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08화 (857/1,000)

00908  99. 한성 사변  =========================================================================

“비, 빙장어른.”

“못난 놈! 제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한 놈!”

낮게 깔린 목소리에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세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세자빈은 이민호가 두려워 부들부들 떠는 와중에도 지은 공주를 보살피려 애썼다. 세자빈 품에 쓰러진 지은이 헐떡이면서 간신히 눈을 떴다.

“아바마마! 세자 저하를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저도 어머님들처럼 제 남편을 지키다가 다친 것뿐이니까요.”

“지은이 이 불쌍한 것! 네가 도대체 뭐가 모자라서 조선에, 그것도 세자의 후궁으로 시집갔느냐?”

“세자 저하는 제가 선택한 분인 걸요?”

이때 특전대대 의무병 둘과 간호사 자격증을 획득한 호위 둘이 지은을 들것에 실어 내실로 옮겼다. 들것이 움직이는 길을 따라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서 이민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의무병들은 남자라서 바로 쫓겨나고, 무수리들이 붕대와 뜨거운 물을 준비하느라 황망하게 움직였다. 본대를 따라갔던 군의관이 급히 연락을 받아 전술 차량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세자는 들어라!”

“예! 전하.”

“만약 지은이가 잘못될 경우 이번 일을 일으킨 역적들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조선 왕실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가 내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전하의 분노를 감당할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책임을 제가 지는 것으로 그쳐주시길 앙망하나이다.”

세자가 이민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떠올렸는지 부들부들 떨었다.

건국 초와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고산국과 조선을 단단하게 묶었던 연결고리가 느슨해져서 조선을 치는 것이 지금은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조선이 현재 일본처럼 고대 군장국가로 돌아가는 것도 전혀 상상만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은 공주가 총탄에 맞은 것이 확인된 이상 세자를 꾸짖는 일은 부질없었다. 군의관을 독촉하려고 대문 밖에 세워진 전술 차량으로 돌아가는데 마침 군의관이 탄 차량이 중희당 앞에 도착했다.

“전하! 공주마마께서 중태라고 들었습니다. 하온데 저는 남잡니다.”

“의사는 의사, 환자는 환자일 뿐 성별 구분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대는 지금부터 왕도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남자가 아니다.”

“조금 당혹스럽지만 어명을 따르겠습니다.”

“어서 가!”

군의관이 ‘나는 남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내실로 달려갔다. 간호장교는 다음날 아침 한성에 설치될 야전병원을 따라 움직이기로 예정됐기에 호위들이 임시로 간호장교 역할을 맡기로 했다.

고산국에서는 의사가 남녀 가리지 않고 환자를 돌볼 뿐만 아니라 흔히 남자 산부인과 의사가 산모에게서 아기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유독 왕실 여성들에 대해서는 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왕궁에 상주하는 어의 부부 중에서 후궁의 가슴까지 옷을 올려 청진기를 대는 정도까지는 남자 어의가 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여자 어의가 담당했다.

“대원수는 왜 아직 연락이 없지?”

“방금 편전과 침전을 장악했어요. 하지만 조선국 국왕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해요. 입직 승지는 물론 내관과 궁녀들도 국왕의 위치를 모르겠다고 해요.”

통신수로서 전술 차량에 남아있던 호위 선주가 보고했다. 반란군이 궁궐을 장악한 동안 숨어있던 승지와 입직 사관들을 비롯해 선전관 등이 이민호에게 얼굴이라도 비추려고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그러나 피아 구별이 쉽지 않아 특전대대 병사들이 그들을 무장 해제시킨 다음 접근을 차단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궁인들이 밤에 사용하던 후원 사다리를 타고 궁궐 담벼락을 넘어간 광해 임금은 사복시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숨어들었다가, 의관이 고발해서 반란군에게 붙잡힌다. 세자 이지는 왕을 뒤쫓았으나 찾지 못하고 장의동 민가에 숨었다가 잡힌다.

“우리가 개입한 것을 알아챘을 테니 곧 돌아오겠지.”

“그리고 역적들이 왕으로 옹립한 흥안군 이제를 비롯해 주모자들을 생포했어요. 함경 북병사 이괄을 비롯해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사살했어요.”

실제 역사에서 인조가 되는 능양군을 비롯해 반정을 일으킬 만한 왕족, 혹은 반정에서 왕으로 추대될 만한 왕족은 유학이라는 명목 하에 고산국에서 강제로 군사훈련을 시킨 다음 대학에 재학시켰다. 고산국과 조선 왕실의 이익이 합치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광해 임금의 형제 왕자나 조카들을 모조리 고산국에 억류할 수 없어서 이렇게 한성에 소수 왕자들이 남아있었다. 그 중에서 흥안군은 어려서부터 활달하고 권력욕도 강해서 요주의 인물로 꼽혔다. 실제 역사에서는 이괄의 난 때 인조를 호종하다가 탈출, 한성으로 가서 이괄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됐다가 처형당하는 인물이었다.

