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16화 (865/1,000)

00916  100. 세인트 킷츠 앤드 니비스  =========================================================================

“국왕전하 만세!”

“장수를 누리소서, 폐하!”

“그래, 그래. 호칭이 뒤죽박죽된 것 같지만 그래도 고맙다.”

비올레타와 포카혼타스를 양쪽에 두고 선 이민호가 손을 흔들자 항구 전체에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왕실 가족 외에도 새강릉 항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민호와 함대를 환영하러 몰려나왔다. 본토에서 새강릉으로 재이주한 사람들과 북미 원주민이 다수였고, 일부 유럽인 이민자들 중에서는 특히 아일랜드 출신이 많았다.

“여긴 왜 다들 한복을 입지? 어색해.”

본토에는 이민호가 제안한 현대 의복과 비슷한 복장을 복식연구가들이 개량한 간편복과 더운 기후를 감안한 개량한복이 유행이었다. 그 외에는 지역에 따라 전통적인 복장이 유지됐으나 유독 새강릉만 달랐다. 한복을 입은 원주민이 머리에 갓을 쓰는 대신 독수리 깃털을 꽂거나 붉은 턱수염을 수북하게 기른 아일랜드 남자가 도포를 걸친 꼴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됐다.

“한복이 문명인의 복장이래요. 평소에는 다양하게 입는데 공식 행사가 있을 때는 주로 한복을 입어요.”

“민족 고유 의상은 정장으로 인정한다고 하지 않았소?”

“고산국의 뿌리는 조선이니까요. 다수를 차지하는 종족의 문화가 확산되는 것이 일반적이라서 어쩔 수 없어요.”

비올레타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시간이 가면서 복장이 비슷해지더라도 각 종족의 전통 복장이 끝까지 살아남길 바랐다. 그러나 문화란 다양하고 풍부할수록 가치가 있다는 개념이 이 시대의 대다수 백성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새강릉에서는 계절마다 여러 종족이 주체가 되는 축제를 번갈아 열었다. 그런데 고산국 본토, 특히 조선에서 유래한 문화가 먹거리와 놀이 등 여러 분야에서 가장 다양하며 풍족하고 뿌리가 깊었다. 공통점보다 차이가 더 심한 원주민 부족들, 고향에서 쫓겨난 아일랜드인들에게 전통을 지키라고 지원하거나 강요해도 소용이 없었다.

“새로운 고층 건물이 많이 들어섰구려.”

“예, 전하. 전망대를 언덕으로 옮겼고 여각이 많이 생겼어요.”

새강릉의 도시 풍경은 예전에 12층 시청 겸 전망대 하나만 달랑 들어섰던 때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거대한 종합경기장과 관객 수만 명을 수용하는 축구장, 격투기 전용 실내 경기장 등 체육시설이 외곽에 들어섰고 항구 주변에는 호텔과 상업건물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한옥 담장과 르네상스 양식을 본뜬 근세 유럽식 석조건물, 현대식 고층 건물이 뒤섞여 마치 2000년 전후 서울 시청 앞 덕수궁 근처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유럽식 건물은 사실 석조가 아니라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마감재만 석조를 썼을 뿐이지만 겉모습은 꽤나 근사했다.

“죄다 12층이긴 하지만 외관이 다양하고 꽤나 멋지구려.”

“13층 이상을 짓지 말라는 어명은 잘 지켜지고 있어요. 설마 유럽의 금기 때문만은 아니죠?”

“북미 내륙에서는 철근과 콘크리트를 구하기 어려워 주로 벽돌로 고층 건물을 지을 것이오. 벽돌 건물은 12층이 건축 한계로 알고 있어서 철근 콘크리트 건물도 같은 층수 제한을 두었소. 철골조나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한해 나중에 층수 제한을 풀 예정이오.”

시내와 풍광 좋은 시외의 몇몇 호텔은 국립이나 시립이 아닌 민간인 회사가 건설해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왕토사상에 의해 건물은 50년, 길어도 100년 동안만 지상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상공업 위주인 새원산과 달리 농업과 행정 중심 도시인 새강릉의 12층짜리 호텔들은 여행자들의 임시 숙소가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호텔들은 새강릉 주변 농부 가족들의 단기 휴양 시설로서 각광받았다. 농촌에서 누리기 어려운 문화적 혜택을 하루나 이틀 동안 도시에서 실컷 누리기 위한 농민들의 선택이었다. 농민들이 도시민보다 훨씬 부유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소빙하기에 접어든 지금은 농업이 더 중요하고 미래에 대비해 농민의 소득을 최대한도로 올릴 필요가 있어서 일부러 도농 간의 소득 격차를 억제하지 않았다. 이대로 내버려둬도 산업이 발전할수록 상공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임금 수준이 더 높아질 것이기에, 오히려 농민의 자식들에게 여러 가지 직업 선택의 자유와 교육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걱정이 많아 보이세요. 별궁으로 납시지요, 전하.”

