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23화 (872/1,000)

00923  101. 1624년  =========================================================================

국왕이 교황청 대사를 만났다는 기사를 접한 개신교 목사와 장로들이 알현을 신청했다. 별다른 일이 없더라도 종교들 사이에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자체적으로 대표 100여 명을 뽑으라고 한 다음 간담회를 개최했다. 불교와 이슬람교에서는 따로 알현을 신청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분들이 많이 늘어났다고 들었는데 과연 사실이구려. 오랜 공부 끝에 새로 목사가 되신 분들께 축하 말씀을 드리오.”

“감사합니다, 전하. 하온데 요즘 교세 확장이 벽에 부딪친 것 같아 고민입니다.”

“그렇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봅시다.”

이민호가 지난해 국세조사 때 통계를 낸 종교 관련 자료를 살폈다. 성인 중에 천주교가 13퍼센트, 칼뱅파와 루터파로 양분된 개신교가 합해서 11퍼센트, 불교는 여러 종파를 합해서 26퍼센트, 유교 15퍼센트, 이슬람이 2퍼센트, 각종 토속신앙 4퍼센트 등으로 골고루 분포하고 있었다. 유교를 빼더라도 종교 인구 비율이 현대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이슬람교는 이민호가 걱정했던 것보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사막이 흔한 중동지역에서 직접 전해진 것이 아니라 습도가 높은 동남아시아 지역을 거쳐 들어온 이슬람이라 여성의 복장부터 훨씬 개방적이었다. 그리고 고산국에서는 경전에서 비롯된 교리와 지역마다 상이한 관습을 확실히 구별하므로 명예살인 같은 악습도 없었다.

“고산국 백성의 4분의 3이 종교생활을 영위하고 있소. 이미 신앙을 가진 사람이거나 종교에 반발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포교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전하. 복음을 널리 전파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저희들은 이단을 타도하고 무신론자들을 구원해줄 도덕적 의무가 있습니다.”

“잠깐!”

이민호가 칼뱅파 목사의 발언을 중지시켰다. 간담회에 참석한 다른 목사들이 웅성거리고, 기자들이 조명을 터뜨리며 사진을 촬영했다. 그러나 방금 발언한 목사는 마치 순교할 작정이라도 했는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어느 분야에나 이렇게 고지식한 척해서 소속 집단에 민폐를 끼치는 자들이 있었다.

“같은 종파 내에서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오. 충분히 이해하겠소. 그러나 공개된 자리에서 다른 종교를 무시하거나 무신론자를 비난할 경우 종파 전체가 어떤 처분을 받는지 알고 있지 않소?”

“하지만 방금 제 발언은 거짓 하나 없는 진실입니다.”

“칼뱅파를 이단이라 칭한 역대 교황들의 발언도 진실을 담았을 것이오. 그대와는 더 이상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군. 경호원! 현행범으로 체포해!”

경호원들에 의해 목사가 질질 끌려 나갔다. 기자들이 그 장면을 고스란히 사진에 담았으니 내일 아침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될 것이다. 목사의 발언 내용이 기사에 그대로 실린다면 칼뱅파에서 종교적 탄압이라고 주장할 가능성도 없었다.

이 시대에 타 종교에 포용력을 가지라고 목사나 성직자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다. 현대 한국에서 천주교와 불교 사제들이 상대방의 종교 축제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거나, 여기에 개신교까지 포함돼 종교인들이 대화를 하는 것을 이민호가 봤다 해도 고산국에서 같은 장면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적대감을 표출하는 자를 국가 차원에서 용납할 수는 없었다.

“문제를 일으킨 종파에 대한 처분은 어느 종파에게나 동일하오. 성직자나 개신교 목사가 예배를 비롯한 공개석상에서 타 종파를 무시하거나 비난할 경우 1년 동안 교회 밖에서 포교를 할 수 없소. 칼뱅파 교회에 대한 이 처분은 사흘 뒤부터 적용될 것이오.”

목사와 장로들이 일제히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반발했다가는 더 큰 제약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참석자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처분은 타 종파 신도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시키고 전쟁까지 하는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관대한 편이었다.

그리고 선교를 위한 재정 지원은 당장 끊기겠지만 교회 운영비는 국가예산으로 지원되기에 목사들 입장에서는 국왕 또는 정부와 충돌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았다. 특히 고산국에 과반을 넘는 종교가 없기에 교권에 대한 왕권의 확고한 우위를 담보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성직 임명권이 교황에서 황제 같은 세속 군주들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시간이 갈수록 토지 소유권이 교회에 집중됐기 때문이었다. 종교 혼자 아무리 고고한 척해봤자 토지를 비롯한 경제적 토대 자체가 속세의 것이었으므로 종교인들도 속세에서 아귀다툼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근대 이후 웬만한 국가에서는 정교분리가 법제화된다.

