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12화 (861/1,000)

00912  100. 세인트 킷츠 앤드 니비스  =========================================================================

해가 갈수록 고산국 영토가 확장되고 이민이 늘어날수록 인종차별 문제가 대두됐다. 소수에 대한 다수의 사회적 통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행해지기 마련이었지만 북미 동해안 지역에서 자행되는 인종차별 문제는 국가의 통합을 방해할 정도로 심각한 양상이었다.

예전에 새강릉에서 시의원 몇 명을 처형하는 극단적인 대응을 했는데도 몇 년 지나자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갔다. 가해자들은 주로 지능이 떨어지고 타인에 대한 공격 성향이 원래부터 강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교육이나 설득만으로 인종 차별을 그만 두지 않았다.

이들은 유럽 이주민들을 가장 만만하게 봤다. 북미 원주민들은 자존심이 강해 즉각 보복을 행하며, 북미 대륙의 원래 주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해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이에 반해 빈곤과 기아를 피해 이주한 유럽 출신들은 조선 혈통에 열등의식을 갖고 있어서 쉽게 인종 차별의 희생자가 되곤 했다.

“나도 조선 출신이라 고산국에서 조선의 후예들을 다수 인종집단으로 만들어주려고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고산국 안에서는 혈통을 불문하고 같은 백성이란 말이야. 국가 발전과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혈통이 더 높고 낮은 차별이 존재해서는 안 돼.”

“옳으신 말씀입니다, 아바마마. 갈릴레오 백작이나 김수공 국장을 비롯해 유럽 출신으로서 국가에 기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살펴보니 인종차별 가해자들은 출신과 혈통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자들입니다.”

“공부도 안 하고 군대도 안 가고, 그저 평생 기본 소득으로 놀고먹으면서 술 취하면 마누라나 애들을 두들겨 패는 저열한 족속들이지.”

이민호는 세자 개똥이에게는 더 솔직히 말할 수 있었다. 국무회의 때와 달리 개똥이도 이민호와 독대할 때는 편하게 앉아서 악력기를 쥐었다. 개똥이는 올해 말에도 히말라야에 등정할 계획이었다.

“분명 부끄러운 범죄라서 사회적으로 제재해야 하는데 이런 일에는 주변 사람들이 저지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더욱 문제입니다. 소수 인종에 대한 견제를 조선 혈통 주민들이 원하는 걸까요?”

“그건 아니야. 보통은 가해자들이 피해자의 인종 대신에 잡다하게 다른 이유를 내세우니까 제삼자가 개입하기 어렵겠지. 시의원들이 문서상으로 명백히 인종차별 범죄를 저지른다면 일벌백계하겠지만 일반인들은 증거를 잡기 어려워.”

기회만 생기면 남을, 최소한 남의 감정이라도 공격하고 싶어 하는 자들은 상대가 그저 소수 인종이라는 만만해 보이는 요소를 갖고 있기에 그것을 핑계로 삼을 뿐이었다. 어린놈이 건방지다고 욕하는 자들은 노인의 늙고 병든 몸을 모욕하며, 부자를 시기하는 자들이 동시에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는 것과 똑같았다. 남을 공격할 수만 있다면 진보든 보수든 언제든 스탠스를 바꿀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이 타인을 공격하면서 내세우는 이유란 공연한 트집 잡기에 불과했다. 인종 차별은 국기 문란에 준하는 반역행위라고 위협해도 소용이 없어서,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새강릉과 새원산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다.

“그게 문제입니다. 예전에 아바마마께서 인종 차별을 막기 위해 유럽인 이주민 출신들을 경찰로 많이 고용했었습니다. 이들을 사복으로 갈아입혀 휴대용 녹음기를 들고 다니게 해서 증거를 수집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흠. 바람직하진 않지만 인종 차별 문제에서만큼은 그게 좋겠다. 몇 명 체포한 다음 신문에서 크게 떠들어대면 앞으로 말조심을 하겠지. 대신에 녹음기 활용은 인종차별 범죄만으로 증거 능력을 제한할 필요가 있겠어.”