“아니오, 비올레타. 아직 군사작전이 끝나지 않았소. 함대 사령관! 개선행사를 열어주지 못해 미안하오. 포로와 인종 학살 용의자들을 구금하고 조사를 시작하시오. 가족들은 따로 수용하시오.”

“이송할 준비를 이미 마쳤습니다, 전하.”

요새에서 항복했던 잉글랜드 포로들이 배에서 내렸다. 대부분 포로들이 귀가 먹어 어리둥절한 표정인 가운데 해병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이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정착민들 중에서 성인 남자들이 뒤를 따랐다. 바로 이들이 원주민 학살의 주범들이었다.

“죽여, 죽여! 잉글랜드 악마들을 다 죽여!”

“이제 와서 불쌍한 표정 짓지 마! 역겨워!”

새강릉에 정착한 아일랜드인들이 잉글랜드인들을 알아보고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총을 들고 쏘려는 아일랜드 남자들을 해병대와 경찰이 대거 투입해 제지했지만 소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잉글랜드 포로들을 본 아일랜드 여자들은 아이들을 껴안은 채 흐느껴 울었다. 이는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상황이 역전된 데 대한 기쁨의 눈물이었다.

“노예로 부리지도 못할 정도로 약해빠진 자들이에요. 시커멓게 이빨 썩은 것 좀 보세요.”

“에스파냐의 오랜 적이었지만 지금은 불쌍해요.”

포카혼타스와 비올레타의 감상이었다. 잔뜩 기가 죽은 포로들이 성난 군중들 사이를 지나갔다.

포로들에 이어 산크리스토발에 정착했던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여자와 아이들이 행진하자 소란은 금방 가라앉았다. 아무리 흥분했더라도 힘없는 아녀자들에게 분노를 쏟을 정도로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경우가 없진 않았다. 여기에 더해 정착민들의 남루한 옷차림과 비쩍 마른 몰골이 새강릉 시민들과 당장 비교됐기 때문이다.

“갑자기 시민들의 애국심이 높아진 것 같소.”

“강함과 부유함은 자부심과 바로 연결되니까요.”

비올레타와 포카혼타스가 빙긋 웃었다. 인적, 물적 기반은 이민호와 고산국 정부가 마련해줬지만 그 동안 새강릉의 발전에 두 사람이 기여한 바가 컸다. 포카혼타스는 대교 외에 행정에 크게 기여한 것이 없더라도 원주민들을 고산국 백성으로 자연스럽게 통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새강릉의 시민들의 얼굴에는 확실히 자부심이 드러났다. 서유럽의 하층민 출신인 산크리스토발 정착민들과 새강릉 시민들의 소득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너무 민망한 수준이었고, 유럽의 하급 귀족들과는 충분히 비교할 수 있었다.

소득 외적인 삶의 질에서도 크게 차이가 났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새강릉 시민들은 똥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센 강과 템스 강의 물을 떠서 마시는 두 도시의 위생 환경을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했다. 소득을 떠나 이 정도면 생활수준을 비교할 의미가 없었다.

“그 동안 고생 많았소. 하지만 앞으로는 북미 동해안 도시들의 발전을 위한다고 너무 욕심을 내지 마시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가족들과 오순도순 지내는 평범한 일상이 백성들에게 몹시 소중하기 때문이라오.”

“예. 결혼해서 아이 낳고 그 아이가 걱정 없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부모들에게 가장 큰 행복일 거여요.”

“열심히 일해서 새강릉을 이렇게 발전시켰으니 정말 자랑스러운 백성들이오.”

이민호는 전생에 독신으로 살아 자식들을 키우면서 느끼는 행복을 전혀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 지역 불문하고 고산국 사람들이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포카혼타스가 뾰로통해져서 입술을 내밀었다.

“전하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여요.”

“우리 장난꾸러기가 열심히 일한 것은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면 정당한 대가를 돌려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 것뿐이야. 생활수준을 높이고 도시를 이렇게 성장시킨 것은 백성들 스스로가 힘써 일한 결과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라는 믿음을 심어주기가 가장 어렵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반을 갖추기 위해서는 정치와 행정뿐만 아니라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이 필요했다. 백성들이 고산국에서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불만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태생적 신분이 낮아서, 혹은 가난해서 억울한 일을 겪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전하께서는 공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너무 습관화됐어요. 전하께서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셔도 돼요.”

