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07 99. 한성 사변 =========================================================================
“아아악!”
돈화문 앞에 몰려 있던 반란군 병사들이 한꺼번에 줄줄이 쓰러졌다. 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기관총 연속 사격음보다 훨씬 더 컸다.
이스탄불 궁전 앞처럼 창덕궁 대문 앞에도 시체가 잔뜩 쌓였다. 고산국 병사들 입장에서는 상대가 오스만 제국이나 명나라처럼 완전히 외국이라 하기 어려운 조선이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 전술 차량 10미터 전진하면서 차량 간격을 좁혀! 기동 중에도 사격을 멈추지 마라!
계복은 전체 부대를 지휘하느라 바빴고 기관총 회전포탑에 오른 선영이 아래를 향해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민호가 몇 번이나 물었으나 계속되는 총성에 가려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결국 선영이 회전포탑에서 내려왔다.
“뭐? 혹시 탄약?”
“그래요. 제가 갖고 갈게요.”
“규정된 대로 내 등짝을 밟으라고 했잖아!”
이민호가 예비탄약을 적재칸에서 꺼내 선영에게 넘겨주었다. 선영이 비록 훈련은 남들처럼 받았지만 탄약을 달라는 신호로 차마 이민호를 걷어차지 못했다. 그러나 기관총 사수에게 탄약을 넘겨주는 임무는 신분이 어떻든 무조건 후방석에 앉은 자의 몫이었다.
- 두다다다다다!
다시 기관총 연사음이 길게 이어지고, 전술 차량들이 계복의 명령에 따라 조금씩 전진하면서 횡대에서 종대로 대형을 바꿨다. 짧은 순간에 수백에 달하던 반란군들이 다 쓰러져 죽거나, 혹은 황급히 돈화문 안으로 도주했다.
“억지로 끌려와 반란에 참가한 병사들이 많지 않을까요?”
“충신이라면 마땅히 반란군 대열에서 벗어나 고변하거나 도망쳤어야지.”
조종수 선희가 묻자 이민호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란군과 마주치자마자 교섭 과정을 하나도 거치지 않고 다짜고짜 사격을 시작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반란군이 궁궐에 불을 질러 밤하늘에 화광이 충천한 것이었다. 이것은 집에 남아서 기다리는 반란군 주모자들의 가족에게 역모의 성공을 알리는 신호였고, 자살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조선 국왕이 이미 붙잡혔을지도 모르고, 이민호에게는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지은이 성질에 반란군에게 순순히 붙잡히지는 않을 거야.”
“주인님이 지은 공주님에게 결혼 선물로 총을 주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여요.”
그리고 반란군의 주동자인 문신들이 결코 앞장서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역시나 반란군 주모자들 대부분이 교전 10초 이내에 몰살당했다. 위험한 일은 무신과 병사들에게 맡기고 문신들은 전체 상황을 파악하면서 지휘한답시고 뒤에서 얼쩡거리다가 고산국 전술 차량들로부터 가장 먼저 기관총 사격을 당한 탓이었다.
그 다음은 병사들 문제였다. 반란에 참가한 왕족이나 고위 관료들이 이번 일에 대비해 양성한 사병들이 선두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였으나 전체 병력 중에서 극소수에 불과했다. 나머지 병사들 대부분은 지휘관이나 관료들이 윽박질러 마지못해 참가하는 바람에 비록 도망가지는 않더라도 반란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심지어 장단부 소속 병사들은 산성 축조에 동원된 일꾼이나 다름없었다. 왕명 없이는 병력 소집과 이동이 극히 어려운 조선에서 장단부 군사들은 반란군이 간신히 동원한 정규군이었다.
그러나 이 병사들은 정보가 부족해 어느 쪽을 위해 싸우는지도 모르는 20세기의 쿠데타 군에 속한 병사들과 달랐다. 쿠데타에 동원된 군부대도 출동 시점에는 쿠데타 진압을 명목으로 출동한다. 나중에 반란군에 속한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어느 쪽에서건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반란에 계속 참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현재 조선에서는 반란군 병사들이 홍제원에 집결할 때 주모자들이 이미 반정을 일으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병사들이 몹시 놀라거나 겁을 냈으나 반란 자체에 대한 반발은 거의 없었다. 이민호는 그렇게 첩자들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창의문을 통과해 한성에 진입하는 순간까지 반란군에서 빠져 나갈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는데도 이들은 끝까지 반란에 참가하는 것을 선택했으니 돌이킬 수 없었다. 병사들이 당금 조선 국왕을 미워했는지, 혹은 반정 성공 이후의 출세를 기대했는지 전혀 상관할 바 없이 이들은 이미 확실한 반란 참가자들이었다.
- 탕! 타앙!