사복을 입은 유럽 출신 경찰이 커다란 휴대용 녹음기를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면서 인종 차별 범죄의 증거를 수집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하는 행태가 비밀경찰이나 함정수사와 다를 바가 없어서 별로 유쾌하지 않은 장면이었다.

“언로를 제한할까 봐 그러십니까? 범죄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그거야 우리 같은 권력자들이나 그렇게 생각하지. 없는 자리에서는 왕도 욕할 수 있다고 했다.”

“마음에 별로 안 들지만 조선보다 언로가 막혔다는 평가는 받고 싶지 않습니다.”

이 시대 기준으로 조선은 언로가 대단히 폭넓게 개방된 나라로 분류된다. 가끔은 상소문 내용이 지나쳐서 유배를 당하기도 하지만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안 좋은 일을 임금 탓으로 돌려도 괜찮았다.

홍수나 가뭄이 들거나 지진이 난 것도, 역병이 도는 것도 모두 임금이 공부를 안 하고 국정에 게을러 하늘이 경고한 자연현상이었다. 류성룡은 한겨울에도 한강에 얼음이 얼지 않은 현상을 두고 선조 임금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를 기화로 임금을 견제하고 정책을 제시하는 기회로 삼은 것이었다.

“불쾌하겠지만 답답한 인간들이 답답한 소리를 하더라도 내버려 둬. 다양한 의견이 자유롭게 나와야 그 속에 쓸 만한 정책 건의를 건질 수 있으니까.”

“예. 성현의 학문을 닦는 일을 게을리 하는 우리 왕실을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신문사를 유지시켜 주기 위해 정부예산을 쓴다는 게 아깝습니다. 그들의 의견이 극히 소수라서 다행입니다.”

“자칭 선비들은 늙어죽지도 않는 것 같아. 자기 자식들도 마음대로 못하는 주제에 말이야. 자식들에게 법학이나 행정학을 공부시키고 싶어도 요즘 젊은 애들이 부모 말을 듣나?”

고산국의 발전된 의료기술 덕에 조선에서 건너온 초기 이민자들 대다수가 아직도 수명과 건강을 누리고 있었다. 예전에 조선과 고산국의 노인들 수명을 비교한 신문기사가 난 적이 있었는데, 최소 20년이나 차이가 나서 고산국에서 70세를 고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고산국에서 태어나 유아기 때부터 영양부족에 시달리지 않은 젊은 층의 기대 수명은 훨씬 더 길 것으로 기대됐다. 의료 수준은 현대 대한민국보다 아직 한참 낮지만 과로사나 학업성적을 비관해서 자살하는 경우가 없으니 조만간 평균 수명이 비슷하게 될지도 몰랐다.

“자칭 선비들이 왕실에는 유학을 배우라고 강요하면서도 자식들에게는 더 이상 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도 우스갯거리야. 개똥이 너는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됐어?”

“히말라야 등정 문제와 결혼 문제 빼고는 제가 아바마마 말씀을 잘 듣는 편입니다.”

“그래, 그래. 요즘 젊은이치고는 부모 말을 잘 듣는 편이지. 특히 세자 자리를 받아들여줘서 눈물 나게 고맙다.”

개똥이가 중고등학교 때 공부 안 하고 죽어라 놀러 다니고, 이민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관학교에 간 것이나 아직도 군에서 전역하지 않은 것 등등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노처녀 공주들과 달리 일찍 결혼한 것만으로 개똥이는 칭찬 받아 마땅했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 겔베스 후작 디에고 카릴료 데 멘도사가 수행원들을 데리고 입궁했다. 고산국 건국 초기에는 멕시코까지 편지 한 번 주고받는데 일 년씩 걸렸는데 지금은 웬만한 일이 생기면 부왕이 고산국 배를 타고 직접 와서 협의했다. 이들은 아직 비행기를 탈 용기를 내지 못했다.

“어서 오시오, 부왕. 오랜 만에 보는 것 같소.”

“지난 두 달 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세자 저하께도 인사 올립니다.”

