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26화 (875/1,000)

00926  101. 1624년  =========================================================================

올해에도 여름에는 여전히 더웠다. 고산국 왕실 가족 전체가 선선한 아이누 섬에서 보름 동안 피서를 즐겼고, 본토로 돌아와서는 고도가 높은 옥산 아래의 행궁에서 지냈다. 백성들도 다들 알아서 기나긴 휴가를 떠나 왕도가 텅 비었다.

평균적으로 지구 기온이 점차 하강하는 것은 명백했지만 매년 오르락내리락해서 앞으로의 추세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때 지구 평균 기온이 3년 연속 상승해서 기온 하강 추세가 멈췄다고 결론을 내린 기상학자들은 다시 판단을 유보했다.

“태풍과 홍수, 가뭄과 기온 하강으로 인한 단위면적당 수확 감소보다 농지를 확대한 효과가 커서 올해에도 곡물생산량이 넘쳐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국내 소비량을 충당하고 남은 것을 주정 원료와 가축 사료로 전용하고, 일부는 아프리카 왕국과 명나라, 인도에 유상으로 지원할 계획입니다. 그러고도 보관 기한이 지나는 5백만 톤 정도를 폐기해야 합니다.”

“아까우냐? 약간의 비효율을 감수하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극심한 기후변화에 대비하는 것이다.”

행궁에서도 왕실 가족들은 통치자로서 의무를 잊지 않았다. 이민호는 총리 혜영과 세자 개똥이, 왕도에서 온 대신들과 함께 정책토론을 계속했다.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아바마마. 만약 시장 상황에 맞춰 곡물 가격이 폭락한다면 농민들은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전체 농가의 2할 정도를 줄여도 되겠지만 다른 산업에서 그 많은 노동력을 흡수하기 어려울 것이 명백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이 커서 성인이 되고, 일자리가 더욱 많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경제인구의 증가 폭이 날이 갈수록 커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국가가 부강해지고 백성들 개개인이 잘 살기 위해서라도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는 편이 좋다. 식량만 풍족하다면 인구 증가만으로도 경제규모가 자동적으로 확대되니까 말이다.”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 부족을 두려워하는 유럽 중농학파의 주장과 정반대입니다만, 고산국은 영토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은 편이니까 상황이 다르겠습니다.”

“물론이다. 인구 증가는 앞으로도 지속돼야 하되, 문제는 일자리다. 질 좋은 일자리를 백성들에게 만들어주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다.”

이민호가 잠시 한숨을 쉰 다음 말했다. 백성들이 충분히 잘 살게 됐더라도 정치가는 끊임없이 미래를 준비해야 했다.

“예상보다 일찍 농업 기계화가 완성되는 바람에 식량부족 문제를 겪지 않게 됐지만, 그 대신 여러 분야에서 문제가 생겼다. 사실 정부가 농민들은 물론 나머지 백성들도 속이고 있다. 지금 경제구조에서는 성인 남성의 절반 정도만 일해도 충분한데 여성들까지 일자리를 원해서, 억지로 직업을 마련해주느라 무척 괴롭다.”

“최근 들어서 새로운 직업을 만들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기본 소득을 올리고 현재 국가의 상황을 솔직히 설명한 다음 적당히 놀면서 일하라고 백성들에게 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럼 다들 대놓고 놀려고 하지 누가 일하려 하겠니? 어쨌든 수용 한계에 쉽게 도달하는 생산직보다는 공무원이나 봉사직종을 늘리는 편이 더욱 좋다. 그리고 직업이란 게 개인에게 자아실현의 방편이 된다는 식으로 눈가림할 수 있어야 한다.”

“아바마마! 미래의 주역인 아이들을 잘 기른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는 보육 쪽이 일자리를 늘리기 가장 쉽습니다. 보육교사들의 근무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고 지금의 두 배를 고용하면 어떻겠습니까?”

“오! 저는 찬성이에요.”

혜영의 동의를 얻은 다음 이민호가 승인했다. 산모들의 육아 지원을 총리부에서 직접 관할하기도 했고, 정부 예산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분야가 복지와 보건,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에서 이 분야를 다 합하면 50퍼센트 비율을 차지하는데도 불구하고 OECD 국가들 중에서 최하위였다.

“그게 좋겠다. 말 안 듣고 하루 종일 빽빽 우는 애들을 자기 아이만큼 정성껏 돌봐주길 바라는 것도 사실 무리야. 아이들이 보육원이나 놀이방에서 하루 8, 9시간씩 지내는데 보육교사들은 교대로 2부제 수업을 하겠구나.”