“예전에 유럽인 목사들만 계셨을 때는 개신교가 건전하고 합리적인 종파라고 여겼소. 그런데 국내에서 안수를 받은 목사들이 많아지면서, 유럽 목사들보다 더 많은 기간 교육을 받았는데도 점점 교조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소. 유럽처럼 국내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소? 결코 용납할 수 없소.”

“저희 유럽 출신 목사들이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전하! 저희들을 벌해주소서!”

“노 목사들은 그만 일어나시오. 종교에 간섭하려는 발언이 아니니 그저 참고만 하시오.”

종교인들에게 고산국이라는 블루워터가 사라지고 이제부터 무한경쟁의 시대가 막을 열었다. 법률을 준수하고 다른 종교를 인정하면서도 교세를 확장하는 것은 종교인들이 할 일이었다.

국왕을 비롯한 정부는 심판 역할을 맡으면 된다. 특정 종교를 가진 후계자가 즉위한다 해도 소속 종교에 특혜를 줄 것이라는 기대를 접는 대신, 차대 국왕이 어느 종교를 믿더라도 다른 종교에 대한 탄압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줄 수 있어야 했다.

“자! 다른 분이 발언해보시오.”

이민호가 발언을 권했으나 이런 분위기에서 섣불리 나설 목사가 없었다. 고산국처럼 확고한 성문법 질서를 갖춘 나라에서 종교인들은 법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종교교리는 신의 법이니 인간의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종교적 근본주의가 고산국에서는 설 자리가 없었다.

대신 고산국에서 어느 종교에도 특권을 부여하지 않았기에 모든 종파가 종교의 자유를 확실히 누릴 수 있었다. 괜히 신도 숫자를 바탕으로 특정 종파가 특권을 확대하려고 시도했다가는 정치적, 법적 제재를 받아 교세가 위축될 뿐이었다.

“전하. 저희 개신교도들은 신에게 복종하듯이 국왕전하께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개신교도들의 충성심은 익히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하온데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므로 신에게 경배를 드리고, 세상의 진리를 탐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산국에서는 사철 날씨가 좋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백성들이 생업과 종교생활 외에 외부활동에 소모하는 시간이 지나치게 많은 것 같습니다. 체육행사나 각종 문화행사에 대한 정부 지원을 줄여주신다면 신도들이 경건한 신앙생활에 더욱 정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성들이 건강하고 즐거워야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이오. 교직자들이 보기에 백성들이 운동이나 공연 관람을 하는 것이 전혀 무의미해 보이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소.”

“체육은 백성들의 건강 증진을 위한 국가시책으로 합당하겠으나 영화나 대중음악은 신도들과 젊은이들의 건전한 심리에 크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민호가 예전에 살았던 대한민국에서 학부모나 종교인들의 생각은 비슷했다. 아이가 만화나 소설, 대중음악에 심취하거나 게임에 몰입하지 않게 되면 그 시간에 공부를 더 많이 하겠지, 혹은 교회에 더 자주 나오겠지 하는 헛된 기대를 품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문화 일부를 유해하다고 억압해 결국 사라진다 해도 아이가 공부 시간을 늘리거나 교회에 다닐 리가 없고 새로운 유흥거리를 찾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학부모와 종교인은 당장 눈에 띄는 대중문화를 원흉으로 지목해 제물로 삼으려 한다.

젊은이들이 즐기는 스포츠나 대중문화에 종교인들이 우호적이었던 적은 유럽에서 목사들에 의해 창단된 몇몇 축구 클럽 외에는 거의 없었다. 스포츠와 대중문화는 종교의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전하! 영화를 개봉하거나 가수가 신곡을 발표하기 전에 사회 각계의 원로들로 구성된 위원회에 심의를 맡겨서 청년들이 나쁜 사상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그 위원회에 종교인이 한두 명쯤 들어가겠지요. 다른 종교나 반종교적인 사상을 합법적으로 제거하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것 같소.”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목사만 심의위원이 되란 법은 없소. 스님이나 이맘을 심의위원으로 임명하면 어떻게 될 것 같소?”

“그건 절대 안 됩니다! 헙!”

“뭐, 그런 거지요.”

