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03 99. 한성 사변 =========================================================================
99. 한성 사변
1623년 1월 3일 아침 왕도 고북에 눈이 내렸다. 예전에도 가끔 평지에 싸락눈이나 진눈깨비가 내린 적은 있었으나 땅에 내린 즉시 녹지 않고 0.5cm나 쌓인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유구국의 왕도 나하 서쪽 60km 위치에 있는 구메 섬 등대 겸 기상관측소에서도 같은 날 진눈깨비를 관측했다.
연휴 기간이라 왕도의 시민들이 가죽 외투나 오리털 외투 등을 잔뜩 껴입고 집밖으로 몰려 나왔다. 그리고 이웃끼리, 나중에는 모르는 사람과도 눈싸움을 즐겼다. 털모자를 쓰고 벙어리장갑을 낀 아이들이 잔디밭에 엷게 쌓인 눈을 모아 자그마한 눈사람을 만들었다.
이민호는 아침 일찍부터 이조 부설 재난구호본부에 나와 있었다. 이조 참판인 본부장이 각지에서 들어온 상황을 취합해서 보고했다.
“밤새 자다가 얼어 죽었다거나 수도관이 동파됐다는 신고가 아직 한 건도 접수되지 않았습니다.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지만 아직 시간이 이르니 좀 더 기다려봐야 확실한 상황을 알 수 있겠습니다.”
“고도가 높은 곳은 더 문제가 될 걸세. 원숭이 탄광에 연락을 해보게.”
“그렇지 않아도 원숭이 탄광에는 눈이 내린 직후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형무소장이 어젯밤에 수감자들의 보온 대책을 마련해두었다고 합니다.”
오전 8시가 넘었는데도 고북 시의 기온이 아직 영하를 기록하고 있었다. 겨울에 눈이 자주 내리는 곳이라면 상관없겠지만 항상 영상이었던 지역에서 기온이 갑자기 곤두박질칠 경우 예상치 못한 재난이 덮칠 수 있었다.
“주택 관리관들이 전원 소집된 즉시 관할 지역 주민들을 점고하라고 명하게. 얼어 죽었거나 저체온증에 걸려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응답이 없는 집은 강제로 문을 개방해서 방마다 수색하라고 하게나. 병원과 보건소, 소방서에도 비상을 걸어두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주택 관리관들이나 주민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꼼수, 아니 권도이긴 하지만 지명 수배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을 내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흉악범이 숨어들었으니 찾는다고? 급한 상황이니 그렇게 하게. 자주 써먹지는 말게.”
“자주 써먹으면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수배자는 명나라 국적의 불법체류자로서 키 165에서 167cm 사이이며 눈썹 위에 상처가 난 강간범으로 설정하겠습니다.”
주택 관리관은 공동주택과 개인주택 경비와 시설 보수 및 관리를 맡은 시청 공무원들이었다. 현대의 아파트 경비원과 비슷한 업무를 수행했지만 권한이 강하고 처우는 훨씬 더 좋아서 제법 인기 직종이었다.
장기 복무한 사회봉사 직종, 예컨대 군인이나 소방관, 경찰과 의사 등이 나이 들어 퇴직한 다음 주택 관리관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흔했다. 미화원이나 우편배달원이 그렇듯이 주택 관리관들도 경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치안 보조 업무를 수행했다.
오전 9시가 지나면서 여기저기서 신고 접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방서와 병원 소속 구급차들이 경보음을 울리며 온 시내를 질주했다. 가끔 경찰 마차도 경보음을 울리며 달렸다.
경찰 순찰차는 학교 승합차와 우유 배달차 다음 순위로 제작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이 시대 최첨단 기계인 자동차를 직업적으로 운전하려는 사람들은 하루 8시간씩 이론 수업과 실기 수업을 강행하는 교육 기간 6개월을 거뜬히 버텨냈다. 자가용 운전자가 되려면 주 5일 하루에 두 시간씩 두 달 동안 배운 다음 면허 시험을 보는 것으로 법안을 마련했다.