외국 사절이 알현할 때마다 항상 세자 개똥이가 입시했다. 내정과 외교, 군사는 주권의 핵심 내용이었고, 기술자 출신이었던 이민호에게는 그 중에서 외교가 가장 어려웠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현역 장교인 개똥이는 오히려 내정을 어려워해서 어머니인 혜영에게 특별교육을 받고 있었다.

“부왕께서 항상 바쁘신 모습을 보게 돼서 기쁘오.”

“이제는 디에고라고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국왕전하. 전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에스파냐는 요즘 유럽에서 무도하고 불충한 이단자들과 싸우느라 힘에 겹습니다.”

그냥 우는 소리가 아닌 게,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에 의해 막힌 해로 대신 육로를 통해 네덜란드 남부와 독일에 보급을 추진하느라 에스파냐 정부에서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도로가 좋아도 마차 시대에 육로 보급이란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특히 점점이 흩어진 독일의 영지들을 통과하면서 드는 비용은 말도 못했다.

“돈 디에고! 에스파냐와 가톨릭 동맹군이 워낙 잘 싸워서 우리가 나서서 도와줄 필요가 없을 것 같소. 틸리 백작과 발렌슈타인 공작의 무위는 잘 듣고 있소이다. 이번에는 어떤 문제로 오셨소?”

“산크리스토발과 니에베스 섬을 잉글랜드와 프랑스인들이 점거한 사실은 국왕전하께서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세인트 킷츠 앤 니비스 연맹은 나중에 영연방 독립국이 되지만, 이때는 카리브 해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섬들로서 유럽인들의 초기 개척지에 불과했다. 니비스는 스페인어로 ‘Nuestra Señora de las Nieves’, 눈의 여왕이란 뜻이었고 킷츠는 크리스토퍼의 약자였다.

콜럼부스가 명명한 산크리스토발, 즉 여행가의 수호성인인 성 크리스토퍼 혹은 성 크리스토포로스는 원래 이 섬에서 북쪽으로 20마일 떨어진 섬의 이름이었으나 지도 제작 과정에 실수가 발생해 이 섬의 이름이 되었다. 지명이야 다양한 이유로 수시로 바뀔 수 있어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잠시 기다리시오. 아! 여기 리아무이가 화산섬 말이오? 에스파냐나 고산국보다 그들이 먼저 정착했으니 할 수 없지요.”

고산국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원주민인 칼리나고인이 부르는 리아무이가라는 이름이 병기돼 있었다. 원주민 말로 비옥한 땅이라는 뜻인데 화산섬의 토양이 워낙 비옥해서 높은 농업생산력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이 섬에서 좁은 해협 건너편에 위치한 니비스 섬은 오우알리에라는 이름으로, 원주민 말로 아름다운 물을 뜻한다. 실제로 식수로 음용 가능한 샘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칼리나고인, 다른 이름으로 섬 카리브인은 남미 오리노코 강 유역 출신으로서 콜럼부스가 도착하기 200여 년 전에 카리브 해 섬들을 정복했다. 그 전의 원주민은 타이노인으로서 역시나 남미 아마존 지역에서 진출한 민족이었다. 두 섬에 인간이 산 것은 콜럼부스가 도착하기 5천 년 전부터였다.

문제는 1538년 프랑스 위그노들이 산크리스토발에 정착지를 마련했다가 에스파냐에 의해 쫓겨난 이후, 프랑스와 잉글랜드 이주민들이 비옥한 이 섬에 정착하려고 꾸준히 시도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1623년에 두 나라 이주민들이 협정을 맺어 산크리스토발을 나눠 가졌다. 이 섬에 살고 있던 칼리나고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에게 이주를 허락한 사실을 확인했기에, 고산국과 에스파냐에서도 원주민들의 뜻을 존중해 유럽인들의 이주와 정착을 묵인했다.

“역시 국왕전하께서는 배포가 넓으십니다. 힘으로 언제든지 가지실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에스파냐 상대로 내가 그런 말을 하면 돈 디에고께서 무척 놀라시겠지요.”

