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17 100. 세인트 킷츠 앤드 니비스 =========================================================================
본격적인 재판은 전쟁포로들이 아닌 잉글랜드와 프랑스 정착민 성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열렸다. 이들이야 말로 원주민 인종 학살 사건의 진정한 공동 정범들이었다. 이 재판은 일주일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준비됐다.
피고들은 고산국 검사들이 제시한 두 가지 중에서 똑같은 것을 선택했다. 게임 이론은 이 시대에도 제대로 적용돼서 동료들의 살인행위를 가려주면서 사형을 택하는 대신 동료들의 행위 하나하나를 고자질하면서 징역 10년을 택했다. 인종 청소 행위에 대한 자세한 진실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이제는 범죄의 동기가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증인 바비는 원주민들이 유럽인 정착민들을 공격할 계획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진술하시오.”
“여러 섬에서 원주민들이 세인트 킷츠 섬에 몰려왔어요. 목적은 뻔한 것이 아닌가요?”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증인은 명확한 의미를 담아 진술해야 합니다.”
“원고측의 이의를 받아들입니다. 증인 바비는 원주민들이 모인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식인종들이 우릴 잡아먹으려 했다고요. 흑흑!”
바비(Barbie)는 원주민들의 공격 계획을 가장 먼저 정착민들에게 알리고 원주민들에게 선제공격하라고 선동한 중년 여성이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정착민들이 다급히 소집돼 야간 시력이 나쁜 백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을 상대로 야습을 감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바비의 현재 신분은 증인이었지만 재판 과정에서 언제든 기소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바비는 유럽 정착민들이 먼저 원주민들을 학살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잡아먹혔을 거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증인 바비는 칼리나고 원주민들이 산크리스토발 섬에 모인 것만으로도 공격 행위의 전조로 판단했습니다. 그 판단이 틀렸음을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한 백과사전을 통해 간단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검사가 국가기관에서 발행해 공신력이 높은 백과사전 내용을 읽었다. 고산국 대서양 탐사전단과 인류학자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카리브 해 도서지방 원주민들의 생태를 기록해왔다. 물론 이들도 처음에는 원주민들의 풍습에 대한 오해가 깊었지만, 교류가 지속될수록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리아무이가 섬과 그 주변 섬들에 거주하는 칼리나고 원주민들은 일 년에 두 번 의식을 치른다. 카리브 해에는 건기, 즉 박쥐 남자의 계절과 우기, 즉 개구리 여자의 계절이 있으며 계절이 바뀌는 달에 주변 여러 섬에서 출발한 대표자들이 리아무이가 섬에 모여 밤에 의식을 진행한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증인 바비가 오해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고 사료됩니다.”
“아니에요! 그들은 야만적인 식인종이에요.”
뚱뚱한 바비가 울부짖었다. 원주민들의 풍습을 이해하지 못한 백인 정착민들이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선제공격을 함으로써 오해를 풀 기회가 사라졌다.
“칼리나고 원주민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을 증인이 직접 확인했거나 증거나 있습니까?”
“그래요! 제가 원주민들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사람의 뼈가 그 야만인들의 집에 잔뜩 쌓여 있었어요. 당연히 사람을 잡아먹고 전리품으로 뼈를 쌓아뒀을 거여요.”
검사가 백과사전 해당 항목을 펼쳐서 증인에게 들이밀었다.
“혹시 이런 식으로 사람의 뼈를 차곡차곡 집안에 쌓아뒀습니까?”
“맞아요! 제가 본 것과 똑같아요.”
증인 바비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허름한 원주민의 오두막 안쪽에 사람의 뼈가 쌓여있는 사진을 본 방청객들이 식인종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에스파냐 외교관들도 칼리나고인들이 식인종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콜럼부스가 항해 중에 원주민들의 식인행위를 문서로 보고했고, 이를 근거로 1503년 이사벨라 여왕이 카리브 해 원주민들을 식인종 야만인으로 간주해 노예로 삼아도 된다는 칙령을 내렸다. 칼리나고인의 다른 이름인 카리브인(Caribs), 원주민 이름으로 카리브나(karibna)는 원래 사람이라는 뜻이었지만 영어로 전해지면서 단어가 붕괴돼 식인종(cannibal)의 어원이 되었다. 이 시기에 유럽인들은 카리브 원주민들을 식인종으로 믿었다.
“증인은 더 자세히 진술하시오.”
“예, 재판장님. 그때 야만인들이 사람 뼈를 가리키면서 당당하고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지었어요. 우리도 언제든 그들의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다는 위협이었어요. 저는 괜찮아도 제 아이들이 식인종에게 잡아먹히는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는 우리 목숨을 지킬 권리가 있어요!”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증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검사가 한숨을 내쉬더니 해당 사진과 관련된 백과사전 내용을 읽었다.
“대서양 탐사전단과 인류학자들이 누차 여러 지역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상의 뼈를 집에 모셔두는 것이 카리브 해 지역 원주민들의 전통 장례 풍습이다. 뼈에 남은 조상들의 혼령이 후손들을 재난과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아니에요!”