“전하! 안 좋은 내용을 보고하게 돼서 송구합니다. 현재 동사사 일곱, 저체온증 환자 28명이 발생해 병원으로 긴급 후송했습니다. 아직 주택 수색이 절반도 진행되지 않았으므로 최종적으로 두 배 이상의 인명피해가 예상됩니다.”
“맙소사! 왜 이리 많아? 그런데 자기 집에서 얼어 죽는 경우도 있나?”
“동사자 세 명은 길거리나 공원 의자에서 자던 취객이었고 나머지 네 명은 노환을 앓고 있던 노인들입니다.”
아직 연초라서 병든 노인들이 초인 같은 의지로 새해를 넘기고 나서 노환으로 별세하는 경우가 포함됐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극도로 빈궁한 유민 출신으로서 몇 푼 안 되는 전기요금이 아까워 난로를 키지 않고 버티다가 얼어 죽은 사람도 꽤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몇 년 전에 단열재 시공과 이중 창문을 의무화하는 식으로 주택 설계를 변경했지만 아직 모든 주택에 적용되지 않았다. 기후 변화가 극심해질 것으로 예상했어도 내구기한이 수십 년이나 되는 주택은 느리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민호는 창호라도 먼저 강화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술 취해서 자더라도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서 잘 것이지 말이야. 영상의 기온에서도 얼어 죽을 수 있다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안타깝지만 취객이 제 정신이겠습니까? 경찰에게 겨울철 야간 순찰과 취객 보호 활동을 강화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술 취한 채 폭행이나 기타 범죄를 저지르면 가중 처벌하도록 법제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술을 즐기는 사람들은 벗들끼리 집에 모여서 마시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자기 주량까지만 마시고 일찍 귀가했다.
그러나 아차 하는 순간 술이 술을 마시다가 급기야 술이 사람을 먹게 되면 정신을 잃는 경우가 흔했다. 곤장을 치더라도 고쳐지지 않을 고질병이라 이민호도 포기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기온 하강의 위험성에 대한 교육과 홍보를 강화하겠습니다.”
“첫눈이 내린 결과 치고는 꽤나 참담하군. 문제는 고북뿐만 아니라 고중이나 고남에도 언제든 눈이 내릴 수 있다는 걸세.”
“예전 같으면 설마 했겠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정오가 거의 다 돼서 고북 시에 사는 모든 주민을 점고하고 주택을 수색하는 일이 끝났다. 최종적인 인명 피해는 사망 15명에 저체온증 환자 61명으로 집계됐다. 오후에 저체온증 환자 중에서 두 명이 죽어 사망자는 17명으로 늘어났다. 예전에 집중호우로 인해 계곡에서 피서객들이 집단으로 죽은 이래 최악의 참사로 기록됐다.
“전하! 겨울철에는 가정에서 전기난로나 온풍기를 의무적으로 틀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기술로도 일정 온도 이하로 내려가면 자동으로 실내난방을 하는 온풍기를 제작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열팽창계수가 다른 금속판 두 개를 붙여서 온도조절기를 만든다는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력 소모가 커지겠지만 그게 좋겠네. 전력회사에서 기온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겠군. 다음 주 국무회의에 안건을 내도록 하게. 자동 온풍기를 동해국과 새원산에 먼저 보내야겠어.”
대부분의 동력을 전력에 의존하는 고산국에서 수력발전은 한계에 달한지 오래였다. 그러나 원유 채굴 비용보다 운송비가 몇 배나 드는 현 시대라 해도 전력 생산을 위해 석유를 무한정 낭비할 수는 없었다. 지구상에 한정된 지하자원은 현세뿐만 아니라 후세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재 풍력 발전은 어느 정도 실생활에 이용하고 있으며 조력 발전과 태양열 발전도 초기 개발 단계에 접어들었다. 전자 기술의 미비로 인해 태양광 발전은 아직 언감생심이었다.