“흥안군이 한성에 남아있었나? 이괄은 북병사라면서 왜 한성에 있지?”

“얼마 전에 북병사에 제수된 다음 아직 임지로 출발하지 않았다고 해요.”

“알았다. 역도들을 꽁꽁 묶어서 감옥에 처박아 놓으라고 해.”

역모에 참가한 자들은 조선국왕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아마도 가문 전체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괄은 기동전의 대가로서 뛰어난 지휘관이었지만 상대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이민호가 다시 중희당으로 들어섰다. 내실 앞에서 세자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이민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불쾌해진 이민호가 고개를 돌렸다.

- 부다다다다다~

현대 중국이나 북한처럼 고산국에서 직승기라 불리는 헬리콥터가 창덕궁 상공에 나타났다. 제주목에서 연료 보급을 받고 뒤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건쉽 역할을 맡은 직승기들이 궁궐 상공을 선회하는 사이 수송 직승기들은 각 대문 안쪽에 착륙해 해병대원들을 쏟아냈다. 돈화문을 제외하곤 궁궐을 지키던 시위 군사들이 죄다 도망가는 바람에 고산국 해병대원들이 대문과 여러 거점을 지켰다.

청파 들판에 위치한 임시 활주로도 헬기를 타고 온 해병대가 장악해서 이때부터 수송기들이 안전하게 이착륙하고 연료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밤새도록 수송기들이 한성과 고산국을 왕복해 보병 1개 연대와 기병 1개 대대가 추가로 파병됐다. 그리고 비록 포대가 제외된 감편이긴 해도 기계화 보병대대가 한성에 입성해 장갑차들을 궁궐 사방에 배치할 수 있게 됐다. 이제부터는 두려울 게 없었다.

“주인님! 방금 이천 부사가 이끄는 보기 600여 명이 동대문을 넘었어요.”

호위 선주가 커다란 무전기를 등에 짊어진 채로 와서 보고했다. 호위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신분 높은 후궁들이 남자 군인들과 똑같이 행동하게 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동대문으로 향하던 우리 해병대 1개 소대가 그들과 대치하고 있어요. 이천 부사가 하는 말로는 조선국왕을 호위하기 위해서 급히 왔대요.”

“다른 고을 수령도 아닌 이천 부사가 이 시간에 병력을 이끌고 와? 반란군이다. 직승기들을 보내 제압하라고 해!”

그런데 오해가 있었다. 이천 부사 이중로는 수령이라서 축지법을 쓴 것이 아니라 경기 방어사를 겸했기에 이 시간에 병력을 지휘해 한성에 도착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중로가 이끄는 병력이 이천부 소속이 아니라 경기도 소속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중로 역시 이번 반란에 참가해 병력을 동원한 자였다.

공격 명령은 원수부를 거쳐 즉각 수행됐다. 해병소대가 위치한 곳에서 하늘로 신호탄이 솟아오른 직후 헬리콥터 좌우 승강구에 탑재한 기관총이 지상을 향해 불을 뿜었다. 맹렬한 총소리가 한성의 밤하늘을 뒤흔들고 창덕궁까지 들렸다.

조선군에게는 헬리콥터에 저항할 수단이 없었다. 포수 몇 명이 하늘을 향해 화승총을 쏘다가 기관총 연사에 쓰러졌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 사람들은 고산국 군대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 헬리콥터를 상대로 전투를 지속할 군대도 없었다. 교전이 시작된 직후, 이중로가 이끄는 병력에서 사상자가 채 1할도 나오기 전에 부대 전체가 와해됐다. 이천 부사 이중로는 도주하는 병사들을 막으려다가 고산국 해병대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밤이 됐는데도 전투 한 번 없이 도성의 문들이 자꾸 열리고 있어요. 일개 수문장이 아니라 도성의 수비를 총괄하는 고위급 지휘관이 내응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게 누구지?”

호위대장 선영은 참모 역할도 충실히 수행했다.

“훈련대장 이흥립이 반역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이 밤중에 그 자를 어떻게 찾아서 체포하지?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어.”

이 시기에 사대문을 비롯한 도성의 수비는 훈련도감의 관할이었다. 그리고 창덕궁의 대문인 돈화문 경비를 맡은 병력의 소속 기관이기도 했다. 실제 역사에서 훈련대장 이흥립이 역모에 적극 가담하는 바람에 반정이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한성 사람들은 우리 고산국에서 조선 왕실을 전복하는 것으로 오해할지도 몰라요.”

“염려할 것 없어. 조선 국왕이 돌아오면 금방 안정될 거야.”

광해 임금은 도주하고 비변사는 반란군에 의해 기능이 마비됐다. 그러므로 조선군을 통합 지휘할 구심점이 잠시 사라진 상태였다.

