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02화 (851/1,000)

00902  98. 전란의 시대  =========================================================================

새 영토를 편입하는 문제로 관계 부서들이 바쁜 와중에도 유럽에서는 30년 전쟁과 위그노 반란이 계속됐다. 6월에는 국왕군이 프랑스 남서부, 몽토방 북동쪽 네그레펠리세 마을을 포위한 다음 점령했다. 국왕군은 800명에 달하는 마을 주민들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 죽이고 마을을 땅 속에 파묻어버렸다. 잘못 입수된 반란 정보로 인해 화가 난 루이 13세가 직접 학살과 평탄화 명령을 내렸다.

여름 내내 프랑크푸르트와 하이델베르크 주변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만스펠트가 하이델베르크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자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만스펠트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용병단을 해산시켰다. 만스펠트의 용병단은 곧 네덜란드에 고용됐다.

8월 말에 만스펠트와 브룬스비크-뤼넨부르크 공작 크리스티안이 이끌던 신교도 군대가 네덜란드 베르건 옵 솜(Bergen-op-Zoom)을 포위한 곤살로 데 코르도바의 가톨릭 군대를 공격하다가 대패했다. 10월 2일에는 나사우의 마우리스와 만스펠트가 이끄는 네덜란드 군대가 베르건 옵 솜을 구해낸다. 같은 지역에서 한 달 간격으로 싸움이 났고 일부 지휘관과 병사들이 겹침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는 30년 전쟁이 아니라 80년 전쟁, 즉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분류된다.

“아바마마! 드디어 유럽 전쟁에 참전하실 겁니까? 우방국들이 양쪽 진영에 나뉘어서 싸우니까 우리나라가 섣불리 참전하기 곤란할 것 같습니다.”

“알아서 잘들 싸우고 있으니 그냥 내버려둬. 우린 참전할 자격도 명분도 없잖아.”

“그럼 저를 왜 부르셨습니까?”

브루나이 출신 후궁 하나의 아들 하산이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전쟁에 신중하면서도 전투에는 참가하고 싶어 안달하는 꼴이 영락없이 군인이었다.

육군 대위인 하산은 북미 중앙평원에서 기병 중대장 임기를 마치고 휴가 중에 이민호에게서 호출을 받았다. 하산은 무슬림답게 휴가 중인 군인들이 쓰는 약모나 베레모가 아닌 터번을 쓰고 있었다.

“민간인 통역 말고 육군 장교 중에서 투르크어와 아랍어를 동시에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더구나. 특히 아랍어는 배우기 정말 어렵지.”

이민호는 왕족이 아닌 장교에게 아라비아 동해안을 맡기고 싶었지만 언어 문제가 걸렸다. 병조와 참모본부에서 적임자로 하산을 추천하기에 어쩔 수 없이 보내기로 했다.

“오! 드디어 제가 배운 말을 써먹을 때가 왔습니까?”

“그래. 이번에는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가서 고생 좀 해야겠다. 아라비아 반도 동해안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곳이다.”

이민호가 하산에게 아라비아 반도 동해안 지역을 영토로 확보하는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기병 일개 중대를 이끌고 자원탐사단을 보호하면서 그곳에 거주하는 유목민들을 설득해 유전 건설 사업에 참가시키는 것이 이번에 하산이 맡을 임무였다.

“해군의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는 해안 지방은 문제가 없겠습니다. 하지만 내륙지방의 완전한 모래사막에서는 말 외에 장기 작전용으로 낙타를 운용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게 좋겠다. 아부다비 경비중대에 일러둘 테니 도착해서 낙타를 인수하도록 해라. 유사시에는 아덴만에서 작전하는 해군 분함대에 해병대 병력 지원을 요청하도록 해라.”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하오나, 아바마마! 저 같은 초급장교들은 임지를 전전하다 보니 여자 만날 기회가 적습니다.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잘 생겼다고 자부하는 제가 아직도 장가를 못 가고 있지 않습니까? 제 형제이며 외가 쪽으로 손자뻘인 다솜이 오스만 제국의 공주한테 장가갔다고 들었습니다.”

미인으로 유명한 파트마 술탄이 고산국 육군 장교인 하산보다 비리비리하고 고지식한 다솜이를 선택할 줄은 아무도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여자마다 배우자 선택 기준이 다를 테니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지난 일이지만 집안 어른들이 배우자를 정해주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파트마 술탄은 배우자를 직접 선택하는 특권을 누린 셈이었다.

“그래서, 너도 장가보내달라고?”

“헤헤! 이왕이면 무슬림 여성으로 좀 구해주십시오. 배우자가 어떤 종교를 믿든 상관없는데 음식 때문에 곤란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왕궁이나 군대, 학교와 관청에서는 무슬림을 위해 할랄 음식을 따로 준비했다. 돼지고기가 들어간 소시지 대신 양고기 소시지를 식단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리스코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북미 동부가 아닌 본토에서 소수에 불과한 무슬림이 제대로 된 할랄 음식을 시중에서 구해 먹기 어려웠다.

