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10화 (859/1,000)

00910  99. 한성 사변  =========================================================================

반란 사건 마무리는 광해 임금이 세자와 협의하며 꼼꼼하게 진행했다. 반란군이 왕으로 옹립한 흥안군과 일부 주모자들은 생포되고 나머지 양반과 관료 대부분이 돈화문 앞에서 사살됐기에 체포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훈련대장 이흥립이 몇몇 수하들과 함께 북쪽으로 도주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괄이 기동전의 대가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흥립도 그에 못지않았다. 이흥립 일당을 체포하라는 어명을 지닌 파발마보다 더 빨리 이동하거나 산을 타고 넘어 매번 포위망을 쉽사리 벗어났다. 그러나 이흥립은 실제 역사에서 이괄의 잔당이 그런 것처럼 후금의 침공 때 길잡이가 될 일은 없었다.

“역도의 가족들을 남김없이 추포했습니다만, 아녀자들 위주로 일부가 사전에 자살했습니다. 관비로 떨어져 사람들의 놀림감이 될까 저어한 탓이겠지요.”

“쯧쯧!”

조선국왕 및 세자와 역모 뒤처리 문제를 협의하던 이민호가 한참 동안 혀를 찼다. 그러나 조선에는 조선의 법이 있기에 아녀자들이 불쌍하다고 반란 주모자의 가족들을 풀어달라고 요청하기도 어려웠다.

“역도의 가족들을 변경에 유배하거나 이주시키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양반이 천민으로 신분이 하락할 경우 특히 여자들이 살 의욕을 잃기 쉽습니다.”

“무관이나 고을 수령이 보호해주지 않을 테니 온갖 잡놈들이 집적대겠지요.”

이민호가 맞장구쳤다. 조선국왕이 뭔가 요청하려는 낌새를 채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역시나 예상이 들어맞았다.

“고산국이 급속히 팽창하는 와중에 새로 얻어 개척 중인 영토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들을 살려줄 겸 오지 개척에 투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산국이 만성적으로 인력이 부족하다지만 법원의 판결을 받은 범죄자가 아니면 강제노동을 시키지 않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범죄에 연좌제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조선 기준으로 범죄자라도 고산국 법에서는 무죄 방면해야 할 것입니다.”

“고산국에서 출간한 형법 관련 서적을 살펴본 결과 어느 지방에서 죄수 수용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우 다른 지방에 죄수들을 위탁 수용할 수 있다는 조항을 발견했습니다. 고산국과 조선국이 비록 지방은 아니지만 그 조항이 국가 간에도 준용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역도의 가족들에게 자애로운 왕법이 미치겠군요. 그렇다면 이 문제에는 적극 협조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시름 놓았습니다.”

역도의 가족들이 조선에 남아봐야 피차 불편할 일을 고산국에 떠넘긴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과 고산국, 역도의 가족들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이민호가 흔쾌히 받아들였다.

“혹시 연좌제에 걸린 가족들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천 명은 넘지 않을 것입니다.”

“헉!”

반란 주모자로 분류된 자들이 50여 명이었고 대다수가 반란 진압 와중에 사살됐다. 그러나 주모자들의 3족에 해당하는 친가, 외가, 처가 사람들을 다 합하니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역도의 3족에 포함된 성인 남자들을 남김없이 처형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으나 조선국왕은 사형 집행을 미뤄두고 있었다.

“오지에서 농사를 시키다가 한 세대가 지나면 풀어주겠습니다.”

“그 정도면 합당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연좌제는 과도한 면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농민이나 일반 서민이 아니라 양반가의 일원이라는 데에 있었다. 농사를 직접 짓기보다는 소작농이나 노비들에게 일을 시키는 일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이들을 집단으로 호주에 보내 목화밭에서 25년 동안 일을 시킨 다음 거주 이전의 자유를 주기로 했다. 목화밭 노동이 고달프긴 하지만 농업 기술이 부족한 외국 출신 농업 노동자들이 흔히 하는 일이었다. 역도의 3족에 해당하면서도 살아남은 데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접한 자들이 몹시 기뻐했다.

“반란에 참가했다가 항복한 군사들은 가담 정도에 따라 분류해 적극 가담자는 처형, 단순 가담자는 장 100대를 치는 것으로 용서해주기로 했습니다. 다만 후손들이 과거를 보기는 어렵겠지요.”

“뭐, 잘하셨습니다.”

반란군 군사로서 생포된 자가 천여 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 100여 명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흥안군도 친국을 받은 이후 처형시키기로 내부 결정을 내렸다.

“이 기회에 국내 정치세력 일부를 정리할까 합니다.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 계열 고관 일부에게 역모를 사전에 막지 못한 책임을 지워 파직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삼사에서 간관들이 이번 일에 무능한 대처를 한 그들을 탄핵하고 나섰습니다. 세자가 즉위할 때까지 계파 균형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조선국 국내 정치 문제는 조선국에서 알아서 잘 정리하십시오.”

