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04화 (853/1,000)

00904  99. 한성 사변  =========================================================================

이민호는 호위들과 함께 아라비아 송유관 건설 사업에 파견될 배관공과 용접공들이 실습하는 곳을 순시했다. 다들 허름한 작업복을 입어서 막일꾼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공동주택 건설현장에서 배관공사 경력이 최소 10년을 넘기는 숙련된 배관공과 용접공들 중에서도, 불량률이 극히 낮은 최고 수준의 기술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대형 송유관 용접을 맡기기에는 아직 부족했기에 자원탐사단 소속 용접반장에게 지도를 받았다. 커다란 송유관을 용접으로 누수 없이 완벽하게 연결하는 작업은 건설현장의 하수도나 상수도 배관 공사와는 차원이 다른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송유관은 수도관처럼 속이 텅 빈 것이 아니라 지형을 극복하기 위해 중간에 가압펌프가 내장되기도 해서 엄청난 무게를 자랑했다. 사고가 나면 현장에서 작업하는 기술자와 인부 몇 사람이 순식간에 죽거나 팔다리를 잃을 수 있었기에 공기 단축보다는 안전이 최우선 명제였다.

“감독관은 뭔가 불만이 많은 것 같은데?”

“예, 전하. 연수원생들이 대형 송유관 용접은 처음이라 그런지 관 안쪽을 제대로 못 보면서 겉만 들입다 때웁니다. 쪽거울을 안에 넣고 이렇게, 이렇게 보면 아주 쉬운 건데 말입니다.”

배관공사 현장에서 흔히 쪽거울이라 부르는 것은 작은 화장용 거울이 아니라 용접 기자재의 하나로서 검사거울이 정식 명칭이었다. 긴 손잡이가 달렸고 중간에 거울 면이 휘어지는 각도를 조절할 수 있게 돼 있어서 배관 안쪽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든 장치였다. 용접 중에 고열의 불똥이 거울에 튀므로 수시로 교체해야 하는 소모품이었다.

“그, 그렇군. 하지만 감독관에게나 쉽지 모르는 사람이 배운다는 게 쉽지는 않아. 감독관이 처음 일을 배울 때처럼 자세히 훈련을 시키도록 하게.”

“가르친다고 해서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문제입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초보자 티를 벗으려면 숙련 기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아부다비와 브루나이 유전은 바닷가에 있고 북미 유전들은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해서 배나 기차로 원유를 옮겼기에 대형 송유관을 킬로미터 단위로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아라비아 유전은 내륙 100km에 위치한 초대형 유전이라 송유관 선을 건설해 원유를 옮기는 것이 더 경제적이었다.

문제는 유전을 개발하면서 몇 백 미터 이상의 송유관 공사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형 송유관을 용접해본 사람이라곤 자원탐사단 소속의 용접공 몇 명뿐이라는 것이 더욱 큰 문제였다. 그래서 자원탐사단 용접공들을 감독관으로 임명해 건설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배관공과 용접공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현장에서 직접 배우면 더 빨리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대신에 불량률이 급격히 늘어날까 두렵습니다. 사고가 빈번히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알겠네. 아라비아 유전 개발은 그리 급할 것이 없으니 감독관이 사업단장에게 사업 계획 전체를 연기해달라고 건의하게. 내가 감독관의 의견에 동의했다고 단장에게 반드시 전하도록 하게.”

“기술자들의 목숨을 아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내 백성이니까 당연하지. 나야말로 건의해준 자네에게 고맙네.”