“아라비아 반도에 가면 유목민 족장들이 서로 딸을 주겠다고 난리가 날 텐데 말이다.”

“휴가를 반납하고 지금 즉시 아부다비로 출발하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족장 딸보다는 파트마 술탄의 여동생 아이세 술탄이 나을 것 같다. 사진 볼래?”

“우왕! 아직 어리지만 아이세 술타나가 엄청난 미인으로 자랄 것 같습니다. 이 사진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사진을 보면서 뭘 하려고?’라고 물으려다 말았다. 남자들끼리 뻔한 것을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성용 잡지 최신호까지 넘겨주었다.

“이것도 가져가렴. 오스만 제국의 공주와 결혼하면 다른 여자들을 내보내야 한다. 그러니 일 년만 더 참아라.”

“이런 미녀와 결혼할 수 있다면 일 년 동안 참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일 년 후에 제가 오스만 제국에 정식 청혼을 하면 되겠습니까?”

“쾨셈 술탄 소생인 공주 둘 다 고산국에 시집보내기가 쉽지 않겠지. 네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 년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소령으로 특진시킨 다음 이스탄불로 보내주겠다. 대사관 무관으로 말이야.”

어찌 된 셈인지 28세인 개똥이와 26세인 하산이 같은 계급에 같은 호봉이었다. 하산이 전공을 여러 번 세워 1년 승급한 반면 개똥이는 히말라야 등정 준비를 하느라 자주 휴직했기 때문이다.

등정하는 기간은 군 복무 기간으로 인정해줬지만 준비하려고 휴직한 기간은 인정하지 않은 탓이었다. 일 년 뒤에는 하산이 먼저 소령으로 승진하게 생겼다. 그러나 개똥이가 세자로서 맡은 일이 많아지면 전역하기로 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왕자인 제가 이스탄불에 가면 황제가 안심하겠습니다. 황제에게 아부하면서 아이세 술타나를 달라고 하면 됩니까?”

“일반적인 무슬림 가문과 달리 황실의 혼인 문제에서는 황제에게 결정권이 없다. 황궁 연회에 자주 참가하고, 특히 발리데 술탄과 쾨셈 술탄에게 선물공세를 펼치도록 해라. 그럼 두 사람이 알아서 너와 아이세 술탄을 맺어줄 것이다. 선물을 구입할 예산을 충분히 배정해주마.”

술탄의 여성형이 술타나이며, 오스만 제국 황족 여성들의 칭호라는 것은 이민호도 알고 있었다. 당사자와 직접 대화할 때는 술타나로 부르고 고산국 사람끼리 대화할 때는 술탄으로 칭했는데 하산은 아랍어와 오스만 투르크어 전공자답게 명사의 성을 일일이 구분했다.

“아바마마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평소에는 불만만 늘어놓더니 이럴 때만?”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산이 싱글벙글 웃으며 나갔다. 불만이란 자식들의 이름을 너무 쉽게 지어준 것 때문에 생겼다.

개인적으로 보면 하산이나 다솜이나 이상할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외우기 쉽도록 자식들 어머니 이름을 따라 하나의 아들은 하산, 다나의 아들은 다솜이라 지어줬더니 어머니들처럼 무성의하게 지어줬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식들 이름을 헷갈리지 않으려면 그 어머니인 후궁 이름을 연상하도록 비슷하게 지어주는 것이 이민호에게 편했다.

에스파냐의 보물 수송 함대가 9월 6일에 플로리다 해협 서쪽 마르퀘사 환초에서 침몰했다. 아토차, 마르그리타, 로사리오 함은 기상이 악화된 바다에서 화물 과적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확인시켜주었다. 함대에 적재한 화물은 멕시코와 페루에서 채굴해 에스파냐로 보내는 은이었다.

다음 날 새벽 플로리다 반도 남단에 위치한 등대에서 에스파냐 조난자들을 발견해 해군에 통보했다. 긴급 출동한 고산국 대서양 함대가 사고 해역에 도착해서 조난당한 에스파냐 승조원들을 모두 구조하고 바다에 떠다니는 시신을 인양했다. 그리고 이들을 아바나로 보내주었다.

며칠 후에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에서 보물을 인양해달라고 공식 요청했으나 대서양 함대 사령관은 보물선들이 침몰한 위치의 수심이 너무 깊어서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부왕이 강짜를 부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 사고로 인해 에스파냐 본국은 재정적으로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됐다.

기후 변화가 극심해진 1622년에는 수많은 해난사고가 일어났다. 보스포루스 해협 남단 황금 뿔 지역이 얼어붙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을 정도이니 태평양과 대서양이 얼마나 엉망이 됐을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고산국 선박들은 매 시간 일기예보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항해해서 사고를 줄일 수 있었다.

