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24화 (873/1,000)

00924  101. 1624년  =========================================================================

1624년 5월에 네덜란드의 서인도회사 함대가 브라질의 수도 바히아, 정식 명칭 살바도르 다 바히아를 함락시켰다. 함대가 지난해 말에 출발하기 전부터 정보가 꾸준히 외부로 새어나갔고 중간기착지인 베르데 만에서도 목표를 밝혔으나 에스파냐는 어떠한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네덜란드 함대가 마음 놓고 바히아를 공격할 기회를 내주었다.

고립된 살바도르의 총독이 농민과 흑인노예 3천 명을 징집하고 도시 방어에 임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 충성심이 전혀 없는 군대는 네덜란드 함대의 포격에 방어를 포기하고 도시 주변으로 도주했다. 네덜란드 함대 35척 중에서 4척이 전리품을 가득 싣고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정보는 여기까지 들어왔습니다, 전하.”

“수고했다, 정보참모.”

이민호는 이번 네덜란드의 브라질 침공을 심각한 사태로 파악하고 군 최고지휘부와 참모본부 간부들을 소집했다. 참모본부에서는 바히아 점령으로 전쟁이 끝났다고 판단했다. 유럽에 병력 대부분을 출병시킨 에스파냐가 브라질을 수복하기 위해 병력과 함대를 보내기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총함장께서는 이번 사태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보십니까?”

노구를 이끌고 참석한 이순신이 눈을 반짝였다. 칠순이 훨씬 넘은 이순신은 체력은 예전만 못했지만 여전히 지혜로웠다.

“네덜란드가 초반 전술 목표는 일단 달성했습니다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에스파냐 출신 총독에 의해 갑자기 징집된 포르투갈 농민들의 전의가 낮았기에 초반에 네덜란드가 도시를 함락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도시 바깥은 사정이 전혀 다를 것 같습니다.”

“총함장께서는 포르투갈 농민들이 항복하고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포르투갈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만리 밖의 새로운 땅에 정착했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라 생존을 위해 끝내 침략자를 몰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전쟁터는 도시가 아니라 밀림입니다. 절반도 안 되는 농민군이라지만 그들이 우세할 것입니다.”

“총함장님의 예상이 맞는다면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양상과 비슷하게 전개되겠군요. 네덜란드 침공군이 땅에서는 의병, 바다에서는 해군에게 시달릴 것 같습니다.”

참모본부 요원들은 끝내 수긍하지 않았고, 전쟁은 이순신과 이민호가 예상한 것과 반대로 흘러갔다. 바히아를 점령한 네덜란드군이 성벽과 해자를 건설해 도시방어를 강화하고 흑인 노예들을 해방을 미끼로 유인해 병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브라질 전체가 네덜란드에게 점령될 것 같았다.

그러나 주교 마르코스 테이세이라가 이끈 농민군이 전쟁을 역전시켰다. 바히아 외곽에 작은 요새를 세운 다음 네덜란드군을 숲으로 유인해 꾸준히 유격전을 펼쳤다. 네덜란드에서 임명한 지상군 사령관들이 차례로 전사하고, 결국 다음해에 포르투갈에 의해 바히아가 수복된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크리스.”

“의전이 참으로 웅장하게 진행되더군. 고마워. 사진은 잘 찍혔겠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가 고산국 왕도를 방문했다. 고산국에서 구입한 4천 톤급 여객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넌 크리스티안은 먼저 베네수엘라에 들러 사탕수수 밭을 경작하는 덴마크 농민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새강릉에서 전세 여객기를 타고 고북 공항에 도착했다.

고산국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외국 국가원수를 항구가 아닌 공항에서 영접하는 기록을 세웠다. 외국 국가원수나 귀빈을 공항 또는 항구에서 영접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얼마 전부터 세자 또는 고북 시장으로 정해져 있어서, 세자 개똥이가 의장대와 군악대를 이끌고 장엄한 환영식을 연출했다.

국왕인 이민호는 왕궁 남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승용차를 타고 도착한 덴마크 국왕 일행을 맞아들였다. 공식 영접 절차가 끝나고 크리스티안 4세를 알현실로 안내했다.

“물론이지. 실물 크기 그대로 인화해서 커다란 액자에 담아줄게.”

“사진에서 수염을 좀 멋지게 다듬어주게. 그리고 새치가 많이 난 앞머리를 갈색으로 고쳐주면 더 좋겠어.”

“후후! 사진의 비밀을 알고 있었군. 사진작가에게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겠네.”

크리스티안을 수행하는 신하들 중에 음울하게 생긴 노인이 류트를 들고 따라다녔다. 존 다우랜드라는 잉글랜드 작곡가 겸 류트 연주자였는데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이 이 시대 유럽 군주나 영주들에게 유행했다.

“고산국 수도가 책에서 본 것보다 훨씬 크고, 뭐랄까, 괴상하다고 해야 하나? 시내 중심가의 몇몇 건물이 라인 강변의 높은 절벽 위에 세워진 요새 성곽 같더군. 군사용은 아닌 것 같던데 말이야.”

