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28 101. 1624년 =========================================================================
에심 칸은 카자흐의 세 번째 중흥기를 이끈 지도자였지만 운이 없는 편에 속했다. 현대 우즈베키스탄 북서부, 아랄 해에 면한 지역에 살던 카라칼파크 족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에심 칸은 수도를 서쪽 투르키스탄의 시그나크로 옮겨 반란 진압에 몰두했다. 그런데 반란이 끝나고 나서 이번에는 부하라 한국과 타슈켄트 한국을 상대로 기나긴 전쟁을 벌여야 했다. 특히 타슈켄트는 카자흐 남부의 인구밀집 지대와 가까워 다시 점령하거나 최소한 반드시 기세를 꺾어놓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산국을 따르는 연합국 기마대군이 접근했으니 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할 여력이 없었다. 카자흐 영역을 지나 티베트까지 빈번히 왕복하는 토르구트가 두려워서 통행세 운운했다가 이렇게 호되게 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발하슈 호 동쪽은 토르구트 족이 원하는 대로 여전히 카자흐 영토이되 누구나 통행할 수 있는 중립지대로 규정됐다. 카자흐 한국이 고산국에 복속하는 것은 비록 명목에 불과했지만 앞으로도 고산국의 강한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뜻했다. 턱을 치켜든 개똥이 머리 위로 항공기들이 굉음을 울리며 떼를 지어 지나갔고, 에심 칸이 엎드린 채 눈물을 흘렸다.
“칸은 참 안됐지만 우리 세자 정말 멋지다! 그렇지 않소, 총리?”
“민망합니다, 아바마마.”
개똥이는 멋쩍어서 머리를 긁고 혜영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몹시 기뻐했다. 아들 개똥이가 기병 30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서서 광대한 영토를 보유한 유목국가의 칸에게서 항복을 받았다. 이로써 세자의 군사 지휘 경험이 부족하다는 세간의 우려를 한 방에 날릴 수 있게 됐으니 절로 혜영의 주름살이 펴졌다.
“그런데 저 장면을 찍으려고 촬영기사가 땅바닥에 엎드렸겠다.”
“촬영감독이 다시 찍어야 한다고 해서 땡볕 아래서 저 낯 뜨거운 대사를 세 번이나 지껄여야 했습니다.”
“큭큭! 세자의 정복자 연기가 아주 좋았다.”
기병 30만이 중가르 분지를 지나는 동안 토르구트 족이 선두에 서서 대군을 이끌었다. 금의환향한 토르구트 족을 환영하며 오이라트의 여러 친척 부족들이 병력을 모아 행렬에 합류시켰다. 자그마치 40만으로 불어난 기마대군이 지평선 양쪽을 메우며 초원과 사막을 건넜다.
소와 양을 충분히 끌고 오고 고산국에서 내준 술통이 많아서 마치 축제처럼 즐겁게 진군이 이뤄졌다. 전투가 벌어질 일이 없어 세자 직할 장갑차 부대가 한 일은 확성기를 통해 행진곡을 틀어주는 것뿐이었다.
연합군이 티베트 라싸에 도착하자 달라이 라마가 멀리까지 나와서 영접했다. 세자 개똥이는 달라이 라마를 일개 국가원수로 대하지 않고 종교 지도자로 더욱 우대해서 겔룩파를 비롯한 불교도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토르구트 칸과 카자흐의 칸, 오이라트와 몽골, 여진의 여러 크고 작은 부족장들이 세자 개똥이를 호위하는 모양새를 이뤄 이들 중에 누가 가장 우위에 있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티베트를 불교의 성지이자 정치적 중립 지역으로 만들면 좋겠소. 물론 토르구트의 칸이 양보를 해야겠지만 말이오. 예판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렇게 된다면 티베트인들뿐만 아니라 토르구트와 협력과 동시에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오이라트 부족들과 몽골인들이 모두 기뻐할 것입니다. 어지를 받들어 토르구트 칸을 설득해보겠습니다. 달라이 라마에 의해 이미 칸으로 등극한 이상 그도 더 이상 큰 욕심은 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불교가 강세인 지역에서 달라이 라마의 종교적 영향력이 큰 만큼 주변 세력들이 그를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려 시도하는 것은 당연했다. 마치 명목상의 군주를 손아귀에 넣고 권력을 휘두른 고려 무신정권이나 일본 쇼군 같은 정치체제라고 보면 된다.
토르구트에서 티베트는 사실 너무 멀었다. 고산국에서 철도를 부설해준다 해도 주변 경쟁자들로부터 제대로 지키기 어려울 것으로 봐야 했다. 그렇다고 티베트에 대한 토르구트의 영향력이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고산국에서 토르구트를 위해 여러 부족을 아우른 대규모 기마대를 티베트에 보낸 이상 앞으로도 주변 세력들은 토르구트의 힘을 무시하지 못한다.
“총리! 모든 극장에서 본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이 보도 영화를 상영하도록 지시하시오.”
“예, 전하.”
