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09화 (858/1,000)

00909  99. 한성 사변  =========================================================================

창덕궁과 한성에 대한 병력 증강은 새벽까지 계속됐다. 항공 정찰 결과 한성으로 접근하는 조선군 병력의 움직임은 없었다. 그래서 각 부대에 교대로 휴식하도록 지시했다. 두세 시간 쪽잠을 자봤자 더 피곤할 것 같지만 밤을 꼬박 새우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새벽에 전술 차량 뒷좌석에서 잠깐 눈을 붙인 이민호가 이른 아침에 감옥을 찾았다. 흥안군이 군복을 입은 이민호를 알아보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산국 장군이냐? 나는 한때나마 왕이었던 몸이다. 당장 네놈 주인을 불러와!”

“나는 나의 주인이고 너는 너의 주인이다. 할 말 있거든 해보아라.”

“혹시 고산국 국왕전하이십니까?”

“그래. 너 같은 놈들을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화도 안 난다.”

이민호가 간수가 앉던 낡은 나무 의자를 끌어와 옥문 앞에 앉았다. 평소 생활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왕족인 흥안군이 이민호를 비웃었다.

“역시 무관이 왕이 되더니 행동거지가 고상하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조선을 장악한 다음 나라를 키워 고산국에도 예의범절을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고산국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예의범절만으로도 차고 넘친다네. 어른들도 꾸준히 예절 교육을 받지. 그런데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자넨 며칠 못 가 굶어죽겠군.”

평생 궂은일을 하지 않고 직접 몸을 움직이는 일을 천하게 여기는 왕족이라도 솔선수범이나 권농일의 뜻을 알고 있었다. 조선에서 사대부가 편히 지내며 살찌우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이는 탐관오리나 무능한 관료에 대한 틀에 박힌 비난 문구였다.

“흥! 어째서 외국 국왕께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셨습니까? 조선국왕이 저를 친국하기 전에 비참해진 제 꼴을 보러 오신 겁니까?”

“조선국왕이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고, 나는 내 딸을 지키러 온 것뿐이야. 내 딸이 총탄에 맞았더군. 더 늦게 왔더라면 큰 일 날 뻔했어.”

흥안군의 안색이 허옇게 변했다. 이민호의 자식 사랑은 주변국에도 잘 알려져 있어서 흥안군은 자기가 곱게 죽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세자와 세자빈, 후궁들을 곱게 생포하라고 아랫것들에게 일러두었습니다. 고산국 공주님이 흉탄에 맞은 것은 제 책임이 아닙니다.”

“선종 임금의 자식들이 하나 같이 다 그래. 그저 제 것만 챙길 줄 알지 남에 대한 배려나 책임감 따위는 하나도 없단 말이야.”

인성을 따져보면 광해 임금만 조금 낫지 다른 왕자들은 하나 같이 임해군의 판박이였다. 흥안군도 마찬가지였고 정원군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 그 자식들 중에서 인조가 되는 능양군도 삼촌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자고로 힘을 가진 자가 누리는 법입니다.”

“여러 가지 유교 경전을 배워도 좋은 구절은 다 잊어먹고 꼭 그런 구절만 인상에 남겠지. 내가 자네를 마음대로 해도 되겠나?”

“당연히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 비슷한 역모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고산국이 다시 개입할 것입니까?”

“내 딸이 조선 왕실에 있는 동안에는. 참! 외손주와 그 핏줄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조선 왕실을 보호할 걸세.”

“쳇! 차라리 조선을 그냥 속국으로 삼아버리십시오.”

“그럴 수는 없지. 귀찮거든.”

더 이상 꼴 보기 싫어 옥문에서 나왔다. 흥안군을 몇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왕족이 역모에 참가한 이상 살아남지 못할 테니 굳이 모욕을 가할 필요도 없었다.

“고산국 국왕전하 납시옵니다~”

이민호가 내실 밖에서 헛기침을 하자 동궁 소속 상궁이 내관처럼 길게 소리를 질렀다. 왕도 고북에서 날아온 어의 부부가 지은 공주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들었다. 다행인지 몰라도 총알이나 파편이 몸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내실에 들어가 보니 지은 공주는 비단금침에 엎어져 있고 어의 부부와 세자빈이 공주를 돌보고 있다가 일어섰다. 앉으라고 명하자 부인 어의가 다시 지은의 손을 꼭 쥐면서 따스한 눈길을 보냈다. 지은을 비롯한 공주들이 다 커서도 여전히 품에 안겨 칭얼댈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부인 어의였다.

“이제 좀 괜찮으냐?”

“예, 괜찮아요. 괜찮긴 한데......”

“뭐가 문젠데?”

“세자 저하께서 저를 무서워하시는 것 같아요. 아녀자가 총을 들고 설쳤으니 좋은 소리 듣지는 못하겠지요. 저하께 미움 받을까 무서워요. 히잉~”

“낄낄!”

