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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911화 (86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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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세인트 킷츠 앤드 니비스

1623년 8월 말, 이민호는 고위 지휘관들, 참모본부 요원들과 함께 기록 영화를 관람했다. 듬성듬성 숲이 널려있는 드넓은 서유럽 평원에 양측 수만 명이 맞붙은 대규모 전투를 고산국 관전 무관단이 촬영한 보기 드문 영상이었다.

관전 무관단에 기병 1개 중대를 호위로 붙이고 나서는 희생자가 거의 생기지 않았다. 거친 용병들이 괜히 시비 걸었다가 혼쭐이 난 다음부터 아예 접근하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반대편에 가담했다간 승패에 직접 영향을 줄 수도 있기에 간덩이가 부은 병사들이 시비를 걸지 못하도록 양쪽 지휘관들이 철저히 단속했다.

“좁은 지역에 엄청나게 밀집해서 싸우는군. 남쪽으로 우회하는 기병대를 보병으로 막으려 하는데 가능할까?”

“가톨릭 동맹의 기병대 지휘관이 린델로, 신교도 군 우익에서 보병대를 움직여 포위망을 저지하려 시도하는 지휘관이 크니프하우젠입니다. 남동쪽 언덕을 보십시오, 전하.”

“중포가 많군.”

언덕에 줄줄이 배치된 대포에서 흰 연기가 차례로 뿜어져 나왔다. 화면이 휙 돌아가서 포탄이 떨어지는 곳을 비추자 기병대를 막으려고 움직이는 신교도 보병대 사이에 줄이 쫙쫙 그어졌다. 포탄이 날아가는 선을 따라 보병들이 줄줄이 쓰러지면서 생긴 줄이었다.

“틸리 백작이 보유한 화포 14문 중에서 9문이 사거리가 긴 중포입니다.”

“포탄이 작렬탄이 아닌데도 아주 처참하네. 그런데 개신교 군기에 뭐라고 적힌 건가?”

“예, 전하. ‘모든 것을 신과 그녀를 위해서’라고 적혀 있습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아무리 중세 기사도를 숭배한다지만 종교가 주요 원인인 전쟁에서 저런 구호를 내걸다니, 미쳤군.”

역시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크리스티안이 패전한 것은 신의 분노를 산 탓이라는 여론이 생겼다. 잠시 후 신교도 군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서쪽으로 궤주하기 시작했다. 일단 강 하나만 건너면 강변에 준비된 방어선에 의존해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네덜란드 국경도 훨씬 가까워진다. 그래서 개신교 기병과 보병 모두 탈출에 필사적이었다.

게다가 수 km에 이르는 보급마차 행렬이 가톨릭 기병대의 추격을 막아줄 듯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크리스티안이 종교 전쟁을 핑계로 신교와 구교 도시를 가리지 않고 약탈해서 모은 수백만 플로린이 마차에 실려 있었다. 틸리 백작이 이끄는 가톨릭 동맹군 및 제국군에게 따라잡힌 주요 원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화약을 실은 마차가 포탄에 명중해 대폭발을 일으키는 바람에 후퇴 행렬은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바뀌고 말았다. 15,000명에 달했던 신교도 군대는 기병 2천이 크리스티안을 따라 강을 건너 탈출했을 뿐, 나머지 보병 대부분이 전사하고 4천은 포로로 잡혔다.

1623년 8월 6일 네덜란드 국경을 20km 앞두고 베스트팔렌 지방 슈타트론 마을 동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신교도 군대가 이렇게 완패했다.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겸 할버슈타트 주교령의 영주 크리스티안이 이끄는 신교도 군대와 틸리 백작이 지휘하는 가톨릭 동맹 및 제국군 연합이 맞붙은 전투는 거의 일방적인 결과를 낳았다.

가톨릭 군이 25,000명이 동원됐다지만 신교도 군대가 네덜란드 영토로 도주하기 전에 따라잡느라 전투에 직접 참가한 병력은 가톨릭 군 전체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가톨릭군 사상자는 천 명 정도였다.

