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너희들이 후손을 남기는 편이 좋아.”
“아기님이 태어나시더라도 저희들처럼 사는 게 불편하고 고달플까봐 두려워요.”
“혹시나 아이들이 백색증으로 태어나더라도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 훨씬 좋을 걸? 너희들은 요즘 어때?”
“전하 덕택에 행복해요.”
“나타샤와 스텔라 덕택에 나도 행복하다. 그리고 학문연구도 중요하지만 출산과 육아는 고산국 모든 백성들의 의무다. 왕실 식구가 모범을 보여야겠지?”
“저, 전하의 뜻을 받들겠어요.”
이민호가 나타샤와 스텔라에게 번갈아 입을 맞췄다. 운전을 맡은 호위가 안전한도 내에서 최대한 빨리 차를 몰아 왕궁으로 돌아갔다.
멕시코 영토 매매 협상은 이번에도 결렬됐다. 뜻밖에 에스파냐에서 현금을 받기보다 기존 부채의 완전 탕감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통용되는 이자율의 절반인 10퍼센트 정도만 받았는데도 에스파냐 왕실에 심각한 재정 부담이 되고 있는 듯했다.
네덜란드와 덴마크, 스웨덴의 전쟁 참가 계획을 파악하고 있던 이민호는 내년에 다시 협상을 진행하자고 에스파냐 협상단에게 제안했다. 돈 들어갈 곳이 많은 에스파냐가 급하지, 고산국이 서두를 일은 없었다.
그리고 협상단을 빈손으로 돌려보내기 미안하다는 이유로 금 30톤을 에스파냐 왕실에 추가로 빌려주었다. 협상단은 이 금이 독이 든 성배라는 사실을 눈치 챘지만, 에스파냐가 현재 파산 위기에 몰린 탓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을에 민희와 민영의 아들 석호와 석진이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의 딸들과 결혼했다. 유럽 왕족과 귀족들을 초빙해 먼저 덴마크 왕궁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덴마크의 주변국들과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이민호는 결혼식 축하연 기간 내내 야망에 부푼 크리스티안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꾹 참고 들어주었다.
고산국 왕도에서 왕자들과 덴마크 공주들의 결혼식을 다시 올렸다.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축하사절을 보냈고, 스웨덴의 쇠데르뫼데 백작 악셀 욱센해나와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이 결혼식 축하 명목으로 왕도를 방문해 이민호와 비밀리에 협상했다. 그리고 재상 리슐리외가 돌아가는 길에 볼 품 없는 소년을 왕궁에 남겨두었다.
“작년에 돌아가신 부용 공작 앙리의 차남이자 튀렌 자작이란 말이지?”
“그, 그렇습니다, 전하. 아,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입니다.”
이민호와 오찬을 함께 하는 프랑스 귀족 소년은 1611년생이라는데 체구가 작아 열 살도 안 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말도 심하게 더듬어 통역이 몇 번이나 되물어 의미를 확인해야 할 정도였다. 세자 개똥이가 몹시 답답해서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죄, 죄송합니다, 세자 저하.”
“아니오, 자작. 나도 모르게 실수해서 미안하오. 내 사과를 받아주기 바라오.”
“천만에 말, 말씀입니다. 다 제 탓입니다, 저하.”
이민호는 부끄러워하는 앙리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튀렌 자작! 이왕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겠나?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야지. 신체적 불리함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튀렌 자작이 정말 대단해.”
“황공하옵니다, 전하.”
“하지만 튀렌 자작이 기대하는 것을 고산국 의사들이 해줄 수 없을 것 같아. 언어는 뇌가 관장하는데 고산국에서도 뇌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거든. 위험하기도 하고.”
“충분히 이해합니다, 전하. 저는 고산국 청소년들이 체력단련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한다는 잡지 기사를 보고 고산국에 오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쉽게도 6개월 후에는 삼촌들을 돕기 위해 네덜란드로 가야 합니다.”
튀렌 자작은 네덜란드 총독 마우리츠의 조카였다. 실제 역사에서 그는 마우리츠라는 이 시대 기준으로 몹시 훌륭한 군사학의 대가 밑에서 호위병으로 근무하며 군사학을 배웠다.
“나이가 어릴 때 체력을 단련해놓는 게 여러 모로 좋지. 그런데 운동만 할 거야?”
“제가 역사와 군사학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만 체력이 약해 공부하기 어렵습니다.”
“체력과 공부라. 그럼 외국인을 위한 사관학교 단기과정이 적당한데 성인 대상이라 어렵겠어. 군사유년학교는 어떻겠나? 병조에 일러둘 테니 군사유년학교에서 공부하고 체력단련도 하게. 체력이든 공부든 하는 방법을 배워서 꾸준히 하면 평생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튀렌 자작이 돌아가고 나서 이민호가 세자와 대화를 나눴다. 육체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프랑스 귀족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현대전에서도 군인의 체력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화약무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지휘관이 반드시 체력적으로 우월할 필요는 없어졌다는 판단이었다.
“세자가 가끔 만나서 조언이나 해줘라. 혹시 알아? 오랜만에 프랑스에서 대원수가 나올지.”
“설마 그 정도로 성장하겠습니까만, 자신의 한계를 넘으려고 발악하는 사람을 같은 인간으로서 돕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히말라야가 생각나는 모양이구나.”
“헤헤! 이제 몇 개 안 남았습니다.”
지금도 히말라야 14봉에 대한 개똥이와 산악부의 도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세자가 14봉 등정을 마칠 때까지 이민호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지만 말릴 수도 없었다. 세자가 내세울 수 있는 사실상 몇 안 되는 업적이기도 하고, 고산국 왕실 구성원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무척 강한 자들이라는 인식을 외국에 심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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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내내 매달려서 한 회 겨우 올리는군요.
1624년 한 회 더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