해난 사고는 남태평양에서도 발생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소유한 500톤 급 선박이 호주 북서쪽 섬에서 난파한 것이다. 하필 한밤중에 일어난 이 사고로 인해 92명이 물에 빠져 죽고 간신히 종선 두 척에 나눠 탄 생존 선원 46명이 자카르타로 향하는 도중에 한 명이 더 죽었다.

북쪽으로 노를 젓고 가던 작은 배들을 고산국 해군 함정이 발견해 장영실 항으로 예인했다. 의료진이 선원들에 대한 긴급 구호를 실시한 다음 45명에 달하는 선원들을 수송기 편으로 왕도로 보냈다. 아라비아 반도의 유전 문제로 한창 바쁜 이민호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선장과 선원들을 만나봤다.

“배 이름이 트라이얼이라고 했나?”

“  발음 차이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정확히는 트라이올입니다, 국왕전하.”

이민호가 잘못 봐서 그렇지 해군에서 제출한 보고서에는 Tryall이라고 제대로 기록돼 있었다. 선장 이름은 존 브룩이었다. 너무 흔한 이름이라 가공인물로 착각할 수 있겠으나 실존 인물이었다.

“트라이올 호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않았군, 그래. 어느 쪽으로 해서 왔나?”

“작년 9월에 플리머스 항을 출항해 아프리카 남단을 지났습니다. 그리고 남위 40도에서 부는 편서풍을 타고 호주 서남단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보름 동안 기다렸다가 남풍을 타고 북상하는 도중 경도 계산을 잘못해서 불행히도 암초에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남위 40도에서 50도 사이에서 부는 강한 편서풍을 Roaring Forties라고 했다. 범선이 이 편서풍을 타면 기존의 동인도 항로보다 6개월이나 항해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물론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면 기간을 더욱 단축시킬 수 있었다.

“선장은 태평양에서 첫 항해라면서 이 항로의 존재를 어떻게 알고 있었지? 해도를 구했나?”

“예, 전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범선 마우리티우스가 1618년에 발견한 항로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장 르네르트 야콥스존과 함께 고산국 영토인 호주의 서해안을 타고 북상한 화주 관리인 빌렘 얀스존이 암스테르담에서 책을 출판한 덕택입니다.”

“빌렘 얀스존이라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선장이었던 사람 말이지?”

“예. 그는 두이켄 호의 선장 출신입니다.”

호주를 고산국 영토로 선언하면서 대략적인 위치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민호가 처음 호주에 갔을 때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귀족 젊은이들을 동행하면서 호주의 위치는 이미 전 세계에 노출됐다.

일부러 남반구의 정밀한 해도를 공개하지 않았는데도 유럽인 항해자들이 그 발표를 근거로 호주를 발견해 동인도제도 항로에 이용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남단과 남미대륙 남단을 통제해 태평양을 고산국의 호수로 만드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던 욕심이었다.

“브룩 선장은 동인도제도에 향신료 무역을 하러 왔나? 요즘에는 향신료가 유럽에 충분히 공급되는 줄 아는데 말이야.”

“고산국 상선들이 유럽 상인들에게서 주문을 받아 향신료를 대신 구입해서 유럽으로 운반해주고 있습니다. 덕택에 가격이 대폭 내려갔지만 그래도 아직은 직접 교역을 하는 것이 훨씬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습니다.”

“운송비가 많이 드는 편이니까 더 싸게 운반해줄 수는 없지. 알았다. 왕도에서 쉬다가 유럽으로 가는 배편을 통해 귀국하도록 해라.”

“죄송하오나 침몰한 배에서 화물을 인양할 수는 없겠습니까? 그 배에는 동인도제도에서 무역할 자금인 은괴와 시암의 왕에게 바칠 선물이 잔뜩 실려 있습니다.”

“트라이올 호가 침몰한 수심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기술로 배나 화물을 인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역시나 그렇군요. 저희들은 쫄딱 망했습니다. 흑흑!”

브룩 선장과 선원들이 울면서 숙소로 돌아갔다. 이민호는 사관들에게 에스파냐 보물선단과 트라이올 호가 침몰한 위치를 자세히 기록하도록 지시했다. 이 기록은 후세 사람들에게 큰 재산이 될 것이다.

사실 얕은 바다에서 배가 침몰했다면 지금이라도 해안경비대 구난선 몇 척을 동원해 인양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침몰한 배를 인양하는 작업은 아주 긴 시간과 자본을 요구했다.

그래서 좀 더 확실한 인양 수단이 만들어질 때까지, 그리고 배와 화물의 주인이 늙어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특허 법인인 브리티시 동인도회사가 늙어죽지는 않겠지만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는 침몰선에 실린 보물을 고산국에서 독차지할 가능성이 높았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과 같이 재정이 풍족한 고산국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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