“이로써 길고 긴 추격전이 끝났군.”

“전하께서는 전쟁에 개입하고 싶은데 명분이 없는 것을 한탄하시는 것 같습니다.”

“올해는 참전할 예산도 없어.”

한성 사변에서 전투에 참가한 병력은 특전대대와 항공대 중에서도 극히 일부밖에 없었다. 그러나 창덕궁과 한성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추가 병력을 대거 파병하는 바람에 원정비용이 급증했다. 결국 나머지 병력을 파병한 것은 항공 수송 능력을 극한까지 시험한 것에 불과했는데, 연료비와 군수지원에 소모된 비용까지 합하니 어마어마한 예산이 들어가고 말았다. 앞으로 항공 수송은 자제하기로 했다.

이민호는 개인적으로 세계 제일의 부자였으며 고산국 경제가 성장하며 지하자원에 대한 그 동안의 투자가 결실을 맺어 매년 재산이 급격히 불어나고 있었다. 유럽에 원정군을 보낼 예산이 부족하면 내탕고를 열면 간단히 해결된다.

그런데 명분은 돈 주고 사기도 어려워서 미리 유럽에 교두보를 마련해둘 걸 하는 후회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유럽 전쟁에 참가하면 얻을 수 있는 실익이 하나도 없다는 문제까지 겹쳤다.

“덴마크 국왕전하께서 이 기회에 영토를 확장하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독일과 스코틀랜드에서 용병을 대규모로 고용하고 있습니다.”

“국외 영토는 베네수엘라만으로 충분하다니까 말을 안 듣네.”

“그럼 덴마크 국왕을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릴 필요는 없어. 크리스티안 국왕이 신성로마제국 영지의 공작이기도 하니까 내전에 참가할 자격이 있지. 쯧! 국왕이 나이가 들수록 초조해져서 그래. 국내 정치에서 이룬 업적에도 불구하고 군주라면 누구나 후세에 정복군주로 이름을 남기고 싶어지거든.”

고위 지휘관들과 참모본부 요원들이 일제히 이민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속국이나 영향력을 강하게 받는 나라들까지 합하면 지구 절반 이상으로 영토를 확장한 이민호를 정복군주라고 칭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전쟁으로 얻은 영토보다 빈 땅을 선점하거나 외국에서 매입한 영토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복하지 않은 탓에 그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아온 주민들을 지배하기 훨씬 쉬워진 면이 있었다. 북미 원주민이나 호주 원주민들은 자기들이 고산국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쉽게 받아들였다. 정복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늘어날 전사자 숫자도 크게 줄일 수 있었고, 정복과 복속 과정에서 밑 빠진 독에 물붓기가 될 예산 낭비도 거의 없었다. 경외심이 가득 담긴 눈길을 느낀 이민호가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험! 괜히 후대에 세계 통일을 하겠다고 설치는 군주가 나올지도 모르겠어. 몇 세대 후에는 가능할지도 몰라. 하지만 세계 통일이란 게 인류 발전을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

“하오나 전하! 세계가 한 나라가 되면 전쟁을 아예 없애거나 최소한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신 내전이나 독립전쟁이 자주 일어나겠지. 고산국처럼 영토가 넓은 나라에서 분열은 곧 멸망으로 직결될 수도 있어.”

“외국의 침략보다 내란이 더욱 두렵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내전이나 독립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고산국에 속한 다양한 민족들이 이전보다 삶의 질이 훨씬 높아지면서 고산국 중앙에 맹목적으로 충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지역 간에 경제적인 격차가 생기거나 정치적 불만이 쌓인다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봤다.

고산국의 앞선 군사과학을 앞으로도 국왕과 왕실이 계속 독점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세월이 흘러 지역이 분열되면 군대도 분열될 가능성이 높고, 이는 내전으로 치닫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분열돼 싸우느니 차라리 적대적인 국가가 존속해 내부 결속을 다지는 편이 훨씬 나았다.

“군대는 외적의 침략에 대한 방어뿐만 아니라 국가통일을 이루는 최후의 보루로서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키지 않더라도 농민 반란군을 공격해야 할 수도 있고, 비무장한 시민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일에 군대가 동원될 수도 있어.”