돈화문과 그 주변 궁궐 담벼락에서 반란군 포수들이 반격을 시작했다. 장갑이 얇더라도 화승총 정도로는 전술 차량에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하지만 보병의 존재 자체로도 실체적인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민호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저들이 전술 차량 바퀴 사이에 통나무나 적당한 크기의 돌을 끼워 넣어서 기동 불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 포반! 잔적이 대문 뒤에 숨었다. 날려버려! 나머지 차량 돌입 준비!
계복이 지시한 직후 76밀리 경량 야포 4문이 차례로 불을 뿜었다. 반란군 포수들이 숨어서 저항하는 대문이 폭풍에 휩쓸려 날아가 버렸으나, 누적되는 희생에도 불구하고 포수들은 화승총을 쏘면서 끝까지 저항했다. 고산국이 개입한 이상 역모는 이미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역모죄로 효수되고 싶지 않은 병사들은 자그마한 희망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다.
계속된 포격에 의해 기둥과 지붕이 크게 흔들리면서 돈화문의 거대한 중층 문루가 기우뚱거렸다. 붕괴 위험을 무시하고 돈화문을 향해 돌격하려고 대기 중인 전술 차량들 위로 검은 그림자가 지나갔다.
- 팡! 팡! 팡! 팡!
수송기가 돈화문 상공을 지나면서 조명탄을 연속 투하했다. 파지직거리는 소리를 내고 허연 연기를 뿜으며 하늘에서 서서히 낙하하는 불빛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 시대에 충분한 공포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던 반란군 병사들 사이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저 수송기는 왜 안 돌아갔죠? 한성이 수송기의 항속거리 내에 충분히 들더라도 전술 차량을 실으면 작전반경이 아슬아슬하다면서요? 공중급유기는 아직 취역하지 못했잖아요.”
“수송기들끼리 주유구를 연결할 수 있어.”
이민호가 선희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그 동안 공중급유기가 개발되지 못했더라도 기술 발전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항공기 연료를 가득 채우고 날아온 공중급유기가 수송기들에게 연료를 충분히 공급해주면 좋겠지만 아직은 개발 단계였다. 대신에 왕도에서 예비 연료를 싣고 뒤늦게 출발한 수송기들이 먼저 한성 상공에 도착한 수송기들에게 하늘에서 비행 중에 연료를 공급해줄 수 있었다. 미 해군에서 전투기가 다른 전투기에게 급유해주는 시험을 고산국에서는 속도가 느린 수송기들을 동원해 성공시켰다.
“저 비행기에 야포나 기관총 같은 무장을 장착시키면 좋겠어요.”
“그럼 좋겠지만.”
그러나 수송기에서 지상으로 폭탄을 떨어뜨리는 단순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광학조준기를 이 시대 기술 수준을 넘어 극한까지 개발해야 했다. 일차대전에서 활약한 항공기처럼 눈대중으로 대충 기관총을 쏘게 할 수도 있겠지만 무기체계 개발자 출신인 이민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수송기에서 개조된 미군 근접 지원 공격기 AC-130처럼 야포와 기관포 등 무장을 지금 당장이라도 올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수송기에서 이들 무장을 충분히 활용할 만한 레이더나 조준 장치 등을 개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 중대 6번 단차부터 진입한다. 돌격! 나를 따르라!
- 콰지직!
전술 차량들이 대문의 잔해와 시체들을 짓밟으며 창덕궁 내부로 진입했다. 역시나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새라 계복이 앞장섰다.
돈화문은 황제국인 명나라 자금성처럼 전면이 다섯 칸으로 지어졌으나 양쪽 바깥문을 막아 제후국 기준에 맞췄다. 기둥 사이가 넓어서 폭이 좁은 전술 차량들이 여유 있게 통과했다.
- 다다다다닷!
이민호가 탄 전술 차량이 대문 문턱이 있던 선을 마지막으로 넘었을 때에는 이미 대문 안쪽이 정리가 끝난 다음이었다. 먼저 진입한 전술 차량들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금천교를 지나 중문인 진선문으로 향했다. 반란군 소수가 회랑 건물 창을 통해 화승총을 쏘았으나 기관총 사격 한 번에 침묵하고 말았다.
전술 차량들과 후속하는 특전대대 보병들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앞 인정문까지 직진하면서 마주치는 모든 반란군들을 소탕했다. 사방의 전각이 불타오르는 와중에 전술 차량에서 발사한 기관총 화광이 번득였다. 여기에 더해 하늘에는 조명탄이 타면서 내려오고 바닥에는 시체가 가득 깔려서 마치 지옥에서 싸우는 듯했다.
“금군이 일방적으로 당한 것 같아요.”
“화승총이 별로 볼품이 없어서 궁궐에 배치하지 않았나 봐. 사거리는 활이 더 기니까 국왕 암살 가능성 때문만은 아니겠지.”
인정문 주변에는 궁궐 경비를 맡은 군사들과 반란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전사자들의 복장을 살펴보니 인정문 바깥에는 호위청 군사들이, 인정전 뜰에는 금군청 소속 군사들이 무더기로 쓰러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방어군이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화승총을 대량 동원한 반란군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 전투가 마무리된 것 같았다.