“재판장님!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유럽 일부 교회에서 신자들의 뼈를 지하에 모아두는 것과 비슷하다고 사료됩니다. 계속 읽겠습니다. 서인도제도의 어느 지역에서도 식인 풍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단, 전쟁이 끝난 뒤 의식의 일종으로 식인행위가 자행됐다는 콜럼부스의 증언 및 이탈리아 탐험가 조반니 다 베라차노의 죽음에 대해서는 논란이 남아 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충격을 받은 증인 바비가 비명을 질러댔고 피고들이 웅성거렸다. 피고들 일부는 넋이 나갔고 몇몇은 바비를 향해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원주민들의 장례 풍습이 사실이라면 유럽 정착민들은 친절을 베푼 원주민들을 축제기간 중에 학살한 인면수심의 인간이 된다.
실제 역사에서 세인트 킷츠의 원주민 학살은 1626년에 발생했다. 세인트 킷츠 섬에 정착한 백인들이 이 섬에 모인 도미니카와 주변 여러 섬의 원주민 대표들을 죽이는 바람에 주변 섬들에서 원주민들이 꾸준히 쳐들어와서 여러 번 전투가 벌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원주민 3천에서 4천이 죽고 백인 정착민들도 최소 100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백인 세력이 증강된 다음에는 역으로 백인들이 주변 다른 섬들을 공격해 원주민들을 학살했다. 칼리나고와 타이노인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구가 대폭 줄어들었다.
“피고들은 진정하시오. 장례 문화가 달라 오해가 생길 가능성이 충분했소. 범행 동기를 논할 때 이 부분을 충분히 감안해서 판결을 내리겠소.”
“잘못했습니다. 모르고 그랬어요. 흑흑!”
피고들 숫자가 워낙 많아 재판은 꽤 오래 끌었다. 그러나 오해가 빚어낸 학살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백인이 원주민들을 학살해 숫자를 줄였을 거라는 예상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백인들이 가져온 병 자체만으로도 면역이 없는 원주민들에게 치명적이었다.
다음 날 이민호는 왕자 둘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새로 건립된 새강릉 시립 극장으로 향했다. 쥐똥이가 지 애비는 쥐똥만큼도 존경하지 않지만 형은 무지막지하게 존경하는 모양이었다. 두 왕자는 주로 극한 지대에서의 생존법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시립 극장을 둘러보고 부속건물의 녹음실로 향했다. 유리창 너머에서는 아일랜드 출신 여성 4인조 밴드가 악기를 연주하며 한창 녹음에 열중하고 있었다. 음반을 제작할 때 보통 연주곡을 따로 편집했으나 이들은 자신감이 넘쳤는지 동시 녹음으로 진행했다. 이민호와 왕자들은 바깥에서 잠시 구경했다.
“노래 어때, 쥐똥아?”
“제발 제 이름 좀. 아바마마께서 만드신 곡이죠? 역시 노래는 아주 좋습니다만 가족 관련된 노래치고는 분위기가 너무 어두운 것 같습니다. 이 시기에 어울리는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부추기는 내용이 아니라서 더욱 아쉽습니다.”
후렴 가사 처음에 어린 시절의 불행이 언급돼 아일랜드의 상황을 말하는 듯했으나 그 의미가 반드시 정치적으로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아일랜드 독립을 부추기는 선전 도구로 곡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시대를 떠나 대중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는 편이 낫다고 이민호는 판단했다. 물론 현대 음악에서 표절한 곡이었다.
“가족에 관련된 추억이 항상 행복한 것만은 아니야. 소재의 다양성을 위해 이런 노래가 나올 때가 됐지.”
“가수의 음색과 창법이 아주 독특합니다. 호불호가 갈리겠는데요?”
“개똥이 말이 맞다. 대신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주 좋아하겠지. 그래서 음반 판매량이 기대된다.”
이 노래의 작곡가로 등록한 이민호가 개인 계좌로 입금될 저작권료를 기대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때 같은 노래를 조선말과 게일어로 각각 녹음을 마친 가수들이 녹초가 돼서 녹음실에서 나왔다. 가수들은 국왕과 왕자들의 출현에 깜짝 놀랐다가 분분히 인사하기 바빴다.
“열심히 연주하고 노래 부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잘 부르더구나.”
“감사합니다, 국왕전하. 그리고 좋은 어제곡을 저희들에게 하사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오래도록 외세에 시달린 에이레 사람들의 정서가 녹아있는 듯합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여성 가수가 대표로 감사인사를 올렸다. 원래 아일랜드 사람이 작곡하고 불렀으니 아일랜드 사람들 정서에 어울리는 것이 당연했다. 이민호가 일부러 이들에게 곡을 준 이유였다.
“그리고 음악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건국 초부터 국왕전하께서 애써주신 사실을 저희 음악가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 영원히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칭찬은 됐고. 그런데 음악계에 불만이 있다고 들었다.”
“국왕전하께서 거둥하실 정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전하.”