열사의 사막에서, 어쩌면 사막 유목민들에게 공격받을지도 모를 대형 송유관 공사를 하는 것이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기술자들은 새로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기술 수당과 해외 파견 수당을 기본으로 받고, 여기에 사막에서는 주로 밤에 공사를 진행할 계획이므로 야간 수당에 생명수당까지 받게 되면 국내에서 일하는 것보다 최소 너덧 배 많은 급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일 년 바짝 일하고 나서 2, 3년 풍족하게 놀기를 원하는 기술자들에게 아라비아 유전 개발은 최고의 기회였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도시가스 배관 용접공은 실력이나 숙련도에 따라 일반 직장인의 몇 배나 되는 임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임금이 줄어들었다. 만약 외국계 회사에 고용돼 파이프라인 건설에 참여할 수 있다면 연봉으로 몇 억 대는 쉽게 받았다.

“송유관을 유조선에 연결하려면 부두에서 최소 몇 십 미터는 바다 속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수중 용접이 가능한 인원이 없습니다. 저번에 전하께서 수중 활동이 가능한 인원을 충원시켜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말일세. 해군 수중파괴대 장병들이 도대체 퇴역을 하려고 해야 말이지. 이번에 수중파괴대에서 신병과 전입자들을 대규모로 모집했으니까 적응 훈련만 끝나면 인원 여유가 생길 걸세.”

수중 용접을 하면 급료를 열 배 이상 받을 수 있다는데도 끈끈한 전우애로 맺어진 수중파괴대 대원들은 부대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잠수가 버거워지면 퇴역을 생각하겠지만 이때는 이미 수중 용접을 하기도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수중파괴대 퇴역자들 중에서 잠수 용접사를 뽑기도 곤란했다.

“자기 직분에 충실하면 보는 사람도 즐겁습니다만, 송유관 건설은 국가 발전에 직결되는 사업입니다. 잠수할 사람이 없으면 해녀에게 용접 교육을 시켜서라도 반드시 데리고 가야 합니다.”

“알았네, 알았어. 반드시 두 달 안에 잠수부 최소 네 명을 보내주겠네. 수중 용접은 여자가 할 일이 절대 아니니까 해녀들은 제발 내버려두게.”

이래서 민간의 취미 생활을 국가에서 지원해줄 필요가 있었다. 만약 산소통과 물안경, 오리발 등을 미리 민간에 판매해서 잠수를 취미로 삼는 사람들 숫자가 충분했다면 수중 용접사를 민간에서 쉽게 양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녀의 물질 외에 잠수 행위 자체를 군에서 독점하는 바람에 이렇게 급할 때는 군에서 인원을 빼오는 수밖에 없게 됐다.

한 달 뒤에 수중파괴대에서 30대 중반 나이의 전역자 두 명이 생겼다. 이들은 용접 교육을 받으면 군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국가의 부름을 연거푸 받게 됐다고 투덜거렸다. 이민호는 법을 고쳐 용접사 면허 외에 수중 용접사 면허를 새로 추가했다.

“사진으로 볼 때는 괜찮았는데 실제로 보니 너무 말랐어.”

남성 잡지 사진 모델과 의상광고 모델로 쓰려고 벨라루스 지역 여자들을 고용한 이민호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벨라루스 여자들은 쫓겨날까 두려워 벌벌 떨었다.

우크라이나처럼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에 속한 벨라루스는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그러나 기후 변화로 인해 몇 년째 농사를 망치고 벨라루스 지역 전체가 붕괴되기 직전이라 했다. 여자들이 날씬해지고 싶어서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못 먹어서 마른 것이었다.

“루스 차르국이 식량 사정이 그나마 낫던데 차르에게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나? 대대로 싸운 원수사이라지만 기근이 발생했을 때 식량 지원 문제는 예외로 하기로 합의했잖아? 통역은 이 문제를 묻도록 하라.”

“황공하오나 차르와 황후께서 개인적으로 도와줘도 폴란드 귀족들이 중간에 식량을 횡령한다고 들었습니다.”

