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18화 (867/1,000)

00918  100. 세인트 킷츠 앤드 니비스  =========================================================================

“왕자들은 왕도와 새강릉 사이에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 것 같으냐?”

두 도시는 기후도 비슷하고 바다와 강을 낀 지리적 위치도 비슷했다. 경제적으로 몹시 풍요로우며 조선 혈통이 과반수를 차지하면서도 다른 여러 인종이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새강릉에는 요새나 성곽 같은 방어시설이 전무합니다.”

“새강릉에 처음 왔으면서도 개똥이가 금방 파악했구나.”

“사실 참모본부에서 여러 번 지적되고 꾸준히 토의됐기에 이미 상식입니다, 아바마마.”

“그렇구나. 그럼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겠지?”

“예. 새강릉은 넓은 대서양을 끼고 있으므로 해군과 항공대 위주로 외적을 방어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 저와 참모본부의 결론입니다.”

이민호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왕도 고북은 건국 이후 두 번째 정착지이며 군사력이 미약할 때 건설을 시작해 아리수 강 하구 외에도 이곳저곳에 방어시설이 축조돼 있었다. 그러나 새강릉을 건설할 때는 이미 대서양 함대, 당시에는 대서양 전단이 바다를 지켜주고 있었으므로 요새와 성곽의 필요성이 적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새강릉을 확장할 계획을 세우면서 방어시설을 아예 만들지 않기로 결정했다.

세계 어느 나라든 바닷가에 자리 잡은 도시들은 해안 성곽에 방어를 의존했다. 유럽과 중동, 아시아 등 현대에 남은 유적지들을 얼핏 살펴보면 어느 한 시대에 축조된 것 같지만 오랜 세월 몇 번이나 새로 짓거나 개축, 증축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나중에 함포의 위력이 충분히 강해진 다음에는 무용지물로 전락해 버려진다.

그러나 쥐똥이는 생각이 달랐다.

“유지비용으로 따지면 육군보다 해군과 항공대가 훨씬 비쌉니다. 그리고 적이 멕시코 국경이나 북극을 통해 지상으로 접근할 수 있으므로 도시에 대한 기본적인 방어시설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쓸 일이 없더라도 시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개똥이는 이견이 있느냐?”

“예, 아바마마. 육군 위주로 방어 전략을 수립한다면 지금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이 해안 방어에 필요합니다. 병력유지비야 해군과 항공대 유지비보다 적게 든다 하더라도 군인이란 성인 남성, 곧 국가 경제력의 바탕이 되는 노동력의 핵심입니다. 이들이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보람에 사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생산 현장에서 일하거나 연구소에서 미래를 열어가는 편이 국가적으로 훨씬 효율적이라 생각합니다.”

쥐똥이가 놀라면서 개똥이에게 존경이 가득 담긴 시선을 보냈다. 멀리 샛강 위로 길게 이어진 포우하탄 대교에 화물차와 마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자전거 길도 마련돼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오갔다.

준공 당시와 달라진 점이라면 화물차를 비롯한 자동차가 마차보다 많아진 점이었다. 조만간 최소한 도시 지역에서는 마차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됐다. 얼마 전까지 마차를 몰던 포우하탄 원주민이 어렵게 운전면허를 따서 화물차 운전대를 잡듯이, 고산국은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시야가 저보다 훨씬 넓으십니다.”

“사관학교에서 너도 이미 배웠겠지만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다 보니까 군사 전략이 국가 전략에 전적으로 종속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 너도 몇 달만 근무하면, 아니 관점만 조금 바꾸면 시야가 훨씬 넓어질 거야.”

어렸을 때는 동생들한테 못 된 장난을 자주 치던 개똥이가 커서는 제법 형님 구실을 했다. 다시 혹한지에서의 생존법을 논하려는 쥐똥이에게 이민호가 물었다.

“요즘 새강릉 시의회 의원들은 어떠냐?”

“개차반이 거의 절반이었던 예전과 달리 제법 괜찮은 사람들이 뽑히고 있습니다. 아무리 게으른 의원이라도 최소한의 의무는 수행합니다.”

“흐음. 그래? 재미없게 됐군.”

“사법당국에 의한 꾸준한 감시와 숙정보다 최근 도입된 주민소환제가 훨씬 효과가 큰 것 같습니다. 시의회 설립 이전에 미리 준비된 제도였다면 처음부터 도입하지 그러셨습니까?”

“그래서야 시민들이 투표의 중요성을 모르니까.”

“시민들이 한 표의 소중함을 확실히 깨달은 것 같습니다.”

시의원이 비리를 저지르거나 정책 심의를 잘못하는 경우 주민소환제에 의해 언제든지 파면될 수 있었다. 그럼 시의원을 다시 뽑아야 하는데, 일반 선거와 달리 보궐 선거에서는 의무투표제가 적용됐다. 주민들은 자주 투표하기 귀찮아서라도 처음부터 후보의 사람 됨됨이나 공약을 자세히 살핀 다음 제대로 선택하게 됐다.