자리를 옮겨서 최초의 록 그룹 가수들의 불만을 들어보기로 했다. 아일랜드 출신 여성 음악가들 중에서도 특히 실력자들을 모아 밴드를 결성하고 어제곡을 받아 데뷔를 앞두고 음반을 녹음하기까지 이들은 탄탄대로를 달려왔다. 그러나 고산국 본토에서 인기가 가장 높은 가수들과 자신들이 여러 모로 다르다는 사실에 불만이었다.
“그대들의 불만을 이해하겠다. 본토에서 음반을 낸 몇몇 가수들은 실력도 없고 곡이 좋지 않은데도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예술가인 그대들은 예쁘고 귀여운 여자애들이 엉터리 음악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이 불편한 거겠지?”
“꼭 그런 건 아니지만요. 성공에 대한 불안도 있어요.”
“이번 곡으로 성공 못하면 어떠냐? 너희들은 실력이 있으니까 새 곡으로 다시 도전하면 된다. 두 사람이 직접 수십 곡을 작곡했다며?”
물론 이민호가 당사자 가수들이 아니니까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 가수들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부터 저희 음악을 널리 알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명심하거라. 너희들은 아이돌 가수가 아니라 예술가들이다. 장르가 다르니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과 너희들은 가는 길이 다르다. 성공의 척도도 대중가수가 아닌 다른 예술가들과 비교해야 한다.”
“전하! 그게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습니다.”
“너희 가수들은 청중과 공감하는 것이다. 너희들의 예술적 감성과 철학을 청중들과 공유하는 거야. 아이돌 가수들은 대중에게 욕망과 행복을 파는 것이 직업이다. 남성 잡지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찍은 사진이나 사생활에 관한 기사가 자주 실리는 이유지. 그들의 성공이 부러우냐? 상업보다 예술의 수명이 훨씬 기니까 시기할 필요 없다.”
아이돌 가수를 포함한 대중 가수의 예술성을 폄하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일단 예술로서 수준이 차이가 났다. 현재의 아이돌 가수들도 오래도록 활동하면 자기만의 음악성을 갖게 된다고 들었지만 깊이 공감하지는 않았다.
“전하! 저희들도 기회만 된다면 그들처럼 되고 싶어요. 일단 노래와 춤 실력은 충분하잖아요? 백인이라서 안 될까요?”
“인종은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무시하는 아이돌 가수들이 데뷔하기까지 몇 년 걸리는 줄 아느냐? 그 동안 노래와 춤 외에 뭘 배운다고 생각하느냐?”
이민호는 예전에 몇몇 걸 그룹의 라이트 팬으로서 한국의 아이돌 가수들이 음악적 재능과 외모 외에도 얼마나 노력하는지 익히 들어왔다. 비주얼과 가창력, 심지어 작곡 능력이 뛰어나도 경쟁이 워낙 극심해 인기를 얻지 못하고 사라지는 걸 그룹도 많이 봤었다.
고산국에도 현대 한국처럼 다수의 아이돌 그룹이 활동하고 있었다. 초반에는 이민호의 지시에 따라 몇 개가 만들어졌다가 지금은 중소 기획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다양한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켰다.
그러나 점차 경쟁이 심해지면서 연습생으로 몇 년 동안 고생만 하다가 데뷔조차 못하는 지원자들도 많았다. 그런 아이돌 그룹에 비하면 오히려 수가 적은 락 그룹에게 기회가 더 많다고 판단해서 이 그룹을 구성하도록 지시했었다.
“대중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인가요?”
“그렇지. 너희들이 보기에는 그저 의미 없고 사소한 것들이지만 그런 것을 배우고 경쟁자들에 비해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재능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장점을 밀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만약 이 대화가 공개된다면 가수 팬과 아이돌 팬 양쪽에게 욕먹을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그러나 음악 관계자들, 특히 아티스트 쪽에 선 가수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싶어서 하는 이야기였다.
“쥐똥이 너는 이들에게 할 말이 있느냐?”
“아, 아닙니다. 없습니다.”
쥐똥이의 시선이 자꾸 간 곳에 빨간 머리 여가수가 있었다. 혜영의 아들인 개똥이는 아일랜드 가수들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비올레타의 아들인 쥐똥이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었다.
유럽에서 빨간 머리는 집요한 사회적 박해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선정성의 화신으로 간주됐다. 빨간 머리 여자가 성격이 드세다고 하는데 어릴 적부터 오래도록 핍박을 받으면 성질이 고울 리가 없었다. 아일랜드는 빨간 머리가 인구의 10퍼센트 이상을 점유한다.
“아무리 봐도 빨간 머리 여가수에게 홀린 것 같은데? 얼굴은 왜 빨개지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놀래라. 내 귀 안 먹었다.”
“죄, 죄송합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애비가 아들을 좀 놀릴 수도 있고, 아들이 애비에게 반발할 수도 있지. 국왕이기 전에 난 네 애비란다. 그 사실을 항상 기억하거라.”
노래가사처럼 가족이 항상 행복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럴 때 자식이 부모에게 섭섭함을 토로할 수도 있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그리고 가족이라지만 아들과 딸이 이미 수백 명을 넘어서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민호는 자식들에게 항상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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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잉글랜드 문제는 아직 결론이 안 났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