“아! 그냥 사무용 건물이나 여행자 숙소야. 길쭉길쭉한 고층 건물이 유럽인들 눈에 익숙하지 않다는 말은 자주 들었네. 실용성 위주로 설계해서 멋대가리가 없는 편이지.”

“길쭉하고 사면에 각이 진 것이 꽤나 인상적이었어. 석조건물이라 화재에 취약하지 않겠지?”

크리스티안이 고산국을 방문한 것은 오슬로에서 또 다시 발생한 대화재 때문이었다. 오슬로 도심 대부분이 목조건물로 이뤄진 탓에 매년 연례행사처럼 화재가 발생했고, 올해에는 전 시가지가 사흘 동안 맹렬하게 불타올라 재건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실제 역사에서는 크리스티안 4세가 오슬로를 포기하고 그 서쪽 아케르슈스 요새 쪽에 신도시를 건설해 크리스티아나라는 이름을 붙인다.

“석조건물이라고 화재로부터 안전한 것은 아니야. 다만 옆 건물로 쉽게 번지지 않는다는 거지.”

“그걸로 충분해. 이번 오슬로 대화재 때 희생자가 예년보다 많이 발생하지 않은 것은. 고산국 소방체계를 본 따서 화재진압보다는 인명구조와 화재확산 방지에 노력을 기울인 덕택이야.”

한참 전에 이민호가 몇 차례 도시 화재에 대해 크리스티안에게 경고했었다. 목조건물을 전부 석조건물로 바꾸지 않더라도 주택의 간격을 넓히고 소방수레가 들어갈 도로를 확보하라고 했지만 도시 구조가 바뀌는 데에는 장구한 세월이 필요했다.

“화재가 발생한 그 자리에 도시를 재건할 계획인가?”

“아니. 이제 지긋지긋해. 전에 불이 나서 무너진 건물을 채 재건하지도 전에 다시 불탄 경우도 있더군. 아예 새로운 땅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 싶어. 물론 석조건물만 지을 거야.”

크리스티안이 고산국을 방문한 첫 번째 이유였다. 이민호는 우방을 위해 건설 중장비와 건설자재를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

터다지기와 상하수도 등 기본적인 도시 기반시설을 고산국에서 갖춰주면 건물은 네덜란드 건축가들을 동원해 네덜란드 르네상스 양식으로 짓기로 했다. 북해와 발트 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북유럽의 설탕 무역을 주도하는 덴마크는 건국 이래 최고의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어서 도시 재건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말일세. 민호 자네가 말리고 나도 딱히 영토적 야심은 없지만 가만히 있기도 곤란해.”

“왜? 덴마크가 독일 내전에 개입하지 않는 이상 황제군이 덴마크를 공격할 가능성은 없지 않나?”

“내가 독일 내 신교도 영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고 있어서 말일세. 황제군이나 가톨릭 연맹 소속 군대가 전쟁을 핑계로 수시로 홀스타인에 들락거리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사실 지금까지 덴마크가 독일 내전에 참가하기 직전까지 간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때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참전은 하지 않았지만 유럽의 모든 나라들은 조만간 덴마크가 본격적으로 개입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자넨 독일의 영주이기도 하지만 본업은 덴마크 국왕이야. 아무리 봐도 독일 전체를 덴마크 한 나라가 감당하기 어려워.”

“이대로는 독일 전체가 로마가톨릭에 넘어갈 참이야. 그럼 홀스타인뿐만 아니라 덴마크도 영향권 내에 들어가겠지.”

“이해는 하겠지만 어려울 텐데.”

“그래서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스웨덴이 우리 덴마크를 도와주기로 했네. 신교도 국가들과 독일 내 신교도 영주들이 연합하면 황제군과 가톨릭 연맹의 연합군보다 훨씬 우세해.”

“문제는 세 나라가 바다 건너 외국이라는 거야. 응원군이 합해서 10만이라도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위치에 도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네.”

더욱 큰 문제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전투에서 신교도 군대가 형편없이 밀렸다는 사실에 있었다. 발렌슈타인이나 틸리 백작 같은 명장에게 도전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훈련이 부족한 신교도 군대는 에스파냐 테르시오와 상대하게 되는 순간 사기가 급전직하해 도주하기 바빴다.

“내 휘하에는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용병들이 있네. 돈 받고 싸우는 자들이라 농노 징집병들처럼 쉽게 도망가지 않아.”

“바로 그 용병이 문제라니까? 스웨덴의 동원 제도를 보고 좀 배워.”

“덴마크 인구가 적어서 성인 남성은 아껴두는 게 낫거든.”

네덜란드와 덴마크,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의 고민은 바로 여기, 인구가 적다는 데에 있었다. 17세기 중후반에 잉글랜드를 상대로 바다에서 세 차례나 맞붙은 네덜란드는 주로 독일인 용병들을 고용해 함대를 운영한다.