“쥐똥이 너는 새로운 수도가 어디로 결정되면 좋겠느냐?”

“호주가 안전하겠지만 남반구에 치우쳐 있고, 북미가 가장 풍요로운 땅 같습니다. 태평양이 중요하면 북미 서해안에, 대서양이 중요하면 국가의 중심에서 한참 벗어나더라도 동해안에 수도를 건설하면 좋겠습니다.”

“너의 선택을 물었다.”

“역시 가장 활발하게 성장하는 곳은 새강릉과 새원산을 비롯한 북미 동해안 아니겠습니까? 강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왕도에 적합한 대도시가 들어설 만한 곳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미 내수 경제가 훨씬 비중이 크다. 무역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가난한 유럽과의 무역에 경기가 좌우되는 단계는 지났어.”

개똥이가 흥미진진하다는 눈길로 대화를 지켜봤다. 이민호가 쥐똥이를 시험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바마마께서는 누에바 에스파냐를 어떻게든 도모하실 생각이시군요. 그럼 이번 재판을 통해 명분을 쌓은 다음 잉글랜드와 전쟁을 할 거라는 유럽 외교관들이나 신문기자들의 예상은 죄다 빗나간 것 같습니다.”

“너도 제법이구나. 그냥 새순천 근처 내륙지방이 새 수도로 적당하겠다고 대답할 것이지 말이야.”

“가족끼리 허심탄회하게 토론을 하는 것이 우리 왕가의 규칙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새순천 근처를 수도로 정하기에는 바다 건너 누에바 에스파냐가 확실히 거슬립니다.”

북미 북부가 아닌 서부와 동부, 그리고 남부를 차례로 개발한 것에는 각각 목적이 있었다. 북부 캐나다 지역은 현재 소빙기라는 이유도 있었고, 외국이 점령하려고 나설 이유도 없기에 개발 순위를 미뤄두었다.

북미 서해안 남부, 특히 지진이 상대적으로 적게 발생하는 새목포를 외항으로 두고 약간 내륙에 수도를 건설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죄다 사막 지역이라 물을 구하기 어려웠다. 리오그란데 강을 수원으로 이용하는 대안이 있었지만 국경에 너무 가까웠다.

어디를 새로운 수도로 결정하더라도 멕시코를 얻는 편이 좋았다. 에스파냐가 유럽 전쟁에 몰두하면서 재정이 이미 파탄 나는 바람에 매입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그렇다. 그래서 나는 잉글랜드가 유럽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생각이다. 에스파냐 중앙정부의 자금줄을 말려야 하니까.”

“전쟁을 한다면 멕시코를 간단히 얻을 수 있는데도 돈으로 해결하려 하시는군요. 하긴, 외국에 원한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요. 유럽인들이 고산국을 따뜻한 나라라고 부르던데, 이는 기후에 국한된 별명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도 들었는데 우리가 손해 볼 것 없는 좋은 평가다. 가끔 우리의 강함을 드러내줘야겠지만 미래를 위해 가급적 전쟁을 피하는 것이 좋다. 비겁하다고 생각하느냐?”

“전혀 아닙니다. 국초부터 아바마마께서 경제와 외교를 이용해 챙길 만한 국익은 다 챙기셨으니까요. 화끈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불만이겠지만 말입니다.”

오랜만에 자식들과 공감대를 형성했다.

재판을 시작하고 일주일 동안 집중심리가 진행되면서 인종 청소로 기소된 피고들에 대한 심리가 모두 끝났다. 검사는 전원 사형을 구형했고 눈물로 선처를 호소하는 피고들의 최후 변론도 끝났다.

이번에는 특이한 복장을 한 노인이 증인석에 나타났다. 판결을 앞두고 산크리스토발 섬에서 백인들에게 죽음을 당한 이웃 섬 추장의 아버지가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한 것이다.

“신성한 재판정에서 발언할 기회를 주신 고산국 대추장님과 두 분 미녀님, 그리고 지혜롭고 공정하신 심판 추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충격적인 일을 겪으신 추장께 다시 한 번 위로의 말씀을 드리오.”

이제는 어떤 호칭을 들어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대서양 탐사전단 소속 통역관도 구태여 국왕전하라고 말을 바꾸지 않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칼리나고 원주민 대표들을 새강릉으로 초청해 며칠 관광을 시켜주었다. 그리고 고산국의 백성이 된 포우하탄 부족연맹의 대추장과 추장들을 만나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주었다. 자부심 강한 칼리나고 원주민들이었지만 학살과 문명 사이에서 보고 느낀 게 많은 듯했다.