아이슬란드와 새섬 외에도 지열 발전이 가능한 곳은 최대한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필리핀 북부와 규슈에서는 수력이나 화력발전보다 더 많은 전력을 지열발전을 통해 생산하고 있었다. 고산국 본토에서도 자원탐사단이 온천마다 조사하고 다녔다. 여진족 호위들과 이민호가 이용하던 노천 온천, 현대 대만의 베이터우(北投) 온천과 그 동쪽 지열곡(地熱谷)도 자원탐사단에게 내주었다.
기온이 예년 수준으로 올라가는 며칠 동안 재난구호본부가 비상근무를 실시했다. 다행인지 몰라도 기온이 영하로 급강하한 첫날에만 희생자가 발생하고 그 다음 날부터는 다들 추위에 대비해서 아무런 일이 없었다.
그런데 주택 관리관들이 집집마다 점고하는 과정에서 이조참판이 설정한 가공의 흉악범, 명나라 국적의 불법체류자로서 키 166cm 위아래에 눈썹 위에 상처가 난 자가 일곱 명, 그 외의 불법체류자나 범죄자가 60여 명이나 체포됐다. 이들을 조사했더니 강간범이라고 자백한 자가 셋이었다. 면밀한 조사와 엄정한 재판을 통해 강간범들에게는 참수형을 집행하고 나머지 불법체류자들은 명나라로 추방했다.
2월에 프랑스와 사보이 공국, 베네치아가 파리 협정을 맺었다. 에스파냐 군대가 북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국경지대인 발텔리나 협곡을 지나 알프스를 넘는 것을 공동으로 막으려는 시도였다.
3월 9일을 전후로 향료제도의 암본 섬에서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포르투갈 상인들이 싸움을 벌였다가 유구국 상인의 중재로 서로 화해했다. 원래 역사에서 암보이나 학살 사건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브리티시 동인도 회사 직원 열 명, 일본인 용병 아홉 명, 포르투갈 상인 한 명을 처형한 사건이었다. 향신료 무역에서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서로 감정이 악화되면서 생긴 일이었다.
“위대하신 고산국 국왕전하께 신성 로마 제국의 신민이며 히브리어와 천문학과 교수인 쉬카르트가 다시 인사 올립니다.”
“계산기 개량 작업에 진척이 있었던 모양이구려. 그 동안 수고가 많으셨소.”
요하네스 케플러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빌헬름 쉬카르트가 고산국에서 귀족으로 지내는 갈릴레오를 찾아온 것은 지난 1월 말이었다. 그는 톱니바퀴로 작동하는 기계식 계산기를 설계해서 만들었으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갈릴레오로부터 개량 작업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로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고, 그렇지 않아도 일이 많은 갈릴레오가 결국 이민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국방연구소 기술자 몇을 붙여주었더니 두 달 만에 드디어 개량된 시제품이 나왔다. 그 계산기는 좌우로 막대 여러 개가 달린 모양인데 현대 대한민국에서 통닭을 굽는 전기장치처럼 생겨서 이민호가 실소를 지었다.
“숫자에 맞춰 위아래로 이동하는 막대와 좌우로 이동하는 막대를 움직이고 밑에 단추를 누르면 자동으로 계산이 됩니다. 덧셈과 뺄셈, 곱셈과 나눗셈 계산이 모두 가능하나 여섯 자리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대단하오. 로가리듬을 활용하면 천문학 계산에 크게 도움이 되겠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고안한 계산기나 네이피어의 계산자를 비롯해 유럽에서는 계산에 도움이 되는 기계장치를 만들려는 시도가 꾸준히 있었다. 약 20년 후에는 파스칼의 계산기가 발명되고 그 뒤로도 무수한 시도가 있게 된다.