이민호도 한국에서 살 때 학생들이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수업을 받는 2부제 수업은 말로만 들었다. 그러나 고산국은 학생이 아니라 교사들이 2부제로 근무하게 됐다.

내년부터는 유아원과 놀이방 등에서 일하는 보육교사들만 교대 근무하겠지만 나중에는 초등학교로 확대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남들이 안 볼 때 보육교사가 아이들을 학대하는 일이 없도록 2인 이상이 근무하도록 규정을 새로 만들었다. 여기에 혜영의 의견을 수용해 유아의 연령이 낮을수록 현재보다 더 많은 비율로 보육교사를 배정하기로 했다.

“자동차 산업처럼 전후방에 연쇄효과를 일으키는 산업을 크게 일으키는 것도 일자리 마련을 위한 아주 좋은 방법이다.”

“그렇습니다, 아바마마. 자동차 생산 공장과 판매점, 수리소뿐만 아니라 도로 건설 현장과 도로변 휴게소에 많은 인원을 고용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자동차 수요가 늘어날수록 고용효과도 더욱 커질 것입니다.”

“언젠가 한계가 오겠지. 그만한 게 또 있을지 모르겠다.”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제철산업과 각종 서비스업 등 전후방 산업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일자리가 크게 늘어났다. 차량정비소가 곳곳에 세워져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과학기술 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 부품공장들이 신제품 개발을 주도하면서 기술개발이 탄력을 받았다. 이제는 정부에서 자금과 기술을 지원하지 않더라도 민간 기업들이 신기술을 개발할 정도였다.

그리고 자동차 산업과 함께 어업과 운송업도 크게 발전했다. 물론 외부 유출을 우려해 엔진 등록제를 실시했으나 예전보다 어선이나 화물선에 엔진을 장착하는 것이 훨씬 쉬워졌다. 이제는 고산국 어선은 물론 유구국 상선들도 범선과 외륜선 시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정부와 해군의 감시망을 피해 승용차가 유럽으로 밀수출될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유럽의 기술 수준에서 디젤 엔진은 쉽게 복제할 수 없었다.

제트 엔진 종류는 더 낮은 기술 수준에서 보다 쉽게 복제가 가능했지만 군용기와 군함에서만 사용해 유출 가능성을 줄였다. 1946년에 영국이 패전국 독일에서 전리품으로 획득한 제트엔진을 소련에 선물하고 겨우 몇 년 뒤인 6.25때 한반도 북부에 미그 15기가 날아다녔을 정도로 제트 엔진은 복제가 쉬운 편이었다.

“전하! 농업과 건설, 공업 분야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어요. 이제부터는 예술 분야를 강화하는 게 어때요?”

“그게 좋겠소, 총리. 음악과 미술을 융성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가로수를 심어 가꾸고 관상어를 기르는 취미를 권장하는 것도 백성들의 삶의 수준 향상을 위해 좋을 것 같소. 국가가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 끝없이 고민해야 한다오.”

고산국에서는 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한국처럼 남북통일이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같은 국가목표를 백성들에게 제시하지도 않았다. 국가목표를 이루기 위해 백성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해가 갈수록 농업 종사자의 비중이 줄어들고 도시가 생활의 중심이 되고 있어요. 도시를 어떻게 가꿔야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해요.”

“좋은 말씀인데 뭔가 생각이 있소?”

“제가 직접 고민하는 것보다는 괜찮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추천하라고 평소에 말씀하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혜영이 호위에게 손짓하자 국무회의실 문이 열리고, 총리 혜영이 추천했다는 도시공학 전공자가 들어왔다. 30대 후반의 비교적 젊은 학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이민호가 예전에 대학 학부에 흔히 개설된 건축학과와 토목학과 외에 대학원에 도시공학 전공을 개설해두었더니 교수들이 알아서 적당한 커리큘럼을 짰었다. 공학 외에도 자연과학과 몇 가지 인문학을 더해 도시공학이라는 특이한 학문이 만들어졌다.

“먼저 전하께서 도시를 어떻게 규정하시는지, 어떤 기능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먼저 교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고 백성들의 경제생활에 효율적인 도시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도시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삶의 여유에 중점을 둘 것인가에 따라 도시 설계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효율적이면서도 인간의 삶에 여유를 줄 만한 도시 설계는 없을까? 백성들이 건설공사에는 아주 진저리가 났으니까 도시를 덜 고치고 말이야.”