“내가 역사상 최고의 군주는 아닐 것이오, 비올레타. 그리고 그런 평가는 의미가 없소. 내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일하는 것이 내게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이오.”

“모두가 전하의 백성이에요. 조선 출신이든 원주민이든, 아니면 유럽 출신이든.”

“그래. 고맙다, 내 어린 아내여.”

포카혼타스가 이민호에게 답싹 안기고 싶어 했지만 복장에 워낙 많은 장식물이 붙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여전히 귀여운 포카혼타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군주제가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었지만 국가운영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칭송을 받는 동안에도 이민호에게는 불만이 많았다. 특히 지방행정에서 자율성이 부족해 국가 전체적인 행정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했다.

민간 분야에서는 언제 국가가 민간사업에 개입할 줄 몰라 과감한 투자를 스스로 자제하는 경향이 컸다. 일단 민간에게 개방된 분야는 다시 기업청 소속의 국립사업체가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사업가들에게 신뢰를 주기 어려웠다. 사업체를 키워봐야 자손에게 상속이 불가능하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국영기업은 계속 규모를 키우는데 반해 민간 기업은 적당한 선에서 성장을 멈췄다. 이런 현상을 두고 이민호가 크게 걱정했지만 그 대신 다양한 중소기업들이 시장에 새로 진출할 기회가 많이 남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젊은 창업자들과 미래의 후손들을 위한다면 이 정도가 나을 것 같았다.

사흘 후 요새에서 항복한 포로들이 피고로 등장한 군사재판이 먼저 열렸다. 새강릉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군사재판이었고, 특별히 새동래에서 온 군 법무관들이 법정에 착석해 심리를 진행했다.

잉글랜드 포로들은 포격과 폭격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기에 고산국에서 규정한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저지를 기회 자체가 없었다. 지휘관이 백기를 든 이후에도 일부 포로들이 저항한 것을 검사가 문제로 제기했으나 포로들 대다수가 고막이 터져서 항복한 줄 몰랐을 거라는 군의관의 소견서로 인해 그냥 넘어갔다.

용병 신분으로서 참전한 것은 약간 문제가 됐다. 현대 유엔에서 금지한 용병은 돈을 받고 외국 정부 혹은 기업에 고용되는 등 여러 가지 규정이 있지만 특히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의 민족자결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다이아몬드 등 자원을 탈취하기 위해 선진국 기업이 용병들을 고용해 신생국 정부를 전복시키는 사태를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잡힌 포로들은 정착민들과 국적이 같고 조사 결과 잉글랜드 정부에게서 명령을 받아 정규군과 동일한 임무를 수행했기에 용병 부분도 무혐의가 확정됐다

“포로 중 최고위 계급인 피고 케빈 메니닉 대위 외 106명은 잉글랜드의 국왕군 소속으로서 소집해제 기간 중에 따로 계약금과 일당 및 승리 수당을 받기로 약정하고 칼리나고 원주민 명 리아무이가 섬, 영어 명 세인트 킷츠 섬에 도착한 뒤, 같은 섬에서 일어난 인종 학살 범죄를 적극 방조하기 위해 요새에서 저항한 혐의가 있다. 그러나 잉글랜드 정부에서 군 조직을 통해 국왕군 소속인 피고들을 소집해 이 섬에 수송하고 요새 수비를 지시했다는 증거가 명약관화하게 드러났기에 이들의 실체를 용병이 아닌 정규군으로 간주한다. 전쟁 포로에 대한 처분은 군법 161조에 의해 승전국인 고산국의 육군과 해군, 항공대의 총사령관이시며 이번 작전을 위해 조직된 고산국과 에스파냐 연합군의 최고 지휘관이신 국왕전하께 전적으로 일임한다.”

- 땅! 땅! 땅!

판사가 판결문을 낭독한 다음 나무망치를 두들겼다. 법률 용어는 어느 나라든 명확성을 기하기 위해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경향이 있으나 고산국에서는 비교적 통상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문장은 이민호 기준으로 지독히 길고 따분했다.

통역을 해줘도 못 알아듣기에 통역관이 급히 타자를 쳐서 종이를 내밀고 나서야 포로들이 판결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 포로들과 여러 나라의 외교관, 관전무관들이 이민호 얼굴만 쳐다봤다.