“흐음. 그뿐이오?”
“고, 고마워요.”
아들을 인질로 삼아 혜영에게서 억지로 고맙다는 소리를 들은 이민호가 활짝 웃었다. 1970년대 대한 늬우스 같은 정치적 선전 영화는 다른 영상 매체가 부족한 고산국에서 큰 대중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여러 나라 병력을 지휘하기 위해 원래 이민호가 직접 가려다가 개똥이를 밀어주기 위해 대신 보냈다. 후계자의 세자 시절 업적도 현 국왕이 신경 써서 챙겨줘야 했다.
“기병이 자그마치 40만이오! 하늘에 항공기들이 날고 있으니 두려울 게 없소. 이 멋진 모습을 외국에, 특히 유럽 여러 나라에 보여주고 싶은데 말이오.”
“국내에서 제작한 영화를 외국에 보여주고 싶어도 한계가 있어요. 외국에서는 덴마크 일부 도시 외에 전기를 쓰는 곳이 거의 없거든요.”
“영화가 아니면 신문과 잡지를 통해서라도 외국에 고산국의 발전상을 꾸준히 알려야 하오. 특히 외국에서 인기 좋은 남성용 잡지에 이번 원정기사를 반드시 싣도록 하시오.”
“시사나 문예잡지라면 몰라도 남성용 잡지를 국외 선전에 동원하기에는 민망하지 않나요?”
“무슨 소리요, 총리? 헐벗은 처자들의 사진이 선전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오.”
다른 나라들과 국력 차이가 이미 크게 벌어졌으므로 그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세월이 조금 더 흐르면 다른 나라에서 알아서 기느라 고산국에 시비를 걸지 못할 것이며, 수출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미국에서 발행된 플레이보이 지는 여성 누드 사진이 게재되는 남성용 잡지이지만 발행부수가 워낙 많아 시사 분야에서도 영향력이 큰 편이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포르노 잡지는 미국의 현재를 한국인들에게 인상 깊게 각인시켰다.
사람들은 누구나 영화가 가상의 것이며 시사 주간지 내용이 정치적 선전물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이에 반해 포르노 잡지 사진의 배경이 되는 번화한 시가지와 호화로운 주택은 그런 심리적 부담 없이 미국의 부강함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누드 사진과 포르노를 잡지로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서도 극단에 해당했다. 고산국 잡지에서는 포르노나 누드 사진은 차마 못 싣고 수영복 정도에 그치지만 그것만으로도 외국에서는 충분히 문화적 충격이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외국 무용단을 초청해서 국내 여러 도시에 순회 공연하는 것처럼 우리 무용단을 외국에 보내 공연을 추진하려고 해요. 우리 고산국이 세계의 문화적 주도권을 쥐는 첫 번째 단계예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오.”
“그래서 주상아 공주님의 셋째 따님이신 선화 공주님과 동료들을 초청했어요.”
“‘공주님과 무수리들’말이오? 그것 참. 가창력은 좋지만 국내에서 인기가 별로 없지 않소? 외국에 보내더라도 국내에서 적당히 인기가 좋은 가수단을 보내는 게 좋겠소.”
“그래도 다들 예쁜데다 각자 라틴어와 불어, 스페인어, 독일어, 영어를 잘 구사한단 말이에요. 선화 공주님이 계시니까 유럽의 왕실을 통해 외국에 공연을 보내기에 가장 적당해요.”
“친선 외교사절 역할을 하면서 남편감이라도 찾으면 그것도 좋겠소. 호위! 들어오게 하라.”
주상아 소생의 막내 공주는 귀엽고 예쁘고 애교를 잘 부렸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지금은 5인조 여성 가수단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이민호가 준비해둔 미발표 신곡을 다섯 곡이나 빼앗아갔다. 그러나 언니들 중에 이미 셋이나 대중가요계에 진출해서 이제는 공주라 해서 딱히 인기몰이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꺄악! 아바마마! 저를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시는 거여요?”
“왜? 내가 언제 너를 음흉한 눈으로 쳐다봤느냐?”
대신들이 얼른 고개를 돌린 것은 선화 공주와 동료 가수들의 옷차림이 노출이 심했기 때문이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이민호에게 선화 공주가 투정을 부렸다.
“아뇨. 마치 안무가 선생님처럼 사무적으로 쭉 훑어보시니까 섭섭해서 하는 말이에요. 오라버니도 인상 찌푸리지 마세요. 저 정도면 아주 예쁘잖아요.”
“그래도 내 딸일 뿐이다. 반바지가 너무 짧아서 대신들이 차마 눈을 둘 데가 없구나. 어서 동료들과 함께 노래하면서 춤춰봐라.”
고산국 여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격렬한 춤을 추면서도 노래 부르기가 가능했다. 멤버들이 일정 시간씩 나눠서 부르면서도 일부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립싱크를 하는 평균적인 대한민국 아이돌 그룹보다는 조금 더 나았다.
“할스 경과 김 교수! 똑바로 보고 의견을 말해주게.”