덴마크는 30년 전쟁에서 용병 군대 2만을 동원했다가 패전한 다음에는 온 국토를 유린당한다. 조만간 발트 해를 장악하게 되는 스웨덴도 한 번 밀린 다음부터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인구가 적은 나라는 국력에 한계가 있어서 단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재기하기 어렵다.

“그럼 북미처럼 성인 남성들을 예비군으로 조직하든지. 크게 잘못될까봐 걱정이야.”

“참고할게. 그래도 덴마크 영토가 침공당하면 고산국이 도와줘야 해.”

“조약이 유효한 한 덴마크 영토는 확실히 지켜주지.”

“역시! 고맙네, 친구!”

“하지만 자네와 내가 개인적인 동맹을 맺었지, 고산국과 덴마크가 국가 차원에서 동맹을 맺은 게 아냐. 그 차이를 알아? 크리스 자네가 재위하는 동안에는 괜찮지만 후대에도 제국의 분쟁에 개입했다간 자칫 슐레스비히-홀스타인뿐만 아니라 본토까지 잃게 될지도 몰라.”

“나도 장난이나 개인적 야심으로 참전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지금이 아니면 영토를 확장할 기회가 영원히 없을 테니까. 그래도 자네 덕택에 덴마크 전부를 거는 것보다는 안심하고 일을 시작할 수 있겠어.”

살짝살짝 들려오는 청량한 웃음소리를 향해 이민호가 고개를 돌렸다. 세자는 국왕들의 원탁에 함께 앉은 대신에 크리스티안 4세의 딸들을 위해 다른 왕자들이 대화상대로 나섰다.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여백작 소피 크리스티나, 같은 여백작 엘리사베트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우아하게 웃고 있었다. 둘은 1605년과 1606년생으로서 크리스티안 4세의 첫 번째 왕비 브란덴부르크의 안네 카테리네와의 사이에서 낳았다. 민희의 둘째 아들 석호와 민영의 첫째 아들 석진이 헤벌쭉 웃는 것이 덴마크 공주들에게 홀딱 반한 것 같았다.

“공주들은 왜 데려왔나?”

“당연히 신랑감을 찾으려고 동반했지. 고산국 말을 아주 잘해서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걸세. 소피는 문학, 엘리사베트는 음악에 소질이 있어서 그쪽을 공부하고 있네.”

크리스티안이 한참 동안 딸 자랑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민호가 보기에도 신분을 떠나 공주 둘 다 괜찮은 재원 같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유럽과 달리 고산국에서는 사촌 이내에 결혼이 불가능해. 자네 여동생이 내 아내잖아.”

“알고 있어. 그런데 그 기준이 법적 사촌이 아닌 혈통상 사촌이더군. 왕가라고 다른 건 아니겠지?”

“끙!”

역대 호위대장들이 낳은 자식들이라 그런지 석호와 석진은 매우 건장한 체구를 갖고 있었다. 석호는 전업 축구선수로서 중앙수비수이며 아직 나이가 어려서 교체선수로 활약했다. 대학교 2학년인 석진의 전공은 물리학이었다.

“포르투갈 귀족 가문과 혼사가 이어질지도 몰라.”

“상관없어. 고산국 같은 강대국 왕실이라면 여러 왕가들과 혼맥을 쌓는 것이 당연하겠지.”

“딸을 둘이나 먼 나라에 시집보내면 속이 꽤 쓰릴 텐데?”

“소피와 엘리사베트는 어렸을 때 병으로 죽을 뻔했는데 고산국 의사가 고쳐줬지. 그래서 둘은 어릴 적부터 고산국으로 시집가는 게 꿈이었다네. 신랑이 왕자가 아니더라도 공주들의 꿈을 이뤄주고 싶네.”

“알겠네. 그래도 혼인은 당사자들의 의사가 우선일세.”

이민호가 석호와 석진 왕자를 불렀다. 그러나 자꾸 공주들에게 눈이 돌아가는 둘을 보곤 묻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자네 의도가 성공했네. 하지만 고산국이 지켜주는 것은 덴마크 본토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게. 난 덴마크 국왕과 개인적인 동맹을 체결한 것일 뿐 신성 로마 제국의 홀스타인 공작은 모르는 사람이야. 물론 다른 사람에겐 달리 말하겠네.”

“혼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니까? 자네가 날 도울 일도 없을 거야.”

“남들은 절대 그렇게 보지 않을 테지.”

당사자들이 서로 좋아 죽겠다고 해서 혼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늦게 낳아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이가 장가간다고 해서 민영이 꽤나 섭섭하게 여겼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예비 며느리들이 고산국 문화에 이미 익숙해져서 따로 가르칠 것도 별로 없었다.

============================ 작품 후기 ============================

아직 살아는 있습니다.

하루에 한편 올리는 것은 당분간 무리일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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