“본 국왕이 잉글랜드 포로들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겠다. 전쟁포로는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포로교환의 일차대상이 되겠지만 현재 본국은 잉글랜드와 전쟁을 하고 있지 않으며 잉글랜드에 붙잡힌 아국 포로도 없다. 또한 정상적인 교전 행위 외에 다른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전쟁 포로는 군법 제176조에 의해 전시 구금 외의 처벌을 가할 수 없다. 본 국왕은 포로들을 즉각 석방할 것을 지시한다. 전쟁포로들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새강릉 시장에게 명한다.”

“와아!”

고산국 말을 알아들은 잉글랜드 외교관들이 벌떡 일어나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통역관이 쪽지를 보여주자 포로들이 일어나 이민호에게 허리를 몇 번이나 숙여 감사를 표했다. 뜻하지 않은 행운에 어리둥절하면서도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잉글랜드 포로들에게 징역형 10년 정도 선고할 줄 알았던 에스파냐 외교관들이 반발했으나 이 재판은 온전히 고산국 관할 하에 이루어졌다. 에스파냐가 불만이라면 이 포로들을 자국 법정에 세워서 형을 언도할 수 있겠지만 포로들이 자발적으로 에스파냐 영토로 가지 않을 것이므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국왕전하! 혹시 고산국 병력에 인명피해가 발생했더라도 동일한 판결을 내리셨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그렇소. 법은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하기 때문이오. 비록 식인종 원주민과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민간인 정착민들을 보호하는 임무라고 속아서 왔지만 저들은 분명 국가의 명령에 의해 정상적인 교전행위에 들어갔소. 교전 중에 따로 전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고산국 군인들이 몇 명이 죽었든 무죄요.”

이민호가 근엄한 표정으로 설명한 다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에스파냐 외교관이 뭔가 오해했는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다음 두 손을 꼭 쥐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잉글랜드 외교관의 안색은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외교관들이라 판결에 숨은 의미를 금방 파악했다.

“국왕전하! 설마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이려 하십니까? 잉글랜드 정부는 이번 사건과 전혀 관계없이 민간인들이 저지른 범죄, 혹은 자위권 행사에 불과합니다.”

“이번 원주민 학살 사건에서 잉글랜드 정부의 역할을 규명했으니 조만간 잉글랜드 정부에 공식 항의할 예정이오. 상황에 따라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것이오.”

바로 이 순간에 방청객에 자리 잡은 기자들이 일제히 사진기 조명을 터뜨렸다. 아차 실수했다 싶은 이민호는 기자들에게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 1면에 특종을 터뜨릴 만한 노골적인 표제가 이들의 머릿속에서 마구 나뒹굴고 있는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듣거라.”

“예? 예! 전하!”

이민호가 직접 지명하자 흥분했던 기자들이 몹시 웅성거렸다. 기자는 조선 초기의 사관, 즉 사건을 정확히 기록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해주면 좋겠지만 어느 시대든 정치적 목적이나 신문 판매부수를 올리기 위해 과장과 왜곡, 선정적인 보도를 밥 먹듯이 하는 황색 언론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고산국에서도 이런 일은 가끔 있었고, 이번처럼 왜곡하기 쉬운 말도 드물었다.

“전쟁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는 말은, 전쟁을 하겠다는 명시적 의사를 표현한 것이 아니다. 질문이 있으면 하도록.”

“황송하오나 부정의 부정은 긍정 아니겠습니까?”

“확률적으로 매우 적지만 전쟁 가능성이 0퍼센트는 아니라는 뜻이다. 의미 차이를 잘 알면서 그러나? 신문 표제로 사용할 경우 과인이 한 말을 곧이곧대로 옮기거나, 문법적으로 일치할 경우에 한해 다른 단어로 대체가 가능하다. 이번 판결을 축약한다는 핑계로 신문 표제를 고의로 왜곡할 경우 언론법에 의해 3일 동안 정정 보도를 낸 다음 신문사는 폐쇄되고 기자와 편집자는 형사고발 조치됨을 명심할 것이다.”

오해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오해하는 것은 남녀의 애정문제 뿐만이 아니었다. 기자들은 발언자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혹은 선정적인 보도를 하기 위해 왜곡을 할 수 있었다.

반복 설명한 덕에 결국 고산국 보도매체에서는 이민호가 내린 판결을 정확히 왜곡 없이 보도했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발행한 신문이 잉글랜드에서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고산국 국왕, 잉글랜드와 전쟁 고려(under consideration)’라는 식으로 알려졌다.

============================ 작품 후기 ============================

며칠 연재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정착민, 즉 인종 학살 범죄자들에 대한 재판이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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