벨라루스 남쪽 우크라이나에도 몇 년째 기근이 발생했으나 고산국과 루스 차르국이 흑해와 드네프르 강 수운을 이용해 부족한 식량을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벨로루스는 내륙 깊숙이 위치해 식량 지원을 해주기 어렵고 루스 차르국이 육로를 통해 지원해준 얼마 안 되는 식량도 중간에서 폴란드 귀족들이 가로챘다. 동유럽에서 전통적인 곡물 수출국이었던 폴란드의 명성은 이미 사라졌다.

만약 벨라루스가 독립국이었다 해도 벨라루스 귀족들이 횡령했을 것이기에 폴란드 귀족들만 탓하기도 어려웠다. 중세가 지나간 다음 귀족이란 책임 없이 권리만 무제한 누리려는 이익집단으로 변질됐다. 벨라루스 농민들은 귀족제에 더해 식민 지배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어서 기근에서 탈출하기란 쉬워 보이지 않았다.

“항상 이게 문제지. 그런데 넌 고산국 말을 아주 잘하는구나.”

“감사합니다, 전하. 제 이름은 밀라입니다. 중간 이름과 부칭, 성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른 벨라루스 여자들과 달리 자그마한 체구의 처녀를 살펴봤다. 연한 금발에 피부가 하얗고 눈코입이 오밀조밀해서 화장을 시키면 꽤나 사진빨을 잘 받을 것 같았다.

“벨라루스의 벨라는 미인이라는 뜻인가? 루스는 예전에 키예프 루스가 있어서 그렇겠고, 언어도 루스인들과 비슷하다고 들었다.”

“벨라는 흰색을 뜻합니다, 전하.”

“사람들 피부가 희다는 뜻인가? 체형도 아주 좋구나.”

“확실히 모르겠지만 모스크바의 루스인들보다 서부에서 거주하는 루스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설마.”

홍해와 흑해가 오스만 투르크의 남쪽과 북쪽에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듯이 색깔이 방위를 나타내는 경우는 흔했다. 의미를 모를 백러시아보다는 서부 러시아가 맞을 것 같았다.

먼저 이들의 처우를 결정해야 했다. 외국 모델을 고용하는 절차에 따른다면 당분간 이들을 잘 먹여서 혐오스럽지 않을 정도로 살을 찌워야 했다. 사진 촬영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계약 기간을 3년으로 정하고 왔으니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3년 동안 마르지도 찌지도 않게 예쁜 몸매와 용모를 유지하도록 해라. 주상아 공주가 너희들을 관리할 것이니 통제에 잘 따르도록 해.”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그런데 정말로 저희들에게 고산국 국적을 주십니까?”

“고산국에서 3년 넘게 일하거나 고산국 백성과 결혼하면 고산국 국적을 주겠다. 고향에 돌아간다 해도 가족들과 함께 평생 부자로 살 만큼 충분한 급료를 지급해주겠다.”

“감사합니다. 저희들은 고산국에 정착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인종별로 거주 지역을 달리 해서 각자 혈통을 보존시키고 싶었지만 벨라루스 출신은 극소수라서 본토 거주를 인정했다. 벨라루스 모델들은 이민호가 보기에나 미인이지 이 시대 미적 기준으로는 팔다리가 길어 옷맵시가 잘 사는 정도에 불과했다.

“마음대로 해라. 그런데 여기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지?”

“화가 앞에서 벌거벗고 있으면 되는 부끄러우면서도 간단한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쿨럭! 뭐, 비슷하긴 하다.”

폴란드의 인력 해외송출 업체, 사실상 인신매매 조직이 사진 모델의 역할을 그 따위로 설명한 모양이었다. 가끔 수영복 입은 여자 사진을 남성용 잡지에 실었으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런 좋은 모델들은 구한 차에 <플레이보이>처럼 누드 잡지를 정기적으로 출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고산국이 야만인 나라로 낙인찍힐까봐 차마 시도하지 못했다. 유럽 출신 이민자들이 집중 거주하는 북미 동부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무슬림인 모리스코나 청교도, 위그노,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은 이 시대에 꽤나 고지식하고 건전한 종교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주인님! 몸매가 참 예쁜데 저들도 후궁으로 삼지 그러세요? 저들도 싫어하지 않을 테고, 우크라이나 후궁들이 무척 좋아할 거여요.”