“군은 왕실에 영원히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전하!”

“영원이란 없다. 왕실 가족들에게는 이미 말해두었어. 나중에는 왕실이 아니라 국가에 충성하는 군대가 돼야 할 것이야. 정치체제가 급변하더라도 군대는 항상 제자리를 지키기 바란다.”

고위 장성들이 이민호가 하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충격적인 선언일 수 있었지만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왕실에서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입헌군주제를 실시할 것이라는 소문이 이미 오래 전부터 나돌았기 때문이다. 왕실이 고산국에서 영원히 전제왕권을 휘두르고 싶었다면 학생들 교과서에 입헌군주정이나 공화정의 장점에 대해 자세히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항상 욕심이 많다. 부모 세대에 비해 더 잘 살게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경제적 성장은 물론 모든 분야가 골고루 발전해야 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어.”

“전하께서 욕심이 가장 많으십니다. 세상 어느 나라 역사를 살펴봐도 젊은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잘 사는 경우가 오히려 극히 드뭅니다.”

“그럼 불만이 생기고 그 불만이 누적될수록 체제가 흔들리게 돼.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이 지혜를 모아 위기를 극복하면 좋겠지만,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버티면서 갈등이 더욱 심해지겠지. 이상과 현실은 확실히 구별하자고.”

이 시대에 이민호처럼 현실적인 군주도 드물었다. 장기적인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이상주의자 같으면서도 국가의 한계나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세자익위사 소속 핵심 기관인 세자호위대의 훈련을 참관했다. 왕궁경비대와 국왕호위대 요원들로부터 훈련을 받긴 했지만 아직 훈련 기간이 짧아 제대로 임무를 수행한다고 자부하기 어려웠다.

세자가 움직이기 전에 호위들이 이동경로에 대한 정밀수색을 마쳤지만 암살자는 상상하기 어려운 다양한 경로를 통해 갑자기 나타났다. 하수관거 뚜껑이 위로 열리는 동시에 암살자가 기관단총을 쏘는가 하면 굵은 가로수의 목질을 파고 숨어 있다가 독침을 날리기도 했다.

“암살자를 사살할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몸을 던져서 세자 저하를 보호하라고 했잖아! 그리고 호위 임무에 한해서는 세자 저하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너희들이다. 세자 저하가 가자고 했다고 그대로 따르면 안 돼! 경호 전문가는 세자 저하가 아니라 너희들이니까 너희들이 판단해야 한단 말이야!”

왕궁경비대장 민희가 훈련을 주관하면서 며느리 뻘인 세자 호위대원들을 닦달했다. 후궁 신분인 여자 호위는 10여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남녀는 직업으로서 경호원이었다.

세자가 국왕에 즉위한 다음 호위 숫자가 늘어나겠지만 후궁 신분인 호위는 많이 늘어나기 어려웠다. 숫자가 적은 대신 이민호의 호위들보다 훨씬 정예가 돼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세자 저하! 호위들을 지킬 생각을 말고 경호는 아예 호위들에게 맡기세요! 호위들은 특수 방탄복을 입고 있어서 총탄에 맞아도 쉽게 안 죽어요.”

“죄송합니다, 작은 어머니.”

“그럼 다시 훈련을 실시하겠습니다. 세자 저하가 길을 가시는 동안 자객이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세자 저하를 공격하는 상황입니다. 시작합니다.”

호위들이 세자를 중심에 두고 바짝 긴장하며 움직였다. 도로 좌우에 늘어선 건물 옥상도 남자 경호원들이 완벽하게 장악했다. 암살자 역할을 맡은 국왕호위 3명이 처마 아래나 굴뚝 속에 꼭꼭 숨었는데도 저격을 시도하기 전에 모조리 적발됐다.

훈련은 왕도 동쪽의 한적한 주택가에서 실시되고 있었다. 그래서 구경꾼들이 나와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구경했다. 구경꾼들 중에서 자그마한 아이가 세자 얼굴을 알아봤는지 축구공을 들고 달려왔다.