“리아무이가 섬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사람들(karibna)은 큰 돛배를 타고 온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름진 땅을 내주고 이웃으로 평화롭게 살도록 허락했습니다. 곡식과 씨앗을 나눠주고 기르는 법을 가르쳐줬으며 그들이 배고플 때는 집에 초청해 음식도 나눠주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조상님들의 뼈를 보여주는 호의도 베풀었지요. 그러나 큰 돛배를 타고 온 자들은 리아무이가 섬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이웃 섬 대표들을 잔인하게 학살했습니다.”

학살사건이 발생한 다음 백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여러 섬에서 칼리나고와 타이노 원주민 전사들이 소집됐다. 그러나 이들이 배를 타고 공격 직전에 고산국 탐사전단이 도착해 복수를 고산국에 맡겨달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직접 복수를 하고 싶었던 원주민들은 며칠간의 논란 끝에 탐사단 대원들을 믿고 기다려주기로 결정했다.

기다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웬만한 섬만큼 거대한 배 여러 척이 나타나더니 다음 날 아침 천둥이 치고 작은 화산들이 불을 뿜었다. 그리고 거대한 새들이 하늘에 나타나 벼락 치는 소리를 이어갔다. 탐사전단 지휘관이 약속한 대로 요새는 불타고 백인 정착민들은 모조리 잡혀갔다. 충격을 받은 것은 외교관과 관전 무관들뿐만이 아니었다.

“큰 돛배를 타고 온 사람들은 저희들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들에게 복수해달라고, 죽음을 선고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역이 진행되면서 피고들과 방청객들이 웅성거렸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한 이후 흐느끼며 울던 피고 가족들이 특히 반색했다.

“비록 저들이 비겁하게 야습으로 제 아들과 이웃 섬 추장들을 죽였다지만 집과 함께 시체를 불태운 덕택에 다행히 뼈를 온전히 추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랬고 우리들이 그렇듯 죽은 자들은 산 자들과 함께 리아무이가 섬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섬을 빼앗긴 것도, 죽임을 당한 것도 아닙니다.”

“음. 계속 발언하시오.”

“잔잔한 바다 위로 부드러운 미풍이 불다가도 어느 날 밤에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듯이, 청새치 떼를 범고래 떼가 쫓아 사냥하듯이, 섬에 박쥐 남자와 개구리 여자가 교대로 오듯이 모든 것은 자연의 섭리입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피해자였지만 전에는 우리가 타이노인들을 정복하고, 학살하고, 노예로 삼으면서 영역을 넓혀왔습니다. 그 전에는 타이노인들이 예전부터 살아왔던 섬 주민들에게 같은 짓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섭리를 완벽하게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친구인 고산국 전사들에 의해 복수가 저지된 순간, 이미 저들에게 복수할 마음을 잃었습니다.”

“그러셨구려. 나의 전사들이 섬에 사는 카리브나들의 생각을 모르고 감정을 상하게 해서 미안하게 됐소.”

사라져가는 북미 원주민 부족 추장의 안타까운 소회를 듣는 것 같아 거북했지만 칼리나고 추장이 매우 객관적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도 고산국 입장에서는 총으로 무장한 백인 정착민의 대열 앞으로 창을 든 원주민 전사들이 용감하게 돌격하다가 전멸하고 마는 그런 참혹한 결과만은 막아야 했다.

“이 거대한 마을에 도착한 이후 많은 것을 새로이 알게 됐습니다. 제 고향의 모든 섬사람들을 합한 것보다 수십 배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고산국 영역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합치면 백 명에 백 명에 백 명이 훨씬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떠서 강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돌다리가 무너지지 않으며, 말이라 불리는 큰 동물과 함께 사람들이 일을 하며, 집채보다 큰 수레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거대한 새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은 하늘을 나는 수레에 불과했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문명 차이가 있다 해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같은 인간들이오. 그대들도 언젠가 우리와 같은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오.”

“그렇습니다, 대추장. 큰 마을에 도착하고서 처음에 저는 조선족이 포우하탄족과 에이레족을 정복해서 노예로 삼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 종족이 싸운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하더군요. 포우하탄족이 사는 지역에 조선족이 도착하고, 연합을 맺은 이후에 머리색이 다양한 에이레족이 차례로 이주해왔다고 들었습니다.”

이민호가 노려보자 통역관이 찔끔했다. 고산국의 주류 민족이 조선 혈통인 것은 맞지만 현대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이민호에 의해 조선족이라는 단어는 금기에 가까웠다. 고산국 백성들이라 해서 본토 산맥에 사는 원주민들과 같은 이름인 고산족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 작품 후기 ============================

분량조절 실패로 여기서 일단 자릅니다.

이어서 카리브해 동쪽 소 안틸레스 제도 전체와 남미 북부 가이아나와 수리남, 아일랜드, 멕시코 등 영토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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