“예. 결국 제가 결정해야겠습니다만, 이항복 문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역모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주모자들과 친밀한 관계라서 말입니다.”

이항복은 실제 역사에서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서 다섯 달 만에 병으로 죽는다. 이민호가 개입해 인목대비 자체가 없었으므로 이항복은 아직 생존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항복이 이번 역모의 주역인 김류와 친밀하다는 데에 있었다.

“백사 대감이라면 저하고도 친분이 좀 있습니다. 저를 벌하실 것인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긴, 조정에서 수십 년 동안 봉직하다 보면 많은 관료들과 친분을 트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항복은 조정 중신으로서 예우하기로 하고, 양위 후에 첫 번째 영의정으로 이원익을 선택했다. 기존 집권당인 대북과 역모를 일으킨 서인이 아닌 관료들 중에서 고르다보니 능력이 출중하고 여러 계파로부터 골고루 신망을 얻은 이원익이 가장 적임자였다. 이 결정에는 세자의 의중이 적극 반영됐다.

조선에서 당파는 학맥과 정치노선인 동시에 이익집단이었다. 당파싸움으로 인한 분란이 잦아 이 기회에 당파를 뿌리 뽑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끼리끼리 뭉치는 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의 본성이었다.

또한 한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는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보다는 차라리 당파가 존속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당파로 인한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탕평정책을 실시하고 이조전랑 추천권을 폐지하기로 했다. 하급 관료들의 인사에 국왕이 개입할 가능성이 훨씬 커졌다.

“그리고 이 조서를 보시겠습니까? 좋지 않은 일로 조서를 받들게 돼서 몹시 민망합니다.”

“천조에서도 조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방증이지요.”

마침 고산국 예조 판서가 북경에서 받아온 황제의 조칙을 광해 임금에게 바쳤다. 황제는 그 동안 이민호가 명나라 국내 정치에 간섭하지 않은 것을 기뻐하며 조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이민호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협조해주었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나고 단 며칠 만에 조서가 도착하다니, 세상이 많이 달라졌음을 실감하겠습니다.”

“다른 나라보다는 고산국에 가까운 조선이 훨씬 적응하기 쉬울 것입니다.”

“앞으로도 달라진 세상을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겠습니다.”

황제의 조서를 조선 전국에 파발로 보내 급히 반포했다. 고산국이 직접 군대를 보내 역모 진압에 개입한 것에 조선인들이 반발할 수 있겠지만, 명나라 황제가 보낸 조서는 현 임금을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예조 판서가 요구해서 형식상 황제가 고산국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는 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역모를 주도한 세력이 내세운 대의명분이 완전히 힘을 잃고 말았다. 반역자들이 내세운 명분이라곤 고산국에 의존하는 광해 임금의 하야와 자주독립이라는 구호뿐이었는데, 조서 덕택에 고산국에 대한 반발을 잠재울 수 있었다.

“즉위식은 길일인 여드레 후에 거행하기로 정했습니다. 경사스러운 날 고산국의 주인께서 자리를 빛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직접 참가하기는 그렇고, 예조 판서와 왕세자를 보내 경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즉위식 당일까지 고산국 병력이 남아있게 된다면 아무래도 조선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다. 국왕으로 즉위할 세자를 위해서라도 이쯤 해서 빠져 주는 게 좋았다. 광해 임금과 세자가 몹시 섭섭한 것 같았다.

“곧 즉위할 세자에게 좋은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세자는 이 기회에 친위군을 확장해두는 게 좋겠네. 특히 내금위와 도성 방어군은 국왕이 직접 장악하는 편이 나을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이번 일로 군권 장악이 중요함을 뼈저리게 느꼈사옵니다.”

조선국왕에게 친위군이 생기는 것을 모든 당파에서 반대하겠지만 역모가 외국군에 의해 진압된 것을 명분으로, 그것도 고산국 군대가 한성에 진주한 동안 군제 개혁을 추진하기로 했다. 조선 초기를 제외하면 정조 때 장용영이 왕권 강화를 위해 국왕이 직접 장악한 유일한 군사조직이었고 나머지 군대는 항상 비변사나 문무 관료들이 손에 쥐었다. 이제부터 관료들은 악몽을 꾸게 될 것이다.

세자의 즉위를 며칠 앞두고 고산국 군대가 한성에서 차례로 철군하는 동안 이민호는 외손자의 재롱을 보면서 소일했다. 자그마한 아기가 외할아버지의 수염을 쥐기 위해 비틀비틀 걸으면서 다가올 때마다 이민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전하! 혹시 원손 아기씨가 좀 더 장성하시면 다른 왕자님들이나 대국의 황자들처럼 고산국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지요?”