“세자 저하 천세!”

“꼬마야! 가까이 오지 마!”

- 피시식!

호위가 꼬마를 가로막는 순간 축구공에서 분홍색 기체가 뿜어져 나왔다. 폭탄으로 상정한 것이었는데 거리를 측정해 세자가 무사한 것으로 판정했다. 대신 꼬마, 사실은 왜소증에 걸린 성인 여자를 가로막은 호위는 순직한 것으로 간주됐다. 훈련은 계속 진행됐다.

- 펑!

“5층 건물 폭파 후 붕괴 상황! 세자 저하 우측 호위 3명 무력화된 것으로 판정한다.”

5층 공동 주택 입구에서 흰 연기가 치솟고 민희가 상황 부여를 하기 전부터 호위들이 급히 움직였다. 호위들이 세자를 번쩍 들어 올리다시피 해서 규정된 시간 내에 위험 구역에서 벗어났다.

아직 암살이 성공하지 못했다. 앞으로 20미터만 더 가서 세자가 방탄차에 타는 순간 훈련은 성공리에 마치게 된다.

- 빵빵!

드디어 경적을 울리며 방탄차가 나타났다. 뒷문이 열리고 세자가 서둘러 타려는 순간 방탄차 안에서 작은 총성이 울렸다. 세자가 얼굴부터 발끝까지 시뻘건 물감에 젖었다.

“세자 저하가 또 당했잖아! 방탄차가 바꿔치기 당하거나 탈취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지!”

민희가 세자 호위들을 혼냈다. 그 동안 이민호는 민영과 함께 훈련을 지켜보다가 혀를 내둘렀다.

“민희가 정말 꼼꼼하게 준비한 것 같다만, 호위하기 어려운 저런 곳에는 중요 인물이 아예 가지 말아야지. 아무리 훈련이라지만 너무한다.”

“그래도 다양한 상황을 설정해야 하는 경호 훈련이니까요.”

전직 호위대장이며 현재는 왕실 경호대장인 민영이 헤헤 웃었다. 이민호는 민영과 함께 세계를 누비던 때가 그리웠다.

“생각해보니 민영이를 낮에 보는 건 참 오랜만이야.”

“그렇죠? 그렇지만 저는 항상 주인님을 지켜보고 있답니다.”

현직 호위대장은 선영이지만 왕궁에서 외곽 경호는 민영의 지휘 아래에 있었다. 왕자와 공주들에게 붙여주는 경호원을 훈련시키는 사람도 민영이었다.

“항상 고마워.”

이민호가 민영과 뜨거운 눈길을 교환했다. 바로 이것이 세자 호위대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개똥이가 온 몸이 빨간 물감으로 물든 채 항의하러 왔다.

“너무 하십니다, 아바마마.”

“내가 보기에 세자호위대의 실력은 충분하다. 그러나 세자와 세자호위대 사이에 사랑과 신뢰가 부족한 것 같다. 사랑으로 맺어진 전우들에게 그 무엇이 두렵겠느냐?”

“그건 그리스 동성애 군대의 모토 같습니다만.”

“어쨌든 네가 먼저 사랑을 해줘야 한다. 호위들이 너 말고 누구한테서 사랑을 받겠느냐?”

이민호는 세자에게 세자호위대와 더 많은 시간과 공감대를 형성할 기회를 가지라고 충고했다. 후궁 신분의 호위들에게 정을 주는 것이 첫 번째 아내를 배신하는 것 같아 양심에 꺼린다는 세자의 감정은 충분히 이해해줄 만했으나, 호위들도 사람, 그 중에서도 여자였다.

“휴우~ 결국 제 잘못이었군요. 다시 차분히 생각해보겠습니다.”

“명심해라. 살아남는 것도, 후궁들을 다독이는 것도 국왕의 의무다.”

“존경합니다, 아바마마.”

군주에게는 정치 말고도 신경 쓸 게 참으로 많았다.

============================ 작품 후기 ============================

짧은 해외 원정 편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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