조선에서 병마절도사나 고을 수령이 자체 판단만으로 병력을 이동하는 것이 극히 어렵기에 조선군이 국왕을 시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궁성으로 몰려올 가능성은 적었다. 이천 부사 이중로의 예에서 봤듯이 병력을 움직였다면 반란군에 속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주인님! 조선국왕은 행방을 모르고 궁궐과 도성은 우리가 완전히 장악했어요.”

“그래서?”

“아뇨. 그냥 그렇다고요.”

선영이 뭔가 건의하려다가 이민호의 표정을 보고는 바로 포기했다. 무엇을 건의하려 했는지 알 만했지만 조선은 이민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공주 지은이 조선에 시집가도록 허용한 것은 고산국이 조선 왕실과 조선국의 안전을 보장한 정치적 행위였다. 조금 전에 이민호가 세자를 위협하긴 했지만 괜히 이번 일을 핑계로 약속을 어길 의향은 전혀 없었다. 물론 지은 공주가 죽을 경우 두 나라의 관계가 경색되고 무역이 막힐 것은 확실했다.

아직도 조선에서 고산국으로 이민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땅을 소유하지 않은 자라면 양반과 농민, 유민을 가릴 것 없이, 그리고 노비라면 주인 혹은 국가에 납속한 다음 언제라도 고산국에 이민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을 군사적으로 점령한다 해도, 경직된 유교적 신분사회와 탐관오리들의 학정 아래 신음하는 조선 민중을 구원해준다는 의미가 전혀 없었다.

또한 조선 하층민들에게 이민이라는 숨통이 트여 있어서 실제 역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우가 훨씬 나았다. 조선 조정 입장에서도 고산국과 무역을 하면서 세입이 충분하기에 농민들에게서 세금을 과중하게 걷을 필요도 없었다. 후금이 멸망한 이후 군역도 예전처럼 느슨해져서 부담이 훨씬 덜했다. 이래저래 고산국이 조선을 칠 이유나 명분이 없었고, 이 시기 고산국에 있어서 조선은 그저 이웃나라의 하나일 뿐이었다.

“전하! 전하!”

“군의관! 지은이는 어떻게 됐나?”

군의관이 내실 밖으로 나와서 이민호를 찾았다. 군의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저는 남자가 아닙니다. 아니, 공주 저하께서는 다행히 무사하십니다.”

“무슨 소리야? 총탄에 맞아 피를 줄줄 흘렸어. 당장 듣기에 좋으라고 없는 말을 지어낼 필요는 없네.”

“흉탄에 맞으신 부위가 말씀드리기 몹시 민망하오나, 둔부이옵니다.”

“엉덩이라고? 피를 엄청 많이 흘리던데 피탄 부위가 가슴이나 배가 아니야?”

교전 중에 총상을 입더라도 주로 엉덩이에 맞아 목숨을 건진다는 이차대전 당시 미군 공수부대 이야기를 옛날 어느 전쟁 드라마에서 본 것 같았다. ‘서서 쏴’ 특유의 사격자세 때문에 둔부 측면을 노출했다가 거기에 맞은 모양이었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구멍이 네 개나 생겨서 피를 많이 흘리신 것이지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수혈이 필요한 정도도 아닙니다.”

“험! 험! 불행 중 다행이군.”

민망해서 이민호가 연신 헛기침을 했다. 현재 부상 부위에 대한 지혈과 소독을 마쳤으니 왕도에서 부인 어의를 불러서 수술하기로 했다.

“그런데 조선국왕은 왜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거야? 선주야, 다시 대원수에게 연락해 봐.”

“예. 그런데 우리가 국왕을 해칠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어요.”

“내가 조선에 욕심을 낼 이유가 없는데 말이야.”

일단 궁궐에는 조선국왕이 확실히 없었다. 날이 밝아 관료들이 출퇴근과 외출을 자유롭게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광해 임금이 안심하고 환궁할 것 같아 더 이상 찾기를 포기했다.

“해병 1연대장에게서 입전이에요. 사대부들이 활과 칼을 들고 돈화문 앞에 몰려왔어요.”

“뭐야? 조선국왕을 구하겠다는 건가? 오해한 모양이군.”

“아니요. 우릴 도와서 고산국과 조선을 통일하는 역사에 동참하겠대요.”

“지랄! 한창 총소리가 울릴 때는 벌벌 떨고 있다가 다 끝나고 나니 공신이 되고 싶은 모양이지.”

하늘에 공포를 쏴서 사대부들을 해산시키도록 명령했다. 고산국이 눈부시게 발전하는데도 애써 무시하던 양반들이 이 상황에서는 기회주의자의 면모를 충실히 드러냈다. 몹시 혐오감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지은의 희생을 바탕으로 조선을 흡수하는 일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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