“무슨 말씀이시오, 세자빈? 신분이 어떻든 성인이 될 때까지 아이를 어미 품에서 떼어낼 일은 없을 것이오.”

지은 공주는 아직도 엎드려서 지내고 세자빈이 걱정스레 물었다. 지은이 낳은 아기가 어느새 원손으로 공인받았다.

사실 조선 왕자들이 고산국에 유학 간 것은 말이 유학이지 유배 혹은 인질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런 관행이 조선의 왕통을 이을 원손에게 적용될 수는 없었다.

“아! 그렇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왕통을 이을 후계자가 외국에 유학 가는 일에는 신중해야 할 것이오.”

“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전하.”

원손이 조막만한 손을 뻗어 이민호의 염소 같은 수염을 잡아당겼다. 세자빈이 당혹스러워하는 동안 원손이 까르르 웃었고 이민호가 원손을 안아 칭찬해주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몹시 아팠지만 꾹 참았다.

“대신 원손이 조금 더 성장하면 여러 가지를 가르칠 개인 교사를 파견해드리겠소. 아무래도 여성 교사가 낫겠지요.”

“아아! 예. 왕족에게는 어릴 때부터 엄격한 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산국의 앞선 학문을 배운 뛰어난 교사를 보내주십시오.”

세자빈은 잔소리가 심한 중년의 여성 교사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영화 <왕과 나>나 <사운드 오브 뮤직>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급 젊고 아름다운 가정교사를 준비할 계획이었다. 궁궐에 파란이 일고 지은이 피해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민호는 멀리서 지켜보면서 즐기기로 했다.

혹은 그 교사가 19금 영화 <개인교수>의 여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상대 미성년자의 성별을 가리지 않고 범죄행위겠지만 남자로서 꼬마 주인공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 왔다. 공주 지은이 무수리들의 도움을 받아 만화를 그리다가 이민호를 맞이했다.

이민호는 예나 지금이나 취미를 직업으로 삼게 된 사람들이 항상 부러웠는데 지은도 드문 행운아들 중의 하나였다. 지은은 고산국과 조선을 아우르는 문화계의 거목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혈통적, 심리적으로 점차 멀어지는 고산국과 조선을 끈끈히 이어주는 문화적 가교가 지은이 진정 원한 역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지은아. 이제 애비는 왕도로 돌아가겠다.”

“고마웠어요, 아바마마. 와주셔서 정말 기뻤어요.”

“얼른 나아라. 하필 엉덩이를 맞았느냐?”

지은이 아픈 와중에도 활짝 웃었다. 공주 지은이 비단 이불 안에 엎드린 채 작별을 하게 돼서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은이 앞으로 보름도 안 돼서 털고 일어날 것이라고 어의가 보고해서 다행이었다. 지은이 완치될 때까지 어의 부부가 창덕궁에 남기로 했다.

“앞으로 큰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왕실에서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항상 조심하도록 해라.”

“예. 혜진 어머니 덕택에 수라간은 걱정 없어요.”

“독극물 감별 기구는 믿지 마라. 항상 사람이 문제니까.”

“예. 세자빈 마마께서 관할하시겠지만 저도 도울게요.”

이민호는 지은이 불쌍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지은이 비록 왕비가 되지 못하겠지만 원손이 왕으로 즉위하면 추존 왕비가 될 수도 있었다. 이민호는 딸이 일생을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이민호가 원하는 것은 그뿐이었다.

원정을 다녀오면 항상 혜영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혜영이 원정 비용 명세서를 이미 뽑아들고 이민호를 국왕집무실에서 맞이했다.

“이번 역모 진압도 원정이라 친다면 원정 비용이 자그마치 6백만 원이나 들어갔어요. 올해 정부 예산 예비비의 대부분을 이번 원정에 소모했다고요.”

“내 딸의 목숨을 구하는 군사작전이었으니 내탕고에서 지불하지.”

어차피 지하 수장고에 잔뜩 쌓인 황금 따위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딸의 미소와 손자의 재롱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됐어요. 조선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후궁들이 몹시 기뻐한 것으로 충분해요. 이제부터는 안심하고 공주를 외국에 시집보내도 괜찮겠대요.”

“더 늦기 전에 얼른 보내, 제발!”

왕궁에 돌아온 이민호는 노처녀 딸들을 시집보내지 못해 안달하는 평범한 아버지에 불과했다. 이번 일이 있고 나서 무수히 많은 외국 왕실에서 고산국 왕실에 국혼을 신청했다. 그러나 노처녀 공주들이 여전히 여유를 부려서 이민호를 절망에 빠뜨렸다.

============================ 작품 후기 ============================

한성사변 편을 마치겠습니다.

이후 조선은 실제 역사의 진행방향과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