“선택과 집중의 문제입니다, 전하. 그러나 도시를 도시답게 만드는 것은 건물과 자동차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명백합니다.”

“오호! 계속 설명해보게.”

건국 직후부터 도시라면 널찍한 도로를 중심으로 큰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공간이라는 개념이 강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차와 기관차에 이어 자동차가 도로를 누볐고, 이민호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북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도시 중심가에 자동차가 다니지 않았다. 현대 서울에도 차가 다니지 못하는 보행자 전용 거리가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은 자동차가 적어서 큰 문제가 없지만 언젠가 도로가 미어터질 정도로 차량이 많아질 경우 공해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다. 도시의 매연은 노인들의 수명과 어린이들의 건강을 갉아먹는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 시대 사람들이 매연과 공해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이민호는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다. 지금도 백성들은 공장과 축산단지에서 오폐수를 배출하지 못하도록 정부에서 강력히 규제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다.

“도시의 광장이나 길가에 앉아 쉬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거리를 향해 앉아 있습니다. 건물이나 자동차가 아니라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 있는 거지요.”

“음. 길가 찻집의 의자들도 대부분 도로를 향해 있지.”

“그렇습니다, 전하. 사람들이 길가에 앉아 신문을 읽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만, 사실 신문은 길가에 앉아있기 위한 핑계로서의 소도구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물건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사이에 섞여들기 위해 깔끔한 전문매장보다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백화점이나 재래시장을 더욱 선호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일세.”

“저희 학과에서 몇 년째 왕도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명소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오래 된 고산족 유적지나 멋진 풍경이 펼쳐진 산과 바다가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중심가와 백화점 같은 곳을 가장 먼저 찾습니다.”

“맞아. 의미 있는 조사를 했군. 풍경이 좋은 휴양지보다 왕도에 훨씬 많은 관광객이 몰리지. 사람이 몰려있는 것 자체가 관광자원이야.”

예전에 이민호가 파리, 런던, 뉴욕 등 관광객들이 몰리는 도시 리스트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도시를 방문한 관광객이 그 나라를 방문한 외국 관광객의 대부분이었다. 어느 외국에 처음 간 관광객이라면 당연히 그 나라 수도를 관광 코스에서 빠뜨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방문지는 화려하고 깔끔한 고궁이 아니라, 보기에 따라 불량식품이라 부를 만한 전통 먹거리를 쉽게 사먹을 수 있는 허름한 야시장이었다. 고궁이나 박물관처럼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관광지는 사진 몇 장으로 남을 뿐, 소중한 추억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에서 생겼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려는 강한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야 안심이 되니까요. 현실이 이런데 사람들이 몰려 사는 도시의 공간을 사람이 아닌 건물과 자동차에 내줘서야 되겠습니까?”

“논리의 비약이 심한 듯하나, 도시가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라는 관념만은 확실히 동의하겠네. 그런데 어떻게 바꿔야 할까? 새로운 도시를 만들 때도 참작해야겠어.”

도시공학 교수가 미리 준비한 인쇄물을 꺼내 이민호와 국무회의 참석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나중에 혜영에게 물어보니까 이 교수가 건축 관련 전문 잡지에 도시의 발전 방향을 주제로 꾸준히 기고했다고 한다.

“가장 먼저, 왕궁 앞 주작대로를 왕실 차량과 비상차량 외에는 차가 다니지 않는 광장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광장 중앙에 커다란 분수대를 만들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멋진 풍경이 될 것입니다. 분수대에는 전하의 동상을 중심으로 총리님과 총함장님, 대원수님을 비롯한 여러 개국공신들의 동상을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음. 예전에는 생각만 그렇게 했었는데 이번에는 과감히 시도해봐야겠어. 그런데 내가 백마를 타고 있는 동상만은 제발 세우지 말아주게.”

“예. 전하께서는 바다를 잘 이용해 나라를 개창한 개조이시니 전하의 동상 주변에 군함과 상선을 조각해야겠습니다.”

“아니, 제발 내 동상은 세우지 말라고.”

“쑥스러워하지 마세요, 전하. 동상은 고산국의 태조이신 전하의 권리이자 의무예요.”

이민호의 희망은 혜영의 제지에 의해 무산됐다. 도시공학 교수가 피식 웃더니 설명을 계속했다. 어느 시대나 나라를 불문하고 남편이 공처가가 아닌 경우가 더 드물었다.

============================ 작품 후기 ============================

염려해주신 덕택에 몸은 좀 나아졌습니다. 얼른 연재를 마치고 좀 쉬어야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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