궁중 여인들이 입는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무거운 가채를 머리에 얹은 채 소총을 연사하는 지은의 모습이 상상되자 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전투 중에 사람을 죽인 심리적 충격은 덜 받은 것 같았다.

고산국 왕실 식구들과 군인들은 사격 훈련을 받을 때 소와 돼지 등 살아있는 동물을 상대로 총을 쏘아 죽이는 과정을 마지막으로 거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유전자에 깊이 각인됐기에 이렇게라도 해서 실전에서 적군을 사살한 순간의 심리적 충격을 줄이려 했다.

“세자빈이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시오.”

“말씀을 낮춰 주시지요, 전하.”

“이게 편하오.”

이민호는 세자에게 처음부터 말을 낮췄었고 광해 임금에게도 주눅 든 적이 없었다. 굽힐 일도 없고 고산국이 강하다 해서 조선국왕을 깔보는 것도 아닌, 항상 동등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세자빈에게는 함부로 반말을 하기 어려웠다. 딸인 지은이 형님으로 모시는 사람이라 이민호가 대하기에도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은 공주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제발 말씀 낮춰주세요, 형님.”

조선 왕실에서 지은의 공식 명칭은 동궁의 내관(內官) 직제 중에서 가장 높은 종2품 양제(良娣) 고 씨로서 종5품 소훈(昭訓)인 다른 후궁들보다 훨씬 높았다. 조선 동궁에서도 고산국 후궁처럼 여러 여자가 한 남편을 두고도 씨앗 싸움 대신 서로 의지하고 돌보며 사는 듯했다.

세자빈 밀양 박 씨는 이 시대 궁궐의 여자치고는 매우 강단이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인조반정 이후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가 위리안치된 집에서 땅굴을 파고 탈출하려다가 들키자 자결한다.

“세자 저하께서는 이번 일을 몹시 부끄러워하십니다. 역모 사건을 제대로 막지 못한 일뿐만 아니라 지은 공주님께 구명지은을 입은 사실도 말입니다.”

“고산국에서는 부부가 서로 지켜주는 게 당연한 건데요.”

“어디서건 그게 맞습니다. 그래서 주상전하께서 안 계신 지금 세자 저하께서 비변사와 병조, 내금위를 장악한 다음 남는 시간에 활쏘기 연습을 하고 계십니다. 다음부터는 지은 공주님을 제대로 지켜드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머머!”

지은이 좋아 죽으려 했다. 이민호는 지은이 꽤 똑똑하다 여겼는데 세자빈에 비해서는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 같았다.

“국왕전하.”

“말씀해보시오, 세자빈.”

“제가 비록 세자빈의 중임을 맡고 있다 하나 더 이상 아기를 낳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자 저하와 조선의 미래, 그리고 왕통을 이으실 아기씨를 위해서는 장차 지은 공주님이 왕비마마가 되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저는 사가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안 돼요, 형님!”

지은 공주가 조선 세자의 후궁 자리에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부부의 연을 맺은 세자빈을 내치는 것은 명분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지은이 극력 반대했다.

“세자빈은 들으시오.”

“예, 전하.”

“왕실 식구라면 누구든지 행동하기 전에 정치적인 판단을 해야 하고, 행동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오. 세자와 조선국에 대한 세자빈의 충심은 충분히 이해하겠소.”

“안 돼요, 아바마마!”

이민호가 지은과 눈을 맞췄다. 안타깝던 눈길이 부녀지간에 무언의 대화가 진행된 이후 따스하게 변했다. 그러나 엎드린 채 끙끙대면서 그래봤자 웃길 뿐이었다.

“결혼 전에 지은 공주가 어떤 정치적 판단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하오. 물어볼 필요도 없었소. 나는 다만 공주가 배우자를 선택했기에 인정한 것뿐이고, 지은 공주가 고산국과 조선국 두 나라를 위해 결정했다고 어렴풋이 믿고 있을 뿐이오.”

“지은 공주님은 따스한 분이십니다. 조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해줄 것입니다.”

“그렇소. 그런데 지은은 세자가 이미 성혼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후궁이 되어도 좋다고 했소. 그러니 세자빈이 지은에게 장차 왕비 자리를 양보할 필요가 전혀 없소이다. 앞으로는 지은을 곤란하게 하지 말아주시길 당부 드리오.”

“황공하여이다, 전하. 제가 지은 공주님의 바람막이가 되어드릴 것입니다.”

세자빈이 엎드린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사실은 이민호가 세자의 자리를 확실히 보장해준 것이니 세자빈이 감사할 만했다.

“그리고 고산국이 국시로 아기, 아니 홍익인간을 내세웠지만 세자빈이라는 개인 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면서까지 추구해야 할 정의란 있을 수 없소.”

“지은 공주님이 조선에서 훌륭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제 한 몸을 바쳐 보필하겠사옵니다.”

“아니에요, 형님. 제가 형님을 보필해드려야지요.”