문화계에 대한 심의위원회 설치 건의는 없는 일로 했다. 다른 종파 종교인이 심의위원이 됐을 때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흠! 몇몇 교회에서 학생들을 교회에 가둬두려고 한다는 탄원서를 받았소. 주일예배와 수요예배, 금요예배에 새벽기도는 물론 방과 후 성경공부라니. 신도들과 어린 학생들을 일주일 내내 교회에 붙잡아두고 도대체 뭘 가르치려는 게요?”

“전하! 그런 불법을 저지르는 교회는 극소수일 것입니다. 혹은 새로이 신앙을 받아들인 교인들을 집중 교육하는 기간일 것입니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 개인 시간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요즘 티베트 불교가 몽골에 퍼지면서 출가자 수가 급증하고 있소. 종교인들에게 이상적일지 몰라도 사회 존속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요.”

원래 역사에서 청나라가 몽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티베트 불교를 장려하고, 몽골인의 장남을 라마승으로 강제 출가시킨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이민호는 그럴 의도가 없었으므로 현재 몽골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겔룩파와 다른 종파의 사원을 건립해주는 정도에 그쳤다.

“개신교는 로마가톨릭의 교황권과 사제주의에 대한 반성에 바탕을 둔 현실적인 종교이므로 결코 신정정치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낡은 종교인 불교와 비교하시면 섭섭합니다.”

“티베트 불교는 몽골인들 사이에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융성했던 이후에 받아들인 새로운 종교요. 낡다니요. 기독교도 신약 기준으로 천육백 년이나 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 않소?”

“험! 험! 그렇습니다. 헌데 인도에서 선교활동 중인 예수회 신부가 티베트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신부 안토니오 데 안드라데가 현재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티베트로 향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티베트가 고산국의 속국인 토르구트 족의 지배 아래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고아 부왕청을 경유해 고산국 예조에 여행신청을 했었다.

예조에서는 고산국왕 이민호 이름으로 신부에게 여행허가서 및 몇 가지 언어로 보호요청서를 발급했다. 이민호가 원하지는 않지만 경우에 따라 티베트가 고산국 영토임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미래에 활용될 수도 있기에 이번 일에 최대한 협조했다. 원래 역사에서 안토니오 신부는 티베트를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이름을 올린다.

“로마가톨릭에서 하는 것은 다 따라하고 싶다는 게요?”

“저희들이 따라쟁이는 아니지만 뭔가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좋소. 개신교에서도 티베트에 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가시오. 단, 티베트가 신정일치 국가이니 티베트인을 대상으로 선교를 할 수는 없소.”

“약속할 수 있습니다. 이왕이면 예수회 신부보다 저희 루터파 목사를 먼저 티베트에 도착시키고 싶습니다.”

“저희 칼뱅파도 그렇습니다. 저희들의 소박한 청원을 들어 주소서, 전하.”

이민호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웃은 다음 청원을 수락했다. 고산국 영토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유럽에서 전쟁을 할 정도로 두 종파가 경쟁관계인 것만은 확실했다. 현실을 인정해줘야 했다.

그래서 몇몇 목사들과 장로들을 위해 전세기를 내주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신부들이 항의해 그들 중에서 몇을 골라 비행기에 태워주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티베트에서 불교경전을 구하려는 스님들이 몇 가세했다.

며칠 후 전세기는 라싸 인근 호반에 건설된 임시 활주로에 안전하게 내려앉았다. 티베트를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이라는 타이틀도 고산국 교회에서 오랫동안 재직한 독일과 네덜란드 출신 목사들, 그리고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신부들이 공동으로 차지했다. 라싸를 방문한 안토니오 신부는 며칠 먼저 도착한 유럽인 목사와 신부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아바마마! 몇 달씩 걸어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은 안토니오 신부가 불쌍합니다.”

“뭘? 비행기와 철도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험한 길을 걸어간 신부가 잘못이지. 우리한테 제대로 협조해달라고 요청했어야지.”

히말라야 등정을 계속하는 개똥이 입장에서는 안토니오 신부의 고행을 충분히 공감하겠지만 이민호는 그저 코웃음만 쳤다. 교통수단이 발전하면서 신비의 세계고 오지고 뭐고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이번 사건은 유럽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애초에 유럽 국가들이 지리상의 발견에 뒤이은 영토 주장을 할 수 없게 만들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고, 목사와 신부들이 나서준 덕택에 훌륭하게 목적을 달성했다.

============================ 작품 후기 ============================

종교문제는 따분하더라도 중요한 분야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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