“전하께서 저를 놀리시는 것 같아 몹시 민망합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리요?”
“알고 봤더니 고산국에서는 삼각함수를 계산하고 입력과 출력, 연산과 제어 장치를 갖춘 해석 기관을 이미 제작해놓았습니다. 종이의 특정 위치 여러 곳에 구멍을 뚫고 그곳에 전기가 흐르게 해서 자료를 빠르게 계산하고 기억하는 장치도 이미 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중대한 발견과 발명을 세상에 발표하지 않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 계산기의 작동 원리와 가치를 이해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발표하지 않았소.”
“작동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유럽과 중동의 모든 수학자와 천문학자들이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것입니다.”
천공 카드 기계는 검표를 마쳤다는 표시로 구멍이 뚫린 기차표에서 착안해 미국의 홀러리스가 1887년에 발명했다. 홀러리스는 후에 IBM의 설립자가 된다.
“어쨌든 쉬카르트 교수의 발명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소. 보통은 덧셈을 여러 번 반복해서 곱셈 계산을 수행하고, 뺄셈을 반복해서 나눗셈 계산을 수행한다오. 그러나 교수가 발명한 계산기는 사칙연산을 마치 중국의 수판처럼 즉각 해낼 수 있소. 이것은 후대의 수학자와 발명가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될 것이오.”
“그렇게라도 의미가 있다니 다행입니다, 전하.”
쉬카르트의 발명은 그가 케플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20세기 후반에야 알려졌다. 18세기 초에 발명품 스케치가 담긴 책이 출판됐을 때에는 그보다 나은 계산기가 이미 여럿 발명되는 바람에 세상에서 완벽하게 잊혀지고 말았다.
그리고 현대에 쉬카르트 계산기는 설계상 톱니바퀴 등 부품 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었다. 그러나 쉬카르트는 1635년에 개량된 완성품을 만들어 세상에 발표하기 직전이었다. 불행히도 쉬카르트는 30년 전쟁의 와중에서 온 가족과 함께 흑사병으로 죽는다.
“혹시 교수는 고산국 왕립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할 마음은 없소? 갈릴레오 백작처럼 국가 차원에서 연구를 지원해주겠소.”
“감사한 말씀이지만 고산국 교육계에는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봉사해서 히브리어 교수를 따로 채용할 필요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천문학은 고산국에서 봉직하는 갈릴레오 백작과 그의 제자들만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이미 시대에 뒤쳐졌습니다.”
“그렇지 않소. 여러 가지 제안을 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오. 교수에게 새로운 계산장치를 만드는 일을 맡긴다면 어떻겠소? 종이 천공장치보다 기술적으로 앞서는 계산기를 만들고 싶어서 말이오.”
“기존의 천공 계산기도 전기를 이용해 획기적으로 속도를 높인 매우 발전된 계산기였습니다. 저를 새로운 계산기 제작에 참여시켜주신다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잘 됐소. 독일에 있는 가족을 데려올 테니 편지를 써주시오.”
전기를 이용한 계산기까지는 공개하더라도 초기형 컴퓨터부터는 국가기밀로 묶어두기로 했다. 문제라면 논리적 사고를 수학적으로 해석해 컴퓨터의 논리 회로를 설계하는데 활용할 불 대수의 여러 가지 조건과 규칙을 이민호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덕택에 볼 대수의 개념을 이해하기도 버거워하는 고산국 수학자들만 죽어났다.
그러나 일단 이진법을 전기 회로에 활용하는 것쯤은 아주 쉬웠다. 전압이 높은 것은 1이고 낮은 것은 0이었다. 이제는 유압이 아니라 전기로 기계장치를 제어하는 초기 단계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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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카르트 클락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깁니다. 계산자나 기계식 계산기가 결국은 컴퓨터를 만들어내는 기반이 됐습니다. 주인공 사전에 컴퓨터를 완성하기는 어렵겠지만 기반을 충분히 마련해두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