“아! 그것은 에스파냐에 악몽이 될 것 같습니다. 고산국이 문명국이며 국왕전하께서 문명인이라는 사실에 매일 감사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작은 땅을 얻자고 에스파냐 같은 좋은 우방을 잃을 수는 없지요. 그건 그렇고, 역사적으로 사이가 무척 나쁜 프랑스인과 잉글랜드인들이 한 섬에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소.”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유럽에서 두 나라가 연합해서 에스파냐에 대항할 모양입니다.”

이민호는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이 고산국 왕도에 직접 온 것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잠시 대화가 이어진 다음 돈 디에고가 꽤나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두 나라 정착민들이 연합해서 섬의 원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크게 타격을 준 정도가 아니라 어린애 하나 남김없이 싹 다 없애버렸습니다.”

“맙소사! 은혜를 원수로 갚았군요.”

실제 역사에서도 북미에서 비슷한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정착 초기 굶주린 유럽인 이주민들에게 원주민들이 식량을 제공하고 옥수수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줬지만 백인들의 세력이 커진 다음 원주민에게 돌아오는 것은 학살과 추방뿐이었다.

“이주민들이 하는 말로는 원주민들이 식인종이라 불안해서 공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백인 이주민들은 물론 주변 섬의 원주민들과도 평화롭게 교역하던 원주민을 절멸시킨 악독한 범죄에 대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에스파냐에서 그들을 공격해서 내몰았습니까?”

“아닙니다. 그 전에 먼저 카리브 해의 안전을 책임 진 고산국과 협의부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군이 강한 고산국에서 이번 일을 주도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종교가 다르고 역사적으로 사이마저 나쁜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연합할 뜻을 가진 것은 에스파냐와 신성로마제국을 장악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힘을 두려워 한 탓이었다. 지난 8월 슈타트론 전투에서 개신교 군대가 전멸한 이후 위기를 느낀 덴마크와 스웨덴은 물론, 에스파냐를 상대로 독립전쟁 중인 네덜란드도 반 합스부르크 진영에 적극 가담했다. 잘 나가는 한 놈을 여러 나라가 연합해 두들겨 팬다는 유럽의 전통은 지금도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외교적으로 고립된 에스파냐는 오래 전부터 고산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유럽 전쟁에 참가시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고산국은 끝내 중립을 지켰으며, 대안으로 에스파냐 왕실에서 잉글랜드와 국혼을 추진했으나 이것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참에 산크리스토발 섬의 원주민 학살 문제가 에스파냐에 좋은 기회로 떠올랐다. 단독으로 섬의 정착민들을 제압하고 추방시킬 능력을 가진 에스파냐가 고산국에 합동작전을 요구한 이유였다.

“세자는 에스파냐의 의도대로 유럽 전쟁에 참가하지 않으면서도 리아무이가 섬의 살인자들을 징치할 방안을 고민해봐라.”

“예, 아바마마. 일단 해군 함대를 급파해 리아무이가 섬을 차단하도록 해야 합니다.”

“맞다. 참모본부에 그런 뜻으로 어명을 전하도록 해라.”

“예, 아바마마. 하온데 산크리스토발 섬, 영어로 세인트 크리스토퍼 섬은 고산국 영토도, 에스파냐 영토도 아닙니다. 자칫 내정간섭이나 외국 영토 침공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산국은 문명국이다. 인류가 벌인 일에 도덕적 책임뿐만 아니라 실체적인 책임까지 져야 한다는 뜻이다. 인종 청소 범죄자들을 소탕하는데 국경은 의미가 없다.”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가 소말리아 내전이나 발칸 반도 사태에 개입하고 전투기를 보내 리비아 정부군을 폭격한 것은 오지랖도 아니고 내정간섭이나 주권국 영토 침략도 아닌 문명국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였다. 특히 독일은 이차대전 전범 국가이며 평소 군사행동을 극히 자제하는데도 참전국 명단에서 빠지는 법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 정부가 인권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할 때마다 중국과 북한이 경기를 일으키며 과도하게 대응하는 이유였다. 이번에 카리브 해로 함대를 보내는 것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로 이민호에게 인식됐다.

============================ 작품 후기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종 청소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의 군사행동은 침략이 아니라는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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