“몹시 민망하지만 똑바로 보겠습니다, 전하.”
5인조인데도 다들 노래도 잘하고 예쁘고 몸매도 잘 빠졌다. 곡 자체도 이민호가 21세기 대중가요를 줬기에 귀에 착착 감기는 편이었다.
이런 스탯을 갖춘 걸 그룹이 뜨지 못하는 것은 경쟁자들이 충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었다. 걸 그룹이 인기를 끈 지 이미 20년이 넘어 아이돌 음악계는 이미 포화시장이라 신인그룹이 인기 그룹으로 부상하기 무척 어려웠다.
“어때요, 아바마마?”
“잘하는구나.”
“하지만 대중들 반응이 신통치 않아요. 새로운 노래 몇 곡 더 주세요.”
“곡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너는 언니들과 달리 춤추는 가수인데 춤을 제대로 추지 못하는 것 같구나.”
“예? 학교에서 배우는 것 말고도 노래학원과 무도학원을 3년이나 다녔어요. 고전무용, 현대무용, 길거리 무용에 발레까지 배웠다구요.”
“무도학원에 다녔다고 진정한 무도인이 되는 건 아니지. 잠깐!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먼저 듣도록 해라.”
먼저 도시공학을 전공한 김 교수에게 평하도록 했다. 김 교수는 선화 공주와 차마 눈을 못 마주친 채로, 그러나 과감하게 평가했다. 고산국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가지 운동을 하고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루기에 이공계 출신이라 해서 음악에 문외한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춤과 노래를 듣고 보게 돼서 영광이옵니다, 공주마마. 하오나 제가 알기로 춤은 몸을 의사소통 도구로써 나누는 청중과의 대화입니다. 황공하오나 선화 공주님이 추는 춤에는 감정이 제대로 실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춤으로 주제가 명확히 전해지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교수님.”
“가사는 첫사랑에 빠진 소녀의 두근거림을 묘사했지만 공주마마의 얼굴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거나 비웃거나 둘 중 하나뿐입니다.”
“거울을 보면서 꾸준히 연습했어요!”
“하오나 가사와 안무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공주님 탓이 아니라 안무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어서 궁정화가 프란스 할스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김 교수와 달리 대놓고 감상한 할스도 비슷한 평가를 했다.
“죄송하오나 저는 고산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가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춤으로만 보건대, 아마 ‘나의 미모와 고귀함을 경배하라, 이 못난 것들아.’ 정도로 이해됩니다. 맞습니까?”
“그게 아니에요!”
“저는 화가입니다, 공주마마. 오래도록 초상화를 그린 제 경험에 따르면 인간은 얼굴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외국어는 물론 자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두 나라의 어린 아이들 사이에 대화가 통하는 이유입니다.”
“냉정하고 솔직한 평가를 해주신 두 분께 감사를 드려요. 그럼 어떻게 바꿔야 보다 명확한 의사전달이 가능할까요? 부탁드려요.”
“험! 조언은 조금 나중에 해주게.”
이민호가 대화를 중단시켰다. 요즘 고산국 젊은이들은 데카르트의 철학에 영향을 크게 받아 남의 평가에 개방적이었다. 감정이 이성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충분히 납득하고 있으므로 섣불리 감정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또한 경험적 정보의 오류 가능성은 데카르트적 회의론의 주요 개념이므로 함부로 자기 경험을 내세워 우기지도 않았다. 기성세대와 달리 요즘 젊은이들이 매우 객관적이라는 것은 이런 뜻이었다.
물론 젊은이들이 남의 비판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도 않았다. 오늘 받아들일 남들의 평가를 선화 공주가 며칠 동안 곱씹어 고민한 다음 결론을 내릴 것으로 이민호는 기대했다. 어느 쪽이든 최소 한 단계 발전이 있을 것이다.
“선화야. 나는 네 아버지지만 음악계에서는 여러 가지 악기와 악보의 표준을 제정하고 특히 대중음악계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다.”
“저도 아바마마의 업적을 높이 사고 있어요. 아바마마께서는 훌륭한 곡을 수백 곡이나 만드시고 여러 명이 춤과 노래를 동시에 진행하는 가수단을 창조한 분이세요.”
“그렇다. 하지만 그 동안 내가 대중음악계 종사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이 어느덧 희미해진 모양이구나. 선화 너는 거울 말고 양면 거울을 보면서 표정과 춤 동작을 연습해봐라. 남이 너를 보는 각도에서 봐야 네 표정을 제대로 알지. 그리고 가수단의 관리자와 안무가는 앞으로 나오라.”
관리자를 겸하는 기획사 대표와 안무가가 이민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대표는 제작자도 아니고 매니저 즉 관리자도 아닌, 마케팅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데뷔 초반부터 선화가 속한 걸 그룹의 인지도를 높인 것은 칭찬받아 마땅했지만, 그 외에는 제대로 된 음악적, 대중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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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분야 묘사는 항상 어렵습니다. 다음 회에 1624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