사실 국왕 호위와 궁궐 경비 병력의 주력은 호위청 군관 30여 명과 금군청 소속 군사 100여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병조 기병 3명을 비롯한 여러 군사조직에서 몇 명 혹은 몇십 명씩 궁궐 경비를 위해 파견한 병력은 각 대문 위주로 사방에 흩어져 배치된다. 그래서 천 명이 넘는 반란군이 돈화문을 집중 공격하는 순간 이미 궁궐 방어는 불가능했다.
“대원수! 여기서 흩어지겠다.”
- 서두르지 마시고 상황 판단을 호위대장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았다. 걱정 마라.”
계복이 이끄는 전술 차량 8대는 인정전을 지나 이 시기의 편전인 희정당으로 전진하고 이민호는 나머지 세 대와 함께 숙장문을 지나 동궁의 본전인 중희당으로 향했다. 특전대대 보병들이 차량들을 따라 뛰면서 모든 위협을 제거했다.
이민호가 이끄는 전술 차량들은 산발적인 전투를 수행하면서 성정각을 지나 중희당 앞길에 도착했다. 종묘와 창경궁이 연결된 창덕궁은 경복궁보다 넓어서 동궁에 도착할 때까지 한참이나 걸렸다.
- 탕! 탕!
이민호는 중희당 대문 옆에 숨은 반란군 병사들의 뒤통수를 보고 의아했다. 전술 차량들이 굉음과 총성을 울리며 접근하는데도 이들은 중희당 안쪽을 향해 화승총을 쏘고 있었고, 문 주변에는 시체 십여 구가 쌓여 있었다. 다시 조명탄이 하늘에서 터지며 중희당 대문 안쪽에도 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해? 반란군이다. 공격해!”
“네. 전혀 뜻밖이라서요.”
선영이 기관총을 쏘아 반란군 10여 명의 등짝에 총탄을 퍼부었다. 나머지 30여 명은 손을 번쩍 들어 항복했다. 후속하는 특전대대 보병들이 이들을 생포했다.
“주인님! 안쪽은 아직 위험해요. 내리지 마세요. 보병은 최루탄 투척 후 진입하라!”
중희당 대문이 전술 차량이 지나갈 정도로 충분히 넓지 못했다. 선영이 내린 명령에 따라 중희당 안쪽에 최루탄이 터지고 방독면을 착용한 특전대대 보병들이 돌입했다. 대문 안쪽에서 총소리 몇 방이 울려 퍼졌다.
“내 딸이 있어. 마구 쏘면 안 돼!”
“걱정 마세요. 보병들이 임무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요.”
중희당에서 총성이 계속되는 사이 이민호가 초조하게 기다리며 한숨지었다. 그리고 폭음이 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현재 보병들이 유탄을 쏘거나 수류탄을 던져 중희당 연못의 정원석 사이에 숨어서 저항하는 반란군을 제압하고 있었다.
“내 자식을 구하는 일인데도 앞장서지 못하다니, 아버지로서 자격 미달이다.”
“지은 공주님도 주인님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거여요.”
맞는 말이지만 이민호는 선영의 말에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이성과 감정이 다르게 작용하고 있었다.
“중희당 제압 완료! 지은 공주님은 무사하십니다. 현재 주변 건물 및 지붕과 처마 아래를 수색 중이니 전하께서는 5분 후에 하차하십시오.”
“좋아. 수고했다.”
특전대대 중대장이 전술 차량에 와서 보고하자 이민호가 짧게 치하했다. 얄미운 사위인 조선 왕세자의 안위 따위는 묻지도 않았다.
시집 간 딸을 오랜만에 만날 생각에 이민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장갑차 내부 공간이 특별해서 시곗바늘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5분 넘었다.”
“아직 20초 남았어요.”
선영이 제지해서 마지막 1초까지 기다린 다음에 전술 차량에서 내릴 수 있었다.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확 끼쳤으나 이민호는 서둘러 중희당 본전 건물로 향했다. 호위들이 주변을 경계하면서 함께 움직였다.
“지은아! 내 딸아!”
“아바마마!”
지은 공주는 중희당 본전의 마루에 앉아 있었다. 오른손에는 짤막한 불펍식 소총을, 왼손에는 자동권총을 쥐고 있었으나 양팔이 힘없이 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이민호는 아버지로서 지은 공주의 상태를 바로 알아봤다. 핏기 없는 하얀 얼굴과 대조적으로 마룻바닥에 붉은 피가 번지고 있었다.
“지은아! 의무병! 군의관!”
이민호가 울음 섞인 비명을 토해냈다. 지은 공주 옆에는 조선 왕세자와 세자빈이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렸다. 세자의 손에 활이 쥐어져 있어서 반란군을 상대로 싸운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렇게 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며칠만에 간신히 올려서 죄송합니다.
아직 신, 구 컴퓨터에 각각 큰 문제가 남아있습니다만 임시로 다른 파일을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