“내 나이가 몇이냐? 지금 있는 후궁들만으로도 버겁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운동을 제대로 못해서 체형이 엉망이야. 더 이상 내 개인 시간을 빼앗긴다면 흘러내리는 뱃살을 추스르며 밤일을 해야 될지도 몰라.”

“풋! 지금도 그러세요.”

호위대장 선영에게 놀림을 받은 이민호는 남성으로서 부정당하는 것 같아 참담한 심경이었다. 요즘 집무실 곁방에 운동용 기구 몇 가지를 놓아두었지만 그저 생각뿐이었다. 점점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겨울에 하도 추워서 빙하기가 오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봄은 올해에도 여지없이 찾아왔다. 3월 중순, 이민호는 조선으로 시집간 지은 공주가 그린 만화를 읽고 있었다.

만화는 아주 강력한 정치적 선전 수단이었으나 사상의 자유가 제약된 조선에서 동화 외에는 쉽게 출간하기 어려웠다. 관료들이 국왕이 아닌 다른 왕족을 탄핵함으로써 왕권을 견제하는 조선의 제도에서 괜한 빌미를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흥부전와 놀부>, <심청전>처럼 유교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읽힐 만한 교훈적인 내용이 출간 만화의 대종을 이뤘다. 양반들에게 까막눈이라고 무시당하는 농민들도 한글은 읽을 줄 알았고 조선의 출판능력이 충분했기에 지은 공주가 그린 만화가 집집마다 비치됐다. 지은이 출판사업에서 돈을 벌어들인 덕택에 왕실 재정도 풍족해졌다.

지은 공주는 고산국에서 따로 <홍길동전>이나 <춘향전>, <수호지> 등을 만화로 출간했다. 고산국과 조선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 만화도 알음알음 조선에 들어와서 퍼졌다. 허균 일가가 몰락하면서 간신히 살아남은 일가붙이들이 고산국으로 이민 와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원작료가 이들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배경 그림이 몰라보게 좋아졌어요. 동궁에서 일하는 무수리들을 모아 지우개질을 시킨다고 들은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조수들이 작화 실력이 늘었나 봐요.”

“여백의 미는 확실히 살렸어. 문제는 그림에 여러 가지 색을 칠해서 이게 만화인지 민화인지 헷갈릴 정도야.”

“조선 선비들은 흑백 수묵화를 즐기고 서민들은 색채가 알록달록한 그림을 좋아하니까요. 지은 공주는 만화 독자가 누군지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요.”

문화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하며 다양할수록 좋다니까 더 이상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대체 궁중 생활을 어떻게 하기에 겨우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많은 만화를 그렸는지 생각하니 몹시 안타까웠다. 마치 팬에게 납치, 감금당해 매일 매일 글만 써야 하는 소설가가 연상됐다.

“조선에서 정국 변화는 없겠지?”

“한성에서 불온한 움직임이라곤 전혀 감지되지 않아요. 당금 주상께서 잘하고 계시니까요.”

“어느 나라든 특권층이란 자기들 이익밖에 모르는 집단이야.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소위 반정이란 것을 일으키고 싶어 할 거야.”

이민호는 혹시나 해서 한 말이었지만 걱정할 것은 없었다. 선조 임금의 자식들 중에서 광해 대신 새로운 왕으로 추대될 만한 젊은 왕자들은 대부분 고산국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왕자들이 초반에 군사훈련을 받을 때는 죽을상을 짓더니 조선 국왕이나 관료들로부터 견제를 받지 않게 됐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얼굴이 피어났다. 지금은 훤칠한 키에 제법 멀쩡하게 생긴 얼굴로 유학생 처녀들을 후리고 다녀서 조금 문제가 되는 정도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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