세자빈과 지은 사이에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 권모술수, 음모와 계략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지은이 낳은 아기도 세자빈과 함께 키우며 행복에 겨운 듯했다.

이민호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마침 조선국왕이 환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궁중의 내시들이 한성 거리 사방으로 쏘다니면서 임금을 찾아 나선 이후의 일이었다.

이민호가 내실을 나섰다. 그런데 광해 임금이 동궁인 중희당으로 직접 찾아왔다. 뜰에 마주 서서 서로 읍을 한 다음 위로를 겸한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 뒤에서는 고산국 특전대대원과 내금위 위사들이 서로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조선 왕실에서 불행한 일을 겪으실 뻔했습니다. 무사하셨으니 실로 다행입니다.”

“고산국은 역시 조선의 훌륭한 맹방입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편히 말씀을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옮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습니다. 나무라신다면 얼마든지 질책을 받겠습니다.”

조선국왕은 눈치도 빨랐다. 이민호는 광해 임금에게 할 말이 참으로 많아서 벌써부터 이 갈리는 소리가 입술 밖으로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은 세자의 교육을 위한 건물인 성정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식 자랑 같아서 말씀드리기 꺼려지지만, 세자가 뒤처리를 아주 잘한 것 같습니다. 비변사와 병조, 내금위가 권력의 핵심기구임을 세자가 제대로 파악하고 모두 장악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제가 하루 동안 궁궐을 비웠는데도 모든 관청이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역적들은 물론 가족까지 잡아들여서 제가 어명을 따로 내릴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요?”

조선에서는 비변사가 모든 군무의 최상위 기관이었으나 비변사 문무 당상들의 합의체라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수도 한성의 수비에 문제를 드러내 훈련대장이 무단으로 사대문과 창덕궁의 대문을 반란군에게 열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비변사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훈련도감의 수장인 훈련대장에게 군사적인 실권이 거의 없었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어차피 왕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져서 제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거요?”

“세자에게 양위를 하고 저는 상왕으로 물러날까 합니다.”

그러나 만약 상왕으로서 군권을 쥐고 휘두른다면 양위를 하나마나였다. 세종 즉위 초반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그랬고, 일본 천황제에서도 한때는 천황이 아니라 퇴위한 다음 상황이 되고 나서야 실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소만. 세자가 아직 배울 것이 많을 것이오. 그리고 고산국이 압력을 가해 조선국왕을 강제로 퇴위시켰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지도 않소.”

“제가 복위하거나 간섭할까 봐 걱정되십니까? 양위한 뒤에는 아예 함흥이나 전주로 거처를 옮길까 합니다.”

국왕이 생존 중에 세자에게 양위하는 절차가 이민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죄인의 복장을 갖춘 세자가 임금이 거하는 궁 앞에 거적을 깔고 엎드려 며칠이나 석고대죄를 하며 사양해야 하는 것이 공식 절차였다. 광해군이 왕자였을 때 선조 임금이 심심하면 양위소동을 벌여 이런 이벤트를 즐겼었다.

“퇴위하겠다는 이유가 무엇이오?”

“왜와 후금이라는 강력한 외적이 차례로 멸망한 이후 더 이상 제가 국정을 이끌어가기 버겁습니다. 저보다는 고산국의 든든한 지원을 받는 세자가 즉위해야 국정이 훨씬 안정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군정이되 외국군의 무력에 의존하는 군정이 될 것 같소. 독립국으로서 자존심 상하지 않겠소?”

“양반이나 서민들이 자존심 상할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한성을 장악한 고산국 군대가 장기간 주둔하지 않을 것임을 다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주둔할 예정이라면 천막을 칠 것이 아니라 집을 구했겠지요.”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릴 걸 그랬소.”

성을 포위한 다음 장기간 주둔하는 척해서 조기에 방어군이 항복하도록 유도하는 군략이 있었다. 조선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이민호는 여차 하면 지은을 설득해 고산국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지은이 남편을 두고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세자가 국왕으로 즉위한다면 문제가 전혀 달라졌다.

“원자가 자라서 왕통을 이어받는다면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오래도록 염려하시던 조선 왕실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 같습니다.”

“내가 뭘 걱정했단 말이오?”

“임해군 형님 같은 패륜아가 더 이상 조선 왕실에서 생기지 않는다면 저도 참으로 좋겠다는 뜻입니다.”

“그건 확률 문제라서 나도 모르오.”

선조 임금의 후손들 중에 유독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진 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반사회적 인격 장애가 유전과 성장 과정 양쪽에서 영향을 받는다면 이민호의 핏줄과 합쳐진다 해도 달라질 것은 별로 없었다.

멀쩡하다고 자부하는 이민호에게도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진 아이가 둘이나 태어났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항상 전 인구의 4 혹은 5퍼센트를 차지한다면 어쩔 도리 없이 함께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법과 제도로써 그들을 억눌러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길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었다.

============================ 작품 후기 ============================

역사와 다른 의외의 양위가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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